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시인광장 선정 2014년 올해의 좋은 시 1000[317]
오래된 서고
ㅡ 격포 바다
김경성
1
서고의 열쇠를 잃어버렸다
바다에 빠트린 열쇠를 찾으려면 아침을 기다려야 한다
초승달이 바닷물에 옅은 빛을 내려놓을 때 바다는 초승달 빛만큼의 길을 물 위에 그려놓았다
새벽안개가 바다 안쪽까지 감싸 안은 팔을 풀어놓자 거짓말처럼 서고의 문이 열렸다 누군가 읽다가 접어놓고 간 책을 펼치니 흠뻑 젖어있다
별들이 사산한 불가사리가 책꽂이 아래에 떨어져 있다 무엇을 움켜쥐고 있었는지 불가사리의 다섯 손가락이 아직도 구부러져 있다
끝이 아니라고 잠시 뒤돌아 나가는 썰물의 끝자락을 움켜쥐었지만 나는 끝내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습한 서고에 앉아서 읽지 못하는 상형문자를 손가락으로 따라 그렸다
툭 하고 어깨를 치고 가는 바람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주저앉아
한 생애를 다 보낼 것만 같았던 봄날이었다
2
길을 접어서 몸속에 말아 넣은 소라는 모랫바닥에 엎어진 채 구겨진 길을 풀어서 바다로 밀어내고 있었다
괭이갈매기들은 동백꽃 빛 무늬가 있는 부리를 연신 모래 속에 묻었다가 꺼내더니 바다 쪽으로 날아갔다
백사장에 흩어져있는 새들의 말과 책 속에서 흘러나온
말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졌다
저릿한 말들이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오! 온몸 가득히 느껴지는 오르가즘
화라락 불붙듯이 한꺼번에 서고를 덮치는 해일
속수무책이다
계간 『미네르바』 2013년 가을호 발표
김경성 시인
전북 고창에서 출생. 2011년 《미네르바》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와온』(문학의전당, 2010)이 있음.
출처 - 웹진시인광장 http://seeinkwangj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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