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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발다로의 연인들 / 강인한

by 丹野 2025. 1. 25.



발다로의 연인들

강인한



독화살이 심장을 파고들어 마침내 숨을 끊은
콸콸 더운 피를 끄집어낸 곳, 여기쯤인가 부러진 뼈 한 도막
몇 날 몇 밤의 증오를 순순히 받아들인 곳
피는 굳고, 벌들이 찾던 꽃향기는 언제 희미해진 것일까

부릅뜬 눈으로 빨아들인 마지막 빛은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눈, 햇빛보다 부신 웃음이었다
껴안은 팔에서 부서져 내리는 허무한 흙덩이
잘 가라, 우리들 포옹 아래로 흘러가는 시간이여
눈보다 희고 부드러운 시간들이여

꿀처럼 달고 보드라운 당신의 입술은
아름다운 노래를 버리고 어디로 갔나 만토바의 하늘을 스치는
한 덩이 구름, 한 줄기 놀빛으로 산을 넘어
서늘한 밤의 대기가 되고
내 온몸을 거울처럼 담아 빛나던 당신의 눈은
벌써 여름밤 별자리로 찾아가 맑게 빛나고 있거니

부패라는 것, 오 망각이란
가시 많은 사람살이에 얼마나 고마운 벗일 것인지
오랜 망설임 끝에 다가가서
한 점 한 점 불타는 기쁨으로 땀 흘리던 육체는
기꺼이 벌레의 밥이 되고 다시 흩어져 희미한 슬픔으로
흐르다 올리브나무 수액이 되고, 더러는 바람에
무심한 바람에 팔랑이는 올리브나무 잎새가 되었다

잠도 천년, 다시 또 몇천년이 꿈결 같았다
무서운 살육의 전설도 기억에서 지워지고
수많은 파란이 지나가고 난 뒤
문득 깨어난 아침이 웬일인가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침묵으로 말하노니
손대지 마라, 우리들 기나긴 사랑의 포옹을
비가 오고 눈이 오는 곳, 빗발치는 편견을 법으로 세우는 곳이라면
우리 이대로 다시 몇 천 년이라도 견디고 견딜 것이니.
                                                                                    (2009. 3/4월호 유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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