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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풍경 너머의 풍경

제58회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자 무용가 박명숙

by 丹野 2013. 9. 14.

 

“60년 춤을 춰왔지만 지금도 무대에 서면 떨린다”

[인터뷰] ‘제58회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자 무용가 박명숙

[전국] 서양화가 김환기, 시인 김춘수, 소설가 박완서, 영화감독 임권택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당대의 저명한 예술가이자 대한민국예술원의 회원이라는 것. 대한민국예술원은 예술 창작에 현저한 공적이 있는 예술가를 우대, 지원하기 위해 1954년 개원했다.

예술 진흥에 관한 정책 자문과 건의, 예술 창작 활동의 지원, 국내외 예술 교류 및 예술행사를 개최하고, 예술가들에게 매년 상을 주는 활동을 한다. ‘대한민국예술원상’은 1955년부터 매년 문학, 미술, 음악, 연극·영화·무용 4개 부문에서 탁월한 창작 활동으로 예술 발전에 공적이 있는 예술인에게 수여하는 예술 분야 최고 권위의 상이다.

이번 제58회 대한민국예술원상 연극·영화·무용 부문 수상자로 무용가 박명숙 씨가 선정됐다. 박명숙 댄스시어터 예술 감독이자 경희대학교 무용학부에 재직 중인 박명숙 교수와 만나 무용가로 살아온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죽기 전에 괜찮은 작품을 하나 남기고 싶은 소망이 있어요. 그래서 끊임없이 공연을 하는 것 같아요. 나이를 의식 못하고 계속 다음 공연을 생각해요. 주책이지요.(웃음)” 춤은 무용가 박명숙에게 숙명처럼 보였다. 60년 가까이 춤을 춰왔지만 지금도 무대에 서는 것이 제일 좋고 떨린다.

무용가 박명숙
‘제58회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자 무용가 박명숙(경희대 무용학부) 교수

 
네 살 때부터 춤을 췄다. 먹고 살 것도 없던 시절, 박명숙은 유치원에 갔다가 돌아오면 매일같이 국립국악원으로 등원했다. 가야금, 해금 같은 전통악기도 배우고, 한국무용도 배웠다. 당시 국립국악원은 음악과 소리, 그 시대 나름의 신무용과 전통 무용 등 모든 것을 다 배울 수 있는 곳이었다.

60년대 무용으로 최고의 학교이던 진명 중·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똑같은 동작을 수천 번씩 반복해야 하는 한국 무용과 발레에 염증을 느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새로운 춤을 본 뒤 ‘내가 할 일은 이거다!’라는 생각을 했다. 당시에 원하던 춤을 출 수 있는 곳은 한 곳 뿐이었다. 이화여자대학교에 진학했고 본격적으로 현대 무용을 시작했다.

“아이 낳기 전날까지도 춤을 췄어요. 출산하고 한 달도 안 돼 미국 순회공연도 떠났고요. 10개가 넘는 도시를 투어 했지요. 너무 힘들어서 후회하기도 했지만 ‘무용이 내 팔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렸을 때, 제가 열이 펄펄 나고 아프면 어머니께서 간호사를 불러 제게 주사를 꼽게 하고는 옆에 앉아 보라고 하셨어요. 저 대신 춤을 배우셨지요. 집에 와서 제가 좀 나아지면 어머니가 다시 제게 가르쳐주셨어요.”

한때는 너무 힘들어서 결혼하면 무용을 관둬야지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수 없이 무대에 올라 춤을 췄고 작품을 만들었다. 공연을 하지 않으면 ‘왜 사는지 모르니까’ 하게 된다고 했다. 비슷한 나이의 여자들처럼 편안히 여행을 해본 적도, 쇼핑을 다닌 적도, 사우나에서 시간을 보내본 적도 없다. 밤을 새고 해 뜰 때까지 일하는 게 편하다고 말하며 웃었다. 
 
미술 전시장에서 신순남 화백의 그림을 보자마자 춤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러시아에 이민 간 한국인의 수난 역사를 20년 가까이 걸려 완성한 작품이었다. 그림은 ‘유랑’이라는 현대무용 작품으로 탄생했다. 문둥병 환자에게 매일 점심을 대접하고 딸의 성공을 위해 평생을 희생하신 어머니의 일생을 남기고 싶었다. 그녀의 바람은 본인이 가장 아끼는 ‘에미’라는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일본에서도 성공했고, 북경 공연에서는 기립박수도 받았다. ‘윤무’라는 작품은 장기공연이 쉽지 않은 무용 분야에서 2주 연속 공연이라는 기록을 세웠고 상도 받았다. 누구에게나 선뜻 도움주기를 좋아하는 따뜻한 성격 덕에 작가, 화가 같은 예술가들과의 교류도 폭넓다. 그들로부터 받은 자극과 안주하지 않으려고 기울이는 부단한 노력이 고스란히 그녀의 작품에 투영돼 나타난다.

무용가로 사는 것은 개인적인 어려움 외에도 사회적인 인식과 맞서 싸우는 일의 연속이었다. 역사적으로 춤은 천시돼 왔다. 기방에서 시작된 것이란 편견 때문이다. 당시 무용가들은 결혼하기도 힘들었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지금도 그런 인식이 남아있다. 정부에서도 그런 인식을 뛰어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국가 행사에 무용이 빠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엑스포, 아시안게임 같은 중요한 국가적인 행사가 있을 때마다 비가 쏟아져도 미끄러져도 무용가들이 공연을 하지 않은 적이 없다.

에미
‘에미’는 헌신적으로 자신을 키워낸 어머니의 이야기를 담았다.

 
“열심히 희생을 해왔는데도 거기에 대한 보답이 없어요. 교과 과정에 무용을 넣어달라는 요구가 아직까지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복지 문제에 대한 해결도 안 돼 있어요. 중요한 분이 돌아가셔도 무용가로서 대우를 해주는 것도 없어요. 무용가는 그냥 무직자예요. 프랑스나 선진국처럼 예술가로 대접해주는 분위기가 되려면 아직 멀었지요.”

‘문화융성’이라는 기조는 좀 더 빨리 시작됐어야 했다고 답했다. 한 정권 내에서 당장 실효를 거둘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호흡을 길게 잡고, 정권이 바뀌더라도 동일한 의식과 공감대를 갖고 이 운동을 추진해 가겠다는 국가적인 의지가 필요하다고도 덧붙였다.

“어른들은 그러시지요. ‘살기도 힘든데 무슨 예술이냐’. 사실은 특정한 예술가 몇몇 분들이 문화대국을 만드는 거잖아요. 그것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대국이 되지요. 예술가들이 남긴 작품은 그 나라의 국력이 됐고 국위가 됐어요. 예술은 주변에서 내가 볼 수 없었던 것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놀라운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견인 역할을 하지요. 이것이 예술입니다. 다이아몬드이고 원유이지요. 한국의 국격을 높이는 문화적 자산이 되는 거예요. 다행히 이제는 조금씩 아시는 거 같아요. 생각이 달라지고 있어요. 그래도 무용은 가장 어려운 형편이예요.”

 

국내는 물론 일본과 중국 무용계 평단의 주목을받았던 작품 <에미>
국내는 물론 일본과 중국 무용계 평단의 주목을 받았던 작품 ‘에미’

좋은 사회가 좋은 예술을 육성시키며, 양질의 예술과 사회적 문화·복지 수준의 향상은 긴밀한 관계이다. 다수가 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비효율성의 증대가 아니라 사회적 안전망을 확보하는 효과적인 투자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박명숙 교수는 초·중·고등학교에서 이뤄지는 예술 교육의 적극적인 지원이 청소년 문제와 사회 범죄율을 낮추는 데 매우 적절한 투자라고 강조했다.

풍족한 집안 덕에 어려움 없이 성장했다. 유학도 갔다 오고 박사 학위도 취득하며 원없이 공부했다.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엘리트 코스만 밟아와 어려움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 때문에 숱한 역경도 겪었다.
 
“공연만 몇 번 안했어도 강남에 빌딩 몇 채가 생겼을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안하면 제자도 키울 수 없고 뭔가 남길 수도 없죠. 해마다 지원을 받기는 하지만 전체 예산의 극히 일부분이예요. 나머지는 능력껏 하라는 거죠.“ 후원을 받게 되면 그 이후에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차라리 집을 담보로 잡혀서 공연을 하는 게 낫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 공연예술계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30년 전부터 연구해오던 것이 지금 빛을 보고 있다.

박명숙 교수는 공연을 위한 모든 것을 자체 제작한다. 한 사람이 세 가지 이상의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을 시켰다. 무용가 주변의 스태프, 기획, 음악, 조명, 분장, 작가들에게 나가야 하는 돈이 새나가지 않도록 팀 안에 스태프를 만들었다. 한국공연예술센터와 업무협약(MOU)을 맺고 제자들을 인턴 사원으로 일하게 하기도 했다. 학생들은 이를 통해 학점도 받고 일하던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 무용가 말고도 여러 분야의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그 결과 제자들은 무용학 박사, 예술경영학 박사, 안무가, 연출가, 평론가, 교사, 전문기자 등 각자의 자리에서 큰 몫을 하고 있다.

 

윤무
한국 최초 무용 장기 공연으로 ‘소극장 르네상스’를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은 작품 ‘윤무 A Circle Dance’
조명, 분장, 의상, 기획 등 공연에 필요한 모든 것은 팀 내에서 해결하고 있다.
30년 전부터 공연예술계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기울여왔던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다. 조명, 분장, 의상, 기획 등 공연을 위한 모든 것을 자체 제작한다.

 
무용으로 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늘 연구하고 개발한다. “사회·복지 분야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어요. ‘힐링 댄스’라는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 중인데, 환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의사와 환자 가족까지 함께 힐링 할 수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학교 내에 암센터가 개원하면 도입할 예정이예요. 노인복지를 위해 건강해지는 프로그램도 만들려고 해요. 약보다는 몸을 움직이는 것으로 건강을 되찾게 하는 것이지요. 이런 교육 프로그램들은 수익도 올리고 예술도 살릴 수 있어요.”

병원은 물론, 관객이 10명 뿐인 섬으로 찾아가 ‘맞춤형 공연’도 한다. 공연 예술가로서의 활동과 함께 무용단을 이끄는 예술감독과 교육자로서의 삶이 후배들에게 영향을 끼칠 거라는 생각에 더 또박또박 걸으려 한다. 힘이 되고 싶다고 했다.

“작품 활동을 하면서는 만들어가는 과정이 상당히 중요해요. 너무 안이하게 자기가 하는 것에 만족해선 안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할 것이 정말 많아요. 사회학부터 인문학 전반, 과학 등등 다른 학문에 대한 다양한 관심을 갖고 깊이 있게 공부해야 해요. 정치, 경제, 사회,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에게 힘든 일이 뭔지, 동물 학대에 대한 생각까지 모든 걸 꿰뚫고 있어야 이야기할 수 있어요. 무용가는 팔다리만 움직이는 춤꾼이 아니예요. 작가이지요. 몸으로 공간을 디자인하면서 작품을 통해 외쳐야 해요. 말은 유창히 못하고 글도 작가처럼 기막히게 못쓰지만 무대에서 사람들과 같이 울고 웃고 호소하려면 틈틈이 공부하고 알아야 해요.”

33년간 대학에 재직하고 이제는 마무리할 시기이지만 제자들과 후배들에 대한 애정은 여전히 의욕적으로 느껴졌다. 수상 소감을 물으니 ‘꿈도 못 꾸는 상’이었다고, 운이 좋았다며 겸손히 말했다. 1세대 한국 현대무용 최고 무용수, 안무가, 예술감독, 예술행정가, 융복합 교육의 선도적인 교육자인 무용가 박명숙은 대한민국 무용 역사에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정작 스스로는 ‘보잘 것 없지만 전체가 잘 굴러갈 수 있도록 돕는 작은 톱니바퀴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예술원상 시상식은 9월 5일(목) 대한민국예술원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정책기자 이정훈 (프리랜서) hunlee8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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