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에 나를 맞추지 않았다 나한테 맞는 세상을 찾아갔다
[중앙일보] 입력 2013.05.23 00:17 / 수정 2013.05.23 00:17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피사의 사탑을 똑바로 보는 두 가지 방법. 하나. 기울어진 탑을 일으켜 세운다. 둘. 탑에 맞춰 내 몸을 기울인다. 그런데 몸을 기울이긴 귀찮고 탑을 일으켜 세울 힘도 없다? 그렇다면 할 수 없다. 이왕 비뚤어진 탑, 그냥 그대로 보는 수밖에.
강남식(67) 사장의 선택은 달랐다. 그는 주어진 선택지, 그 어느 것도 집어 들지 않았다. 아예 피사를 벗어났다. 탑이 똑바로 서 있는 다른 세상을 찾아갔다. 그가 봉제업에 발을 들인 건 1973년, 올해로 딱 40년이다. “그땐 봉제회사가 잘나갔어요. 대학 졸업생 선호 1순위가 신문사·원양회사, 그 다음이 봉제회사였어요.” 동방산업 무역부에 취직한 것도 그래서다. 배울 만큼 배웠다 싶어 83년 창업을 했다. 능림상사. 아내가 당시 최고라는 역술가 백운학에게 이름을 받아온 회사다. 봉제와 무역을 같이 했다.
좋은 시절은 늘 그렇듯 짧았다. 몇 년 못 가 봉제는 사양산업이 됐다. 89년엔 은행 돈줄도 끊겼다. 산업합리화를 내세운 정부가 ‘섬유·봉제 산업엔 추가대출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친한 동업자들이 “봉제는 끝났다”며 전자회사를 차렸지만 다 망했다. 능림상사도 93년 결국 부도를 냈다. 다른 일은 싫었다. 할 줄 아는 것, 잘하는 것 놔두고 왜 다른 걸 해야 하나. 해외로 갔다. 방글라데시·태국·말레이시아로 옮겨 다녔다. “봉제는 꼭 필요한 산업입니다. 어디선가 누군가는 옷을 만들어야 합니다. 봉제가 경쟁력이 없어진 건 우리나라 얘기일 뿐입니다.”
97년 그는 캄보디아 시골마을 토울 코크를 최종 정착지로 선택했다. “그해 7월, 내란이 일어나 훈센이 정권을 잡았어요. 가난한 나라, 강력한 독재자. 봉제업엔 최고의 조건이 갖춰진 거죠.” 국민 불만 잠재우려면 배를 곯게 해선 안 된다. 그러려면 개방은 필수. 예상대로 훈센은 외국 투자자 유치에 열을 올렸다. 법인세는 기본 3년, 최대 9년까지 면세다. 재수출할 땐 모든 원부자재가 면세다. 소득세도 최고 20%로 아주 낮다. 옷 한 벌 생산원가는 평균 70센트, 한 해 1200만 달러어치를 만든다. 주로 제이시페니와 월마트에 납품한다. 이달 들어 최저임금이 월 81달러로 올랐지만 다른 곳으로 옮길 생각은 없다.
“요즘 봉제 무역은 속도전쟁입니다. 임금만 싸선 안 돼요. 주문에서 납품까지 2~3개월 안에 끝내야 합니다. 물류와 인력이 받쳐줘야죠. 미얀마가 뜬다지만 멀었어요. 여기만큼 되려면 5년은 걸립니다. 아프리카는 10년 더 걸려요.”
이렇게 버티면 5년은 문제없다. 10년 갈 수도 있다. “그땐 내 나이 80입니다. 월급쟁이로 시작해 이만큼 현역 인생 살았으면 대만족입니다. 세상에 맞추지 않고, 자기 실력 통하는 데서 싸운 것, 그게 비결이라면 비결이었죠.” [프놈펜에서]
이정재 논설위원·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출처 : 세상과 세상 사이
글쓴이 : 장자의 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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