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방문은 여행 계획에 없었다. 아마 그곳을 옵션으로 넣기에는 여행사로서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가이드가 조심스럽게 아우슈비츠 수용소 방문을 이야기했을 때 4명의 가족이 세 팀, 친구 사이가 한 팀, 그리고 다섯 팀의 부부가 모인 스물네 명의 일행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나 역시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소금 광산과 멀지 않은 곳이라는 설명, 또 우리가 다시 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 때문에 들리자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낯을 익힌 일행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의견이 나왔는데 의외로 찬성 쪽이 많았다. 그렇게 결정된 방문이었다.
지난 8월 20일(화), 슬로바키아의 타트라라는 곳에서 일박하고 출발했다. 아침까지 맑았던 하늘은 크라코프 근교의 비엘리치키 소금 광산에 이를 무렵에는 흐려지고 간간히 빗방울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700년의 역사를 가진 소금 광산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폴란드 정부가 관리한다고 들었다. 수천km의 지하 갱도가 있는데 그중의 2%만 개발하여 개방중이라는데 관람하는 시간은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극한적인 한계에서 일했을 광부들이 순전히 소금 덩어리로 샹들리에를 만들고, 기도하는 공간으로 성당을 만들었다는 현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광부들의 집념과 땀을 보면서 그곳까지 달려간 노력과 비용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최초의 비 이탈이아계 교황인 폴란드 출신의 요한 바오로 2세가 다녀가면서 지어주었다는 무료 화장실도 인상적이었다. 유료 화장실에서 곤혹스러웠을 교황님의 처지가 상상되어 웃음도 나왔다.
과거 폴란드의 수도였다는 크라코프는 대학생이 인구의 15%를 차지하는 교육도시면서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도시였다. 수도였던 바르샤바가 독일군의 폭격에 폐허가 된 데 비해 크라코프는 수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온전하게 지탱할 수 있었다고 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그 곳의 성모마리아 광장 주변을 둘러봤다. 우리가 멀리 바벨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크라코프를 다급하게 떠났던 까닭은 비가 내리고 날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여행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비를 맞았던 날. 철조망이 그대로 남은 아우슈비츠 적벽돌 건물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 카메라를 함부로 들이대기도 주저스러웠다. 건물 안을 둘러보는 내내 나는 말을 잊었다.
사진 찍기를 거의 포기하고 안내를 받아 구경하는 것으로 마치고 말았다. 수십 명을 가두었다는 작은 방, 가스실, 가스를 담았던 통, 시체 소각실, 도망자들을 잡아 목을 매달았다는 식당 앞의 교수대, 장교들 사교장이었다는 시체 소각실 옆의 건물…. 그리고 죽어간 자들이 남긴 신발, 안경, 의족, 머리카락과 머리카락으로 짠 천…. 인간이 금수보다 잔인해질 수 있다는 증거들을 보면서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에게도 국가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추상적이고 맹목적인 애국심을 고취하고 또 상대방을 향한 적대감을 조장하면서 완장을 채워주면 얼마든지 광기를 드러낼 수 있음은 어느 정도 역사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과거의 사실만이 아니라 현재도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일본 극우파의 망동이나 중동 지역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자살 폭탄 테러도 그런 광기와 상통하는 것이라고 본다.
또 현재 우리 땅에서 볼 수 있는 종북 몰이도 그런 광기의 표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종북 혹은 친북의 무리를 처단하는 것이 애국임을 강조하고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고 선동하면서 태극 마크가 달린 모자 하나 씌워주니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날뛰는 무리들의 행동도 일종의 집단 광기의 표현 아니겠는가.
철학적이고 이성적인 학자일수록 생명의 위협에 더 쉽게 굴종하고 권력에 비굴해지는 모습을 개인적으로도 많이 지켜보았다. 유신독재를 주도하거나 협력했던 학자들, 평화의 댐이 '북한의 수공'이라고 언론에서 떠들었던 학자들, 가깝게은 4대강 사업이 강을 살리는 사업이라고 강변했던 학자들….
그뿐인가. 시대가 바뀌었고 또 사람이 바뀌었다면서 양심을 버리고 권력의 그늘로 좇아간 언론인, 문화예술인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물론 개인의 밥줄과 가족의 안위를 담보로 굴종을 강요하는 권력 앞에서 개인이 저항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또 개인이 법을 앞세운 권력의 회유와 강압을 거부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다가올 고난과 역경을 예상하면서 당장 가진 것을 포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일신의 영달을 위해 양심을 팔아 부정한 권력에 부역을 자진하는 것은 말아야 했다. 부정할 권력에 저항할 용기도 없고 형편도 못 된다면 최소한 침묵이라도 택해야 했다.
특히 사회의 지도층이라는 정치인, 언론인, 학자, 법조인, 기업인 등의 언행은 무거워야 했다. 지도층의 인사들이 자진하여 권력에 복종하는 모습은 결국 집단 광기를 부추기고 정당화시켜준다는 점에서 더 큰 악이라 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 비극은 그런 집단 광기에 편승한 정치인은 물론 지식인, 언론인 등이 히틀러의 공범자가 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아우슈비츠는 집단 광기가 자행한 역사의 비극을 간직한 역사적인 공간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 독살된 사람들의 정확한 수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해설자도 100만 이상일 것이라고만 했다. 유대인뿐 아니라 나치에 저항한 폴란드 국민과 집시 등도 한꺼번에 죽었다고 했다.
일 끝나고 가스실로 가면서도 샤워장 가는 길로 알고 갔다가 죽었던 사람들, 일하다가 쓰러져 죽은 사람들,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되었다가 죽었던 사람들, 생체실험이 되었던 어린 쌍둥이들 …. 아우슈비츠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아우슈비츠보다 20배나 큰 규모의 수용소가 있었는데 독일군이 후퇴하면서 거의 파괴하고 불태워 버렸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곳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을까?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죽어간 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릿해진다.
죽은 뒤에 용서를 구하고 속죄한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용서를 구하고 속죄하는 것은 똑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최소한 양심의 표현이고 살아있는 사람들의 도리일 것이다. 독일 정부는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던 나치의 행위를 반성하면서 죽은 자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속죄하는 모습을 보였다. 금년 8월에도 독일의 수상은 헌화와 묵념을 했다.
36년간 한국을 지배하면서 온갖 살상과 비인간적인 만행을 저지른 일본, 불과 며칠 만에 난징에서 20만 중국인들을 죽였던 일본, 2차 대전시에는 동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공하여 죄없는 국민을 살상했던 일본, 이시이(731)부대를 만들어 인간 마루타를 생체 실험의 도구로 썼던 악랄한 만행을 저질렀던 일본, 각국의 여성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아 죽음과 같은 상처를 남긴 일본은 지금 독일과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세계는 상반된 두 나라의 태도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돌아 본 충격은 아직도 크다. 아마 내 인생에 중요한 경험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좀 더 시간이 지난 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관한 기억을 살려 일본의 태도를 아울러 조명해볼 작정이다.
"ARBEIT MACHT FREI (일하면 자유로워진다)"
수용소 정문 위 조형물에 남은 문구다. 누가 남긴 말인지…. 그 글을 읽으며 들어가서 끝내 죽음으로써 자유를 얻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오싹해진다.
그런데 가이드가 조심스럽게 아우슈비츠 수용소 방문을 이야기했을 때 4명의 가족이 세 팀, 친구 사이가 한 팀, 그리고 다섯 팀의 부부가 모인 스물네 명의 일행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나 역시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소금 광산과 멀지 않은 곳이라는 설명, 또 우리가 다시 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 때문에 들리자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낯을 익힌 일행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의견이 나왔는데 의외로 찬성 쪽이 많았다. 그렇게 결정된 방문이었다.
지난 8월 20일(화), 슬로바키아의 타트라라는 곳에서 일박하고 출발했다. 아침까지 맑았던 하늘은 크라코프 근교의 비엘리치키 소금 광산에 이를 무렵에는 흐려지고 간간히 빗방울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700년의 역사를 가진 소금 광산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폴란드 정부가 관리한다고 들었다. 수천km의 지하 갱도가 있는데 그중의 2%만 개발하여 개방중이라는데 관람하는 시간은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극한적인 한계에서 일했을 광부들이 순전히 소금 덩어리로 샹들리에를 만들고, 기도하는 공간으로 성당을 만들었다는 현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광부들의 집념과 땀을 보면서 그곳까지 달려간 노력과 비용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최초의 비 이탈이아계 교황인 폴란드 출신의 요한 바오로 2세가 다녀가면서 지어주었다는 무료 화장실도 인상적이었다. 유료 화장실에서 곤혹스러웠을 교황님의 처지가 상상되어 웃음도 나왔다.
▲ 소금광산 폴란드 정부가 관리하는 세계 문화유산. 7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 |
ⓒ 홍광석 |
▲ 최후의 만찬 소금 광산 소금의 벽에 조각한 최후의 만찬. | |
ⓒ 홍광석 |
▲ 소금광산의 연회장 지하 동굴에 지상의 시설 못지 않은 연회장도 있었다. | |
ⓒ 홍광석 |
과거 폴란드의 수도였다는 크라코프는 대학생이 인구의 15%를 차지하는 교육도시면서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도시였다. 수도였던 바르샤바가 독일군의 폭격에 폐허가 된 데 비해 크라코프는 수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온전하게 지탱할 수 있었다고 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그 곳의 성모마리아 광장 주변을 둘러봤다. 우리가 멀리 바벨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크라코프를 다급하게 떠났던 까닭은 비가 내리고 날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여행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비를 맞았던 날. 철조망이 그대로 남은 아우슈비츠 적벽돌 건물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 카메라를 함부로 들이대기도 주저스러웠다. 건물 안을 둘러보는 내내 나는 말을 잊었다.
사진 찍기를 거의 포기하고 안내를 받아 구경하는 것으로 마치고 말았다. 수십 명을 가두었다는 작은 방, 가스실, 가스를 담았던 통, 시체 소각실, 도망자들을 잡아 목을 매달았다는 식당 앞의 교수대, 장교들 사교장이었다는 시체 소각실 옆의 건물…. 그리고 죽어간 자들이 남긴 신발, 안경, 의족, 머리카락과 머리카락으로 짠 천…. 인간이 금수보다 잔인해질 수 있다는 증거들을 보면서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 아우슈비츠 정문 일하면 자유로워진다는 문구가 걸린 정문에서 유대인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곳을 가장 많이 찾는 이들은 유대인이고 그 다음은 독일인들이라고 했다. 일본인들은 거의 오지 않는다고 들었다. | |
ⓒ 홍광석 |
▲ 독가스를 담았던 통 '사이클론 비'라는 독가스를 담았던 통. 통 하나면 몇 천명을 죽일 수 있었다고 했다. 샤워장에서 물이 나오기를 기다리다 독가스를 마시고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은 고통이다. | |
ⓒ 홍광석 |
▲ 희생자들이 남긴 신발 나치는 희생자들의 신발을 재활용하였다. 미처 처리하지 못한 주인 잃은 신발들이 서늘하게 했다. | |
ⓒ 홍광석 |
평범한 사람에게도 국가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추상적이고 맹목적인 애국심을 고취하고 또 상대방을 향한 적대감을 조장하면서 완장을 채워주면 얼마든지 광기를 드러낼 수 있음은 어느 정도 역사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과거의 사실만이 아니라 현재도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일본 극우파의 망동이나 중동 지역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자살 폭탄 테러도 그런 광기와 상통하는 것이라고 본다.
또 현재 우리 땅에서 볼 수 있는 종북 몰이도 그런 광기의 표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종북 혹은 친북의 무리를 처단하는 것이 애국임을 강조하고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고 선동하면서 태극 마크가 달린 모자 하나 씌워주니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날뛰는 무리들의 행동도 일종의 집단 광기의 표현 아니겠는가.
철학적이고 이성적인 학자일수록 생명의 위협에 더 쉽게 굴종하고 권력에 비굴해지는 모습을 개인적으로도 많이 지켜보았다. 유신독재를 주도하거나 협력했던 학자들, 평화의 댐이 '북한의 수공'이라고 언론에서 떠들었던 학자들, 가깝게은 4대강 사업이 강을 살리는 사업이라고 강변했던 학자들….
그뿐인가. 시대가 바뀌었고 또 사람이 바뀌었다면서 양심을 버리고 권력의 그늘로 좇아간 언론인, 문화예술인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물론 개인의 밥줄과 가족의 안위를 담보로 굴종을 강요하는 권력 앞에서 개인이 저항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또 개인이 법을 앞세운 권력의 회유와 강압을 거부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다가올 고난과 역경을 예상하면서 당장 가진 것을 포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일신의 영달을 위해 양심을 팔아 부정한 권력에 부역을 자진하는 것은 말아야 했다. 부정할 권력에 저항할 용기도 없고 형편도 못 된다면 최소한 침묵이라도 택해야 했다.
특히 사회의 지도층이라는 정치인, 언론인, 학자, 법조인, 기업인 등의 언행은 무거워야 했다. 지도층의 인사들이 자진하여 권력에 복종하는 모습은 결국 집단 광기를 부추기고 정당화시켜준다는 점에서 더 큰 악이라 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 비극은 그런 집단 광기에 편승한 정치인은 물론 지식인, 언론인 등이 히틀러의 공범자가 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아우슈비츠는 집단 광기가 자행한 역사의 비극을 간직한 역사적인 공간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 독살된 사람들의 정확한 수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해설자도 100만 이상일 것이라고만 했다. 유대인뿐 아니라 나치에 저항한 폴란드 국민과 집시 등도 한꺼번에 죽었다고 했다.
일 끝나고 가스실로 가면서도 샤워장 가는 길로 알고 갔다가 죽었던 사람들, 일하다가 쓰러져 죽은 사람들,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되었다가 죽었던 사람들, 생체실험이 되었던 어린 쌍둥이들 …. 아우슈비츠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아우슈비츠보다 20배나 큰 규모의 수용소가 있었는데 독일군이 후퇴하면서 거의 파괴하고 불태워 버렸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곳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을까?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죽어간 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릿해진다.
죽은 뒤에 용서를 구하고 속죄한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용서를 구하고 속죄하는 것은 똑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최소한 양심의 표현이고 살아있는 사람들의 도리일 것이다. 독일 정부는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던 나치의 행위를 반성하면서 죽은 자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속죄하는 모습을 보였다. 금년 8월에도 독일의 수상은 헌화와 묵념을 했다.
36년간 한국을 지배하면서 온갖 살상과 비인간적인 만행을 저지른 일본, 불과 며칠 만에 난징에서 20만 중국인들을 죽였던 일본, 2차 대전시에는 동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공하여 죄없는 국민을 살상했던 일본, 이시이(731)부대를 만들어 인간 마루타를 생체 실험의 도구로 썼던 악랄한 만행을 저질렀던 일본, 각국의 여성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아 죽음과 같은 상처를 남긴 일본은 지금 독일과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세계는 상반된 두 나라의 태도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돌아 본 충격은 아직도 크다. 아마 내 인생에 중요한 경험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좀 더 시간이 지난 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관한 기억을 살려 일본의 태도를 아울러 조명해볼 작정이다.
"ARBEIT MACHT FREI (일하면 자유로워진다)"
수용소 정문 위 조형물에 남은 문구다. 누가 남긴 말인지…. 그 글을 읽으며 들어가서 끝내 죽음으로써 자유를 얻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오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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