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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옛사랑을 추억함 外

by 丹野 2009. 1. 30.

 

 

옛사랑을 추억함 / 나호열

 

나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나

꽃 피고 바람 불고 속절없이 죄다 헐벗은 채로

길가에 서 있었던 때가 있었나

이제는 육탈하여 뼈 조각 몇 개 남았을 뿐인데

얇아진 가슴에 돋아오르는

밟을수록 고개 밀어 올리는

못의 숙명을 닮은 옛사랑이여

나는 아직 비어 있는 새장을 치우지 않은 채로

횃대에 내려앉은 깃털과

눈물 자국을 바라본다

작은 둥지에는 무모했던 ,무정란의

꿈의 껍질 그대로

이제는 치워야지 하면서

또 누군가를 감금하기 위하여

시간을 사육하고 있다

덫 인줄 모르고 내 가슴에 내려앉으려면

튼튼한 날개가 필요하다

한 번 날아오르면 별이 된다고

죽어야 별이 된다고

눈물의 망원경은 막막하게

허공을 조준하고 있다

 

 

허물 / 나호열

 

깃발이었다

겨울이 되어야 완강해지는

나무의 팔뚝 위에

하얗게 빛나며 흔들리는

함성을 지운 깃발이었다


저 높은 나무를 기어올라

허물을 벗은 뱀은 어디로 갔나

수없이 허물을 벗겨내어도

얼룩진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는

주름과 주름 사이에 끼어 돋아나는

몸의 슬픔

결코 가볍지 않을 터인데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짐승은 위험하다

느닷없이 밧줄로 휘감기는

바람도 뱀의 허물임이 틀림없는데


울고 있는데 웃지 말라고

내 입을 봉하려는 너는 누구냐


 

 

 

백지 / 나호열

 

백지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백지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뿐이다
네가 외로워서 술을 마실 때
나는 외로움에 취한다
백지에 떨어지는 눈물
한 장의 백지에는 백지의 전생이 숨어 있다
숲과 짐승들의 발자국
눈 내리던 하늘과 건너지 못하는
강이 흐른다
네가 외로워 하는 것은 그 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지만
네 옆에 내가 갈 수 없음이 외로움이다
그러므로 나는 숲에다 편지를 쓴다
길에다 하염없는 발자국에다 편지를 쓴다
백지에는 아무 것도 없다
눈만 내려 쌓인다

 

 

 

 

폭죽 / 나호열

 

물 같은 사람과 불 같은 사람이 만나서

물 같은 사람은 자신이 불이라 여기고

불 같은 사람은 자신이 물이라 생각하면서

결국은 물과 불이 한 몸이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

어느 평생이 필요할까

물이 불이 되려면 흐름을 멈추어야 하고

불이 물이 되려면 눈물을 배워야 할까

육신을 바꿔 입어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너는 전생으로 달려가고

나는 후생으로 뒷걸음 치고

불꽃놀이는 깊은 밤 시작되었는지

꽃잎처럼 떨어지는 불꽃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조용한 강물의 흐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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