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839 기억의 자리 / 나희덕 기억의 자리 나희덕 어렵게 멀어져간 것들이 다시 돌아올까봐 나는 등을 돌리고 걷는다. 추억의 속도보다는 빨리 걸어야 한다. 이제 보여줄 수 있는 건 뒷모습뿐, 눈부신 것도 등에 쏟아지는 햇살뿐일 것이니 도망치는 동안에만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의 어귀마다 여름꽃들이 피어난다, 키를 달리하여 .. 2006. 2. 21. 다음 생의 나를 보듯이 / 나희덕 다음 생의 나를 보듯이 나희덕 어느 부끄러운 영혼이 절간 옆 톱밥더미를 쪼고 있다. 마치 다음 생의 나를 보듯이 정답다. 왜 하필이면 까마귀냐고 묻지는 않기로 한다. 새도 짐승도 될 수 없어 퍼드득 낮은 날개의 길을 내며 종종걸음 치는 한 生의 지나감이여 톱밥가루는 생목의 슬픔으로 젖어 있고 .. 2006. 2. 21. 소리에 기대어 / 나희덕 소리에 기대어 나희덕 가로수 그늘에 몸을 기대고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별 몇개가 떨어졌는지 잡풀 뒤에 숨어서 누가 울고 있다. 쓰르라민가, 풀무친가, 아니면 별빛인가 누구인들 어떠랴 머리를 가득 채우는 저 소리, 충만을 이내 견디지 못하는 나는 다시 하늘을 본다. 눈 멀어지니 귀도 멀어.. 2006. 2. 21. 나뭇가지가 오래 흔들릴 때- 편지 2 / 나희덕 나뭇가지가 오래 흔들릴 때 - 편지 2 나희덕 세상이 나를 잊었는가 싶을 때 날아오는 제비 한 마리 있습니다. 이젠 잊혀져도 그만이다 싶을 때 갑자기 날아온 새는 내 마음 한 물결 일으켜놓고 갑니다. 그러면 다시 세상 속에 살고 싶어져 모서리가 닳도록 읽고 또 읽으며 누군가를 기다리게 되지요 제.. 2006. 2. 21. 너무 이른, 혹은 너무 늦은 / 나희덕 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나희덕 사랑에도 속도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솔잎혹파리가 숲을 휩쓰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한 순간인 듯 한 계절인 듯 마음이 병들고도 남는 게 있다면 먹힌 마음을 스스로 달고 서 있어야 할 길고 긴 시간일 것입니다. 수시로 병들지 않는다 하던 靑靑의 숲마저 예민해진 .. 2006. 2. 21. 그런 저녁이 있다 / 나희덕 그런 저녁이 있다 나희덕 저물 무렵 무심히 어른거리는 개천의 물무늬에 하늘 한구석 뒤엉킨 하루살이떼의 마지막 혼돈이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바라보려 한다. 뜨거웠던 대지가 몸을 식히는 소리며 바람이 푸른 빛으로 지나가는 소리며 둑방의 꽃들이 차마 입을 다무는 소리며 어떤 날은 감히 그.. 2006. 2. 21.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 나희덕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나희덕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 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 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라짐으로 하여 남겨진 말들은 아름.. 2005. 12. 11. 바람은 왜 등뒤에서 불어오는가 / 나희덕 바람은 왜 등뒤에서 불어오는가 나희덕 바람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이 멀 것만 같아 몸을 더 낮게 웅크리고 엎드려 있었다. 떠내려가기 직전의 나무 뿌리처럼 모래 한 알을 붙잡고 오직 바람이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그럴수록 바람은 더 세차게 등을 떠밀었다. 너를 날려버릴 거야 너를 날려버.. 2005. 12. 11. 강은 말랐을 때 비로소 깊어진다 / 복효근 강은 말랐을 때 비로소 깊어진다 복효근 가뭄이 계속 되고 뛰놀던 물고기와 물새가 떠나버리자 강은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려 처음으로 자신의 바닥을 보았다 한때 넘실대던 홍수의 물높이가 저의 깊이인줄 알았으나 그 물고기와 물새를 제가 기르는 줄 알았으나 그들의 춤과 노래가 저의 깊이를 지.. 2005. 12. 11. 이전 1 ··· 81 82 83 8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