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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풍경 너머의 풍경

1년에 딱 두 번 울리는 종탑

by 丹野 2013. 3. 14.

1년에 딱 두 번 울리는 종탑오마이뉴스 | 입력 2013.03.12 10:36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종로구 옥인동 언덕배기 골목길 끝에서 나타난 로맨틱한 종탑, 뒤로 북악산이 펼쳐져 있다.

ⓒ 김종성

화창한 주말, 수도권 전철 3호선 경복궁역에 내리면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전철 역사를 나오게 된다. 한양 도성 성곽길을 걸으러 가는 중장년의 등산복 입은 사람들, 삼청동이 있는 북촌과 함께 명소가 된 동네 서촌 통의동의 맛집과 갤러리에 놀러가는 젊은 연인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경복궁 관광을 하러 걸어가는 일본, 중국, 말레이시아 관광객들까지.

그 사람들 중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골목과 언덕길이 경복궁역 가까이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종로구 옥인동 골목과 언덕배기가 그곳으로 서울 서촌이라고 불리는 동네에 자리하고 있다. 동네 이름도 예쁘고 내 어머니 이름이 '정옥'이어서 그런지 동네가 남다르게 느껴진다.

벽화가 없어도 좋은 골목길



한옥지붕 위 고양이가 한 눈에 외지인을 알아보고 유심히 관찰 중.

ⓒ 김종성



과자 진열대에 시식용 바구니가 달려 있는 인심좋은 효자 빵집, 동네 아이들의 주요 표적이란다.

ⓒ 김종성

경복궁역에서 나와 옥인동 골목을 찾아가는 여정도 즐겁다. 서점인지 동네 사랑방 혹은 문화 모임방인지 정체가 궁금한 '길담서원', 자리 잡은 지 20여 년이 훌쩍 넘어 이젠 동네 토종가게가 되었다는 한 패스트푸드점, 시장통 안에 고객센터가 있는 작고 정겨운 통인시장, 아들이 빵 배달을 하며 가업을 배우고 있는 동네 빵집 '효자 베이커리'…. 옥인동 가는 길엔 발길을 붙잡는 '참새 방앗간'들이 많아 시간이 자꾸만 지체된다.

한옥집과 단층의 주택들, 현대적인 건물들이 모여 있지만 어느 건축물도 하늘을 가리지 않고 동네 뒤편의 인왕산을 자랑하듯 내보인다. 그렇게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리며 걷는데 날 쳐다보는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동네에서 오래 살았음직한 고양이 한 마리가 한옥 지붕 위에 서서 외지인 여행자를 유심히 관찰 중.



옥인동 언덕동네로 가는 관문, 신교동 80계단

ⓒ 김종성

동네의 명물이자 옥인동 언덕동네로 가기 위한 관문인 신교동 80계단이 나온다. 양 옆의 손잡이며 계단들이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지만, 아마 이곳에서 각종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을 동네 꼬마 녀석들의 추억이 계단, 계단마다 가득 담겨 있는 듯하다. 저 계단에 떼로 앉거나 오르내리며 참새들처럼 떠들었을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그런 추억이 없는 사람에게 계단이란 단순히 층(層)의 반복일 뿐,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힘만 무척 드는 구조물일 것이다. 서울에 있는 후암동 108계단, 남산 삼순이 계단, 이화동 꽃계단, 삼청동 돌계단이 시민들의 사랑을 받게 된 건 어릴 적 계단이 놀이터였던 추억을 가진 사람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벽화는 없지만, 계단옆에 손잡이가 있어서 그런지 정답게 느껴지는 언덕배기길.

ⓒ 김종성

몇 년 전 중장년층의 서울 시민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 페이지였던 동대문 운동장이 무슨 플라자를 만든다며 철거되었다. 당시 오세훈 서울 시장에게 동대문 운동장에서의 개인적인 추억이 있었다면 (기억이 아닌) 흔한 기념비 하나 남기지 않고 그렇게 무참히 없애지는 않았을 것이다. 삭막한 고수부지로 둘러싸인 서울의 한강도 마찬가지. 전두환 군사 정권의 권력자들에게 한강에 대한 소소한 추억들이 있었다면 그리 아름다웠다는 강변의 둔치를 모두 콘크리트로 바르진 못했을 거다. 추억은 그렇게 힘이 세다.

이 계단도 그렇고 주변 골목들도 그렇고 언젠가부터 전국적으로 유행하는 벽화가 있을 법도 한데 그림 한 점 없다. 달동네, 언덕동네의 쓸쓸함을 달래주기도 하는 벽화 그림들이 굳이 필요 없다는 의미일까. 노약자를 위한 손잡이가 있는 언덕 골목들이 친숙하면서도 마음 짠하게 다가온다. 보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각기 다른 감성을 갖게 하는 게 골목이다. 어떤 이에겐 남루하게 보이기도 하고, 또 다른 이에겐 정겨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골목이 없는 도시는 추억이 없는 사람처럼 무미건조하게 살아가게 되리라는 것.

골목마다 어지럽게 들어선 전봇대와 전깃줄은 이웃간의 긴밀한 교류를 상징하는 듯하고, 어느 집 붉은 벽돌 담장 위에 방범용으로 만든 뾰족한 쇠 가시 마저도 정답다. 언덕동네에 웬 고급스럽게 보이는 주택들이 지어져 있나 했더니, 가까이에 인왕산과 수성동 계곡이 있는 등 경관이 수려한 옥인동엔 옛부터 부호들의 집들이 많았단다.

옥인동의 보물, 언덕배기 위 낭만 종탑



일 년에 딱 두 번 종을 울린다는 로맨틱한 종탑.

ⓒ 김종성



군사정권 시절 교회안에 있었던 철책, 군인이 지키는 초소도 있었다고 한다.

ⓒ 김종성

인왕산이 눈 앞에 점점 다가와서 산행하는 기분으로 골목과 언덕길을 올랐다. 그리 힘들지 않게 오른 언덕배기 끝엔 말로만 들었던 옥인동의 보물, 종탑이 정말 있었다. 종을 울릴 때 쓰는 밧줄까지 걸려 있어 금방이라도 은은한 종소리가 동네에 울려 퍼질 것 같다. 그 옆엔 자그마한 교회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런 언덕배기 위에 종탑까지 있는 교회라니, 고즈넉한 산사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다.

낭만적인 기분이 들게 하는 종탑 앞에 서면 무엇보다 인근 동네가 한 눈에 펼쳐져 눈이 시원해진다. 고층의 아파트와 드높은 빌딩이 안 보이는 서울 도시 전경이라니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게다가 시선 양 옆엔 청와대를 품고 있는 북악산과 늠름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인왕산이 들어서 있어 가히 좌청룡, 우백호란 풍수지리설 용어가 실감이 난다.



옥인동의 뒷산이자 병풍 인왕산으로 서서히 해가 내려앉고 있다.

ⓒ 김종성



땅거미가 지고 언덕배기 아래 동네에 하나, 둘 켜지는 불빛들이 따스하기도 하다.

ⓒ 김종성

카메라로 주변 풍경을 담으며 속으로 연신 감탄을 하고 있는데 교회 신자로 보이는 분과 눈이 마주쳤다. 나 같은 외지인이 종종 찾아오는지 해 저문 야경도 좋다는 정보까지 알려 주신다. 더불어 이 교회의 이채로운 내력까지 알려 주셨다. 1958년 건립 당시 교회의 원래 이름은 '하와이 한인 기독교 독립교회'였단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육군공병단을 동원하여 지은 교회로 그가 일제 강점기 시절 활동했던 하와이 한인교회에서 이름을 딴 것이라고. 국가 권력에 의해 지어진 교회라서 그런가 마당한쪽에 보기 흉한 낡은 철책이 둘러쳐져 있다. 교회의 위치가 청와대 기와의 곡선미가 느껴질 정도로 가깝다보니 군사정권 시절 내내 철책은 물론 군인이 교대 근무를 서는 초소까지 교회 마당에 있었다고 한다.

인왕산으로 해가 뉘엿뉘엿 내려앉기 시작한다. 검게 변해가는 산의 실루엣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대하니 무척 인상적이다. 교회 신자분의 말대로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집집마다 하나 둘 불이 켜지는 동네 야경이 서서히 지는 노을처럼 여유롭고 따스하고 정답다. 종탑에서 연말 자정에 새해를 알리는 재야의 종을 친다니, 잊지 말고 꼭 와봐야겠다.

덧붙이는 글 |

지난 주말(3월 9일)에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