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것들에 대하여
황정산
김경성의 시는 한 마디로 속도에 대한 저항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속도가 지배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유행과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상품, 이런 변하는 세상에서 오래된 것들은 낡은 것이 되고 사라지고 무시되어야 할 것이 되고 만다. 오죽 하면 “변해야 산다.”라는 말까지 나오겠는가? 하지만 잠시 뒤로 물러서 누구를 위한 변화를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김경성의 시는 바로 이런 질문을 던져준다.
백 년이 넘는 시간이 폭설에 무너졌다 생살이 찢기어지고 뼈마디가 툭툭 부러졌다
중심을 잡아주는 뿌리는 지층 속의 기운을 받아들였던 곳
우지끈 부러질 때, 울음의 파문은 바깥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거북이 등 같은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다
해마다 적어놓은 말들이 시간의 경계에 걸려서 땅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한 생애 동안 떠받치고 있던 하늘을 내려놓고 묵언수행 중이다
머릿속에서 웅웅 거리는 소리에 휘청거린다 내몸이 균형을 잡지 못한 지 오래 되었다
사는 동안 내 안에 어떤 울음이 자라고 있어서
마음 바깥으로 넘어서지 못하고 날마다 출렁이기만 하는가
상처에 고여있는 나무의 울음이 출렁이고
내안에서 자라는 울음의 나무는 숲이 되어서
심하게 흔들린다
- 「울음의 바깥」 본문
시인은 태풍에 부러진 나무 가지를 보고 아픔을 느끼고 있다. 백년이 넘은 나무가 한 순간의 태풍에 무너졌다는 것은 급격한 변화의 하나다. 세월에 세상의 모든 것이 바뀌듯이 오래된 나무가 부러지고 무너지고 때로 고사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변화의 한 과정일 뿐이다. 그런데 시인은 왜 이런 변화에 이토록 “내 안에서 자라는 울음”이라고 할 정도로 슬퍼하고 있을까? 그것은 이 변화가 주체를 상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심하게 흔들린다”라고 표현했듯이 나무는 뿌리로 중심을 잡고 큰 가지로 하늘을 떠받드는 나무의 본성은 점차 사라져 갈 운명에 처하리라는 것을 시인은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서고의 열쇠를 잃어버렸다
바다에 빠트린 열쇠를 찾으려면 아침을 기다려야 한다
초승달이 바닷물에 옅은 빛을 내려놓을 때 바다는 초승달 빛만큼의 길을 물 위에 그려놓았다
새벽안개가 바다 안쪽까지 감싸 안은 팔을 풀어놓자 거짓말처럼 서고의 문이 열렸다 누군가 읽다가 접어놓고 간 책을 펼치니 흠뻑 젖어있다
별들이 사산한 불가사리가 책꽂이 아래에 떨어져 있다 무엇을 움켜쥐고 있었는지 불가사리의 다섯 손가락이 아직도 구부러져 있다
끝이 아니라고 잠시 뒤돌아 나가는 썰물의 끝자락을 움켜쥐었지만 나는 끝내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습한 서고에 앉아서 읽지 못하는 상형문자를 손가락으로 따라 그렸다
툭 하고 어깨를 치고 가는 바람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주저앉아
한 생애를 다 보낼 것만 같았던 봄날이었다
- 「오래된 서고」 부분
시인은 바다를 오래된 서고로 비유하고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많은 것들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순환과 그 속에서 수 억 년을 지내며 만들어진 온갖 자연물들이 만들어 놓은 흔적들은 그 어떤 책보다도 풍부한 정보와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서고라는 시인의 비유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시인은 그 서고가 오래 되었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는 이 오래된 것들을 잊고 지내고 있기 때문에 시인은 그것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정보에 목말라 한다. 오래된 것들은 이미 시효를 상실했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무엇인가가 우리를 좀 더 발전시켜 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지러울 정도로 속도를 추구한다. 하지만 시인은 오래된 바다에서 그곳의 오래된 언어를 찾고자 한다. 거기에 우리가 보지 못한 진실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시인 역시 그 오래된 언어 속에 완전히 빠져 들지 못한다. “툭 하고 어깨를 치고 가는 바람” 즉 현실의 저항이 있기 때문이다.
-『미네르바』2013년 가을호, 신진조명 / 시인은 무엇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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