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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나, 시 이렇게 썼다>, <나, 시 이렇게 읽었다> / 조삼현 시인

by 丹野 2019. 4. 3.

<나, 시 이렇게 썼다>, <나, 시 이렇게 읽었다> / 조삼현 시인



세렝게티의 아이들
 
  권혁수
 
 
1.
나무에 갇힌 코뿔소를 꺼내놓아야 해
망고와 바나나를 먹으려면 코뿔소를 먼저 완성해야 해
 
세렝게티의 아이들
 
나무토막이 코뿔소가 되기 전까지
굶어야 하는 아이들
 
2.
국제우편으로 배달된 상자를 여니
검은 코뿔소가 나왔다
훅훅 더운 콧김 내뿜을 때마다
풀 냄새를 풍겼다
 
세렝게티 아이들의 손에서
태어난 코뿔소
 
아이들에게 망고와 바나나를 주고
적도 지나오느라 까맣게 그을린,
 
초원을 달리다 태양을 뿔로 찌르고
진흙 물웅덩이 휘젓던 그 근육질 뚱보가
아이들의 손에서 태어났다니!
배고픈 아이들의 노동으로 숨을 쉬다니!
 
3.
세렝게티 아이들이 코뿔소를 사냥한다
 
별이 보이는 초막의 지붕 밑에서
조각칼을 들고
 

<나, 이 시 이렇게 읽었다>  

조삼현 
  
 
  세렝케티 공원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생태계 중 하나로 탄쟈니아의 동물왕국이다. 탄쟈니아와 케냐의 국경지대에 마사이족, 삼부르족, 아루샤족 등이 유목생활을 하며 부족국가 형태의 집단을 이뤄 사는데 ‘괜찮아, 모든 것이 다 잘 될 거야’라는 의미의 ‘하쿠마 마타타’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고 한다. 가장 아프리카다운 지역이다. 그곳 세렝케티의 아이들의 삶을 탄주한 이 시가 2009년 문예진흥기금 수혜 작품이다.
 
  좋은 시란 주제가 명징해야한다. 시인의 우주관 및 세계관, 시대를 앞서가는 선구 정신, 삶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 등이 바탕이 되어야하고 이들 여러 가지 조건 중 하나를 충족하여 한다. 그러한 조건 중 하나가 시의 골격을 이루고 그 뼈대 위에 직유, 은유, 활유, 알레고리 등으로 데커레이션을 하여 시를 아름답게 장식하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권혁수의 시는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관이라는 명쾌한 주제가 있다. 세렝케티 아이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이 시의 주제로, 주제는 시의 집이다. 집이 크면 클수록 많은 장식을 할 수 있는 반면 잘못 다루면 어설픈 시가 되고 만다. 권혁수의 시는 알레고리로 데커레이션 하였다. 알레고리의 사전적 의미는 “하나의 단어나 문장으로 묘사하는 은유와 달리, 어떤 주제 A를 말하기 위해 다른 주제 B를 사용하기도 하고(...중략...) 연과 연의 은유, 이야기 전체를 하나의 총체적 은유로 관철하는 것”인데 권혁수의 시가 이야기 전체를 대 은유로 직조한 서사시이다.
 
  이 시를 쉽게 해석하자면 국제우편으로 보내온 소포를 열자 검은 코뿔소가 나온다. 그 코뿔소는 세렝케티의 아이들이 조각공예한 것으로, /망고와 바나나를 먹으려면 코뿔소를 먼저 완성해야 해/야 하고 /나무에 갇힌 코뿔소를 꺼내놓아야’ 즉 코뿔소를 깎아서 팔아야만 생계 해결이 되는 /배고픈 아이들의 노동으로 숨을 쉬’ 는 척박한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이다. 단순한 진술을 1.2.3부로 나눠 알레고리 기법을 활용하여, 가로 세로 피륙을 짜듯 정교하게 쓴 시로, 보여줄 듯 안 보여줄 듯 보여주는 독자와 줄다리기하는 능란한 글 솜씨가 재미있다. 조삼현(시인)



칸나
 
  송찬호
 
 
드럼통 반 잘라 엎어놓고 칸나는 여기서 노래를 불렀소
초록 기타 하나 들고 동전통 앞에 놓고
가다 듣는 이 없어도 언제나
벌겋게 목이 부어 있는 칸나
그의 로드 매니저 여행용 가방은
처마 아래에서 저렇게 비에 젖어 울고 있는데
 
그리고 칸나는 해질 녘이면 이곳 창가에 앉아
가끔씩 몽롱 한 잔씩을 마셨소
몸은 이미 저리 붉어
저녁노을로 타닥타닥 타고 있는데
 
박차가 달린 무거운 쇠구두를 신고 칸나는
세월의 말잔등을 때렸소
삼나무 숲이 휙휙 지나가버렸소
초록 기타가 히히힝, 하고 울었소
청춘도 진작에 담을 넘어 달아나버렸소
삼류인생들은 저렇게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초로(初老)를 맞는 법이오
 
여기 잠시 칸나가 있었소
이 드럼통 화분에 잠시 칸나가 있다 떠났소
아무도 모르게 하룻밤 노루의 피가 자고 간 칸나의 붉은 아침이 있었소
 
 
  
<나, 이 시 이렇게 읽었다>
  조삼현
 
  시 창작기법 중 2인칭인 너와 3인칭인 그대를 빌어 나를 형상화하거나, 꽃, 나비, 별, 새 등 객관상관물을 통해 나를 상징하는 창작기법이 있는데, 송찬호의 시가 대개 그러하다. 그의 시〈가방〉이 그렇고 〱채송화〉가 그렇고 〈칸나〉가 그러하다. 칸나는 인생 또는 시간을 상징하는 기재로써의 꽃이다. 꽃도 다름 아닌 저녁노을처럼 붉은 꽃이고 노루의 피처럼 붉디붉은 꽃이다. “드럼통 반 잘라 엎어놓고” 그 위험한 곳에서 노래를 부르는 칸나가 표의하는 것은, 우리네 인생은 늘 불안하고 칸나처럼 붉디붉은 눈물주머니 하나쯤 달고 산다는 의미일 것이다. 칸나는 노래를 부르는 여자가수로 인식되지만 기실은 우리 모두를 아우르는 다의적 다상적 성격의 객관상관물일 것이다.
 
  “초록 기타 하나 들고 동전통 앞에 놓고” 있는 이방인은 하루하루를 구걸하듯 살아가는 사람이리라. 천상병 시인께서 인생을 ‘소풍’이라고 하였다면, 서정춘 시인께서는 당신의 시 죽편에서 인생을 ‘여행’이라고 하였다면, 송찬호 시인은 인생을 하루하루가 ‘구걸’ 같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칸나’와 ‘초록 기타’는 화자 또는 인생을 상징하는 것일 진데, 물격인 “여행용 가방”이 인격의 로드 매니저가 되는 物我一體 아이러니가 재미있다. ‘초록 기타’는 젊음을 상징할 것이다. “가다 듣는 이 없어도 언제나 벌겋게 목이 부어” 노래를 부르는 칸나는 가끔씩 해질녘 창가에 앉아 있기도 하고, 몽롱 한 잔씩을 마시기도 한다. 몸은 이미 저리 붉기만 하여 저녁노을처럼 타닥타닥 타고 있는데......
 
  “박차가 달린 무거운 쇠구두를 신”은 칸나가 “세월의 말잔등을 때”리자 “초록 기타가 히히힝, 하고 울었”을 뿐인데 시간이란 “삼나무 숲이 휙휙 지나가버”리고 “청춘도 진작에 담을 넘어 달아나버”린다. 시인은 능청스럽게도 칸나 = 인생 = 이방인 = 시간인 듯 묘사하다가 마지막 연에서 “여기 잠시 칸나가 있었소” 라며 화자 자신이 직접 개입한다. 나이 이순을 넘은 시인이 자신을 정의할 때 “삼류인생들은 저렇게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초로(初老)를 맞는 법이오” 라는 역설로 겸양을 대신할까? “드럼통 화분에 잠시 칸나가 있다 떠났소” “아무도 모르게 하룻밤 노루의 피가 자고 간 칸나의 붉은 아침이 있었소” 에서 ‘있었소’ ‘떠났소’의 ‘었’이나 ‘났’은 소멸을 상징하는 과거완료형이다. 생멸의 슬픈 절규를 탄주한 그물코처럼 정교한 송찬호의 시를 읽으며, 나는 언제쯤 칸나 붉게 벙그나 흐느낀다. 조삼현(시인)



화분
 
  문태준
 
 
사랑의 농원에 대하여
생각하였느니
 
나는 나로부터 변심하는 애인 
 
나의 하루와 노동은
죽은 화분에 물을 부어주었느니
 
흘러 흘러갔어라,
먼 산 눈이 녹는 동안의 시간이
 
죽은 화분에 물을 부어주었느니
 
풀이 사라진 자리에
다시 풀이 와
어떤 곳으로부터 와
 
풀은 와서 돋고
몸은 커지고 스스로
풀꽃을 피우고 문득
여인이 되었어라
 
수심(愁心)을 들고 바람 속에 흔들리거나
내가 돌아앉으면
눈물을 달고 어룽어룽 내 뒤에 서 있었어라
 
어디로부터 왔느냐
묻지는 않았으니
누구도 나에게 그렇게 묻지 않았듯이
 
우리는 이 화분을 들고
앞서고 앞서서 가거나
늦추고 늦추어서 갈 뿐
 
우리는 이 화분을 들고
서로에게 구름 그림자처럼 지나가는 애인
나는 나로부터 변심하는 애인
 
그러하니 사랑이여,
우리가 만나는 동안은
샘물을 길어서
주름을 메우고
서로의 목을 축여다오

 
 
<나, 이 시 이렇게 읽었다> 

조삼현
 
 
  이런 징그럽게 독한 시를 보면 나는 젊은 시인 문태준이 두렵다.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 같다. 보자, 세상살이를 사랑의 농원으로 비유하였다. 어제의 나는 죽고 오늘의 나는 어제로부터 변심한 애인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란다. 어제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거듭 태어난 ‘나의 하루와 노동은/ 죽은 화분에 물을 주는 일’부터 시작한다. 시인은 세상사를 사랑 농원에 비유하더니 이젠 아예 화분에 옮겨 심는다. 백무산의 풀씨 하나에서 우주를 보는 느낌이다.
 
  화분이란 나 또는 우리, 생성 소멸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계절은 가고 오고 먼 산 눈이 녹는 동안 봄은 또 찾아와 죽은 화분에 물을 주자 풀이 와서 돋는다. 풀은 어떤 곳으로부터 왔는가?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의 존재론적 의미를 말하는 것이리라. 풀은 와서 돋고, 몸은 커지고, 꽃을 피우고, 문득 여인이 되었다고 하니, 여인이란 생명 유전기능의 신성한 모태를 말하는 것이리라. 풀과 여인을 병치시키며 나아가 화분과 여인을 사랑으로 병렬하는 고도의 언술이다.
 
  그렇지만 사랑이여, 세상사여, 수심(愁心)을 들고 바람 속에 흔들리거나 내가 돌아서면 눈물을 달고 어룽어룽 내 뒤에 서 있을,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의 슬픔이여, 우리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그리고 또 어디로 가는가? 누구도 나에게 그렇게 묻지 않았듯이 묻는 들 답하여 줄 자 누구인가? 산다는 것은 정해진 곳을 향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갈 뿐, 우리는 서로에게 구름 그림자처럼 잠깐 스쳐가는 애인이라는 것이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닌 다시 태어난 애인, 그러니 사랑이여, 우리 사는 동안 샘물을 길어서 깊은 시름과 상처를 메우고 보듬으며 서로의 목을 축이자는 것이다.
 
  그의 시는 머리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쓴다. 또한 그의 시를 읽을 때도 머리와 가슴으로 읽어야할 것 같다. 인간 내면의 고독, 외로움, 결핍, 상실, 이별 정한 등을 행주를 짜듯 가슴을 쥐어 짜, 그 가슴속의 소리를 두레박으로 퍼 올렸다고나 할까. 문태준의 시에서 백석의 리얼리즘과 소월의 서정을 함께 읽으며 애송한다. 조삼현(시인)



지평선
 
  김혜순 


누가 쪼개놓았나 
저 지평선 
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 나오는 저녁 

누가 쪼개놓았나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 
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내 몸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 

상처만이 상처와 서로 스밀 수 있는가 
두 눈을 뜨자 닥쳐오는 저 노을 
상처와 상처가 맞닿아 
하염없이 붉은 물이 흐르고 
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도 깜깜하게 닫히네 

누가 쪼개놓았나 
흰 낮과 검은 밤 
낮이면 그녀는 매가 되고 
밤이 오면 그는 늑대가 되는 
그 사이로 칼날처럼 스쳐 지나가는 
우리 만남의 저녁 



<나, 이 시 이렇게 읽었다> 

조삼현


  김혜순은 최승자, 김승희, 문정희, 나희덕, 김선우 등과 더불어 여성성을 텍스트화한 시를 많이 쓴 시인이다. 그 중 효시가 김혜순이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가부장질서에 항거하고 억압 종속된 여성의 자의식을 일깨워보려는 피나는 노력이었던 것이다. 북을 둥둥 두드리며 아버지의 군대에 대항하는 그의 시 〈낭랑공주〉가 그렇고, 남편의 군대에 항거한 〈유리부인〉이 그렇고, 딸만 아홉을 낳아 버려진 〈바리데기〉가 그렇다. 

  요즘 여성들의 지위가 일취월장 향상된 것은 이들 여성 시인들의 부단한 계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리라. 그간 우리의 법과 사회, 경제, 문화 등 모든 질서는 남성중심 질서였다. 그것은 교육 균등의 기회가 제한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여성이 양성평등 교육에 참여한 것은 1980년도 이후이다. 40년이 채 안 된다. 그간의 교단엔 거의 다 남자 선생님들이었다. 남성중심 교육을 시켰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중 알게 모르게 사용하는 생활언어는 이를 더욱 더 고정화 시킨다. 예컨대 전국소년체육대회, 청소년, 소년이여 야망을 품어라, 청춘남녀, 장인장모 등 여자와 남자를 통칭할 때 주로 남성성의 호칭을 먼저 사용한다. 남자는 이끔씨가 되고 여자는 도움씨가 된다. ‘계집애가 공부는 해서 뭤해’, 운전이 좀 서툰 사람을 보면 ‘저 것 또 여자지’ 등등 우리가 알게 모르게 사용하는 언어폭력은 남자는 시계, 여자는 시곗줄처럼 종속적 등가물로 전략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신성 모태를 가진 김혜순의 입장에선 이렇듯 폄하되고 있는 여성의 초라한 지위를 혁파하고 싶어 온몸으로 피울음을 토하며 육필 시를 쓰게 하였던 것이다. 그의 시 지평선을 보자. 

  /누가 쪼개놓았나/ 저 지평선/ 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 나오는’저 신성한 것은 여자의 성징을 묘사한 것이다. 그래도 너무 속살을 다 드러내면 민망하잖아, 외설스럽지 않게, 한 차원 더 높게, 예술답게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 라는 팬티 한 장 정도는 입혀야지...바깥도 광활하지만 내 안의 자의식은 또한 얼마나 광활한가! 그곳 내 몸이 갈라진 흔적에서 눈물이, 피 눈물이 하염없이 번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상처만이 상처와 서로 스밀 수 있는’ 법인데 '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도 깜깜하게 닫’힌 밤. 시인은 이제 꽃밭의, 꽃의 향기만을 찬미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맹금류가 되어 /낮이면 그녀는 매가 되고/ 밤이 오면 그는 늑대가 되는/ 한판 ‘칼날처럼 스쳐 지나가는’ 싸움을 붙어보자는 것인가? 요즘 초등학교 선생님들 80% 넘게 여자 선생님이라고 한다. 훗날 이 글을 본 여자들이여, 나에게는 사납게 하지 마시라. 조삼현(시인) 
  
  
  
 
소금사막
 
  신현락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한 3만 5천년의 시간은 화석이 모래로 전이하는 데 충분한 풍량이어서 학자들이 사막의 발원지를 추정하는 근거로 들기도 하지만 밤마다 모래가 바다에 빠져 죽은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3만 5천년 후, 그 자리는 소금사막의 발원지가 되었다
 
  모래의 여자는 정갈한 소금으로 밥상을 차리고 바람을 기다린다 사막에서 바람을 많이 먹은 종들은 종종 변이를 일으키는데 그들이 사랑을 할 때는 서로의 입안에 소금을 조금씩 흘려보낸다 사랑을 구하기 위해서 남자들이 여자를 찾아오는 건 소금에 중독된 까닭이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래의 동선을 보면 최초의 호모사피엔스가 여자인 것만은 분명하다 바람의 혀는 감미롭게 모래의 능선을 애무하지만 모래의 여자는 모래만 낳을 뿐이어서 몇 만 년 동안 처녀의 지평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바람이 없는 날에는 가끔 소금이불을 햇빛에 펼쳐놓기도 한다
 
  지금도 소금에 중독된 남자들이 모래의 여자를 찾아 간다 그러나 소금을 맛본 바람에게 혀를 내맡기다가 대륙을 이동하는 모래의 변종에게 눈을 다치기도 한다 눈 먼 사내들이 사막에서 길을 잃을 때 모래의 여자는 심해의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싱싱한 소금을 그들 앞에 뿌려준다 그렇다고 소금을 한 주먹씩 집어 먹는 건 사막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아무리 극소의 미량이라도 한 알의 소금으로 치사량에 이를 수 있다
 
  사랑을 많이 가진 남자의 입안을 들여다보면 소금바다가 출렁거린다 그들은 죽어서도 썩지 않는 사랑을 찾아 흰 뼈만 남은 몸으로 사막을 노 저어 간다 모래의 여자가 가시나무로 소금을 찍어 인간의 간을 맞추는 것은 이 세상으로 사막이 번져오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
 
-제3회 《시산맥》 작품상 수상 작품
 
 
 
<나, 이 시 이렇게 읽었다> 

조삼현

 
  호흡이 긴 시를 읽다보면 앞에서 읽었던 행간의 길을 잃어버려 이게 무슨 말인지 혼란스러운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주제를 먼저 드러내고 나서 전개해 나가는 두괄식 문장도 있겠으나 대개의 시편들은 후반부에 주제가 있음을 주지하고 정독하다보면 시의 길이 보인다. 시뿐만 아니라 영화나 연속극 등 모든 예술은 발단, 전개, 갈등, 절정 또는 서론, 본론, 결론 형식을 이루고 있다. 소금사막 또한 그러하다. 1연은 시를 말하기 위한 모두진술(배경 설명)이라고 한다면 2연과 3연은 전개과정이며, 4연은 갈등 증폭과정, 5연은 갈등구조를 극복하며 엔딩을 하고 있다.
 
  이야기를 좀 엇나가, 2000년 이후 한국 현대시는 급속한 전환기를 맞는다. 그간의 단순구조를 탈피하여 복합구조로 바뀐 것이다. 농경 문화권에서는‘구름에 달 가듯이’라는 단순구조로도 표현할 수 있었지만 복잡다기해진 현대사회에서는 단순구조로는 대용량 표현을 할 수 없음이다. 또한 선배 시인들이 이미 좋은 시를 많이 썼기 때문에 전인미답의 색다른 시를 요구하는 것이 시대적 소명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요즘 시들이 기재나 질료를 많이 등장시키다 보니 시가 많이 복잡해지고 난해해졌으며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신현락의 시가 그렇다.
 
  그렇다면 신현락의 시를 어떻게 들여다볼 것인가? 시인이 채용한 기재나 질료는 모두 화자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다. 사막이 그렇고 소금이 그렇다. 언젠가 티브이에서 타클라마칸 사막 사람들의 생존 과정을 본 적 있는데, 그곳 남자들은 소금을 구하기 위해, 소금을 구해 여자를 얻기 위해 평생 사막을 넘나들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속된 묘사 하나를 해보겠다. 혼자서 소매치기를 하는 사람을 일컬어 ‘독고다이’라고 하는 그들의 은어가 있다. 그러나 대개는 협업한다. 한 사람은 소리를 질러 시선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어깨를 부딪거나 밀어 감각을 분산시켜 바람을 잡은 다음 선수가 쓰~윽 하는 것이다. 이렇듯 신현락의 시 질료들도 서로 협업한다.
 
  사막은 생존조건이 척박한 곳이다. 또한 소금을 구하기가 힘들다. 사막에서 소금을 찾는 시인의 여정이 고달프다. ‘사막’‘소금’‘모래 여자’‘소금에 중독된 남자’‘치사량’‘죽어서도 썩지 않는 사랑을 찾는 흰 뼈’ 는 시인과 시를 상징하는 도구들인 것이다. 또한 ‘그’ 라고 명명한 ‘나’와 ‘사랑을 많이 가진 남자’모두가 화자 자신을 비의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기재와 질료들이 서로 협업하여 유기적인 조합을 이루기 때문에 시의 깊이를 심화시키고 있어 독자와 낯선 숨바꼭질을 한다. 숨바꼭질을 할 때 너무 쉽게 찾으면 재미가 없지 않던가?
 
  그의 두 번째 시집 『풍경의 모서리 혹은 그 옆』이 모서로 살아온 시인의 길이었다면 세 번째 시집 『히말라야 독수리』는 비상의 날개를 달고 창공을 활강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가열 찬 응원을 보낸다. 시인이 찾아가는 모래의 여자가 구도의 길이든 좋은 시를 찾아가는 경로과정이든지 간에 “죽어서도 썩지 않는 사랑을 찾아 흰 뼈만 남은 몸으로 사막을 노 저어” 가겠다는 신현락 시인이여, 시에 중독된 남자여, 그대의 의지가 부럽다. 조삼현(시인)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고형렬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이 문장은 성립하지 않고 시상이 전개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는 말은
상상할 수 없는 걸 상상하므로 항상 제기되는 문제다
그러나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있다
증명할 길이 없지만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있다
에르덴조 사원에서 에르덴조 사원을 생각하거나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생각하려다가 생각을 못하고 놓친다
그들은 먼 나의 생각 사이를 교묘하게 빠져나간다
문장 성립은 둘째 치고 나는 늘 이렇다
나는 이 사유 자체의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는 말이 꼭 성립돼야 하는가
길을 가면서, 나는 혼자, 그 생각에 골몰한다
분명하게 말해서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이 있는 것처럼 에르덴조 사원에 있다
그래 에르덴조 사원에 내가 있다는 것은
에르덴조 사원이 없다는 것과 진배없다
나에게 에르덴조 사원이 있다는 것은 에르덴조 사원이
없다는 것과 동급의 문제로 제기될 수 있다
문제될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 문제가 발생한다
허나 에르덴조 사원에 없는 내가 너무나 고독하다
음률을 맞추며 고통스러워하는 자의 행보
왜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는 나를 생각하고 있는가
나는 이 문장을 떠올리면 슬퍼진다
에르덴조 사원에 없는 나는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
그런데 그대여 왜 그대는 에르덴조 사원엔 없는 건가
나는 지금, 그 때, 에르덴조 사원에 머물고 있어라
나는 정처가 없어서 나무처럼 외로워 보인다
나 없는 사막 입구의 산처럼 나는 하늘을 쳐다본다
에르덴조 사원의 하늘에 나타난 눈부신 구름처럼
나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 이 시 이렇게 읽었다> 

조삼현
 
  에르덴조 사원은 1586년 원나라 때 세워진 몽골에 있는 불교 사원이다. 108번뇌를 상징하는 스투파(불탑) 108개가 성벽에 세워져 있다고 한다. 시인은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이 시, 어떻게 읽어야 할까? 육체와 정신을 분리해서 읽으면 이해가 될 듯도 싶다. 사원이란 신성한 곳이다. 정신세계는 에르덴조 사원에 있고 몸은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고 치면 시의 길이 보이기도 한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길을 가면서, 나는 혼자, 그 생각에 골몰한다/ 분명하게 말해서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이 있는 것처럼 에르덴조 사원에 있다/ 그래 에르덴조 사원에 내가 있다는 것은/ 에르덴조 사원이 없다는 것과 진배없다/ 나에게 에르덴조 사원이 있다는 것은 에르덴조 사원이/ 없다는 것과 동급의 문제로 제기될 수 있다/ 라고... 화자는 분명 에르덴조 사원에 가지 않았거나 갔다고 하더라도 현재는 그곳에 머물러있지 않다. 그러나 정신세계만은 그곳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해서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이 있는 것처럼 에르덴조 사원에 있다/ 에서 살피는 것처럼‘처럼’이란 조사는 생각만 그렇게 할뿐이지 사실은 그렇지도 않다는 의미다. 내 몸이 있지 아니한 곳에 내 몸이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에르덴조 사원이 없다는 것과 진배없는 말이 되고 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시 제목에서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고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았는가.
 
  그럼 이 시에서 에르덴조 사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원이란 신성한 곳일 뿐만 아니라 시인 구도의 길 또는 시정신의 족적을 두고자하는 곳일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허나 에르덴조 사원에 없는 내가 너무나 고독하다’고 언술한다. 그렇다면화자는 왜 또 고독한가? 고독을 감지하는 것은 육체의 기능이 아니라 정신이란 더듬이의 몫이다. 시인은‘몸은 그곳에 없지만 정신만은 에르덴조 사원에 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살펴보니 그것도 아니기에 고독하고, 고독하기에 그 무언가를 갈망하는 것이다. ‘음률을 맞추며 고통스러워하는 자의 행보’‘나는 이 문장을 떠올리면 슬퍼진다’등의 술회로 미루어보아 시력 40년인 그이지만 온전히 다가갈 수 없는 언어적 한계에 대한 고뇌와 폭 깊은 시세계 탐착에 대한 처절한 비의가 느껴진다. 물질이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시가 돈이 안 되는 세상에서, 시인들이여, 그대들은 바보인가 성자인가? 조삼현(시인)
 


시간의 거처
 
  조삼현
 
 
나는 하루 한 장 허공에 기단基壇을 쌓는다  
시간의 모래알갱이를 눈물로 반죽하여,
지천명이면 마천루 한 채 앉혔을 나이
어제 그러함 같이 오늘도 입때껏
쌓아 올린 층상을 살핀다
사라져버렸다, 사라진 곳에 또
오늘 한 장을 올리며 생각한다
 
지중해 연안 어느 왕국 술탄의 궁전은
물과 불의 뼈
용암이 빚은 주상절리를 깎고 다듬었나
석공의 땀방울을 한 켜 한 켜 쌓았나
높이 쌓아 올린 외벽 어디 퍼즐 하나가 빠졌다면……
 
내 생의 이齒 빠진 여름날이 쓰윽
뱀처럼 스쳐 지나가고, 황소구멍으로
냉기 스민다
나를 눈치챈 달력 구월이
바람을 흔들며 넘어간다
 
지금은 뙤약볕만으로는 익지 않겠다는
사과나무의 계절
지난봄의 허공 위에 가을을 포갠다, 포개며
살핀다 — 바람은 고요를 흔들어 표정 드러내는데
나를 다녀간 시간은
어느 갈피에 연보를 쌓아 그대라 형용하나
 
집보다 곰비임비 집 짓는 마음이 더 사원이라면
없지만 있는 집, 훗날 그곳에 불면의
달빛 더께만큼 키 자란 내 그림자가
풍경처럼 걸린다면
 

〈나, 이 시 이렇게 썼다〉

조삼현
 
 
  백세시대라고 한다. 나이 백 살을 백 미터 목표지점까지 달려가는 나 혼자만의 경주라 하자. 나는 지금 어느 지점에 와 있는가? 백세 나이를 일 년 열두 달로 환산하자면 중년의 나는 지금 어느 계절을 살고 있는가? 가을의 초입, 9월이 아닐까 싶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는 모두 매일 죽고 거듭 태어난다.
 
  나는 지금 집을 짓고 있다. 나를 다녀간 시간을, 내 몸에서 빠져나간 시간을 저장하는 집이다. 나를 스쳐 간 시간을, 나를 살다가 죽어버린 시간을 저장하는 시간은행이다. /시간의 모래알갱이를 눈물로 반죽하여,/ '하루 한 장 허공에 기단基壇을 쌓'고 있는 이 집은 '지중해 연안 어느 왕국’ 술탄의 궁전일 수도, 강원도 어느 산 깊은 곳 은자의 귀틀집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매일 쌓고 또 쌓아도 사라져버리는 집.
 
  스무 살 무렵의 인생을 여름이라 치자. 내 인생 여름날의 시간은 벌레 먹은 자국 참 많았다. 구멍 숭숭 뚫렸다. 벌레 먹은 시간의 질료로 짓는 이 집은 /내 생의 이齒 빠진 여름날이 쓰윽/ 뱀처럼 스쳐 지나가고, 황소구멍으로/ 냉기 스'미는 허술한 집이다. 새소리는 물론 지나가는 길손 하나 들지 않는 적막강산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하였다. 존재의 모태가 사유함이라는 것이다. 죽은 자의 언어가 산 자를 사육하는 이 중독성의 경구라니! 데카르트는 죽었지만 데카르트는 죽지 않았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존재와 부재를 육신의 언어만으로 형상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간 속에 소멸해가는 부재를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정의하는 것은 무생물의 시간이다. 나는 지금 죽어버린 시간을 인공호흡하고 있다.   
   
  사과는 뙤약볕만으로 익지는 않는다. 물과 바람과 벌과 나비, 새소리에 익어가는 /지금은 뙤약볕만으로는 익지 않겠다는/ 사과나무의 계절 /지난봄의 허공 위에 가을을 포갠다, 포개며/ ‘살피’자 어렴풋이 떠오르는 집, 그 집은 언어의 집을 짓다 불면의 밤을 지새운 달빛으로 지은 집이고  /집보다 곰비임비 집 짓는 마음이 더 사원'인 집이며/ 없지만 있는 집, 훗날 그곳에’ 너에게 나를 타전하는 풍경소리가 댕그랑거리는 집이다. 마당에 한가득 칸나와 샐비어를 심어야겠다. 


칸나
 
  조삼현
 
꽃의 영혼은 色일까 향기일까
한 생애의 서사를 오롯이 칸나로 요약한 당신
부음을 듣지 못했으니 향기이겠습니까?
알람시계가 까르르르 고장 난 아침을 깨우듯
밀랍샘 당신의 향기를 꺼내보세요
우리는 늘 함께여서 익숙하지만
초면인 듯 낯설죠, 나를 아시겠어요? 
칸나를 장미라고 오독하는 착란이 가시를 착상하듯
향기를 문장이라 정독하는 애인이 정곡을 찌릅니다!
열차의 시간이 휙휙
눈보라를 가르며 자작나무숲 지나 이르쿠츠크의 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베츠느이 아곤은
죽은 자가 밝힌 불이라죠
당신 사후의 불은 언제 켜실 건가요?
오늘 밤 우리 모닥불을 지펴요, 칸나는
온몸이 성화봉 내 몸에 불을 질러주세요
오로라와 신기루 사이 마리화나 당신
 
 
〈나, 이 시 이렇게 썼다〉
 
 조삼현

  러시아 이르쿠츠크주 청사 뒤편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베츠느이 아곤이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이르쿠츠크주 시민 21만여 명이 전장에 출병하여, 이중 5만여 명이 죽어 돌아오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때 죽은 용사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 불꽃 조형물을 설치했다고 한다.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무명용사 공동묘지에서 불꽃을 옮겨왔으며, 그곳 공동묘지의 흙도 함께 옮겨와 죽은 용사들의 혼령을 기리고 있다고 한다. 불꽃 아래 설치된 파이프를 통해 가스 공급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비가 오나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다고 하여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라고 한다.
 
  졸시〈칸나〉는 시베리아 횡단 기차여행을 검색하다 문득 채화되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베츠느이 아곤은 누가 켠 불인가? 이르쿠츠크주 시민들이 켠 불인가? 죽은 용사들의 넋이 혼불이 되어 타오르는가? 나는 이 불꽃을 지피게 한 시발점이 죽은 용사들이기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베츠느이 아곤은 죽은 용사들의 넋이 혼불이 되어 타오르는 것이라는 데 생각이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용사는 죽어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을 남기는데, 시인은 죽어서 무엇을 남길까? 시인이란 허울인가, 불멸의 시 한 편인가? 이쯤에서 나는 /당신 사후의 불은 언제 켜실 건가요?/라는 자기 반문을 하게 되었고 /오로라와 신기루 사이 마리화나 당신/을 찾기 시작한다. 즉 한 편의 시를 찾아 나선 것이다.
 
  졸시〈칸나〉에서 꽃과 향기는 이음동어로 시를 상징하기도 하고 시인을 상징하기도 하는 중의적 의미의 기재다.‘시의 영혼은 시인이란 허울인가 좋은 시 한 편인가’를 /꽃의 영혼은 色일까 향기일까/로 치환하고,‘한 생애의 서사를 오롯이 시 쓰기로 요약한 당신, 아직 죽지 않았으니 좋은 시를 써야 되지 않겠습니까?’를 /한 생애의 서사를 오롯이 칸나로 요약한 당신, 부음을 듣지 못했으니 향기이겠습니까?/로 환치하자 시의 골격이 되었다. 하지만 시의 길은 깜깜한 낭하였고 끝을 알 수 없는 터널이었다. 시는‘늘 함께여서 익숙하지만 초면인 듯 낯설’었고, 조금만 게으름을 피워도 /나를 아시겠어요?/ 하고 외면하는 게 시였다. 때로는 길 밖의 길을 곁눈질하기도 하고 슬럼프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하였다. 이럴 때 ‘알람시계가 까르르르 고장 난 아침을 깨우듯’‘밀랍샘 당신의 향기를 꺼내’게 한 것이 바로 베츠느이 아곤이다.‘칸나를 장미라고 오독하는 착란이 가시를 착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꽃의 영혼을 향기’라고 정의하고, ‘향기를 문장이라 정독하’자 시가 나에게로 와서는 /오늘 밤 우리 모닥불을 지펴요 칸나는 온몸이 성화봉 내 몸에 불을 질러주세요/ 칸나는 나에게 붉은 입술을 내미는 것이었다.
   
 
 
구멍들
 
  조삼현
 
귓속에서 자꾸만 모래가 씹혔다
언어가 슬어놓은 알의 포상기태들
퉤퉤 뱉으려고 하지만 울퉁
불퉁한 분절음이 이명처럼 갉아댔다
오래된 귀엔 소리의 여과기가 있는 걸까
가스레인지 후드 필터를 갈 때 우연히
늙은 수리공의 귓속에 털이 나 있는 것을 보았다
 
귀는 말을 먹는 입이다
 
입속에서 자꾸만 부메랑이 뛰쳐나왔다
입이 던진 부메랑에 누군가가 베이고
초목草木, 금수禽獸가 쓰러졌다
똥 누는 횟수보다 양치하는 횟수가 더 많은
이유를 생각하다, 내 입을 으깨버릴까 봐
늙은 독수리가 낡고 굽어
사냥할 수 없는 부리를 벼랑에 들이박아 새 부리를 돋게 하듯
 
입은 언어의 배설구다*
 
항문은 내 혼신魂神의 부대자루를 묶고 있는
끈이다, 밀교의 은밀 창고다
아무데나 귀와 입을 흘리고 다니지 말라고
꼭지를 닫았다, 내압을 조였다
변기에 앉을 때 무릎을 꺾는 것은 신성
의식을 치르기 때문이다
죽을 때 비로소 괄약근을 놓는
 
항문은 몸을 포괄하는 둥근 괄호다
 
*사무엘 베케트의 '머리의 항문(肛門)인 입' 변용
 
- 시집『어느 수인에게 보내는 편지』(2015, 도서출판 b)


〈나, 이 시 이렇게 썼다〉

조삼현
 
 
  사람의 몸에는 아홉 개의 구멍이 있다. 얼굴에 눈,코,귀,입 일곱 개의 구멍과 두 개의 배설기관을 포함하여 아홉 개다. 그중 제일 사악한 기능을 하는 기관이 입과 귀이며, 제일 착한 기능을 하는 기관이 항문이다. 간혹 오줌 누는 놈이 못된 짓을 하기도 하지만 인류백년대계를 위한 선기능을 더 많이 하기에 이는 제외하였다.  
 
  이 시는 입과 귀 두 개의 나쁜 기관과 착한 기능을 하는 항문을 소재로 하여 쓴 시다. 시인 정호승은 “묵언보다 더 좋은 말이 있으면 말을 하라”고 했다. 이는 입의 절제를 주문하는 말일 것이다. 우리 속담에 “혀 아래 도끼 숨었다”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소에게 한 말은 안 나도 마누라에게 한 말은 소문난다.” 등 입과 관련된 속담은 수도 없이 많다. 입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과 교감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반목과 갈등의 매개체가 되기도 하는 까닭이리라
 
  귀 또한 마찬가지다. “귀 막고 방울 도둑질 한다”“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孩兒之言 宜納耳門 (해아지언 의납이문) - 어린아이 말이라도 귀 담아 들어라” 등 입에 버금가리만큼이나 속담이 많은 기관이 귀다. 귀는 입의 말과 소리를 청취하여 상호 우호적 교감을 하기도 하지만 타자의 말을 잘못 새겨들어 분란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속담이란 옛 성현들이 후생들에게 이르는 교시일 텐데 속담이 많을수록 주의 깊게 새겨들으라는 화두일 것이다.   
 
  입과 귀는 언어의 전달과 수취기능을 하는 감각기관이다. 이 두 기관의 전달 오류나 청취 착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저해하고 분란을 야기하기도 하며 반목과 갈등, 배반과 증오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몸 중 입과 귀 두 개의 기관은 양날의 칼과 같다 할 것이며 나를 겨누는 부메랑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항문이란 배설기관은 어떤가? 우리의 몸에서 가장 더럽고 수치스러운 역할을 한다. 사람이 죽을 때는 항문이 열린다고 하는데, 어떤 치부나 비밀도 묻어두었다가 죽을 때 비로소 괄약근을 놓는 항문! 사람의 몸 중 가장 성스러운 수행자가 아니겠는가?
 
  독수리는 새 중에서 가장 오래 사는 새로 알려져 있다. 수명은 평균 70년쯤 된다고 하며, 수령 40년쯤 되면 구부러진 부리는 자라서 목을 찌르게 되고 발톱 또한 안으로 휘어져 사냥을 할 수 없어 죽게 된다고 한다. 이때쯤 독수리는 환골탈태를 시도하는데, 높은 곳에서 활강을 하여 바위에 부리를 박아버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낡은 부리가 빠지고 새 부리가 돋으면 새로 난 부리로 발톱을 쪼아 뽑아버리고, 무거워진 날개깃도 뽑아버려 새로 돋은 발톱과 날개로 나머지의 생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사람도 나이가 들면 귀에 털이 나게 되는데 이는 남의 말을 잘 새겨들으라는 소리의 여과기가 아닐까 싶다. ‘사랑해’라는 말 빼고는 할 말이 적어진다.


 
도봉산에서
 
   조삼현
 
여근석 처음 본 건 아니지만
처음 여성봉에서 보았네
사타귀바위 위 저 소나무
산객들 셔터 눌러 김치인사하는 것은
한 그루 나무가 산의 장엄을
통째 품어버렸다는 것
풍상을 이겨낸 용틀임일까
거북등 같은 껍데기에 근육질
푸른 시간이 화석으로 박혀있다
박토薄土 아닌
박돌薄乭에 뿌리내려
돌에 눌린 새 乙乙乙 울었네
지난여름 가뭄에 진저리쳤네
까짓 상처는 두렵지 않았다
여린 실핏줄로
거대한 바위를 뚫고 들어가
쐐기를 박듯 쪼개고 들어가
한 모금 흙과
돌의 즙으로 연명하는……
 
사는 것이 쩍쩍
저수지 마른 바닥 같은 날
올라가 볼 일이네, 도봉산에
 
 
- 시집『어느 수인에게 보내는 편지』(2015, 도서출판 b)
 
 
〈나, 이 시 이렇게 썼다〉


조삼현
 
 몇 해 전 저수지 바닥이 쩍쩍 갈라지는 여름 가뭄 뒤끝에 나는 도봉산 여성봉에 오른 적 있다. 그곳에서 여근바위를 보게 되었는데, 동행한 사람들은 모두 19금 한 마디씩을 던지고 하산하고, 나는 일행과 떨어져 종일 소나무 경전을 읽다 내려왔다. 
 
 /박토薄土아닌/ 박돌薄乭에 뿌리내려/....../한 모금 흙과/ 돌의 즙으로 연명하는/ 저 경이로운 생명력이라니! 나는 소나무를 보며 돌에 눌린 한 마리 새를 연상했다.  박돌薄乭에서 박薄 자는 척박할 박, 돌乭 자는 새 이름 돌 자인데, 돌 석石 자 아래 새 을乙 자가 깔려 있으니 乭자를 보며 돌에 눌린 한 마리 새를 연상하게 된 것이다.
 
 아침 불광역으로 가는 전철이 연착한 것은 전철 역 투신사고 때문이었다. 세상이 아무리 흉흉하고 힘들어도 저 소나무처럼 굳건히만 살아간다면 견디지 못할 고통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분들에게 /사는 것이 쩍쩍/ 저수지 마른 바닥 같은 날/ 도봉산 여성봉에 가서 소나무 경외전서를 읽어보시라고 권유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