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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丹野의 깃털펜/시집『내가붉었던것처럼당신도붉다』

검은 부리에 관한 기억

by 丹野 2019. 8. 13.

 

 



 

 


 

검은 부리에 관한 기억

김경성

 

 

머루 덩굴에 긴 이야기를 쓰고 있던 저녁,

새들이 검은 실을 물어다가 하늘 이쪽저쪽 매듭을 짓고는

연못에 빠진 별들을 건져내고 있다

이윽고 초승달 하나 목에 걸치고 뒤뚱거리는

새의 날갯짓이 긴꼬리제비나비같다

 

몸보다 머리가 더 큰 어린 새의 붉은 몸에서 회색빛 깃털이 자라고 날개는 조금씩 바람의 결을 읽기 시작하면서

갸웃거리던 날개 끝에서 바람의 혹점이 생길 때

소리 이울기 연습을 했었다

 

새들이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라고, 날개만 있으면 높이 날아간다고 생각했던 것이 오독이었다는 것을

아는 데 한 달이 걸렸다

무엇이 목에 걸린 것처럼 꺼어억 꺽 거리며

종이를 물었다가 놓았다가

다음에는 나뭇가지를 물었다가 놓았다가

검었던 부리가 복숭아 꽃잎빛깔이 되었을 때 그때부터 씨앗 껍데기를 벗겨낼 수 있었다

 

내 몸의 배꼽처럼

검은부리가 언제나 몸의 중심이 되어서

세상의 조롱속을 오르내렸다

 

생각의 언저리를 물어다가 마음의 중심에 가져다놓는 일, 내가 당신을 알아가는 것만큼이나

더디고 더딘 일이었다

 

 

-<계간 미네르바>  201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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