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없는 사물을 바라보는 눈
최 준
봄이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사물을 대상으로 쓴 시들에 눈길이 자주 끌렸다. 생명이 아니었거나, 생명이었으나 이제는 아닌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속에는 어떤 풍경이 자리 잡고 있을까 궁금했다. 사물을 다루게 되면 시는 서정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게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운 양상이다. 이는 선경후정의 전통적인 시작법을 따른다는 의미와도 통한다. 반문명적이기 쉽고, 시인은 새로운 상상력보다 자신의 경험에 많은 부분을 의지한다. 예언으로서의 기능보다는 반성적인 깨달음과 교훈적인 내용을 담아내고 있는 경우가 더 흔하다.
하지만 사물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과 그 존재를 같이 해오고 있는 영속성을 지닌다. 각 사물들은 저마다의 개별성도 갖고 있다. 과연 인류는 우리의 주변을 이루고 있는 사물들의 도움 없이 현재를 구축할 수 있었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인간이 사물에 대해 갖는 관심은 각별할 수밖에 없다.
시인도 그가 바라보는 사물들에게 할 말이 많겠다. 독자 앞에 사물을 끌어다 놓고 그 겉과 속을 세세히 들춰 보이며 사물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시인들을 만나본다.
덜그럭 덜그럭 둘러보니 돌들이 몸을 비틀고 있다
벼랑 위에서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씻으며 하늘을 마시는 나를
공룡 같은 포클레인이 싣고 와 도살장 마당에다 부려놓고
전기톱으로 자르더니
쇠망치로 내리치더니
대패로 깎아내더니
산 중턱에다 올려놓고
허구한 날 뙤약볕에 옴짝달싹 말고 구경거리가 되라 한다
충신도 아닌 것이, 열녀도 아닌 것이, 문화재도 아닌 것이
그저 퍼런 배춧잎만 있으면 누구나 발라놓는 자화상
——전순영, 「돌의 눈물」 전문
사물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스스로 자리를 옮겨 앉을 수도 없다. 사물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예술품이 되기도 하고 불과 도구가 되기도 하고 무기와 흉기가 되기도 한다. 시인은 사물인 돌의 의식을 읽어낸다.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돌. 눈물을 흘리는 돌. 그러니 감정이입이다. 이 또한 낯익다.
시가 말하고 있는 바는 아주 단순하다. 전개를 따라가 보면 처음에 돌은 “벼랑 위에서/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씻으며 하늘을 마시는” 자연 속에서의 자유로운 ‘존재’였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 만족하면서 이주에의 욕망을 갖고 있지 않은 돌은 그러나 인간에 의해 자리를 옮기고 재단 당한다. “포클레인”과 “전기톱”과 “쇠망치”와 “대패”는 돌의 소박한 소망을 인간의 의도대로 변형, 왜곡시키는 도구들이다. 시인은 “충신도” “열녀도” “문화재”도 아닌 그저 하나의 형상으로 “산중턱”에서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만 돌에 대해 당신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를 묻는다. “퍼런 배춧잎”은 ‘돈’의 흔한 비유이다. 있는 그대로 두고 보면 될 것을 굳이 돈을 들여 다듬어 꾸미는 이유를 돌은 이해할 수 없다. “자화상”은 비싼 대가를 치르며 얼굴을 굳이 뜯어고치는 성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위의 시는 사물을 대상으로 쓴 시들에서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인간과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품고 있다. 그러니 “돌의 눈물”은 슬픔이거나 좌절보다는 분노에 오히려 더 가깝다.
꿈에 나는 앞뒤 문 다 열어놓은
딱딱한 나무토막이다
제재소 전기톱이 나를 켜 정수리부터 가르자
안은 둥근 나이테뿐이었다
철없이 허공을 파고든 어린 날의 상처도
동그랗게 그려져 있었다
견고하게 나를 지탱한 것이 상처였음을
무너진 나이테 무늬를 보며 알 수 있었다
물관을 타고 오른 가파른 수직의 생각도
조각나, 햇살에 빼빼 마르고 있었다
어떤 생각도 끼어들지 못하게
바람과 햇빛이 틈에 낀
살냄새를 지우자
육탈된 몸이 드러낸 육감의 무늬를 따라
사람들은 장롱이나 식탁 심지어 신발장으로
나를 다시 조립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변하는 모습에 놀란 난,
봄날 동백꽃 피듯 화들짝 놀라 잠을 깼다
——유미숙, 「나무토막」 전문
이번에는 “나무토막”이다. 어느 날 화자는 자신이 나무토막이 된 꿈을 꾸었다. 전편의 “돌”처럼 “나무토막” 또한 의식을 갖고 있다. 나무토막인 자신의 몸에 새겨진 나이테는 곧 동그랗게 그려진 어린 날의 상처였다. 이제까지 자신을 지탱하게 한 것이 그 상처였음을 “앞뒤 문 다 열어놓은” 형상으로 잘리고 나서야 비로소 드러난 나이테를 바라보며 확인한다. 쪼개진 판자로 햇살에 말라가는 나무토막은 마침내 살을 모두 버리고 뼈만 남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의 뼈를 다시 조립해 옷가지를 보관하는 “장롱”을 만들고 먹을거리들을 올려놓는 “식탁”을 만들고 심지어는 흙 묻은 신발들을 넣어두는 “신발장”도 만든다.
시의 모두에서 시인이 밝힌 대로 나무토막은 화자 자신이다. 그러니까 시인은 나무토막을 화자의 대리물로 삼아서 자신의 삶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계기로 삼고 있다. 꿈을 빌어 말하고 있지만 심리학에서 꿈은 평소에 갖고 있던 잠재의식의 발현이다. 삶이 타자에 의해 재단당하고 쪼개지고 다시 조립된다는 건 행복한 현실은 분명 아니다. 우리 현대인들의 삶이 그러하지 않은가. 바라는 대로 진행되는 자주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산다. 뿌리 잘리고 가지가 잘려 몸통만 덩그러니 남은 “나무토막”들이다.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실체가 그거다.
수수깡이 그랬다, 수숫대가 그랬다, 쳐다보기에
눈길이 갈 만한 어디 한 군데 옥수수를 닮은 것도 아닌,
절로 기쁨을 자아내는 환하게 생긴 해바라기도 아닌,
시푸르둥둥한 빛깔의 곰보 얼굴까지 하고 선, 멀뚱하게
무거운 고개를 떨구고 있는, 게다가 흙 차지를 꽤나 넓게 하고 있는,
뭔가 좀 그랬다, 다감하지도, 자극적이지도 않은 몸매를 가지고 있으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옆집에 새로 이사 온 가족 아기 첫돌 날, 꽃무늬 접시에 놓여
우리 집으로 건너온 수수떡이라는 혀 속에서 살살 녹는,
맛을 보기 전까진 그랬다 볼품없는 꺽다리 수숫대, 그는
이런 맛을 지닌 들판에서 왔다
——박원혜, 「수수깡」 전문
말을 덧댈 필요가 없다. 기교로 치장하지 않고 꼬아 놓지 않았으니 읽는 그대로다. 둘째 연을 말하고 싶어서 시인은 첫 연에다 들판에 서 있는 “수숫대”의 외양을 세세하고 장황하게 설명해 놓았다. 키는 크지만 “눈길이 갈 만한” “옥수수”도 아니고 “환하게 생긴” “해바라기”도 아니다. 부정성으로 일관한다. 매력이라고는 도통 찾아볼 수 없는 모습에 숨겨진 “수숫대”의 정체성을 몰랐기 때문이다. “시푸르둥둥한 빛깔의 곰보 얼굴”은 수숫대의 매력 없음에 대한 화룡점정이다. 하지만 “곰보 얼굴”이 “혀 속에서 살살 녹는” “수수떡”으로 바뀌었을 때 “수숫대”에 대한 인식은 확연히 바뀐다. “그는 이런 맛을 지닌 들판에서 왔다”는 걸 알게 된다. 멋진 외양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지만 외양만으로 존재 가치를 섣불리 판단하는 오류를 우리는 살아가면서 적잖이 범하며 산다.
두 연으로 이루어진 위의 시를 행갈이 없이 재배치해 보면 세 문장의 산문으로도 읽힌다. 압축과 생략이라는 언어의 경제성을 언급하자면 시적이지 못하다는 의미도 되겠다. 하지만 시인의 주제의식이 이 산문적인 서술을 시가 되게 했다. 말은 많지만 그래서 되려 간결하고 간명하고 선명하게 주제가 드러나 있다. 시다운 시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허름한 모텔방을 베고 누워
뒤척거리다 씻고 나와 언양 언저리를
돌고 돌아 들어온 순댓국집
배추김치와 깍두기를 덜어 자르고
요리법대로 양념을 넣는다
국밥 한술 뜨고 고추 접시를 쳐다보는데
유독 고추 하나 신기 뿜고 있다
눈에 띄는 고 녀석 집어 들고
된장 푹 찍어 절반을 뚝 끊는데
어째, 마음 허리에 아련한 통증이 온다
양파를 베고 누운 고추 사이에서
유독 불거져 보였던 녀석
그렇게 타고났던 것인데
단지 눈에 띄는 겉모습 때문에 걸려들고
고집스런 천성 때문에 씹힌다
틀에 박힌 땅에서 자유스러움은
자연스러움은 처단의 대상이므로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기준이 있으므로
그 고추는 그 기준과 다르므로
라고 애써 이유를 가져다 붙이며
이마로 흐르는 땀만 닦는다
——문철수, 「고추」 전문
우리 식탁에서 “고추”는 ‘약방의 감초’와 같다. 시는 이토록 친근하고 흔한 “고추”를 말하고 있지만 결국은 사람 얘기다. “허름한 모텔방을 베고 누워 뒤척거리”고 있던 화자가 찾아든 순댓국집 식탁 위의 “양파를 베고 누운 고추”들 사이에서 매운 기운을 뿜어내며 “유독 불거져 보였던 녀석”은 곧 화자 자신일 테다. 화자는 “고집스런 천성”을 타고 났고 천성 때문에 “씹힌다” 틀에 박힌 세상을 거부하며 자유스럽고 자연스럽게 살고자 하지만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이 같은 삶의 방식은 처단의 대상이 된다. 단지 세상의 기준과 다르다는 이유로 고통을 당해야 하는 삶이 자신의 천성이며 생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화자의 심정에 선뜻 동의하게 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터.
외로움과 슬픔마저 아련하게 느껴지는 정서를 아무렇지 않은 듯 평정을 잃지 않고 능청스레 전개해 나간 시인의 의도 또한 성공적으로 읽힌다. 진행은 서사적인 내용을 보여주고 있지만 분위기는 더없이 서정적이다. 순댓국집에서 접시에 담겨 있는 고추를 보면 문득 다시 떠올리게 될지도 모를 시편이다.
새벽의 방에 잠을 비우고 숲을 들였다
나뭇잎에서 나뭇잎으로 건너가는 빗방울이 새소리를 타고, 나는 늙은 오동나무 아래 앉아서 이제 겨우 속잎 꺼내 놓은 나무의 속을 들여다본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순한 말들을 옮기는 바람의 혀는 붉고,
산길에 모로 누워있는 늙은 오동나무 텅 빈 방에 애기똥풀꽃 노랗다
숲이 내어주는 길을 따라 짐승의 발자국을 좆는다
산꽃들 피어 출렁이는 숲에서
휘어진 허리를 길 위에 걸치고
이정표처럼 서 있는 늙은 오동나무
오래 익었던 시간의 악보들 가지 끝에 내다 걸었다
악기의 몸통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숲을 울린다
——김경성, 「늙은 악기의 노래」 전문
시처럼, 시로 읽히는 드문 시. 노련한 목수의 잘 지은 한 채 집을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생은 세월에 빚지지 않고서는 아름다운 소리를 품을 수 없다는, 아름다운 소리는 인공이 아닌 자연의 소리임을 “늙은 오동나무”가 악기가 된 그의 몸통으로 보여주고 있다. 담고 있는 품도 넓고 깊어 시적이지만 언어를 매만져 시다운 표현으로 풀어내는 시인의 솜씨가 무엇보다도 돋보인다. 덩그렇게 서 있는 집의 배경에다 아름다운 정원도 하나 조성할 줄 아는 경지다. 오랜 수련을 거치고 가다듬은 결 고운 표현들로 시맛을 한층 더했다. 조미료들은 장식적 효과보다는 적당량으로 조화를 이루어 맛을 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요리사를 연상하게 한다. 아무려나, 표현력을 담보하는 언어를 부리는 기교는 시에 있어서 처음이자 끝이다. 이 시의 처음과 끝이 그걸 분명하게 증명해 보이고 있다.
눈 뜨면 마주치게 되는 주변의 사물들과 인간은 언제나 화해하고 서로 평화로울 수 있을까. 이는 전적으로 절대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인간의 몫일 테다. 파괴하지 말고 홀대하지 말고 겸손하고 경건하게 사물들을 대하는 마음은 곧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작동하는 것임을 사물을 다룬 많은 시들이 말하고 있다. 사물들은 자연의 일부이고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긍정성이든 부정성이든 사물들에게 우리 인간은 빚진 게 참 많다. 갚아야 할 게 너무도 많은데 빚만 자꾸 늘어가고 있다. 푸른 심장을 지니고 살아가라는 나무들의 묵음을 눈으로 듣게 되는 봄이다.
최준/ 1963년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났으며 1984년 『월간문학』, 19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집 『개』, 『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 『뿔라부안라뚜 해안의 고양이』가 있음.
2016년 겨울호 지난 호, 좋은 시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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