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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양관(陽關) / 조 정

by 丹野 2023. 1. 8.

양관(陽關)

    조 정


지구에게 말 걸기 좋은 자리였다

세미하게 늘어뜨린 당사(唐絲) 아지랑이로 사막이 넘실거렸다
감각의 채무자인 경련과 질식 쪽으로
시간이 꼬리를 물고 나아갔다  
모래 밖으로 뜨거운 혀가 나와 발을 핥아주었다  

걷다 멈추면 무너지는 절이 저 끝에 있나요?  
코발트빛 도편은 날아가 어제 태어난 별의 정오가 되나요?
누가 저리 설레요?
천산의 눈 녹아 흐르는 강이 시간 너머에서 숲을 일으키나요?
탑 쌓을 돌멩이 하나 없는데
마음을 어디에 얹어요?

죽음을 동무 삼아 떠난 이들은 구름 전대를 차고 갔다
샘물이 솟고 어린아이들 달리는 풍경이
오래 발효하는 길이었다  
머뭇거리는 자취도 풀을 맺는 기약도 낙타 오줌 냄새도 남기지 않았다
    
지구가 가엾게 들어 올린 정자 난간에 기대어    
미라 한 채    
질(膣)을 타고 선뜩선뜩 모래가 흘러내렸다


                   —계간 《창작과비평》 202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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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趙晶 / 1956년 전남 영암 출생. 200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이발소 그림처럼』 『그라시재라』. 제주 강정마을 주제 장편동화 『너랑 나랑 평화랑』 등.

출처 /  푸른 시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