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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丹野의 깃털펜/풍경이 되고싶은 詩

존재의 인식, 그 허무와 자유 / 이충이

by 丹野 2019. 8. 11.

 

 

 

존재의 인식, 그 허무와 자유

 

이충이

 

배연옥의 서리는 네게는 삶의 뒤돌아보기이며 또한 존재의 내적 파악이다. 이 시는 마음의 궤적과 파장을 표현하고 있다. 어딘가 모르게 외롭고 적막한 일상에 대한 말걸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걷잡을 수 없는 편린들이 몸 안에서 오랫동안 공명하고 있다. 사유세계를 넘어선 새로운 치유적 주제와 스타일이 인상에 남는다.

서리는 네게지루한 일상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무마한다. 이런 지친 삶도 한때 꿈이었다. 모두가 꿈을 꾸었다. 각자 다른 꿈을 꾸며 다른 세상을 살고 있었다. 하나의 세상에 여럿이 모이지 않았다. 각자의 세상을 지닌 사람들이 만났을 뿐이었다. 어디에도 똑같은 세상은 없었다. 세상은 순식간에 달라지는 마술과 같았다. 배연옥은 이런 세상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다.

이곳에 서 있는 여자는 나침반을 놓았다 비로소 길을 잃게 된 것이다 채근하는 사람도 숨가쁜 호흡도 없다 12월의 붉은 서리가 전리품처럼 찾아 온 것이다 한때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풀을 닮고 싶었다 타들어가고 바싹거리지 않는 창의 가림 막이고 싶었다 얼마나 무던히도 속박하는 일을 즐거워했던가

──「서리는 네게1

그는 나침반을 놓았길을 잃게 된 것이다”. 그런데 붉은 서리가 전리품처럼 찾아온 것이다”. 이런 상황이 의도적인 설정은 아니지만 긴장과 은유를 통해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일상적인 을 통해서 기억의 회한과 니힐의 과정을 보여준다. 앞에서 잃어버린 은 실존적 고독을 담아내는 하나의 움직이는 정물에 불과했다. 이것은 2연에서 겨울이 왔다 지나간 가을은 무엇을 했던가” “서리맞은 내 몸의 과육들을 통해 길을 내주는데, 그 이면에는 진정한 자아의 대상이 존재한다. 이런 설정은 충분히 의도적일 수 있다. 물론 배연옥은 소외된 대상을 가까이 할 수 없는 풍경 밖 풍경으로 붙박혀 있다.

이 시에서 자신은 다른 삶을 위하여 사는 것이지 자신을 허물어뜨리는 것은 아니다. 한없이 흔들리는 인간, 무력한 자신의 모습 그 자체와 그 내면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러나 3연에서 모처럼 겨울햇살이 말을 걸어온다서리 중 하나가 말을 걸어온다라는 것은 현실 속에 자신을 인식하는 과정이다. 3연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쓸쓸함에 대해 담담하게 진술하고 있다.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고 위안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을 들었다. 진정한 생명을 얻었다.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의 길을 체득했다. 화려한 수사는 없으면서 나무랄 데 없는 은유의 세계를 이 시는 보여준다.

    

 

 

김경성의 추전역杻田驛은 첫행 꼬리지느러미 오른쪽에 앉았다부터 시적 감수성과 상상력의 구체성이 강렬했다. 시의 전개는 일체의 대상이나 연상되는 사물을 상투적인 상황과 다르게 표출하며, 우리의 외롭고 쓸쓸한 삶을 제시하고 있다. 어딘가 외롭고 간절한 쓸쓸함이 잔물결처럼 밀려온다. ‘추전杻田이라는 풍경 속의 풍경에서 슬픔이 힘이 되는 새벽처럼 담백하게 살아있다.

우리는 마지막 행 당신의 옆줄에 기대어서 생도 저물어 간다에 도달하기 전에 어떤 이야기나 어떤 감정에 휩쓸려서 지루한 일상을 아무렇지 않게 떠나고 싶어진다. 이런 감정이입은 나름대로 언어에 대한 간결성과 특유의 리듬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하며 존재의 들여다보기를 통해 깊은 외로움 속으로 터지는 김경성만의 어휘이다.

 

추전역 / 김경성

   

꼬리지느러미 오른편에 앉았다

한 번씩 몸을 비틀 때마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는 아가미 속으로

산길 꾸러미가 흘러들어 갔다

검은 길은 등지느러미를 따라 흘러가고 

물박달나무는 제 몸의 비늘을 벗겨서 속 길을 그렸다

미처 다하지 못한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연필심이 제 몸의 뼈대가 된 추전역,

이따금 밑줄 긋고 가는 물고기가 없다면

문장을 이어나가지 못할 것이다 

4B연필로 그어놓은 산길 위에 산란하는 물고기 

배지느러미에 말간 알을 가득 안고 바다 쪽으로 흘러갔다

 

당신의 옆줄*에 기대어서 내 생도 저물어간다

 

   

*물고기의 옆줄(측선)은 물의 온도, 흐름, 수압, 진동을 감지한다.

──「추전역전문

 

이 시는 사물이나 대상에 대한 관심과 진심이 없다. 내면의 실체를 볼 수 없다. 일상에 펼쳐진 대상이나 의미를 길어 올리는 일은 여전히 시인의 몫이다. 제대로 보고 투사했기 때문에 이 시의 의도가 잘 살아난다. 그래서 시작詩作의 행위는 인식의 그림으로 옮겨진다. 이것이 남과 다르게 이룬 자신의 삶을 변주해 더욱 신선하게 느껴진다.

추전역杻田驛은 하늘에 가까운 첫 번째 간이역이다. 처음과 끝이 공존하는 곳이다. 여기에 인간의 내면과 일상적 가치가 존재한다. 간이역을 익명으로 불러낸다. 석탄가루 내려 깔린 철길을 따라 물고기처럼 오르내리며 객차는 몸을 오른 쪽으로 틀었다. 아니 우리를 깨우기 위해 기우뚱거렸다. 이 시는 행을 조금씩 전이시키면서 신선한 자극을 준다. 어느 부분에서나 시어의 선택이 탁월하다. 이런 선택은 시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거듭되는 질문이다. 이런 것들이 삶의 고리를 연결하는 이야기가 된다. 특히 지느러미”, “아가미”, “꾸러미”, “”, “물박달나무”, “비늘”, “연필심”, “물고기등에서 연상과 환상이 간결하게 묘사되다가 마지막 행 당신의 옆줄에 기대어 내 생도 저물어 간다는 절정에 이르게 된다.

어쨌든 추전역杻田驛은 시어와 행과 연이 어우러진 이미지를 창출하는 기법이 탁월하다. 이러한 시는 감성과 이성이 빚어내는 언어를 습득한 다음에야 가능하다. 김경성은 시를 쓰고자 한 대상에 틀을 잡아가는 세심한 과정을 꿰뚫고 있다. 어딘가에 가서 어떤 풍경을 보는 집중력도 강렬하다. 짧은 순간이라 할지라도 강도 높은 집중력 때문에 오랫동안 숨겨진 채로 있을 대상의 특성을 식별해 표출시키는 능력이 돋보인다. 이렇게 표현하기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을 것이다.

 

 

강현욱의 궁사의 꿈은 닿을 수 없는 먼 곳과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을 갈망한다. 그러나 그에게 거리와 고도는 문제가 될 수 없는 도전의 대상이다. 무언가를 향하여 투사시키지 않으면 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궁사과녘에 가치를 두었다기보다는 물러설 곳 없이 팽팽히 당기는 손끝에 자의식을 집중시킨다. 그는 쉽게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선언했다.

강현욱의 시에 질문하는 공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켜주는 미학적 장치가 있다. 그는 숭고한 아름다움의 상징, 즉 보이지 않는 과녘이라는 대상의 내면을 응시凝視한다. 여기에 대상은 이루지 못한 사랑일수도 있고 찾지 못한 자유일수도 있다. “활시위를 당기는 궁사는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궁사과녘사이에는 현실과 환상이 투사되어 있다.

 

한껏 움켜진 주먹에 활시위가 외치면

화살은 해방을 위해 날아간다

한 마리 물고기 되어

눈부신 시간의 지느러미를 흔들며,

따라 흐르던 강물을 거스르며,

 

──「궁사의 꿈4

이 시를 따라가면 일상을 팽개치고 지루한 반복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우리는 대상을 얻었지만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갈등이 더 커진다. 우리는 저만큼 물러서서 대상을 향해 또다시 다가가고 다가갈 뿐이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어딘가에 온전히 숨어 있어서 다시 가질 수 없다는 착각에 빠지기 일쑤다.

세상에는 얼른 눈에 띠지 않지만 곳곳에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너무 벅차서 아무도 그것을 가질 수 없을 뿐이다. 이 순간들이 우리가 정말로 깨어있는 순간이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이렇게 반복한다. 또한 이 순간 우리는 매듭과 고리를 혼동하기도 한다. 매듭과 고리라는 과녘을 잃어버린 인간은 고달프다.

시의 깊이가 어느 때보다도 요구되는 시대이다. 어느 시대나 압제와 거짓으로부터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이들이 바로 시인이다. 우리 사회는 인간에 대한 진지함보다는 가벼움이 넘치고 있다. 강현욱은 이 시를 통해 가벼움의 발목을 잡는다. 자신뿐만 아니라 타자의 입장에서 보고 생각하는 능력이 돋보인다.

김진광의 안탈리아의 바다에서 이제껏 갇혔던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았다. 삶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고 껴안으려는 눈길이 간절했다. 매순간 어떤 역사든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문답이 전개된다. 이러한 시는 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아랍인, 나침반, 이정표의 경계선이며 유적지의 버려진 기둥이기도 하다.

이창수의 능소화는 또 다른 하나의 은유이다. 사랑의 시작과 끝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자멸한다. 남녀 사이에는 언제나 깊은 오해가 있기 마련이다. 오해가 없으면 사랑이 아니다. 자신의 몸 속에 내재하는 타락에 대한 죄의식 때문이다. 지독한 사랑조차 한 편으로는 기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두렵다. 이 시는 잠든 존재들을 놓치지 않으려는 시선이 돋보였다.

한경용의 칸나의 유혹은 존재에 대한 선명한 온기와 사랑, 그러면서도 삶을 바라보는 쓸쓸함과 따스함을 꾸미지 않은 언어로 표현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가치상대주의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에 대한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한다. 지신이 좋아하는 것을 버리지 아니하면서도 대상을 위로할 수 있다.

강치두의 상사화에는 오래된 상처가 투사되어 있다. 우리는 만날 수 없음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에 있던 고독하고 비관적인 삶의 단면을 본다. 이모든 것이 자신의 몫임을 알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상사화는 간접회로에 영원히 갇혀있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이 시대의 모순도 함께 보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영원히 해후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충이 / 1943년 목포에서 태어났으며 1984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빛의 파종4권이 있고, 시선집 달의 무게가 있다. 윤동주문학상, 자유시인상, 녹색시인상, 한국기독교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시와산문발행인으로 있다.

 

 

계간평 2014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