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詩가 오는 시간
입력 2017.06.29. 03:10
이상협 KBS 아나운서·시인
문득이다. 시가 오는 시간은 반짝이고, 무책임하다. 밥을 먹거나 서류를 정리하거나 운전을 할 때도 갑작스레 온다. 한 줄 문장으로도, 뜬금없는 단어로도 온다. 하나의 감정이 도착하면 나는 그 쓸모를 궁리한다. 그것은 무슨 뜻일까 오래 되뇐다. 그것은 시 안에서 뼈가 되기도 하며, 스스로 녹아 태도로 남기도 한다.
단어가 단어를 불러오고 문장이 문장을 이끈다. 행이 갈라지는 곳에서는 절벽을 만나기도 한다. 절벽 너머를 오래 응시하면 기이한 풍경이 떠오르고, 풍경은 곧 길이 되어 나를 안내한다. 언어를 징검돌 삼아 천천히 나아간다.
시가 오는 시간은 막막하고 망연하다. 말을 모르는 아이에게 말로 타일러 주듯 느리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그 시간은 나를 내내 재촉하고 끝까지 추궁한다. 시를 쓰면서 가장 궁금했던 건 '사이'였다. 사이는 공간이면서 시간이다. 눈빛 섞이는 뜨거운 남자와 여자 사이, 돌아선 등과 등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알고 싶었다. 바람의 생활, 구름의 목적, 나무가 자라는 각도처럼 세상 모든 것을 '사이'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가 오는 그 시간에 나는 나와 백지 사이에서 라디오의 정확한 주파수를 찾는 사람처럼 애쓰며 진동한다. 힘겹게 자신을 통과한 문장들을 간신히 백지에 써내려 간다. 문득 내게 도착한 이 풍경은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느라 오늘도 나는 오래 시간을 쓴다.
국화 향 / 이상협
문장이 나를 읽었다
묵은 옷을 버리면서
나를 버렸다고 생각한 적 있다
당신 등을 안으면서
안긴다고 생각한 적 있다
나의 눈빛
밑줄 치려는
눈빛들, 심드렁히
그 문장은 나를 읽었다
그 여름 장례식장
죽은 건 그인데 내가 울 듯이
읽을 것처럼
-이상협,『사람은 모두 울고 난 얼굴』(민음사,2018)
이상협: 시인ㆍ아나운서
1974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미술교육학과 졸업
키 181cm
대학 재학 중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서 동상
2002년 KBS 아나운서
2010년 '에고 트립ego trip’이라는 음반을 발표
2012년 현대문학〈너머〉등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
시집 : 사람은 모두 울고 난 얼굴(2018년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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