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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매듭 외 3편 / 신현락

by 丹野 2025. 1. 25.



매듭 (외 3편)

  신현락



인류 최초의 문자는 매듭이었다
금기와 결속의 끈을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이
낳은 결승문자

금줄에 엮어진 붉은 고추와 푸른 솔
울음소리와 함께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가
어둠을 헤치고 생가의 대문에 내건
최초의 문자를 온전히 나의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내 이름이 조상에 의해 태어났듯이
지금 내가 쓰는 문자의 팔 할은
그곳으로부터 흘러온 것이다
당신에게 보내는 나의 문자에
완강한 금기의 영역표시가 배어 있는 건 내 탓이 아니다
내가 나에게 걸려 넘어져도 당신이 같이 넘어지고
당신이 당신에게 걸려 넘어져도 내가 같이 넘어지는 것이어서
이건 옳지 않다고 침묵을 택한다 해도
침묵은 또한 말의 결승문자인 것
당신의 침묵에 걸려 넘어진 기억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를 넘어설 최후의 문자는 무엇일까
울음? 침묵?
배냇저고리에 봉인된 젖냄새 배인 별자리 혹은
사랑이나 죽음 따위는 더욱이 아님을 나는 안다
다만 세상에 아직 아무런 매듭이 없는 문자가 있다면
내용을 갖지 않은 바람의 운율이거나
비가 내려도 젖지 않는 허공 근처일 거라는 느낌 혹은
시작도 끝도 없는
아직 살아보지 못한 시간이 아닐까

그 빈곳으로 가서 태어나는 최초의 문자가
비로소 당신의 매듭이다



구름 위의 발자국



나비는 꽃잎 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새는 죽어서 구름 위에 발자국을 남긴다
아무도 꽃잎의 발자국을 보지 못한다
꽃잎이 지고 나비의 날개는 비에 젖는다
나비를 비애의 그림자라고 명명하는 건
당신의 몫이겠으나 여기부터는 구름의 영역이다
당신은 꽃잎을 밟으며 꽃잠에 들 수도 있다
그럴 때 나는 구름의 문장을 해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구름이 하늘색을 지우는 건 잠깐이다
한때 나는 구름을 향해 무어라고 소리를 쳤으나
새들만이 그 너머로 날아갔음을 안다
꽃잎 위에 비 내리고 어제가 오늘이 되었다
시간은 뒤를 돌아보지 않지만 나는 죽은 새를 들고
구름 위의 발자국을 맞히는 신궁을 기다린다



물방울관음
—水月觀音圖, 慧虛 작, 고려시대, 비단에 채색, 142.0×61.5cm



물방울 안을 들여다본다
오랫동안 손에 쥐고 있는
버드나무에서 아직도 습한 바람이 분다

희미한 물방울을 배경으로
바람으로 연주되는 생이란 어떤 음악일까
사람들은 그림 주위를 기웃거리며
관음의 버들피리 소리를 보는 듯했지만
비단화폭이 악보처럼 펼쳐지는 그림을
기어서라도 만나고 싶은 무릎이 있었음을
물방울 밖 선재동자는 생각이나 했을까

아무 때나 오는 해후가 아님을 안다
생사의 비단길을 뛰어 넘는 것은 간절함만이 아니다
간절함은 오직 간절함에 의지하는 것이어서
어느 생에선가 한 잎 이슬로
버들잎을 놓아버린 손목도 있었던 거다

바람의 길을 오래 생각하던 물방울 안에서
물방울 밖으로 빠져 나온
관음의 젖은 발목을 본 것도 같다
마음이 관음의 버들잎만큼
움직이던 생이 나에게도 있었던 것일까

아직까지 비단길은 바람의 끝자락을 물고 있다
나는 백일홍 꽃잎처럼 펼쳐진 악보를 읽는다
버들잎 푸른 물방울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생이 한 번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물방울관음을 본다
기다림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라 해도
이번 기다림의 배경은 오로지 나의 전생이다



얼음구멍



저수지에 얼음구멍이 뚫려 있다
누군가 저 물 속을 오래 들여다보고 갔나보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 눈빛을 기억하기 위해
저수지는 온몸을 꽁꽁 얼리고 있다
얼음구멍 가장자리로 살얼음 조각이 떠있다
물방울에도 어떤 모서리가 있어서 둥근 얼음구멍 밖으로
투명한 결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빙어의 어신으로 고요한 그의 응시가 단 한 번 깨졌다는 것일까
단지 빙어가 기다림의 내용이 될 때는 아름답다
그의 내면을 회유하던 빙어가 한 번은 물 밖으로 나왔다는 듯이
둥근 얼음구멍이 잠시 출렁인다
얼음구멍을 통해 나는 그의 내면을 본다
말하자면 그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흔들리는 고요가
그와 나 사이에 놓인 기다림의 형식인 셈이다
발밑으로는 수심을 알 수 없는 낭떠러지인데
얼음구멍에 맑은 물이 찰랑거린다
문득 살얼음 엷게 깔리던 그의 눈빛을 생각한다
나는 얼음구멍을 다시 들여다본다
얼음구멍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기다리는 사람이다
두 눈이 얼면서 오래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사람은 기다리면서 비로소 기다림의 내용이 된다
세상에서 사람이 기다림의 내용이 되는 것보다 외로운 일은 없다


                       —시집『히말라야 독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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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락 / 1960년 경기 화성 출생. 1992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따뜻한 물방울』『풍경의 모서리, 혹은 그 옆』『히말라야 독수리』, 논저 『한국 현대시와 동양의 자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