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부리에 관한 기억
김경성
머루 덩굴에 긴 이야기를 쓰고 있던 저녁,
새들이 검은 실을 물어다가 하늘 이쪽저쪽 매듭을 짓고는
연못에 빠진 별들을 건져내고 있다
이윽고 초승달 하나 목에 걸치고 뒤뚱거리는
새의 날갯짓이 긴꼬리제비나비같다
몸보다 머리가 더 큰 어린 새의 붉은 몸에서 회색빛 깃털이 자라고 날개는 조금씩 바람의 결을 읽기 시작하면서
갸웃거리던 날개 끝에서 바람의 혹점이 생길 때
소리 이울기 연습을 했었다
새들이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라고, 날개만 있으면 높이 날아간다고 생각했던 것이 오독이었다는 것을
아는 데 한 달이 걸렸다
무엇이 목에 걸린 것처럼 꺼어억 꺽 거리며
종이를 물었다가 놓았다가
다음에는 나뭇가지를 물었다가 놓았다가
검었던 부리가 복숭아 꽃잎빛깔이 되었을 때 그때부터 씨앗 껍데기를 벗겨낼 수 있었다
내 몸의 배꼽처럼
검은부리가 언제나 몸의 중심이 되어서
세상의 조롱속을 오르내렸다
생각의 언저리를 물어다가 마음의 중심에 가져다놓는 일, 내가 당신을 알아가는 것만큼이나
더디고 더딘 일이었다
-<계간 미네르바> 201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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