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숲
화선지 / 김경성
지상에 방 한 칸 세내어 살아간다
빛을 가린 검은 구름이 아니었어도 숲은 어두웠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 숲길의 눈금을 읽으며
새들의 부리에 찢긴
새들의 혀 자국이 남아 있는 팥배나무 열매
로 부호를 찍어댔다
젖은 채 널브러진 열매의 껍데기들, 혹은 새의 몸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흩어진 씨알들
그 틈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무의 길은
빽빽한 숲의, 나무의 우듬지 너머로 굽이쳐 흐르는 하늘길
한 가지가 한 가지에게로 몸 비틀면서 가는
제 몸속 깊숙이 들이켰던 빛이 들어차 있는
나무가 내어놓은 길
겨울 숲은 사소하게 일어나는 어떤 울림으로 가득 차 있다
발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가는 새들의 날갯짓 소리
파랑파랑 나무의 몸을 뚫고 지나쳐가는 바람
귓속에서는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구겨진, 혹은 잘 접어놓은
유적들이 겨울 숲에 있었다
침잠의 시간 속에서
접혀있던 허공이 바람에 조금씩 펼쳐지며
제 몸빛으로 무언가를 옮겨적는 어느 하루,
내 생의 무늬 속에 그대의 말들을 밀봉하는 동안
겨울 숲에 들어차 있었던 것들이
무언가無言歌가 되어
화르륵
번지는, 번져나가는
-계간 『시와사람』201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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