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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굴참나무 기슭 / 김 영

by 丹野 2023. 2. 8.

굴참나무 기슭

   김 영



나무가 한 그루의 기슭이라는 걸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무수한 파문이, 파문 밖으로 번져
때때로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물꼬를 트듯 새 가지를 내고
한여름이면 무성한 이파리들 위에
호수 하나 펼쳐놓고 있다는 것도
가끔 물방울들이 넘치는 것도 알고 있다

숲이 출렁여도 호수는 쏟아지지 않았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다
숲의 주소가 해발로 시작하고
호수의 주소가 산 1번지로 시작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뿌리를 적신 어린 호수가
굴참나무 물관부를 따라 우듬지에 이를 때
나무는 찰박이는 기슭이 된다
굴참나무는 죽어서도 이 파문을 놓지 않아
가을이 되면 풀숲도 나무 밑도
몇 가마의 파문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본다
톡톡, 어린 파문을 떨구는
풍성한 숲은 번식의 법칙을 갖게 된다
그렇지만 누군들 저의 파문을 내어놓고 싶겠는가
그저, 꾹꾹 눌러 놓은 용수철 같은 파문을
아무도 모르게 내년
또 후년으로 나를 뿐이다

깊은 숨소리가 숲의 소리와 닮은 것도
닮는다는 것이 담는다는 것과 이음동의어인 것도
나무와 사람은 같은 숨을 서로
나누어 쓰고 있기 때문이다



             —격월간 《현대시학》 2023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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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 / 전북 김제 출생. 1996년 『눈감아서 한한 세상』으로 활동 시작. 시집 『나비 편지』 『파이디아』 『벚꽃 지느러미』 등.


출처 / 푸른 시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