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의 구조주의적 정신분석학과 프로이트의 ‘재해석’
스스로 프로이트주의자라고 자칭하면서도 많은 측면에서는 프로이트와 다른 견해를 표방한 자크 라캉 Jacques Lacan(1901-1981)의 주장들은 그 자체로서 주목할 가치를 지닌다. 그는 정신분석학적 구상들을 구조주의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특히 인문학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행사한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이다. 그의 견해들은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분분한 논란을 야기시키고 있고, 쟁론적인 주장들은 정신분석학계에 많은 갈등과 분열을 낳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언어와 무의식의 관계에 대한 기초적 천착을 핵심으로 삼는 그의 이론은 심리학적, 철학적 토론을 근원적으로 뒤흔들었을 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무의식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도 제공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라캉은 아들러와 융처럼 자신을 정신분석학의 ‘이단자’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정신분석학의 ‘루터’, 즉 개혁자로 이해한다. 특히 무의식의 본질과 그 탐구가능성, 나아가 심리학적 심급으로서의 자아의 발생과 관련해서 프로이트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 때문에 그를 기존의 프로이트적 정신분석학의 전통에 포함시키기는 어렵다. 라캉추종자들은 그런 자리매김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뿐더러 또한 수정주의적인 미국의 ‘자아심리학’과도 무관함을 주장한다. 궁극적으로 라캉의 정신 분석은 전통적인 이론이 안고 있는 불만족스러운 실천을 극복하려는 노력에서 귀결된 것이다.
특히 라캉의 언어관에 의하면 세상 위에 표현의 그물망을 펼치고 있는 언어는 의식과 무의식이 생겨나기 전부터 존재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분열은 어린 아이가 언어의 세계로 진입하면서부터 생겨나고, 특히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존재하는 틈새 때문에 언어의 작용에서 미망(迷妄)이 행사하는 역할은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라캉이 프로이트 심리학에 가져온 변혁은 무의식이 인간의 사고와 이미지에 아무렇게나 연결된 원시적 본능의 근원이라는 생각을 뛰어넘어 그 이상의 것이라는 체계적 주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의식과 무의식은 서로 엇갈리면서 공존하는 가운데, 외적 개념화는 내적 구조에 의해 부추김을 받게 된다. 이러한 부추김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언어의 경험이라는 주장에서 라캉의 독특한 언어관을 엿볼 수 있다.라캉은 무엇보다도 유아기의 거울단계를 인간의 심리와 그 심급들의 발생에 있어서 결정적 시기로 간주한다. 따라서 그의 연구는 감각이나 욕구의 경험에 경계가 없는 비정형 상태의 유아기 단계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이 단계를 ‘오믈렛’이라는 동음이의어를 사용해서 표현한다. ‘오믈렛 l’hommelette’은 ‘형태가 없는 계란 덩어리’인데 이것을 띄어 쓰면 ‘작은 사람 homme-lette’, 즉 ‘어린이’가 된다. 어린이는 형체없는 계란처럼 비정형 상태라는 것이다(Lacan 1977b: 197). 그러다가 어린이가 격는 최초의 분리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라캉은 프로이트의 「나르시시즘에 관한 연구」(Freud 1953: XIV)에 나타난 에고에 대한 프로이트 초기 개념과 나르시시즘에 관한 주요 은유인 거울로 소급한다.
라캉의 이론에는 신비스러우며 때로는 문자 그대로 ‘거울 단계 mirror-stage’라는 시절이 있(Lacan1977a: 1-7). 이때 어린이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실제 자기 자신을 동일시한다. (사실 거울 속의 반영은 결코 자신의 실체가 아니다). 라캉은 이러한 나르시스적 은유가 갖는 암시를 연구하고 개발한다. 어린이는 거울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이미지가 지닌 여러 가지 특징에 즐거워한다. 이전에는 자신을 형태 없는 덩어리로 경험했지만 이제는 힘들이지 않고 완전하고 이상적인 이미지로 느낀다. 이 만족스런 거울 이미지의 경험은 외부와 내부 세계가 틈새 없이 총체를 이루는 결합의 은유이며, 욕망을 즉각적이고도 확실하게 충족시키는 완벽한 조정을 의미한다. 라캉은 이같이 언어습득 혹은 오이디푸스 현상 이전의 단계를 ‘상상계 the Imaginary’라 부른다.”
이 단계에서 모든 욕망이 축족된다는 것은 단지 아이의 미망에 불과할 뿐이다. ‘어머니의 욕망’이 지닌 양면성(‘어머니의 아이에 대한 욕망’과 ‘아이의 어머니를 향한 욕망’)으로 인해 깊은 미망의 상태에 있던 아이의 자아가 “언어의 구조 속으로 진입할 때 비로소 틈새가 드러난다. 라캉은 이것을 ‘상징계the Symbolic Order’라 부른다. 언어의 구조는 ‘어머니’와 ‘아이’에 대한 것들을 포함한 아버지의 규칙과 법률, 정의 등, 사회의 명령 체계로 가득 차 있다. 욕망은 지연되고 욕망이 무엇을 요구하든지 그것은 압축된 말로 표현되어야만 한다는 사회의 명령이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갈라놓고 이제 언어를 사용하는 대가로 억압이 나타난다.”
결국 라캉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구조론(이 경우 자아, 이드, 초자아로 형성된 제 2심급론) 대신에
3가지의 생활세계, 곧 ‘실체계’, ‘상상계’, ‘상징계’를 구별한다. 인간은 거울단계에서 상상계가 생겨날 때 그리고 언어의 상징적 질서 속으로 들어갈 때 실재계와의 결별이 초래되기 때문에 ‘실체계’는 칸트의 ‘물 자체’처럼 거의 거론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그것에 관해 상상할 수는 있으며, 또 말할 때는 그것을 파악하려고 시도도 하지만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발생하기 이전의 생활세계에서 유래하는 ‘상상계’에서는 체험하기 위해 필요한 아이 자신의 신체와 어머니의 신체 간에 철저한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상상계’는 곧 이미지의 세계로서 이 세계에서는 거울단계에 있는 어린이가 자신을 거울에 비친 자화상과 동일시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이미지들과 동일시한다. 무의식은 아직 상징화되지 않았지만 작용을 하는 상상계의 한 부분이다.
라캉은 아이가 거울 속에서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보게 되는 거울 단계에서 개별화과정은 시작된다고 본다. 대상과 동일시하는 작업계열에서 최초로 형성되는 관계가 거울상(像)과의 관계인데, 이때의 동일시 작업들이 자아를 구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아이의 체험세계에 아버지가 들어섬으로써 비로소 아이는 성(性) 차이뿐 아니라 또한 ‘법칙’도 알게 된다. 그러나 역시 일차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근친상간의 타부이다. 아버지는 하나의 다른 질서, 즉 가족의 규칙, 사회의 규칙을 대변하는 것이다. 아이는 아버지를 통해 자신의 역할이 대체로 고정되어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아버지는 이제 어머니의 육체에 대한 욕망을 금지한다. 이 욕망은 의식이 없으며 따라서 욕망은 원래 무의식인 셈이다.
언어적 의사소통에서 무의식은 흡사 잊혀졌거나 또는 검열로 인해 왜곡되고 일그러져 버린 하나의 장을 나타낸다. 이 장의 내용은 어휘의 선택과 음색을 통해서, 실수와 이미지 또는 비유를 통해서 표명된다. 무의식은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영혼의 심층 차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아직은 서술될 수 없거나 또는 더 이상 서술될 수 없는 하나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도처에서 언제나 자신을 주목하도록 만든다. 그렇게 해서 의식과 무의식 간의 전통적인 구별은 소멸되는 셈이다. 라캉에 따르면 정신분석적 요법의 목표는 공허한 지껄임에서 시작해서 참된 언표에 이르는 스칼라 상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의 경계를 이동시키는 일이다.
무의식은 더 이상 심층 속에 숨겨져 있기에 심층심리학적으로만 파악될 수 있는 비밀투성이의 그 무엇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무의식은 차라리 언어적으로 공식화된 것과 공식화될 수 있는 것 이전에 또는 그와 나란히 아니면 그것들 사이에 놓여 있는, 그래서 역시 표층에 자리하는 것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낸다. 어떻게 무의식이 술화 속에 숨겨져 있는지를 라캉은 E. A. 포우의 소설 「도둑맞은 편지 The Purloined Letter」에 관한 그의 유명한 세미나를 기반으로 해서 보여 준 바 있다.
이 해석은 라캉식의 텍스트해석을 위한 하나의 모델이 되고 있다. 라캉에 의하면 무의식을 고려에 넣고자 하는 텍스트비평가는 특히 기표연쇄 속에 자리하는 틈새와 단절들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잠재적인 것이 우선적으로 표명되는 장소가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의식으로 야기된 이 틈새는 보편의미론적으로 충족되는 것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라캉은 언어를 우선적으로 기표들의 상징적 질서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라캉의 사고에서 중심역할을 하는 것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명제이다. 라캉은 한편으로 프로이트가 인정한 꿈 작업의 기제(압축과 자리바꿈)와 다른 한편으로 수사학적 형상(환유와 은유)들간의 유추를 지적한 바 있고, 나아가서는 은유와 환유가 경우에 따라 로만 야콥슨이 도입한 구별, 즉 언어의 계열체적 축과 통합체적 축, 말하자면 우연의 원칙과 대체의 원칙간의 구별과 유추 관계에 있다고 했다. 결국 이 유추는 라캉에 의해 거의 동일시되고 만다. 그런 점에서 그는 무의식 속에서 사물 표상과 언어 표상을 서로 구분한 프로이트와는 생각을 달리했으며, 그렇게 해서 그는 구조주의적 언어학(페리디낭 드 소쉬르, 로만 야콥슨)과 정신분석학을 서로 연결하기에 이른다.
라캉은 소쉬르로부터 기표와 기의의 언어학적 구상을 받아들였지만, 그것을 정신분석학적 차원 만큼 보완한 셈이다. 즉 모든 기표는 무의식적 욕망을 수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욕망에는 무의식이 침투되어 있기에 항상 잘못된 인식을 낳는다”는 것이다. “무의식과 억압, 욕망과 결핍 같은 변증법적 대립 관계”는 텍스트뿐만 아니라 “온갖 시각적인 인식에도 존재한다. 무의식의 생성은 기표들이 표현을 추구하는 필요성을 간직하고 또 그 필요성이 언어를 통해 적절히 정돈되는 데서 비롯한다. 그러니까 무의식은 언어습득의 시기에 상징적 질서 속으로 진입할 때 의사소통을 일탈하는 그 무엇으로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는 항상 우리에게 미리 주어져 있고 또한 ‘타자(他者)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욕망은 이제 두 가지를 원한다. 첫째로는 불가능한 충족을 원하거나 아니면 충족이 일시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언제나 또다시 다른 대상으로 옮아가는 그런 충족을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욕망은 인정을 원하며, 언표되고자 하고 남이 들어주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표현을 추구한다. 우리가 상징계의 질서 속으로 들어서서 말하기를 시작할 경우에도 결코 상상계를 떠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두 세계 속에서 사는 것이다. 말하자면 상징적인 질서, 곧 언어적 술화/담화 속에서 인간은 도달이나 접근이 불가능한 실체계 및 실체계와 관련된 욕망으로부터 멀어지면서도 언제나 그 욕망을 언표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이다.
특히 언어와 관련해서 기호는 ‘사물을 표상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기호를 ‘기표’(청각영상)와 ‘기의’(표상)로 구분한 소쉬르의 언어이론을 라캉이 수용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기표는 특정한 언어체계 안에서 다른 것과 구별되는 단어의 소리이다. 기의는 본질적으로는 구분되지 않은 사고의 연쇄에서 뽑혀진 일종의 개념이다. 소리와 개념은 아무렇게나 연결될 수 있기에 그들 사이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그러나 일단 결합해서 사용되기 시작하면 둘 사이는 종이의 양면처럼 고착된다(Saussure 1915=1977: 113). 소쉬르는 이런 결합을 s/S라는 공식으로 표현하는데, 여기서 S(대문자)는 기표를, s(소문자)는 기의를 나타낸다.
라캉은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 확고하다는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비판을 가한다. 그는 하나의 기의에 두 개의 기표가 있을 수 있다는 예를 든다. 화장실의 문 위에 쓰인 ‘숙녀’와 ‘신사’라는 기표는 둘 다 ‘문’이라는 하나의 기의를 나타낸다. 이 재치 있는 예는 언어학 내에서 이미 비평가들이 지적했던 점, 즉 소쉬르가 세계의 부분이 사물이나 사람으로 지칭되는 과정인 지칭(reference)의 문제를 무시했음을 상기시킨다. 이들 기의의 식별이 인간의 판단에 달려 있고, 그 판단이란 게 끔찍스럽게도 어쩔 수 없이 다를 수밖에 없기에 미망(迷妄)이 기초 체계내에 개입된다. 이제 소쉬르적 고착성은 사라진다. 숨어 있던 틈새가 기표와 기의 사이에서 열리고 s와 S 사이의 횡선은 더 이상 결속이 아니고 가름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기표가 기의의 우위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라캉은 소쉬르의 공식을 역전시켜 기표인 대문자 S를 위에, 기의인 소문자 s를 횡선 아래에 두는 S/s로 변형시킨다. 이것은 또한 언어의 의식적 차원의 범주 아래 있는 무의식적 욕망의 자리가 보이지 않고 주목받지 못하지만 예측할 수 없게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을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이러한 ‘횡선 아래’의 이동에 대해 좀더 명확히 하고자 라캉은 상상계와 상징계가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여 소위 ‘실재계 the Real’를 형성하는 지를 언급한다. 라캉에게 실재는 상상계와 상징계가 서로 지배하고자 경쟁을 벌이는 투쟁적 실존의 장(場)이다. 그것은 온갖 지칭과 행위에 관련되지만 오직 의미화 작업을 통해서만 조절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상상계와 상징계가 엇갈리며 만나는 이 경쟁의 장을 그는 뫼비우스의 띠(두 면이 하나로 연결되는 꼬임의 종이띠)로 표현한다. 그 띠는 ‘실체계’이며 면의 양면성은 상징계와 상상계 사이의 갈등이다. 이곳이 미망이 발생하는 장소, 즉 거울 이미지인 이상적 에고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마련했던 방식과는 대조적으로 아버지가 내린 주체의 정의와 만나는 곳이다.
한 도표에서 그는 한 사각형의 두 부분 사이에 빗금을 교차시킨 부분을 표시해 놓았다. 이 회색 지역에서 상상계와 상징계는 기표를 각기 자기 방식으로 보면서 무의식으로부터 의식을 갈라 낸다. 기표에 대한 이런 이중 견해가 양면적인 결과를 낳는다. 단의의 의미는 특히 은유와 환유에서 전복되고 비유로 된다. 라캉은 다시 언어학으로 되돌아가 이번에는 이 두 개의 비유어가 언어의 기초적인 구성 요소라고 주장한 로만 야콥슨의 도움을 받는다.
라캉의 은유나 환유는 정확히 딱 들어맞지는 않지만 프로이트의 압축(condensation)과 자리바꿈/전치(displacement)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 무의식적 욕망은 하나의 모습을 비슷한 다른 모습으로 착각할 수 있으며 결국 한 기표를 다른 기표로 대체한다. 욕망을 훨씬 더 잘 충족시킬 수 있을 때 하나의 기표는 옆의 다른 기표와 자리바꿈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환유(metonymy)이다. 이런 은유와 환유의 효과는 말하는 이는 의식하지 못한 채 언어 속에서 계속 작용한다. 라캉은 언어의 형태와 억압에 대한 반응 사이에 존재하는 동질성을 발견한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말은 무의식이 언어의 산물로 태어나기 때문에 단순한 유추 이상임을 뜻한다. 모든 단어가 제대로 의미를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은 언어, 즉 무의식을 갖고 있는 어린이에게 깊은 좌절을 느끼게 한다. 욕망이 충족될 수 없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에고는 언어가 제시한 말의 연쇄를 따라 움직이는데 무의식은 그것이 잃어버린 대상을 찾고 있는 것이다.
문필가가 궁극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형상화하고자 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욕망을 미리 주어진 언어기호와 전승된 구조들의 형태로서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불가피하게 실패할 수밖에 없다. 즉 ‘인간의 술화는 타자의 술화인 것이다.’ 욕망의 요구는 명문화될 수 없고,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표현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표명되고 싶어하는 것이 욕망이다. 이 점은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실존적으로 열중하다가도 그 작품이 완성되어 출판되었을 때는 무관심해지는 일, 그리고 원칙적으로 독자보다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없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마치 어떤 낯선 것을 대하듯이 마주하고 있을 때 그가 느끼는 무관심 등에 관해서 얼마간은 설명을 해준다.
언제나 작품은 결핍을 발언하거나 욕망의 충족을 약속하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된다는 전제에서 해석은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해석자는 본질적인 것이 아직 텍스트 속에서 발언되지 않은 상태로 있다는 점을 옳다고 느낄 것이며 따라서 그는 그것을 발견하는 과제에 착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발견하든 그것은 항시 본질적일 수 없다는 것이 라캉의 입장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중심적인 상상력의 궤적을 추적하는 통상적인 해석과 통상적인 정신분석학적 해석이 철저히 비판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모든 것을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하고 소화하는 일반인들에게 라캉은 해석과는 동떨어진 인물로 부각되기 싶상이다.
이처럼 언어와 유사한 구조로 무의식을 새로이 정의하는 라캉의 행위는, 주체적인 체험과 느낌을 위한 분석적인 주의력을 연구분야의 변경으로 이동시킨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고전적인 분석은 우리들에게 새롭고 다르게 느낄 것을 가르치고 있는 반면에 라캉은 새롭게 말하는 것을 가르쳐서, 우리가 ‘성숙해지도록’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누가 말하는가?’라고 주체를 따지는 불안한 물음을 제기하지만 이때 그는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내 속에서 말한다’라고 대답한다. 언어는 우리가 상징적 질서 속으로 진입하기 전에, 즉 언어공동체의 성원이 되기 전에 이미 존재하며 또 우리를 주체로서 구성하는 것도 바로 그 언어이다. 따라서 주체의 데카르트적 자기확인은 라캉에 의해 환상으로 드러나게 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대신에 라캉의 경우에는 ‘내가 존재하지 않은 곳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드가 말한다’라는 표현은 곧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즉 우리가 발화할 때 말하고자 하는 것, 즉 기의에 적합한 기표를 찾는 것과 같은 통상적인 표상은 반박을 받고, 오히려 발화가 마치 기표의 고리를 따라 미끄러지는 것같은 표상이 선호되고 만다. 이런 맥락에서 라캉은 기의에 대한 기표의 우선권을 주장한다. 따라서 언어의 지시적 측면은 평가절하된다. 이 견해는 많은 반론을 야기시켰고, 또 데리다도 역시 반박했다. 라캉의 시각은 우선적으로 고립적인 단어와 언어유희, 나아가 어절과 자모에 집중한다. 그것들 속에서는 추이와 압축이 가장 잘 입증될 수 있다. 하지만 단어를 포괄하고 문장을 포괄하는 구조들, 즉 통사론적 현상으로서 텍스트 언어학이 의사소통을 위해 구성적인 것으로 인식한 것, 다시 말해 텍스트해석이 전체 의미로서나 중심적인 상상력으로서 추구한 것에 대한 시각은 이때 상실될 위험에 처한다.
아무튼 우리가 언어를 어떻게 다루며 언어 역시 우리와 어떤 방식으로 교류하는지의 방식과 양상에 관한 그러한 원론적 숙고들은 분명 문학 텍스트의 해석과 생산 및 수용의 이론을 위해 방향제시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따라서 라캉의 저작들은 문예학적 권역에서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 새로운 문학심리학의 영역에 대한 입문서들은 그 사이에 풍부해졌다. 그러나 대부분은 확신을 가진 라캉추종자들에 의해 저술된 것들이다. 라캉의 학설을 프로이트적인 정신분석학과 대질시키면서 문학적 사고를 위한 극단적인 결론을 비교하면서 정리하는 체계적인 성격의 비판적 논평들은 아직 드문 편이다. 오늘날 푸코와 라캉 같은 구조주의자들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문예학적 조류들로서 대표적인 것들은 ‘술화/담화 비판’과 ‘술화/담화 분석’을 비롯해서 자크 데리다와 폴 드 만이 주도한 ‘해체주의’라는 문예학적 방향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문학의 창작자로서의 일정한 개체를 특징짓는 작가성을 인정하는 전통적인 표상과는 결별을 선언한다. 이 경우 문학 작품은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된다. 언어예술작품은 언어 자체와 마찬가지로 확고한 의미를 지닌 기호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콘텍스트에 의존하는, 다수의 의미를 용납하는 기표들로 구성된다. 이런 사정은 꿈의 상징뿐 아니라 문학적 이미지와 상징들에도 유효하다. 확실히 기표의 우위설은 텍스트를 일정하게 해석하는 작업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의문시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기표들 하위에 있는 기의의 미끄러짐에 한정하지 않고 그 이상을 기술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라캉이 보기에 모든 말하기와 글쓰기는 결국 일종의 실수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것을 결코 정확히는 생각할 수 없으며 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정확히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상징계의 구조는 상상계의 구조에 정확히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생각한 것을 정확히 언표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표현된 것의 주체가 곧 표현의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기표는 기의를 모르는 가운데도 그 효과의 측면에서 분석될 수 있다. 의미의 결핍, 의식적 이해에서의 비연속성은 필연적으로 의미로 변하지 않고도 그 자체로서 해석될 수 있고 또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 라캉의 주장이다. 라캉의 제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전기적(傳記的) 방법을 불필요하고 중요하지 않는 것으로 본다. 그들에게는 해석학적 근거들이 번역될 수도 있을 메타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해석자는 작가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의 착각과 과오에 내맡겨져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라캉은 정신분석학을 전통적으로 문학에 적용하는 구상에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그 양자 간의 관계는 적용의 관계가 아니라 포함의 관계인 것이다. 그 둘은 동일한 뿌리에서 생겨난다.
프로이트적인 비평가는 고고학자처럼 심층에 숨어있는 보물을 찾고 있는 반면에, ‘라캉주의자’는 수사학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 훈련받은 탐정처럼 텍스트 속의 균열과 비일치를 찾는 것이다. 그래서 라캉의 독서는 해석자로 하여금 의미도식 속으로 안내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기표들의 무의식적 작용에 대한 감수성을 촉발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해석자는 잠재적인 소망을 추적할 것이 아니라 즉자적인 욕망을 작가와 독자의 추동력으로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출처: 서울대학교 독일학연구소
시인은 이론과 우상을 넘어서 내면의 자유함을 얻을 때 비로소 울림이 있을 것입니다.
오직 집으로 돌아와 거울을 닦는 일에서부터 영혼은 빛이 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탈한 자가 문득 > 램프를 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음의 문턱서 만난 詩… 그와 한몸이 되련다 (0) | 2011.12.11 |
---|---|
언어적 섬에 갇힌 詩들 / 백현국 (0) | 2011.12.11 |
지젝의 라캉 읽기―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중심으로 (0) | 2011.12.09 |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욕망 (0) | 2011.12.09 |
현대에 있어서 고향상실의 극복과 하이데거의 존재물음 (0) | 2011.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