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자 시집 『닿을 수 없는 슬픔에게』문학의전당 2022년 12월 15일 출간
시인의 말
내 깊은 내면에는 현실에 수용되지 못하고
웅크려 있는 슬픔이 있다.
몸을 관통하는 낯선 외로움에 대하여,
쓸쓸함에 대하여,
어리석은 질문을 보태어 내어놓는다.
이 첫걸음이, 그래서 더욱 애틋하다
2022년 12월
조광자
답장
조광자
내 곁에 머무는 난(蘭)의 가슴에
사랑의 연서를 보냈는데
추운 겨울에 가느다란 대궁을 밀어 올리더니
하얀 별꽃을 매달아 놓았다
사랑이 별을 달고 왔다
지상으로 내려온 별들이 어두운 방 안을 환하게 피웠다
추신으로, 향기까지 덧붙였다
분수
조광자
욱, 하는 심지 한번 잘못 건드리면
위로 치솟는 폭포가 있다
붉은 화염을 두르고
쏜살같이 허공을 찌르는
물줄기 하나 키우고 산다
누군가 들려주는 장단에 맞춰
움찔움찔 어깨춤도 추는
꼭두각시가 내 안에 있다
한 편의 드라마에 울고 웃는다
천 년의 잠
조광자
살점 조금씩 떼어주고
옷자락, 광배(光背)도 버리고
눈,코,입이 떨어져 나간 물걸리 사지 부처님
어제의 모서리가 둥글어지고 있다
잠시 눈붙이고 일어나 보니 천 년이 흘렀다
천 년의 잠도 삭이지 못한 흔적
누군가 되돌려 세운 시간에 뼈대만 불려 나왔다
거름 냄새 솔솔 흘러나오는
댓돌 위에 하얀 고무신
버선발로 달려 나와 손 흔드는 구절초
가녀린 발목을 훔쳐본다
한 됫박의 시주 쌀을 이고
오르내렸던 물길
물걸리 옛 지명을 따라 흘러온
그 길이 낯설지 않아
가느다란 물길 한 자락 끌고 왔다
그날부터 시도 때도 없이 가슴에 작은 물길이 번진다
핏대를 올리며 고집을 세울 떼에도
가족의 안녕을 위해 떼를 쓰듯 머리를 조아릴 때도
출렁출렁 파랑이 인다
슬며시 지우고 싶은 것들이 아프게 고랑을 내고 있다
본시 온 곳으로 돌아가고 있는
물걸리 사지 부처님이 한 일이다
칼과 숫돌 사이
조광자
벼리고 깎아서
서로에게 필요한 연장이 만들어지듯
무딘 칼날은 숫돌을 깎아내리고서야
날을 세우고 시퍼런 위엄을 갖춘다
거품을 물고 흘러내리는
예리한 눈빛
상처를 파헤치듯 돌아눕는
싸늘한 금속의 차가움이여
서로에게 익숙해질수록
제 몸을 깎아 완벽한 짝으로 태어나는
칼과 숫돌 사이처럼
무뎌지고 뭉텅한 마음을 벼리고 산다
자재암⁕
조광자
깊이 휘어 도는 고샅길을 따라
설핏설핏 얼어붙은 낙엽을 밟으며
극락교를 건너 원효를 만나러 간다
파계한 승려의 씨앗을 품고
음기에 흐느적거리는 요석 공주의 사랑
가느다란 햇살이 아침 안개를 살살 달래고 있다
절 마당 자궁에서 솟아나는 옥수
한 길 낭떠러지 아래 고였다 흐르는 자재암의 내력
천년이 흘러도 마르지 않는다
무진(無盡) 세월 가부좌 틀고
반쯤 내려 뜬 눈
부처님의 젖가슴은 살이 오르고
오고가는 무량한 중생들 말없이 바라보신다
*동두천 소요산에 있는 암자. 원효와 요석 공주의 일화가 있음.
오래된 시계
조광자
오래된 시계우두커니 서 있는 낡은 괘종시계태엽을 감아 주면 그때서야
땡 -땡,살아 있노라고 맥박이 뛴다식구들이 잠이 들면 대청마루의 낡은 가구들도
이마까지 어둠을 덮고 제자리에 눕는다
한밤의 고요를 신고 대문 밖까지 서성이는 소리
이른 새벽을 깨우고 선잠을 달래는 초침 끝에는
사계절이 한 달처럼 매달려 있었다
힘겨운 오르막 길
귀뚜리 울음소리가 방 안까지 들어와 잠을 흔들고
초침은 밤새 제자리걸음이다
한때는 사랑도 뜨거웠다
물에 누운 부처
조광자
포매리 이정표에서 여기까지 왔다
길은 여럿 있었으나 앞만 보고 달려온 길
이 길을 따라온 이유를 알 수 없어
잠시 머뭇거리는데
언덕 위 바다⁕에서 물에 누운 부처를 만났다
길은 끝이 없으니 잠깐 쉬어가라는 말씀
여기서 한나절 도(道)나 닦아 볼까
내려놓아야 할 몇 푼의 여비를 가슴에 쟁여 들고
천 개의 눈과 손으로 중생을 구제하신다는
부처를 만나러 물길을 들어선다
입구에서 어느 보살님의 말씀이
용궁암 연화 법당에 기도 올리고
복을 받아 가라 하신다
백일기도 비 : 15먼 원
철야기도 비 : 10만 원
입시기도 비 : 20만 원
신중기도, 지장기도 ……
복은 받지도 못하고
부처의 발바닥만 바라보다 돌아 나왔다
*강원도 휴휴암 언덕에 있는 카페 이름
앙코르와트
조광자
당신이 들려주고 싶은 노래
당신이 보여주고 싶은 노래
늘, 그렇게
목이 말랐다
들을 수 없고 볼 수도 없는, 먼 이국의 사원과
사원을 지키는 나무의 이력과
내 전생의 이데아였을, 신들의 궁전을 지키는
무겁게 짓눌린 돌탑의 고행
조금씩, 조금씩 야금거린
이끼 낀 희미한 미소가 남아 있는 곳
시간 너머의 왕국을 찾아
여러 생이 꿈꾸고 간
천 년의 흔적을 지우는 일
춤추는 환각 속을 무너져 내리게 하는
보이지 않는 불가사의 힘
어느 행성들 사이를 유랑하는
그들의 전생을 엿보는 일
만큼이나 멀고, 느리게 다가오는
눈을 감아야만 들리는 거대한 침묵의 함성이 있다
닿을 수 없는 슬픔
-철로
조광자
150cm의 거리에서
우리는 마주 보고 있다
손을 내밀면 금방이라도 닿을 듯
가까운 사이
우리를 밟고 지나가는 열 량의 무게
뜨거운 바람이 가슴에 솟구치고
침목 사이엔 작은 꽃이 핀다
둘이 하나 되어 가는 길이어도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사이
쇠못이 가슴에 총총 박혀 있다
부르고 싶은 노래
조광자
어떤 곡조로 부르고 싶은 걸까
눈을 감고 가슴에 현을 고른다
어쩌면, 흐르지 못하고 고인 눈물 같은 것
오래전부터 키워온 바람 같은 것
가슴에 품고 있는 푸른 휘파람 소리는
멀리 가지 못하고 되돌아와 문을 두드리고
오래된 통증을 다시 속으로 들인다
허물을 벗지 못한 울음으로
새로운 노래를 불러보지만
고여 있는 통증이 신음 소리를 낼 뿐
죽어야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돌기가
내 몸에 산다
밖에서 보다
조광자
생각 밖에서 생각을 보고
가족 밖에서 가족을 보고
도시 밖에서 도시를 보고
지구 밖에서 지구를 본다
개미의 아우성이 코끼리의 고막을 찢고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낳고
꽃의 태동이 생명의 근원이 된다
까마득한,
광년 전에 빛났던 저 별빛
이곳, 지구에서 마주치니
안드로메다 성운이 고향이라고
잊었던 기억 되살아난다
간월암
조광자
세상이 낯설어 갈 곳이 없을 때
물어물어
그곳에 숨어 버리고 싶었네
보일 듯 말 듯,
낮달 같은 그 사람이 하얗게 떠오르면
딱 한번,
바닷길이 열렸으면 했네
조광자 시인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2009년 《시와산문》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원문학회〉 〈시의 밭〉 동인,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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