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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시인 조명]나호열 시인

by 丹野 2014. 3. 13.

 

 

 

 

 

 

[시인 조명] 나호열 시인

 

                          -『시와산문』2014년 봄호

 

 

 

 

 

 시인이 뽑은 대표시

 

 

 

나호열

 

 

 

북은 소리친다

속을 가득 비우고서

가슴을 친다

한 마디 말 밖에 배우지 않았다

한 마디 말로도 가슴이

벅차다

그 한 마디 말을 배우려고

북채를 드는 사람이 있다

북은 오직 그 사람에게

말을 건다

한 마디 말로

평생을 노래한다

 

 

 

 

 

당신에게 말걸기

 

나호열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화난 꽃도 없다

향기는 향기대로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다, 이쁜 곷

허리 굽히고

무릎도 꿇고

흙 속에 마음을 묻은

다, 이쁜 꽃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네게로 다가간다

당신은 참, 예쁜 꽃

 

 

 

매화

 

 

나호열


 

천지에 꽃이 가득하다

젊어서 보이지 않던 꽃들이

이제야 폭죽처럼 눈에 보인다

향기가 짙어야 꽃이고

자태가 고와야 꽃이었던

그 시절 지나고

꽃이 아니어도

꽃으로 보이는 이 조화는

바람 스치는 인연에도

눈물 고이는 세월이 흘러갔음인가

피는 꽃만 꽃인 줄 알았더니

지는 꽃도 꽃이었으니

두 손 공손히 받쳐들어

당신의 얼굴인 듯

혼자 마음 붉히는

천지에 꽃이 가득하다

 

 

 

 

눈물이 시킨 일

 

나호열

 

 

한 구절씩 읽어가는 경전은 어디에서 끝날까

경전이 끝날 때쯤이면 무엇을 얻을까

하루가 지나면 하루가 지워지고

꿈을 세우면 또 하루를 못 견디게

허물어 버리는,

그러나

저 산을 억 만 년 끄떡없이 세우는 힘

바다를 하염없이 살아 요동치게 하는 힘

경전은 완성이 아니라

생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푸르름처럼

언제나 내 머리맡에 놓여 있다

나는 다시 경전을 거꾸로 읽기 시작한다

사랑이 내게 시킨 일이다

 

 

 

 

 

촉도 蜀道

 

나호열

 

경비원 한 씨가 사직서를 내고 떠났다

십년 동안 변함없는 맛을 보여주던 낙지집 사장이

장사를 접고 떠났다

이십 년 넘게 건강을 살펴주던

창동피부비뇨기과 원장이 폐업하고 떠났다

 

내 눈길이 눈물에 가닿는 곳

내 손이 넝쿨손처럼 뻗다만 그곳부터

시작되는 촉도

 

손 때 묻은 지도책을 펼쳐놓고

낯 선 지명을 소리 내어 불러보는 이 적막한 날에

정신 놓은 할머니가 한걸음씩 밀고 가는 저 빈 유모차처럼

절벽을 미는 하루가

아득하고 어질한 하늘을 향해 내걸었던

밥줄이며 밧줄인 거미줄을 닮았다

 

꼬리를 자른다는 것이 퇴로를 끊어버린 촉도

거미에게 묻는다

 

 

 

 

 

 

 

 

 

 

시인의 최근 신작시

 

 

 

스카이 댄서

 

나호열

 

 

풍경은 서 있다 흔들흔들

벽을 뚫고 고개를 넣어도

풍경은 고무줄처럼 늘어날 뿐

쓰러지지도 모로 기울지도 않는다

나무가 뿌리로 날갯짓하며 하늘을 날아가는 듯

시한부 벽보의 웅크린 글씨로 응축되어 있는

출발선에 선 단거리 선수들의 가쁜 숨

등을 보이며 열 걸음 걸어가는 카우보이는

열 걸음을 걸은 후에도 몸을 돌리지 않는다

어디서 총알이 치명적인 사랑을 겨누었으나

탕! 풍경이 잠시 기우뚱하다가 오뚜기처럼 일어선다

풍경을 그린다는 것은 무모한 일

어쩐지 내세 같은, 무너진 폐허 같은

앞뒤가 없는 풍경을 무한히 뒤집어 보는 저 사내

행인들을 향해 쓰레기 줍듯

연신 허리를 굽히고 있다

세월이 하염없이 가엾다는 듯.

 

 

 

 

 

 

시월

 

나호열

 

 

시월이라는 사람에게 편지를 쓴다

한껏 마음을 내어주는 하늘 편지지에

꾹꾹 눌러 숨겨둔 글자들

흰 구름 우표를 붙여

바람에 실려 보낸다

 

시월이라는 사람이 답신을 보내왔다

살얼음 낀 하늘에

 

기러기 한 줄

 

 

 

 

 

슬픔도 오래 되면 울울해진다

 

 

나호열

 

 

견디지 못할 슬픔도 있고,

삭혀지지 않는 슬픔도 있지만

슬픔도 오래 되면  한 그루의 나무가 된다.

 

가지를 뻗는 슬픔

잎을 내는 슬픔

뿌리가 깊어지는 슬픔

 

이 모든 상형의 못난 한 그루의 나무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고

희망이 된다.

 

울진 소광리 못난 소나무

600년의 고독을 아직도 푸르게 뻗고 있다.

 

 

 

 

나의 멘티에게

 

나호열

 

너에게 가르쳐 줄 것은 없다만

이제 신 대신  CCTV를 믿는 것만큼

나돟 추문을 믿느ㅜㄴ다고 말해 줄 수는 있다

어느 날 밤의 은밀한 바람이

결국 욕정의 결말을 삐라처럼 뿌려놓은 뒤

별 볼일 없는 늙은이로 전락해 가는 걸 똑똑히 보아두어라

겉과 속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느냐먄

가시밭 길로 숨어들어 가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동백꽃 뚜욱뚝 모가지 떨어지듯 서늘해지는 뒷목을 치며

뭔가를 배웠다면 나는 고마워하리라

이래서는 안 되는데

저래서는 안 되는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마지막 교훈이니라

 

  

 

태장리 느티나무의 겨울

 

나호열

 

 

부석사 가는 길에 서 있다

 

저, 외톨이 나무

이름 부르면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 하였으나

가닿지 못할 곳을 꿈꾸는 자에게만 흐름을 허락하는

길의 어깨 너머로

온 몸을 휘덮는 초겨울 어둠을 손사래 치니

비로소 주어만 남은 생이 남았다

 

어두워서 춥고

추워서 더욱 어두운 마을 밖에서

칼바람을 남루로 얻어 쓰고

저, 외톨이 나무의 꿈은

꺾어져 돌아가는 길 끝까지 걸어가 보는 것

   

그러나 엄마가 짜준 털옷을 입고도 오돌거리는

버림 받은 새끼 고양이 수 만 마리를 가슴에 품었는지

몸만 가끔씩 틀어 움직일 뿐

 

천수관음 千手觀音!

 

 

 

 

 

 

 

 

 

 

 

* 나호열 시인의 체험적 시론

 

 

 

시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나호열

 

 

 광릉수목원에 갔었다. 겨울이 막 삭막한 도시에 불청객처럼 찾아온 어느 날 이었다. 각양각색의 나무들이 운집한 숲은 적막하였으나 그곳 또한 생명의 싸움터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메타세콰이어와 같은 활엽수들은 잎들을 떨구고 선정에 든 듯 하였으나 침엽수들을 여전히 바늘 같은 푸른 잎들을 내밀고 있었다. 나무들이, 숲들이 얼마나 치열한 생존 경쟁을 하는지 보려면 겨울이 되어야 한다는 숲 해설가의 설명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참나무에 자리를 빼앗긴 메타세콰이어는 한쪽으로만 가지를 뻗었고, 어린 엄나무는 온 몸에 가시를 박아 제 몸을 추스렸다. 피톤치트를 내뿜는 전나무 숲 아래에는 풀들이 자라지 않았으니 인간들의 건강에 그리 좋다는 피톤치트는 사실 그 나무들이 해충과 풀들의 접근을 회피하려는 방어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숲에도 생노병사가 있어 이제 혈기가 돋는 젊은 숲이 있는가 하면 세월 따라 늙어 쇠퇴해가는 숲도 있으니 저마다의 본능과 재주를 다하는 뭇 생명들에게 경의를 표할 수밖에!

 

  광릉수목원에는 나무와 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원숭이와 같은 잡식성 동물이 있는가 하면 고라니 같은 초식성 동물도 있었고,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 최상위 포식자 호랑이도 있었다. 그러나 내 눈과 강열하게 마주친 것은 늑대였다. 세간의 비아냥과는 상관없이 음흉하게 보이는 푸른 눈빛이 내게는 아름다운 보석과 같았다. 날렵하게 균형 잡힌 몸매와 우울이 배인 회색 털은 도도하기조차 하였다. 그러나 늑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른 습성을 가진 동물이다. 날카로운 이빨로 무장하였으나 비정해 보이지 않고, 호랑이처럼 이기적인 단독자로 살지 않는다. 언제나 가족애로 뭉쳐서 집단을 이룬다. 짝을 지으면 평생을 같이 살고 암늑대가 먼저 죽어도 숫컷은 자신의 반려를 잊지 않고 자신의 생을 마칠 때에는 암늑대가 숨을 거둔 곳에서 굶어죽기도 한다. 그래서인가!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고 노래하는 어느 가수가 새롭게 발표한 ‘늑대’ 라는 노래를 거듭 듣는다.

 

  우~우! 사람이 아름답다는 명제와 고독한 늑대의 아득한 거리야말로 내가 평생 동안 궁구했던 숙제였음을 나는 안다. 나무들 간의 치열한 자리다툼과 경쟁의 아우성은 들리지 않고, 동물과 곤충들의 먹이사슬에는 증오가 없는데 사람과 사이에 들끓는 아귀다툼과 온갖 협잡을 견디지 못해 숨어들어간 것이 ‘시’라고 하는 소도蘇塗이다. 아직도 내게 있어서의 인간은 꽃보다 아름답지 않으며 늑대의 가족애와 같은 관계의 건강성을 담보하지 못한 위험한 동물이다. 이런 생각이 인간적 성숙을 방해하고 스스로를 고독하게 한다는 사실을 아는 까닭에 나는 더욱 외롭다. 그러므로 나의 시 쓰기는 당연히 인간과 사회에 대한 환멸과 불신으로부터 벗어나서 따뜻하고 긍정적인 세계로 귀환하려는 것임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일찍이 오규원이 그의 시 「용산에서」 읊었듯이 나의 시에는 근사한 이야기도 없고 따라서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생 生의 증언 밖에 없다.

 

  나는 가끔 ‘용산’을 생각한다. 남루하게 떠나고, 남루하게 도착한 사람들이 유령처럼 떠돌던 역사와, 과거를 알 필요도 물을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 기계적 욕망에 몸을 섞는 붉은 골목길과 그 길을 지나쳐야만 도착할 수 있었던 강변의 우리 집을 떠올릴 때면 근사하지 않은 생을 뒤엎는 환상을 꿈꾸던 청춘의 시절을 떠올린다. 불현듯 펜을 잡고 밝고 아름다운 그래서 융단처럼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노래가 되는 시를 써보고 싶어진다. 시대가 변하고 삶의 방식이 바뀌었다고 해도 시는 여전히 노래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소통이 이 시대의 트랜드가 되어 있어도, 소통의 전제가 되는 유통 流通에 신경 쓰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시를 잘 써야 한다든가, 좋은 시로 세인의 주목을 받고 싶어 하는 그런 유통 말이다. 의식적으로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문단의 은둔자가 되고 주변인이 되었다. 그 대신 나는 무아 無我와 진아 眞我 사이를 헤매는 삶의 모순을 증언함으로서 편견과 잘못된 신념으로 얼룩진 사유를 합리적 사유로 인도하는 즐거움을 얻게 되었다.

 

  합리적 사유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합리적 사유를 요약한다면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시가 언어로 이루어진 구축물이고 시를 어루만지는 자를 시인이라고 할 때 그 인 人은 언어를 속이지 않고, 언어를 속이려는 욕망을 제어하고자하는 분투를 거듭하고 있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꾸밈이 없는 자신의 삶을 절차탁마하는 자가 시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꾸밈이 없는 자신의 삶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이 또 얼마나 지난至難한 일인가! 수치를 무릅쓰고 초라하고 비루한 자신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얼마나 몸서리치는 일인가!

 

  한 때 나는 시론이 없는 시인을 하찮게 생각한 적이 있다. 짧은 생을 살아가면서 이 거룩한 세계의 진면목을 바라보는 수단으로서의 시론은 마땅히 시인이 지녀야 할 덕목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반듯한 시론을 지니고 있지 못하면 시인이 아니라는 주장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싶다. 누구나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듯이, 인생에는 정답이 없듯이,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명제를 체득하는 길은 무수히 많음을 뒤늦게나마 알아차린 까닭이다.

 

  끝끝내 시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나호열 시인

 

약력

     1953년 충남 서천 출생

     198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눈물이 시킨 일』『타인의 슬픔』『당신에게 말걸기』외 10여권 

문화평론집

    『굴레와 해방』

수상

    시와시학 중견시인상

    녹색시인상

    한민족문학대상

    한국문협 서울시문학상

 

 

 

 
Johannes Brahms

Symphony No.4 in E minor, O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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