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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있어서 고향상실의 극복과 하이데거의 존재물음

by 丹野 2011. 12. 9.

 

 

현대에 있어서 고향상실의 극복과 하이데거의 존재물음

           - 하이데거의 교수취임강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박 찬국(호서대)

1. 머리말:향수로서의 철학과 현대의 상황

 

 

하이데거는 그의 전집 29권과 30권에 해당하는 <<형이상학의 근본개념>>(Die Grundbegriffe der Metaphysik, Welt-Endlichkeit-Einsamkeit)에서 "철학은 본래 향수이다. 그것은 모든 곳에서 (고향에서처럼) 안주하려는 충동이다"(괄호안은 필자주)라는 노발리스의 말을 빌어 철학 내지 형이상학의 본래의미를 논하고 있다(전집 29/30, 7 쪽 참조). 철학은 모든 곳을 고향의 집처럼 느끼고 그 안에 안주하려는 충동이라는 의미에서 본래 향수라는 것인 바,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철학은 전체와의 합일을 지향한다는 의미라고 생각된다. 전체를 우리는 세계라고도 말할 수도 있기에 철학은 세계를 고향으로서 느끼고 그것과 합일하려는 근본충동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세계란 얼핏 보기에 우연과 무상한 변화가 지배하는 것 같으면서도 거기에 하나의 조화와 통일이 존재하며 개체는 소멸변화해도 그러한 개체의 소멸변화를 통해 전체는 자신을 유지하고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경이로와 하면서 소크라테스 이전의 탈레스나 아낙시만드로스, 파르메니데스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가 만물의 근원, 즉 무상한 생성변화의 근저에 있으면서 그것을 가능케 하고 또한 모든 존재자들의 통일과 조화를 가능케 하는 근원적인 것을 물었던 것이다. 그러한 물음에는 근원과의 합일을 통해서, 얼핏 보기에 무의미하기 그지 없는 이러한 생성 변화의 세계와 새로운 합일에 도달하려는 충동이 작용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의 근저에는 사실은 전체와의 합일에 도달하려는 형이상학적인 충동이 작용하고 있는 바, 인간이란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전체, 즉 세계를 문제삼는 존재로서의 형이상학적인 동물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다른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유기체의 역사에 있어서 처음으로 죽음을 하나의 문제로서 의식할 수 있는 존재자이기도 한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無化하는 죽음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와 존재전체의 무의미를 자각하는 바, 그가 전체 내지 세계 그리고 생성과 소멸의 의미에 대해서 묻는다는 것은 한갓 사변적인 관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절실한 관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존재 전체에서 생성과 소멸이 갖는 의미를 물음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극복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과 또한 자신의 삶이 위치하는 존재전체와 화해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체에 대한 물음이 생성과 소멸을 감각에 의한 가상으로 간주하고 그것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파르메니데스적인 형태로 나타나든 생성과 소멸을 근원적인 것의 창조적인 생명력의 발현으로 보고 이러한 근원과의 합일을 통해 생성과 소멸의 운동을 승화된 형태로 이해하고자 하는 헤라클레이토스적인 형태를 통해서 나타나든, 거기에는 전체에 대한 이해를 통해 전체를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삶의 공간으로서 이해하려는 시도, 즉 전체를 고향으로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전통형이상학에서 신이 끊임 없이 문제가 되었던 것도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무수한 조건들에 의해 제약되어 생성과 소멸의 세계에 내던져 있는 인간이, 자기자신이 자신의 존재근거인 존재자 다시 말해 자신의 존재조건을 스스로 정립하는 절대적인 존재자에의 귀의를 통하여 인간의 궁극적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소위 과학기술시대라고 일컫는 현대에도 세계전체를 인간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려는 형이상학적인 충동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대인은 과학과 기술을 통하여 세계의 객관적인 작용법칙을 파악하고 그것을 응용하는 것을 통해 세계에 있어서 우연적이고 숙명적인 것이라고 여기던 것들, 예컨대 죽음과 질병, 천재지변 등을 제거하는 것을 통해 세계를 인간이 아무런 공포 없이 살 수 있는 세계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과학기술시대란 전체와의 합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체에 대한 지배를 통해서 인간이 살만한 세계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은 인간이 그 안에 '安住하고 그 안에서 아늑함을 느낄 수 있는' 고향이 아니라 인간이 지배할 수 있는 세계를 의도한다. 인간은 세계에 대해서 주체로서 우뚝 서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지배하고 인간이 인위적으로 건설한 편리한 세계가 인간의 '고향'이 될 수 있는 것인가? 과학기술시대에 있어서 구체적인 개인들은 전체를 지배하기 위한 사회적인 기능연관체계 내에서 자신에게 할당된 역할을 정확하게 수행해야 하고 그러한 노동의 댓가로 욕구충족을 위한 소비물품을 제공받는 하나의 기능인자에 지나지 않지 안은가? 이 경우 주체는 구체적인 인간개개인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들 하나하나를 계산가능한 노동력으로 이용하면서 존재자 전체에 대한 지배를 확보해 가는 맹목적이고 추상적인 기능연관의 체계는 아닌가? 자칭 자유롭다는 인간도 모든 자연물과 마찬가지로 기술의 자기확장과정을 위한 원료에 불과한 것이며, 이를 통해 기술시대에서는 인간과 물질 사이의 차이는 소멸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이 경우 자연과 인간을 엄격히 구별하면서 자연에 대해서는 기술적인 지배를 허용하나, 인간에 대해서는 상호주관적인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보장하자는 하버마스류의 생각이 과학기술시대에 대해서 하나의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자연과 인간의 엄격한 분리는 가능한가? 자연에 대한 기술적 지배는 인간 상호간의 기술적 조직화를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것인 아닌가? 기술적 지배를 자연에 대한 주요한 관계방식으로 인정할 경우에 있어서 인간들 간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이란, 사회적인 기능연관의 체계 내에서 각 기능과 생산물을 공정하게 할당하는 것 이외의 무엇을 의도할 수 있는 것인가? 과학기술시대가 자연과 인간을 포괄하는 전체에 대한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결단인 이상, 이 시대의 극복을 위해서는 전체에 대한 새로운 결단이 요구되는 것은 아닌가?

어쨌든 간에 인간의 모든 행위와 생각 그리고 특히 철학은 세계에서 고향에서처럼 안주하고자 하는 충동을 기저에 갖는다. 문제는 과연 어떠한 철학이 진정한 고향의 건립에 기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하이데거는 이 시대를 고향상실(Heimatlosigkeit)의 시대라고 규정하고 있다(전집 9, 341 쪽 참조). 그리고 우리는 위에서 하이데거가 철학을 고향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향수로서 규정하는 것을 보았다. 하이데거의 존재물음 역시 상실된 고향의 회복을 의도하고 있다. 본고는 하이데거의 존재물음을 상실된 고향의 회복이라는 그것의 궁극적인 의도와의 연관하에서 그의 교수취임강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를 실마리로 하여 해명해 보는 것을 의도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존재물음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그리고 그가 말하는 존재가 무엇인지가 극히 애매하다는 지적이 종종 있어 왔다. 필자는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연이 하이데거가 현대의 근본기분으로서 규정하는 불안이란 기분을 분석하면서 그의 존재물음을 극히 생생하게 개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근거의 본질>>이라든가 <<동일성과 차이>>, <<시간과 존재>> 등 많은 저술이 상당히 추상적으로 자신의 존재물음을 개진하고 있는 반면에,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는 현대인을 엄습하고 있는 불안이란 기분을 철저히 분석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물음을 우리의 실존에 직접적으로 육박하는 형태로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필자는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연이 하이데거의 존재물음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좋은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 글이 하이데거의 존재물음을 고향에의 귀환이란 본래적인 목표와 관련해서 고찰하는 한, 이 글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연에 대한 주석식의 분석에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는 실존적인 긴박성이 넘치기는 하나 하이데거의 존재물음의 본래적인 의도는 뚜렷이 드러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이 글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연을 실마리로 하여 그의 다른 저작들을 원용하면서 하이데거의 존재물음을 고향상실의 극복이란 목표와 관련해서 해명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2. 강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분석

 

 

2.1. 형이상학의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서의 강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연에서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의 본질을 묻는다. 그러나 이렇게 형이상학의 본질을 물음으로써 그는 종래의 형이상학처럼 세계전체에 대한 하나의 체계적인 고찰을 행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여기서 그것의 본질을 묻는 형이상학이란 현존재의 근본사건(das Grundgeschehen des Daseins)으로서의 형이상학으로서, 세계와 존재전체에 대한 체계적인 언표로서의 종래의 형이상학과는 전적으로 구별되는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전통형이상학과 근대의 과학기술문명마저도 가능케 하면서도 전통형이상학과 근대의 과학기술문명에 의해서 망각된 근본사건이다. 현존재의 근본사건로서의 형이상학이란 세계와 존재 전체에 대한 이론적 탐구로서의 형이상학이 아니라 현존재의 심연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근본사건을 말하는 바, 그 사건이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존재자 전체를 초월함으로써 다시 그것들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고 그것들과 새로운 합일을 얻게 되는 초월의 사건을 말한다. 이에 그는 형이상학의 본질을 물음으로써 이러한 초월의 사건의 본질과 의미를 묻는 것이다. 그가 그럼에도 이러한 초월의 사건을 구태여 형이상학이란 말을 빌어 지칭하는 이유는 이러한 초월의 사건이 한편으로 전통적인 형이상학과는 전적으로 구별되면서도 그것과 또한 본질적으로 연관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데카르트에 있어서 전통적 형이상학이 모든 학문의 뿌리에 해당한다면 이러한 초월의 사건으로서의 형이상학은 그러한 전통적 형이상학이 뿌리박고 있는 지반에 해당한다는 것이다(전집 9, 365쪽). 그것은 전통형이상학마저도 가능케 하는 것이며 전통형이상학이 그것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후기하이데거에서 명백하게 나타나지만 하이데거는 현대의 고향상실의 근원을 전통형이상학의 역사에서 찾고 있다. 전통형이상학이 이 과학기술시대의 선구자인 한 과학기술시대의 극복은 이에 그 어떤 형태의 형이상학이든 그것에로 귀환하는 것을 통해서나 그것을 약간 형태를 바꾸어서 연장하는 것을 통하여 행해질 수는 없다. 전통형이상학 역시 세계를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고향으로 승화하려는 충동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나, 이러한 충동의 본질과 기원을 파악하지 못했으며 그것에 진정하게 부응하지 못했다고 하이데거는 보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형이상학의 역사란 고향으로서의 세계를 오히려 은폐해 가는 역사이다. 하이데거는 초월로서의 형이상학의 본질을 물음으로써 전통형이상학의 기원과 한계를 밝히고, 이를 통해 전통형이상학의 극복을 시도하고 진정한 고향에의 길을 개척하려는 것이다.

 

 

2.2. 存在-神-論으로서의 전통형이상학

 

 

위의 머리말에서 우리는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이 전체와의 합일에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았다. 이러한 궁극적 관심을 반성적으로 추구한 것이 철학이며, 이러한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을 존재자 전체를 이론적으로 고찰하면서 그것들의 궁극적 근거를 파고 들어가는 방식으로 충족시키고자 것이 전통적인 철학 내지 전통형이상학이라고 생각된다. 이에 전통철학에서도 그것이 철학인 한 항상 전체가 문제되는 것이다. 우선 개별과학이 각 존재영역 내의 구체적인 현상들의 작용연관을 묻는 반면에 전통철학은 각 존재영역의 전체를 문제삼는다. 예컨대 생물학에서는 구체적인 개개의 생의 현상들이 문제인 반면에 철학에서는 모든 생명체에 귀속되면서 모든 생명체를 생명체로서 가능케 하는 전체로서의 생명 자체가 문제가 되며, 역사학이 구체적인 역사현상을 탐구하는 반면에 철학에서는 모든 역사현상을 역사적인 것으로서 규정하는 전체로서의 역사의 본질이 문제가 된다. 이러한 생물의 본질이나 역사의 본질은 생명현상이 생명현상으로서 역사현상이 역사현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생물의 본질이나 역사의 본질을 우리는 생물의 '존재'나 역사의 '존재'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전통철학에서는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모든 존재영역들을 포괄하는 궁극적 전체가 문제되는 바, 전통철학은 존재자 일반을 존재자로서 규정하는 것 즉 존재자 일반의 존재에 대해서 묻는다. 이렇게 존재자 일반의 존재에 대해서 묻는 것이 제일철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이다. 전통형이상학이란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즉 그것이 존재하는 한에 있어서의 존재자에 대해서 묻는다. 다시 말해 전통형이상학은 존재자의 특정한 영역에 대해서 묻는 게 아니다. 그것은 생물로서의 존재자나 경제적인 것인 것으로서의 또는 정치적인 것으로서의 존재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 대해서 묻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자를 개별과학적으로 탐구하기 전에 우리는 그 존재자가 적어도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이는 다시 말해 우리는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선이해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전통형이상학에 있어서는 존재자 전체에 공통적인 근본특성을 묻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전통형이상학에 있어서의 존재가 자신이 묻고자 하는 존재 자체와 근본적으로 구별된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 그것을 존재 아닌 존재자성(Seiendheit)이라고 부르고 있거니와, 이러한 존재자 전체에 공통된 본질특성으로서의 존재자성에 대한 물음은 전통형이상학에 있어서는, 존재자가 도대체 무가 아니고 존재하는 근거에 대한 물음 즉 존재자 전체의 궁극적 근거에 대한 물음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는 이러한 궁극적 근거가 존재자 전체의 궁극적 근거로서 동시에 존재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존재의 근본특성을 가장 잘 구현하는 존재자인 것이며 바로 그렇기에 그것은 또한 존재자 전체의 존재근거일 수도 있는 것이다. 존재자 전체의 존재근거에 대해서 묻는다함은 존재자가 정치적인 것으로서나 생물적인 것으로서나 존재하기 위한 근거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모든 존재자가 도대체 존재자로서 존재하기 위한 근거에 대해 묻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전통형이상학의 물음은 존재자에 공통된 특성을 묻는다는 점에서 존재론(Ontologie)의 과제이며, 이에 대해 존재자 전체의 근거에 대한 물음 즉 '존재자가 왜 무가 아니고 있는가'하는 물음은 존재자 전체의 근거가 되는 존재자 다시 말해 최고의 존재자에 대한 물음 즉 신학(Theologie)이 된다. 전통형이상학에는 이러한 존재론적인 측면과 신학적인 측면이 불가분리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에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을 존재-신-론(Onto-theo-logie)으로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형이상학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그리고 존재자 전체의 근거를 묻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미 존재자 전체를 대상화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존재자 전체를 초월해 있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존재자 전체의 밖에 존재해야만 한다. 어떤 대상에 대한 물음이란 그 대상에 대한 거리를 항상 전제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이 존재론으로서 존재자의 본질을 물을 경우 이는 존재자 전체의 밖에 설 수 있는 입장을 전제하는 것이다. 존재자 전체의 밖에 설 수 있는 존재자란 존재자 전체의 근거가 되는 존재자 즉 최고의 존재자일 수 있을 뿐이다. 이에 신을 최고의 존재자로 보는 고대와 중세의 형이상학이란 신의 입장으로부터 존재자 전체를 보는 것을 의도했으며 이에 대해 근대에서는 인간의 이성을 최고의 존재자로 보아 이러한 이성의 입장으로부터 존재자 전체를 보는 것을 의도했던 것이다. 이러한 최고의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 전체를 정초하는 것인 바 그것은 그 자신의 근거일 수 밖에 없으며, 이에 고대와 중세의 형이상학에서의 신이 자기자신의 근거인 것처럼 근대의 이성은 자기자신의 근거이다. 또한 존재자 전체를 이론적으로 파악하려는 전통적 형이상학에 있어서는 존재자 전체로부터의 초월이란 항상 존재자 전체로부터의 이론적 초월이며, 이에 존재자 전체의 초월을 가능케 하는 최고의 존재자 역시 항상 존재자 전체를 이성적으로 관조하는 존재자로서 드러났다. 고대와 중세에서 신은 최고의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정신으로서 드러나며 근대에서도 인간은 이성적 존재자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고대와 중세에서는 인간이성이 존재자 전체를 초월할 수 있는 근거 다시 말해 인간이 형이상학을 추구할 수 있는 근거는 인간이성이 신적 이성을 닮았다는 데에 있었던 반면에, 인간이 최고의 존재자로서 승격되는 근대에서는 인간이성은 그 자체로서 존재자 전체를 초월하는 능력을 갖는 것으로서 생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형이상학에서의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은 동시에 초월을 감행하려는 의지에 찬 존재자이며, 이에 니이체의 의지의 형이상학이라는 것도 사실은 전통형이상학의 전복이 아니라 이미 전통형이상학에 은닉된 채로 존재하면서 사실은 그러한 형이상학을 근저에서부터 규정하고 있는 근본경향을 극단적으로 밀고나간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니이체의 철학을 전통형이상학의 극복자가 아니라 그것의 완성자로서 평가하는 것이며 그가 보기에는 최근 소위 상호주관성이니 인간의 언어를 궁극적인 의미부여의 원천으로 보는 사조들 역시 존재자 전체에 대한 표상의지를 인간의 본질특성으로 간주하는 전통형이상학의 틀 내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에게는 전통형이상학의 극복을 내세우는 그 모든 근대와 최근의 사조들이 존재-신-론으로서의 전통형이상학의 연장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하이데거 역시 전통형이상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존재자의 본질을 즉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이해하고자 한다. 그가 존재를 새롭게 문제 삼아야 한다는 것도 단순히 존재에 대한 사변적인 물음을 농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존재자 전체를 보다 진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존재자 전체를 보다 참으로 이해하는 것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존재자 전체와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며 우리의 삶은 풍요롭고 진정한 삶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 역시 존재자 전체를 초월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는 존재자 전체를 넘어서 그것의 근거로서의 신이나 인간 등의 최고의 존재자에로 초월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존재론이 존재하는 한에 있어서의 모든 존재자에 공통된 근본구조와 존재자 전체의 최종적 근거에 대한 이론적 파악을 목표했다면 하이데거 역시 존재자 전체의 본질과 존재자 전체가 그렇게 존재하게 되는 근거를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 그는 존재자 전체에 대한 이론적 거리를 취하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실로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연에서 초월의 사건을 문제삼고 있으나 이러한 초월은 전통형이상학에서의 초월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의 심층에서 일어나는 초월의 사건을 묻고 있다. 그는 이 강연에서 이러한 초월의 사건에서 일어나는 것을 철저히 이해하고 그것이 일어나는 그대로 기술하려는 현상학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파악하기 위해서 존재자 전체를 초월하는 것이 형이상학이라면(전집 9, 118 쪽 참조) 하이데거는 우리 현존재의 심층에서 일어나는 형이상학적인 근본사건을 묻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근본사건이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의 본질로서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존재자 전체를 초월하려는 이론적 의지가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비롯한 존재자 전체가 초월되면서 그것들이 그 자체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사건이 물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이 경우 드러나는 존재자의 본질이란 형이상학에서 파악된 존재자 모두에게 공통된 근본구조가 아니다. 또한 존재자 전체가 이렇게 자신을 개시하면서 진정으로 존재하게 되는 근거로서의 존재 역시 전통형이상학에서와는 전혀 다르게 이해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개별과학 뿐 아니라 전통적 형이상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도 이미 전제되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열리는 사건을 묻는 것이다. 이에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연은 사실은 현존재의 심연에서 일어나는 초월의 사건을 물음으로써 전통형이상학의 가능근거를 묻는 것이며 전통형이상학의 근거에로의 이러한 진입을 통하여 전통형이상학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2.3. 초월과 불안

 

 

이 강연에서는 존재자 전체의 초월은 불안이란 근본기분에서 일어나는 것으로서 기술되고 있다(전집 9, 117 쪽). 불안이라는 근본기분에서는 우리가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서 관계하면서 그것에서 우리 삶의 의지처를 찾았던 존재자 전체가 미끄러져 달아나 버리며(entgleiten) 또한 그러한 존재자 내에 매몰되어 있었던 일상의 우리 자신도 우리에게서 미끄러져 달아나 버린다. 그 이전 우리에게 의미있는 것으로 나타났던 모든 것은 불안이라는 근본기분에서 무의미한 것으로서 나타나며 이를 통해 존재자 전체가 초월되는 것이다. 불안 속에서는 일체의 사물과 우리 자신이 아무래도 좋은 것으로 되어 버린다. 이는 존재자 전체가 우리에게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바로 미끄러져 달아나는 식으로 우리에게 다시 밀려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자 전체가 미끄러져 달아나 버림으로써 어떠한 의지처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태가 우리를 엄습해 오는 것이다. 이러한 불안이라는 기분 안에서 우리는 '무엇인가가 그 어떤 존재에게 섬뜩하다'(Es ist einem unheimlich)고 말한다. 여기서 무엇인가(es)와 그 어떤 존재에게(einem)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무엇에 대해서 그리고 왜 우리가 섬뜩해 하는지를 말할 수 없다. 그저 전체에 있어서 왠지 섬뜩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포와 불안은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존재자를 어떤 특정한 이유 때문에 두려워 한다. 공포에 있어서는 우리는 공포의 원인을 분명히 파악하는 것에 의해 그것을 극복하는 방안을 강구할 수 있다. 그런데 불안에 있어서는 파악가능한 어떤 특정한 존재자가 아니라 전체가 문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안의 경험에서 항상 어떤 특정한 존재자로 인하여 기뻐하고 두려워 하는 우리의 일상적인 존재 자체도 우리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것으로 나타나며, 이에 불안의 근본기분에서 불안해 하는 우리란 이러한 일상적 존재가 아니라 이러한 일상적 삶에 의해서 은폐되어 있었던 그 어떤 존재(einem) 즉 현존재(Dasein)인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나'나 '너'가 불안해 하는 게 아니며 불안이란 근본기분에서는 인간 내의 현존재(Dasein im Menschen)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불안은 존재자 전체를 미끄러져 달아나게 하는 까닭에 우리는 불안 안에서 뚜렷한 의지처 없이 '부유한다'(schweben). 이러한 부유의 상태 안에서는 오직 순수한 현존재 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2.4. 불안과 무

 

 

그런데 불안이란 기분을 통하여 현존재를 그가 자신의 일상 안에서 빠져 있던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 다시 말해 초월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통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신인가? 하이데거는 사태 자체에 근거하지 않은 모든 전제를 피하려 하고 있다. 그는 다만 불안이라는 근본기분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고 있다. 불안이라는 근본기분 안에서 자신을 고지하면서 초월을 가능케하는 것은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존재자가 아니며 그렇다고 하여 그것은 존재자 전체를 창조한 피안의 신으로서 자신을 고지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떻든 우리의 모든 개념적 규정을 벗어난 그 무엇이다. 우리가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해 개념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항상 존재자이다. 오히려 불안 속에서 자신을 고지하는 것은 그것에 의해서 우리가 엄습될 때 존재자에 대한 지금까지의 모든 일상적 규정이 의미를 잃어버리고 우리는 침묵에 빠지게 되는 어떤 것이다. 불안이란 근본기분을 통하여 자신을 고지하면서 우리의 관심을 일상적인 존재자 전체로부터 떼어내면서 존재자 전체에 대한 초월을 가능케 하는 것 그것은 존재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無(Nichts)라고 할 수 있다. 무는 불안을 통하여 자신을 고지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하나의 대상 내지 하나의 객체로서 고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엄습하면서 소위 주체로서의 우리를 무색하게 하면서 우리를 우리의 실존의 근저에서부터 뒤흔들어 놓고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을 비롯한 존재자 전체에 새롭게 직면케 하는 것으로서 자신을 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는 존재자 전체와 분리되어서 따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이 경우 그것은 또 하나의 존재자가 될 뿐이다. 또한 존재자는 불안을 통해 소멸되고 무만이 남는 것이 아니다. 이 경우에도 그것은 존재자가 될 뿐이다. 무는 불안 속에서 미끄러져 달아나면서 다시 그러한 것으로서 우리를 섬뜩하게 하면서 몰려오는 존재자 전체와 함께(in eins mit) 그리고 그것에 즉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불안에는 ...로부터 물러선다(Zurückweichen vor...)는 현상이 속한다. 이제 인간은 주체로서 존재자를 표상하면서(vorstellen) 그것을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고찰하고 파악하는 것에 의해서 그것을 자신의 수중에 두려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 앞에서 삼가 물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으로부터의 후퇴는 무에 출발점을 갖는다. 이제 인간은 존재자를 주체의 입장에서 표상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무에 의해 엄습됨으로써 존재자 전체는 미끄러져 달아나는 것으로써 인간에게 몰려오는 것이다.

무는 하나의 실체로서 자신을 내세우면서 인간의 주의를 자신에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거부한다(abweisen). 이러한 거부는 후기 하이데거에서는 존재의 자기은닉으로서 존재자 전체를 개시하면서 자신은 후퇴하는 것으로서 사유되고 있다. 이렇게 거부하는 것으로서의 무는 독자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침몰하는 존재자 전체를 미끄러져 달아나게 하면서 지시하는 것(das entgleitenlassende Verweisen auf das versinkende Seiende im Ganzen)으로서 존재한다. 무는 우리가 접하는 존재자 전체를 미끄러져 달아나게 하면서 우리를 존재자의 존재 안으로 지시하는 것이다(전집 9, 114 쪽, 각주 a 참고). 이렇게 존재자 전체를 미끄러져 빠져나가게 하면서 지시하는 것이 무의 본질 아니 정확히 말해 무의 현성(das Wesen des Nichts) 즉 무화(Nichtung)이다. 무는 인간 주체에 의한 존재자 전체에 대한 논리적 부정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무 자체가 무화한다. 존재자 전체를 미끄러져 달아나게 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의 표상의지의 작용을 중단시키면서 존재자의 존재 안으로 지시하는 이러한 무의 운동 속에서 존재자의 존재는 무에 대한 단적인 타자(das schlechthin Andere)로서 그의 지금까지 은닉되어 왔던 전혀 낯선 성격에 있어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불안이라는 무의 환한 밤에서 존재자가 있고 무가 아니라는 존재자 자체의 근원적인 개시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무가 아니라는 말은 존재자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보족적인 설명이 아니고 존재자 전체에 선행하면서 그것의 개시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인간이성이 아니라 불안이라는 근본기분 안에서 일어나는 무의 무화가 존재자가 그 자체로서 인간현존재 앞에 자신을 개시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전집 9, 115 쪽, 각주 e). 이에 무는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존재케 하는 것으로서의 존재 이외의 것이 아니다(전집 9, 114 쪽, 각주 c). 근원적으로 무화하는 무의 본질이란 현-존재를 존재자 자체 앞에 다시 말해 존재자의 존재 앞에 직면케 하는 것이다. 이에 무는 존재자의 대립개념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존재자의 존재 자신에 속하여 있다. 이는 존재와 무가 공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의 무화의 사건에서 존재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존재하게 되는 바 여기서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자가 단순히 우리 눈 앞에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非隱匿된다는 것, 존재의 빛 안으로 드러섬으로써 우리에게 現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존재자의 본질을 전통형이상학에서와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게 되는 바, 이 경우 존재자의 본질이란 모든 존재자에게 공통된 근본구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사적인 의미에서의 독일어의 본질(Wesen) 즉 존재자의 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존재자가 현성하는 것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사물이든 인간이든 신이든 그것이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엄습하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현성하는 사물을 우리가 경험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경험을 조성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를 엄습해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부응한다(sich fügen)는 것을 의미한다(전집 12권, 149 쪽 참조).

오직 무의 근원적인 개시를 근거로 해서만 인간의 현존재는 존재자에 관계할 수 있으며 그것을 깊이 과학적으로 고구(考究)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과학 역시 이러한 무에의 진입에 의한 존재자의 개시에 근거할 경우에만 자신의 본질적인 과제를 항상 새롭게 수행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제란 지식들을 단순히 수집하고 정리하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자연과 역사에 대한 진리의 전영역을 항상 새롭게 개시하는 데에 있다. 현존재는 그의 본질상 자신과 자신이 아닌 존재자와 관계하고 있는 바 그는 이미 개현되어 있는 무로부터만 그렇게 자신을 비롯한 존재자 전체와 관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현-존재란 '무 안에 진입해 있음'(Hineingehaltenheit in das Nichts)을 의미한다. 무 안에로 진입하면서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존재자 전체를 넘어서 있다. 이러한 넘어섬을 하이데거는 초월(Transzendenz)이라 부른다. 현존재가 무에로 진입하면서 존재자 전체를 초월하고 있지 않다면 현존재는 존재자에 대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관계할 수 없는 것이다. 현존재는 무에로의 진입을 통하여 존재자 전체와 자기 자신 앞에 직면하게 된다. 이에 무의 근원적인 개시 없이는 어떠한 진정한 자기(Selbst)도 자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2.5. 무와 퇴락의 필연성

 

 

그러나 무가 개시되는 불안은 단지 드문 순간에만 일어난다. 이는 무가 우선 그리고 대개는 은폐되고 왜곡된 방식으로 자신을 개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가 우선 대개는 존재자에 매몰되는 것을 통해 일어난다. 우리가 우리의 일상적 영위 속에서 존재자에 마음을 빼앗기면 빼앗길수록 우리는 무로부터 멀어지며 공공적인 피상적인 삶에서 자신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로부터의 이탈은 어떤 한계 내에서는 무의 가장 고유한 의미에 따라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무는 자신에 주의가 쏠리는 것을 거부하면서, 즉 자신을 은닉하면서 존재자를 지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는 끊임 없이 무화하고 있다. 무가 근원적인 형태가 아니라 은폐되고 왜곡된 형태로나마 끊임없이 무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이데거는 무엇보다 현존재가 일상에서 겪는 다양한 고통들에서 보고 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그의 욕구와 인식이 한정되어 있는 게 아니다. 동물은 과거를 기억하지 않으며 미래를 두려워 않는다. 동물은 목전의 순간에 충실하다. 동물은 "이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매일 ... 순간이라는 말뚝에다 짧게 묶여져서 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울도 권태도 느끼지 않는다. 이런 걸 보면 인간은 어처구니 없다. 왜냐하면 그는 동물들 앞에서 인간임을 자랑하면서도 동물이 지니고 있는 행복에 부러운 듯한 시선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도 동물처럼 권태도 없고, 고통도 없이 살고 싶은 것이다." 인간은 그의 일상에서 과거에 대한 회한과 기억 그리고 미래에 대한 공포와 희망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성격을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근저에서 무가 무화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일상적인 삶에서 무는 그러한 부정과 다양한 고통의 형태로 즉 은폐되고 왜곡된 형태로 개시한다.

그럼에도 근원적인 불안과 무의 무화가 현존재의 근저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은 불안이라는 기분이 일깨워지기 위해서는 어떤 특별한 사건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 불안은 어떤 특정한 계기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를 엄습하여 우리의 일상을 전혀 다르게 나타나게 한다는 사실은 불안이 얼마나 깊게 우리의 현존재를 규정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 현존재의 유한성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너무나도 유한하여 우리의 고유한 결단과 의지를 통하여 무에 직면할 수 없는 것이다. 무는 불안이라는 근본기분을 통하여 우리를 엄습하는 것이며 이 경우 현존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무에서 도피하지 않고 그것에게 자신을 열고 이를 통하여 존재자 전체의 존재에 직면하는 것이다. 무는 불안에서만 근원적으로 개시된다. 이러한 근원적인 불안은 대부분의 경우 억눌려 있다. 불안은 항상 존재하나 단지 잠자고 있을 뿐이다. 이에 철학의 과제란 그러한 근본기분이 갖는 의미를 명확히 함으로써 이러한 근본기분을 일깨우고 그것으로부터 도피하지 않도록 촉구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불안에로의 용기(Mut zur Angst)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6.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의 존재론적 차이

 

 

<<존재와 시간>>은 인간이 일상적으로 처하는 세계 즉 인간이 그의 도구들과 관계하는 환경세계로서의 세계만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와 관련 <<존재와 시간>>에서의 불안의 분석에서는 무엇보다 "어떻게 해서 '현존재'가 불안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통하여 자기 자신 앞에 직면하게 되는가?"(존재와 시간, 184 쪽)가 문제였다.'순간'(Augenblick)에서 열리는 세계와 이러한 세계에서 자신을 새롭게 드러내는 존재자 사이의 관계는 <<존재와 시간>>에서는 주제화되지 않았던 것이다.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이러한 관계를 사유하려는 시도가 보이고 있다.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의 불안의 분석에서는 인간이 자신에게로 되내던져진다는 사실보다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의 '있음'(Ist), 존재자의 '존재'(Sein)가 개시되는 사건(Ereignis)이 특히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현존재와 현존재가 아닌 존재자들의 고유한 가능성들은 어떤 의미에서 선물(Gabe)로서 주어지며 존재자 전체는 무의 무화에서 개현한다(aufgehen).

여기서 무는 존재자 전체의 '곁'에 분리되어서 자신을 개현하는 게 아니라 "미끄러져 달아나는 존재자 전체와 함께" 자신을 개현하는 것이다(전집 9, 114 쪽). 이는 다시 이중적이면서도 통일된 방식으로 일어난다. 무는 존재자 전체를 미끄러져 달아나게 하면서도 이를 통해 존재자가 그것의 이제까지 은닉되었던 낯섬의 성격을 띠면서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불안이란 무의 밝은 밤에서 존재자 자체의 근원적 개시 즉 존재자가 있고 무는 아니다는 사태가 일어난다"(전집 9, 114 쪽). 존재자가 있고 무는 아니다는 귀절에서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차이를 사유하고 있다. 무의 무화가 존재자 전체의 개시를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무의 무화를 통하여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존재자 전체가 미끄러져 달아난다는 것은 이러한 존재자가 소멸된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이 존재자의 존재에 대해서 행했던 척도로서의 역할이 박탈된다는 것 즉 그것에 부여되었던 의미가 무의미한 것으로서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척도로서의 존재자의 역할이 중지됨으로써 존재자의 존재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불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자의 존재로서의 존재자의 낯설음이란 존재자를 그 자체에 있어서, 그의 존재에 있어서 존재케 하라는 요구이다. 존재자의 '있음'이 존재자의 규정으로서가 아니라 존재자가 그의 '있음', 그의 존재로부터 이해될 때 이는 존재자가 '순간'에서 열린 진정한 세계로부터 이해되는 것이다. 이러한 '있음'에서는 존재 자체가 자신을 말하고 있다. '있음'에서는 고유한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오면서 수많은 존재자들의 合에 의해서도 비교될 수 없는 고유한 풍요로움이 언표되고 있다 (전집 51, 49 쪽). 이러한 '있음'은 우리가 보통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있음'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예컨데 괴테의 유명한 시귀절인 "<<산봉우리마다 정적이 (있다) ...>>(Über allen Gipfeln/ ist Ruh...)에서의 '있다'(ist)라는 말에는 유일무이의 집수된 풍요로움(das Einzige eines gesammelten Reichtums)이 말하고 있다"(전집 51, 31 쪽). "이러한 유일무이의 단어('ist'라는 단어를 말함:필자)는 너무도 단순하여(einfach) 우리가 그것에 의해 호소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거기에 덧붙일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존재는 극히 명료하게 우리 앞에 개현되어 있다. 이 경우 하이데거는 존재를 명사적인 의미로서가 아니라 즉 모든 존재자에 속하는 가장 일반적인 규정으로서가 아니라 동사적인 의미로서 내지 시간어(Zeitwort)로서 즉 그것의 (우리 인간에 의해서) 처리불가능한(unverfügbar) 의미에 있어서 사유하고 있다. 불안에서의 무의 무화의 경험은 인간이 현존재로 변화되고 어떠한 존재자도 아니면서도 존재자와의 모든 만남을 가능케 하는 것 즉 전체 내지 세계로서의 존재가 자신을 개현하는 사건인 것이다. 무의 무화란 존재자로부터 보여진 존재 즉 그것을 존재자로서 파악하려는 모든 규정을 거부하는 것으로서의 존재의 자기 개현 이외의 것이 아니다(전집 9, 123 쪽).

 

 

3. 전통형이상학의 근거에로의 귀환으로서의 형이상학의 본질에 대한 물음

 

 

3.1. 전통형이상학의 기원으로서의 존재망각

 

 

그러나 이러한 존재 즉 현존재의 눈 앞에 처리가능한 것으로서 존재하는 존재자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은 우선 대부분의 경우 망각되고 있다. 우선 대부분의 경우 인간이 다양한(mannigfaltig) 존재자에 집착하는 결과 그의 삶은 통일된 의미를 결여하고 분산되고 또한 존재자만이 자신을 '존재'로서 주장하는 것이다. 전통적 형이상학에서조차 존재는 망각되어 있다. 실로 전통형이상학은 "모든 것에 단적으로 귀속되면서 모든 것에 공통되어 있고 모든 것을 통일하고 결합하며 그것의 근저에서 결합하고 통일하는 것으로서의 존재를 묻는다." 그러나 존재망각의 결과 형이상학에서는 존재자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는 형이상학에서 존재자처럼(ontisch) 파악된다. 존재자 전체의 근거로서의 존재는 형이상학에서는 현존재의 눈 앞에 처리가능하게 존재하는 존재자에 대한 전적인 타자성에 있어서 사유되지 않는다. 존재자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것으로서의 존재는 이에 하나의 두드러진 존재자로서 즉 최고의 존재자로서 사유된다. "존재와 존재자에서 <존재>를 형성하는 것은 가장 많이 존재하는 것(das Seiendste)으로서 간주된다. 이에 플라톤은 형이상학이 시작하는 시점에서 존재자의 존재를 모든 존재자들 중에서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자로 사유했던 것이다."(전집 51, 45 쪽). 이에 따라 무의 무화 즉 존재의 개현(Lichtung)과 존재자의 현성(Anwesen) 사이의 차이는, 근거지우는 존재자와 근거지워진 존재자 사이의 차이로서 나타난다. 존재자와 존재 사이의 차이는 "우리의 표상이 존재자와 존재자에 부가한"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서 나타난다. "이를 통하여 차이는 구별로 즉 우리의 지성의 산물로 전락한다"(전집 11, 54 쪽). 형이상학은 "명사적으로(nominal) 표상된 존재자"(전집 55, 99 쪽) 즉 인간지성에 의해 처리가능하게 눈 앞에 존재하는 존재자로부터 존재를 사유한다. 다시 말해 존재자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인 존재는 형이상학에서는 눈 앞에 존재하는 존재자를 실마리로 하여 사유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존재는 지속적으로 눈 앞에 현존하는 것(das ständig Vorhandensein) 내지 존재자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현전하는 것(das ständige Anwesenheit)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이해된다. '존재론적 차이'는 존재자와 존재자성 사이의 차이 다시 말해 존재자에 있어서 참으로 존재하는 것 내지 존재자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현전하는 것과, 그에 비춰서 존재자에 있어서 참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 내지 존재자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현전하지 않고 소멸하는 것 사이의 차이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존재자에 있어서 존재자성, 즉 존재자 자체의 일반적 근본구조는 그 자체가 그것이 지속적으로 현전하는 존재일 수 있기 위해서 다시 근거지움을 필요로 한다. 이에 형이상학은 항상 현전한다는 요구를 특별한 방식으로 충족시키는 존재자를 추구한다. 형이상학은 이러한 존재자를 그 자체 내에 존립하는 신적인 것에서 발견한다. 즉 가장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이러한 존재자 즉 최고의 존재자가 모든 존재자를 존재하도록 '만드는'(machen) 존재자이다. 이러한 최고의 존재자는 가장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자인 한 자신의 존재의 근거이다. 모든 존재자는 존재의 다양한 변양들을 나타내는 바 그러한 존재의 순수한 현존(reine Präsenz)이 최고의 존재자인 것이다.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물음은 형이상학에서는 존재자 자체의 일반적인 근본특성들과 존재자 전체의 궁극적 근거에 대한 물음을 의미한다(전집 44, 217 쪽 이하). 형이상학은 모든 존재자 내의 일반적인 아 프리오리한 존재구조에 대한 이론으로서의 존재론과 모든 존재자의 원형으로서 그리고 존재자 전체의 중심으로서의 최고의 존재자를 사유하는 신학의 통일이다. 이에 따라 존재자 전체의 개시를 가능케 하는 세계의 근원적 통일의 개현, 무의 무화 내지 존재의 개현은 통일의 두 가지 방식 즉 가장 일반적인 것의 의미에서의 통일과 가장 최고의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통일에로 나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보편적인 현전으로서의 존재가 가장 지속적으로 현전하는 존재자 즉 신에 근거하는 한 세계의 통일은 궁극적으로는 최고의 존재자를 통하여 가능하게 된다.

존재가 지속적인 현전 내지 지속적인 현존과 동일시됨으로써 존재는 자신을 은닉하는 것 즉 부재하는 것(das Abwesende) 자체, 무상한 것, 몰락하는 것을 현성케 하는 힘을 상실한다. 존재는 그의 충만한 본질에서가 아니라 일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은닉의 차원은 망각되고 말며 존재는 생성의 대립자가 된다. 존재는 형이상학에서는 지속적인 현성을 보장하는 근거가 된다. 이에 따라 사유는 형이상학에서는 본질적으로 근거지움(Begründen)이 된다. "철학은 점차 최고의 원인들로부터 설명하는 기술이 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유하지 않고 <<철학>>에 몰두한다"(전집 9, 317 쪽). 이렇게 존재자 전체를 근거지우는 표상에서는 존재와 존재자는 서로 다른 사물들로서 나타나며 양자 사이의 관계는 근거와 근거지워진 것 사이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형이상학이 '근거지우는 표상'이면서(전집 14, 62 쪽) 존재자 '전체'를 사유하는 한, 신 즉 존재자 전체의 궁극적 근거가 '존재해야만 한다'. 이러한 궁극적 근거는 "현전의 그때그때마다의 각인에 따라 실재하는 것을 야기하는 자(최고의 존재자로서의 창조자)으로서, 대상들의 대상성을 초월론적으로 가능케 하는 것으로서, 절대정신의 운동의 변증법적인 매개로서, 역사적인 생산과정으로서, 가치를 정립하는 권력에의 의지로서 근거지우는 성격을 갖는다"(전집 14, 62 쪽).

 

 

3.2. 전통형이상학에 있어서 근거율(논리학)의 지배

 

 

전통 형이상학에서는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물음은 존재자의 존재자적(ontisch) 근거에 대한 물음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최고의 존재자에 대한 물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바, 그것은 근거율의 타당성을 전제한다. 근거율은 '존재하는 어느 것도 근거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전집 10, 16 쪽)는 원리를 의미한다. 라이프니츠 내지 근대에 있어서 근거율은 "모든 진리에 대해서는(라이프니쯔에 있어서는 모든 참된 명제에 대해서는) 근거가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표상은 그것이 인식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마주치는 존재자들의 근거를 표상에게로 제시해야만 한다. 근거율은 라이프니쯔에 있어서는 "제시되어야 할 근거에 대한 원칙"이다(전집 10, 45 쪽). 이러한 첨예화된 형태에 있어서의 근거율은 그러나 한갓 인식의 원칙일 뿐 아니라 그것의 근거가 확실하게 파악된 존재자만이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존재의 최고의 원칙이기도 하다. 근거율에서는 모든 것을 그것들을 가능케 하는 근거를 확보하는 것에 의해 확실하게 장악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 바, 결국은 인간의 자기 존립의 확보가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근거는 표상하고 사유하는 인간에게 제시되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전집 10, 47 쪽). 이에 근거의 제시에 대한 요구는 "근거가 충분하고 완전히"(전집 10, 64 쪽) 제시될 것을 요구한다. 이는 오직 그 경우에만 대상이 확실하게 (인간의) 수중에 장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은 인간의 궁극적인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존재자 전체의 근거를 묻는 것이다. 형이상학은 인간이 언제라도 파악가능한 궁극적 근거에 의거함으로써 존재자 전체에게서 인간의 표상의지를 벗어나 있는 낯설음을 제거하려 하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존재하기에 표상의지가 항상 되돌아 갈 수 있는 궁극적 근거로부터 형이상학은 존재자를 표상하고 이를 통해 존재자를 자신의 수중 하에 두는 것이다. 형이상학에서 존재자를 근거지우는 근거들은 존재자를 개념파악할 수 있고 지배할 수 있으며 만들어 낼 수 있는 원리들인 것이다. 따라서 존재-신-론(Onto-theo-logie)으로서의 형이상학에서 실로 존재론은 신학에 근거하나 그렇다고 하여 신학이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근거는 아니다. 왜냐하면 최고의 존재자로서의 신이 형이상학에서 문제되는 근거는 존재론에도 신학에도 존재하지 않고 논리학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근거율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유에 있어서는 그 자체 하나의 존재자로서 명제들의 논리적 연관체계 안에 존재하는 (존재자를 창조하는) 신이 존재할 경우에만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신은 이러한 명제들의 논리적인 연관체계 내에서 하나의 객체가 됨으로써 신은 인간의 존립확보를 위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존재가 최고의 존재자로서 존재자 전체를 확실하게 확보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과 존재자 전체가 처리가능한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은 동일한 과정이다. 존재자는 그것에 고유한 근원성에 있어서 인간의 관심대상이 되는 게 아니라 오직 인간의 안전확보라는 관점에서만 인간의 관심대상이 된다. 사물은 자체로부터 현성하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형이상학에서는 인간은 사물에 대한 근원적인 가까움(Nähe)을 잃어버렸다. 인간을 비롯한 존재자 전체가 자신의 근원적인 본질에로 해방되는 무의 무화의 사건, 존재의 개현의 사건은 망각되어 있는 것이다. 전통형이상학에서는 존재자 전체를 대상으로서 자신의 지배하에 두려는 권력에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 형이상학의 역사란 이러한 주체와 권력에의 의지라는 원리가 갈수록 우위를 점하는 과정이며 이에 하이데거는, 전통형이상학의 근저에서 작용하는 이러한 권력에의 의지를 자신의 철학의 원리로 삼아 극단에 이르기까지 밀고 나간 니이체의 형이상학을 형이상학의 완성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3.3. 하이데거에 있어서 존재물음과 형이상학의 극복

 

 

3.3.1. 무의 무화의 경험과 형이상학의 극복

 

 

하이데거의 사유에 있어서도 존재는 어떤 의미에서 존재자에 대한 근거라고 말할 수 있다. 존재는 존재자를 현성케 한다. 그러나 근거의 본질과 존재자를 현성케 하는 존재의 운동은 하이데거에 있어서는 전통형이상학에서와는 전혀 다르게 사유되고 있다. 근거에 대한 전통형이상학적인 파악에서 근거는 인간이 근거를 장악하는 것을 통하여 존재자 전체를 장악하기 위하여 인간에게 제시된다. 이에 전통형이상학에서 근거는 항상 개념적으로 투명하게 파악될 수 있지 않으면 안된다. 이에 대해 하이데거에 있어서 존재자의 근거에로의 진입은 인간에 의해 장악될 수 없고 근거율에 의거하여 개념파악될 수 없는 근거에로의 진입이다. 근거로서의 존재는 "우리가 <<세계의 설명>>을 위하여 이용하는" 대상이 아니다(전집 51, 20 쪽). 장악가능하게(verfügbar) 눈 앞에 현존하는 존재자로부터 볼 때, 존재는 어떠한 존재자도 아니기 때문에 무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무로서의 존재는 존재자를 근거율에 의거하여 우리가 추구해 들어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존재는 이에 존재자로부터의 개념파악으로부터 단적으로 빠져 달아난다. 존재는 이런 의미에서 심-연(Ab-grund)이다(전집 51, 62 쪽 이하). 그러나 이러한 심연으로서의 존재에 우리는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 모든 존재자가 단적으로 부재하는 상태로서의 공허한 무라는 표상에 떨어지지 않고 어떻게 무가 사유될 수 있는가? 우리는 위에서 무 즉 심연으로서의 존재의 경험은 불안이라는 근본기분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보았다. 불안이란 근본기분에서 우리들에게 친숙한 일상적인 세계는 의미를 상실한다. 우리는 불안의 '근거'를 근거율에 의거하여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불안 속에서 우리를 엄습하는 무는 개념파악의 공격(Angriff)으로부터 빠져 달아나기 때문이다. 무는 우리를 단적으로 엄습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의 근거는 더 이상 물어질 수 없다. 무의 본질은 심-연적이며 은닉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 동안 친숙한 세계의 파괴를 통하여 존재자는 우리에게 전혀 낯설게 열린다(전집 9, 114 쪽 이하). "무화는 현존재에게서 자명하고 낯익고 처리가능한 것으로서의 존재자를 앗아가고 그에게 존재자를 <<경탄>>(Staunen)을 불러일으키는 낯선 존재에 있어서 되돌려 준다." 무의 무화는 단순히 우리에게 친숙했던 것을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가 '있다'는 것 즉 존재자의 장악불가능한 자체 내 존립(das unverfügbare Insichruhen)을 증여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친숙한 존재자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사건인 불안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존재자와 새로운 방식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불안 속에서 존재자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존재자 자체를 방기한다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에 우리가 매몰되어 있는 상태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다시 획득하는 것 즉 존재의 빛 안에서 존재자를 새롭게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불안으로부터 편안함(Geborgenheit)이, 무로부터 존재가 열리는 것처럼 존재자로부터의 분리(Abscheidung) 즉 은퇴함(Abgeschiedenheit:이는 잘 알려져 있듯이 하이데거에 의하여 높이 평가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표현이다)을 통해서 존재자에 대한 새롭고 심화된 관계 즉 새로운 세계관계가 개현되고 '초월론적인 거리'로부터 '존재론적이고 존재적인 친밀성'이 개현된다."

불안에서의 무의 무화의 사건은 이에 존재자가 비은닉되는(unverborgen) 다시 말해 존재자가 현성하는 사건이다. 불안에서 현존재는 '왜 존재자는 있고 무는 아닌가'라는 물음에 의해 엄습된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물음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존재자의 개시 내지 비은닉성을 위해 후퇴하는 무의 무화의 사건 내지 존재의 개현(Lichtung)의 사건에 대한 물음이다. 이러한 물음은 존재자 전체를 최고의 존재자로 거슬러 올라가 근거지우라는 요구가 아니고 존재자 전체를 드러내면서 자신은 후퇴하는 존재의 개현에로 보다 더 깊이 진입하고 그것을 통해 존재자를 보다 더 본질적으로 경험하라는 요구이다. 형이상학이 그러한 물음을 설정할 경우 형이상학은 모든 존재자의 근거로서의 최고의 존재자에로 다가간다. 이에 형이상학은 존재를 그 자체에 있어서 사유하지 않는다. 형이상학은 존재자 전체가 자체로서 현출하게 하는(hervorkommenlassen) 존재의 개현의 사건 그렇게 현출케 하면서 자신은 후퇴하는(sich entziehen) 사건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 결과 존재가 밖에 머물게(ausbleiben) 될 뿐 아니라 이러한 존재의 밖에 머물음 자체가 형이상학적 사유를 통하여 배제되는(ausgelassen) 것이다. 이에 무의 무화의 경험은 궁극적으로는 형이상학적인 근거지움의 의지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 다시 말해 근거율 내지 논리학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무엇보다 "누구나 갖고 있고 그것으로 슬그머니 도피해가는 우상들로부터"(전집 9권, 122 쪽)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3.3.2. 존재와 물(物, Ding)의 경험

 

 

무의 무화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경험은 그것이 주체측으로부터의 개념파악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증여되는 것인 한 어떠한 존재자로부터도 설명될 수 없다. 이러한 존재자의 존재, 그의 본질적인 현성(동사적 의미에서의)에 있어서의 존재자는 그 자체가 더 이상 근거지워질 수 없는 심-연(Ab-grund)이다. 존재자 자체의 개시 즉 존재자의 존재는 하나의 선물(Gabe)로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수용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새롭게 드러난 존재자를 物(Ding)이라고 부르고 있다.

존재자의 존재, 物의 物化(das Dingen des Dinges)는 존재의 개현 내에서 일어나면서도 그것은 그 편에서 후퇴하는 존재의 개현을 集收하는 것으로서 존재한다. 존재는 존재자 안으로 다른 어떤 것에 의해 매개되지 않고 직접적으로 진입한다(전집 54, 222 쪽 이하). 이에 인간주체 편으로부터의 모든 파악시도에서 벗어나 자신 안으로 후퇴하는 존재의 성격은 사물의 본질에게도 속하는 것이다. 사물은 '그 자체 내에 존립한다.' 존재자가 자체 내에 존립한다는 것은 존재자가 실로 자신을 드러내나 동시에 비밀스런 방식으로 자신 안으로 후퇴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사물은 자신 안으로 되돌아가는 식으로 개현하는 것이다. 수수께끼 같은 은닉이 사물의 본질에는 속한다. 예컨데 하나의 돌을 우리가 들 때 우리가 묵직하게 느끼는 돌의 무게에는 "인간 편으로부터의 모든 침입을 거부하는" 성격이 속해 있는 것이다(전집 5, 33 쪽). 존재자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단지 그것이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식으로 우리에게 비은닉되어 있을 뿐이다. 존재자가 이러한 순수한 존재에 있어서 개시될 경우 그것은 한편으로 자신을 은닉하는 것이다. 이러한 은닉을 통하여 존재자는 그 자체 내에 존립하며(in sich stehen) 우리의 표상의지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는 자립성과 내적인 존속(die innere Beständigkeit)을 갖는 것이다. 존재자가 이렇게 자신을 은닉하는 것에 대한 경험에서 존재자는 보다 고양된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에 최고의 존재자에로 우리가 거슬러 올라가 존재자를 정초하는 것을 포기할 때, 우리는 가장 가까운 곳 즉 "우리가 우리에게 아무 것도 꾸미지 않을 때 우리가 그곳에서 살고 죽는" 지반에 이르는 것이다(전집 8, 16 쪽 이하). 이러한 단순소박한 세계는 현실과 배후세계에로의, 존재와 존재자에로의, 현상과 '물자체'에로의 어떠한 분리도 갖지 않는 세계이다. 이에 "사유는 그것이 보다 높이 올라가면서 형이상학을 초월하고 어느 곳에선가로 지양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이 가장 가까운 것의 가까이로 되돌아 감으로써 형이상학을 극복한다"(전집 9, 352 쪽). 이러한 가장 가까운 세계에서 우리는 형이상학과 과학의 밖에 서 있다. 여기서는 피고 있는 장미는 피고 있는 장미일 뿐이며 우리가 추적할 수 있는 근거들의 결과가 아니다. "장미는 왜(Warum)라는 이유 없이 존재한다. 그것은 피어나기 때문에(weil) 피어난다. 장미는 장미 자신을 주목하지 않고 사람들이 그것을 보는 지를 묻지 않는다"(전집 10, 68 쪽). 장미는 근거들을 갖다 대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근거들을 갖다 대는 것은 장미에 대해서는(von der Rose) 타당하나 장미에게는(für die Rose) 타당하지 않다. 즉 근거를 갖다 대는 것은 우리들의 표상의 대상인 한에 있어서의 장미에 대해서는 타당하나, 자체 내에 존립하는 한에 있어서의 즉 단순히 장미인 한에 있어서의 장미에게는 타당하지 않다. 피어남의 때문(weil)은 위의 시구에서 "피어남이 아니면서 다른 곳에서 그것을 정초해야만 하는 다른 어떤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위의 시구에서의 '때문에'는 피어남을 단순히 그것 자신에로 가리키며 자신의 근거를 자체 안에 갖는다"(전집 10, 10 쪽). '때문에'는 실로 근거를 말하는 것이나 이러한 근거는 장미 자체의 피어남이다. 이러한 '때문에'에서 우리는 사태를 그 자신에 맡긴다. 장미는 거기에 존재한다. 그것은 그것의 충만함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근거들과 원인들을 동원하여 존재자의 현성을 정초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소용이 없게 된다. 존재자는 자신의 진리에서 明證的으로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것의 진리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개념파악하려는 주체 편의 어떠한 노력도 필요하지 않는 것이다. 장미는 존재의 개현에 있어서 전혀 낯설게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러한 낯설음은 근거지우려는 표상의지의 대상으로서의 존재자가 갖는 낯설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대상으로서의 존재자가 갖는 낯설음은 표상의지에는 그것을 위협하는 것으로서 나타나며 이에 어떻게든 제거되어져야 할 것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근거지움의 표상의지는 지속적으로 현존하고 이에 인간이 언제나 의거할 수 있는 근거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물이 근원적으로 현성할 때 갖는 낯설음은 아름다움으로서 나타난다. 사물의 낯설음은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황홀하게(entzücken) 하는 것이다.

존재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 소박한 존재자에 머물면서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의 개현 즉 존재자의 개현을 경험하는 것만이 필요하다(전집 54, 222 쪽). 존재는 그 경우 모든 존재자에서 발견되는 가장 일반적이고 이에 가장 내용이 결여된 공허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존재는 또한 결코 도구적인 존재(Zuhandensein)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며 이러한 도구존재는 현존재의 목적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의 개현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존재자의 존재는 다른 것과의 비교를 절하는 유일무이의 것이며 소박하면서도 드문 풍요로움(das Einfache des seltenen Reichtums)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전집 48, 325 쪽). 이러한 존재의 유일무이의 풍요로움은 주체가 처리할 수 있는 수많은 존재자들을 합해도 도달될 수 없는 것이다.

 

 

3.3.3. 시간으로서의 존재

 

 

무의 무화에 있어서 의미를 상실하는 세계는 결국은 형이상학에 의해서 건립된 <세계>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에 있어서는 과학과 기술에 의해서 규정된 세계이다. 형이상학과 과학과 기술에서는 세계는 우선은 서로 분리된 채로 존재하는 존재자들의 합으로서 나타난다. 왜냐하면 존재망각의 결과 오직 존재자 만이 존재하고 그와 더불어 모든 존재자는 자기 자신을 고집하고 자신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형이상학과 과학은 근거율에 의거하여 존재자들을 상호간의 정초연관(Begründungszusammenhang)에로 편입시킴으로써 존재자 전체의 통일을 회복하려고 한다. 무의 무화를 통하여, 존재자는 그것에 부여된 정초연관으로부터 즉 형이상학적인 세계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그것을 통하여 존재자는 자신의 고유한 존재에로 내보내어 진다. 그런데 무가 파괴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존재자 전체에 대해서 자신을 내세우는 인간의 자기주장이다. 그리고 인간이 이렇게 자기주장에의 의지 즉 권력에의 의지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모든 존재자들 역시 자기주장 내지 권력에의 의지의 담지자로서 나타난다. 인간의 존재상태와 인간이 관계하는 존재자 전체는 서로 내밀한 상관관계를 갖는 것이다. 이에 주체로서의 인간은 여타의 존재자들의 자기주장에 대해서 자신을 관철하려 드는 것이며 이러한 자기관철은 근거지움에의 의지로서, 즉 서로 자신을 주장하면서 고립분산된 존재자 전체를 하나의 정초연관 안에 편입시키려는 의지로서 나타난다. 이에 무의 무화가 파괴하는 것은 인간의 자기주장일 뿐 아니라 존재자 전체의 자기주장과 존재자 전체 상호 간의 고립분산이다. 무의 무화에서 파괴되는 것은 존재자 자체가 아니고 일견 존재자의 자립성을 보장해 주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상은 존재자를 존재자에 낯선 근거지움의 연관체계에로 편입시키는 계기가 되는 존재자의 자기주장(Selbstbehauptung)인 것이다. 존재자가 자신을 고집하는 것이 파괴됨으로써 존재자는 그의 근원적인 존재에 있어서 현성하게 된다. 이러한 존재,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성(Anwesung)은 한갓 자신의 존속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는 현성이나, 그렇다고 하여 지속에의 집착이란 의미에서의 지속을 필연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전집 51, 112 쪽). 이러한 근원적인 현성은 생성(genese)이다. "... 생성, 현성은 한갖 현전(Anwesenheit)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現出과 떠오름(Hervor-und Aufgehen)을 의미한다"(전집 51, 113 쪽). 눈 앞에 현존한다는 의미에서의 단순한 현전은 현성으로부터, 현출과 떠오름으로서의 현성에 본질적으로 속하는 것 즉 귀환(Zurückgehen)과 하강(몰락: Untergehen)을 제거하고자 한다(전집 51, 113 쪽 참조). 하강(몰락)과 떠오름 사이에는 "매개하는 어떠한 것도 없다. 양자는 자체에 있어서 본질상 직접적으로 서로 속하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는 어떠한 이행도 없다"(전집 54, 185 쪽). 비현성(Abwesen) 내지 하강(몰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예컨데 "... 태양의 하강(일몰)은 태양의 <파괴>가 아니며 그것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전집 55, 50 쪽). 하강(몰락)은 은닉에로의 진입이다. 은닉에로의 진입이라는 의미에서의 하강(몰락)은 오히려 <존재>이며 아마 그야말로 존재 자체 이다(전집 55, 50 쪽). 그때그때마다 현성하는 것이 현출하는 곳과 그것이 하강하면서 되돌아가는 곳은 동일한 것(das Selbe)이다. 현성하는 것이 현출하고 하강하는 근원은 하이데거에 따르면 아낙시만더에서는 아르케(arche)로서 즉 강요하는 곤경(die nötigende Not)로서 사유되고 있다. "강요하는 곤경은 모든 현출과 모든 하강이 그것에 따르는 것이다"(전집 51, 106 쪽). 이러한 강요하는 곤경은 현출과 현출하는 것을 자유롭게 한다. 그러나 이렇게 현출과 현출하는 것이 자유로와진다는 것은 그것의 존재가 그것의 임의에 맡겨진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주재하는 것으로서의 아르케에 다시 귀환하고 그것에 따르는 식으로 자유로와지는 것을 의미한다(전집 51, 108 쪽).

그러나 현성의 본질에는 현성이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das Immerweiter)에 대한 집착 즉 비본질이 속한다(전집 55, 118 쪽 참조). 따라서 현성이 자신의 본질에서 보존되려면 현출은 동일한 것(근원)에로의 귀환으로서 현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강에서는 (존재자 전체를) 주재하는 시원적인 근원의 힘이 개시되며 그것은 이러한 하강(몰락)을 통해서 자신을 개시하고 현성하는 것의 자기주장을 극복한다. 불안의 경험 내에서 일어나는 무의 무화는 존재자의 자기주장을 통해서 은폐된 하강(하강)의 차원이 개시됨으로써 존재자의 자기주장이 극복되는 사건이다. 이러한 하강에로의 이행을 통해서 즉 자신의 존속에 대한 현성하는 것의 집착의 극복을 통해서 현성하는 것은 그때그때마다의(jeweilig) 자신의 현성에 따르게 된다. "그러한 방식으로 그것은 그때그때마다 존재자에게 귀속된 언제(Wann)와 얼마동안(Wielange)을 충족시킨다"(전집 51, 120 쪽). 현성하는 것은 그것이 그것에게 부여된 그때그때마다의 체류의 시간(Weile)을 따름으로써 현성한다. 이러한 체류의 시간은 "그때그때마다의 은혜로운 그리고 선사된 시간(die je günstige und gegönnte Zeit)이다"(전집 51, 120 쪽). 존재란 그때그때마다 보내고 선사하고 섭리하는 시간(die schickende, gönnende und fügende Zeit) 자체이다(전집 51, 121 쪽). 이러한 <<시간>>은 서로 동질적인 시점들(Jetztpunkte)의 연속이 아니다. <<지금 시간이 몇시이다>>(Die Zeit ist...)라고 말할 경우 이는 우리가 아직 시간을 본래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할 때이다>>(Es ist Zeit)라고 말할 경우에야 우리는 시간을 보다 근원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즉 시간이란 항상 무엇이 일어나고 도래하며 사라질 시간이다. 이에 시간이란 현성과 귀속의 성격을 갖는다. 존재로서의 시간은 그때그때마다의 체류의 시간을 현성하는 것에게 귀속시키는 것이며 이에 상응하여 현성하는 것은 그때그때마다의 滯留하는 것(ein je-weiliges)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전집 51, 121 쪽).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에 귀속된 시간에 따라서 체류한다는 것이며 현성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강에로의 상승의 이행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전집 51, 121 쪽). 존재로서의 시간은 존재자를 그때그때마다의 체류하는 것으로서 현출시키고 다시 소환하는 것이다(전집 54, 209 쪽). 시간은 상승과 하강을 주재하는 동일한 것(das Selbe)으로서의 (존재의) 개현(Lichtung)이며 모든 존재자가 자신의 체류시간에 상응하여 체류하는 영-역(Be-reich)이다. "그리이스적인 의미에서의 <<시간>> 즉 크로노스(chronos)는 본질상 (그리이스적인 의미에서의) 토포스(topos) - 우리는 이를 <<공간>>(Raum)으로서 번역하고 있는 데 이는 오역이다 -에 상응한다. 토포스는 어떤 것이 속하는 장소(Ort)이다. 예컨대 불과 화염과 공기는 위에, 물과 땅은 아래에 속한다. 토포스가 존재자가 현성하는 데에 있어서 속하는 장소를 주재한다면 크로노스는 존재자의 그때그때마다의 현상과 소멸이 속하는 그에게 (귀속된) 역운적인 <<그 때>>와 <<언제>>(geschickhaftes <<dann>> und <<wann>>)를 주재한다"(전집 54, 209 쪽 이하). 이에 대해 "<<세계>>가 하나의 동형적인(gleichförmig) 객체가 되어버린 주체로서의 근대인에게는 시간조차 하나의 도구적인 객체가 된다"(전집 54, 211 쪽). 인간이 시간을 계산하고 이를 통해 시간을 <<요소>>로서 남용함으로써 "인간이 아무리 시간을 아껴도 갈수록 시간은 없게 되고 이에 기술의 가장 작은 노동과정에까지 시간의 절약과 경제적 운용이 필수적이 되는 상태가 생기는 것이다"(전집 54, 211 쪽). 이에 대해 그리이스인들에게는 인간과 모든 존재자는 본질적으로 그때그때마다 부여하고 부여된 시간으로서의 시간의 주재하에 존재한다. 시간은 도처에서 존재자의 현출과 소멸을 주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강에로의) 이행으로서의 현성은 이미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시아에 있어서 지속적인 현전(die ständige Anwesenheit)으로 변화한다. 이데아는 '항상 존재하는' 범형이며 우시아는 '항상 이미' 놓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는 생성과의 대립에서 사유되었다. "... 시간성과 역사성 대신에 지속하는 현전으로서의 영원이 들어선다." 인간이 존재자들로부터 받는 모든 위협은 인간의 안전을 궁극적으로 보장하는 영원히 현존하는 것에의 귀환을 통해 극복되는 식으로 되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시아, 데카르트의 레스(res), 칸트에 있어서의 대상성, 헤겔의 절대정신, 니이체의 권력에의 의지, 기술에서의 부품으로서의 존재는 지속적인 현전의 방식들이다. 그러나 부재하는 것, 소멸하는 것, 몰락하는 것들은 지속적인 현전이란 의미에서의 존재라고 불리워지는 것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힘들이다. 이에 모든 그러한 힘들을 즉 존재와 무를 그들의 상반하는 공속성에 있어서 파악하는 새로운 존재개념 아니 새로운 존재경험이 획득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이미 현재 내지 현성의 의미를 '순간'(Augenblick)으로부터 사유했다. 현재와 현전은 이제 '하강에로의 상승의 이행'으로서의 체류이다. 이러한 현성은 그것으로부터 비현성(Abwesen)이 제거된 것이 아니라 비현성 안에 '비호된'(geborgen) 현성이며 비현성에 결부된 현성이다. 이러한 현성만이 '창조적인 현성'이다. 하이데거에게는 '현성'은 '창조적인 생기'라는 근원적인 의미를 갖는다. 주어진 것에 집착하지 않고 창조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하강과 은닉에 자신을 열지 않으면 안된다. "... 창조하는 자는 경화된 것과 고정된 것에 대해서는 파괴하는 자이다."(전집 44, 136 쪽).

 

 

4. 결어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하이데거는 실로 형이상학의 본질을 묻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을 추구하지 않고 현존재의 근본사건으로서의 형이상학적인 사건 즉 초월의 본질을 묻고 있다. 전통적 형이상학이 존재자 전체의 궁극적 근거를 이론적으로 파악하려는 방식으로 존재자 전체를 넘어서 묻고 있는 반면에, 현존재의 근본사건으로서의 초월의 사건에서는 불안이란 근본기분에서 존재자 전체가 초월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초월의 사건을 통해서 존재자 전체가 이미 자신을 드러내고 있기에 달리 말해서 이러한 초월의 사건을 통해서 존재자 전체의 존재가 이미 현존재에 의해서 이해되고 있기에, 형이상학적인 초월 즉 존재자 전체에 대한 이론적 파악도 가능하게 된다. 다시 말해 하이데거는 전통형이상학도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전제하지 않으면 안되는 근거에 향하면서 형이상학의 본래의 본질을 물으려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형이상학의 역사란 형이상학의 본질이 아니라 비본질(Unwesen)이 갈수록 전면에 들어서는 역사이며 형이상학의 본질이 갈수록 은폐되어 가는 역사인 것이다. 형이상학에서는 존재자 전체를 넘어서 묻는 것은 존재자 내에 머물러 있는 바 그것은 존재자 전체를 초월하되 최고의 존재자를 향하여 초월하는 것이며 그것은 최고의 존재자로부터 보다 낮은 존재자를 근거지우는 식으로 존재자 전체를 표상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존재자 전체의 위협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현존재의 근저에서 일어나는 초월의 운동은 무의 무화를 통하여 일어나는 바, 존재자 전체의 초월은 무의 무화에로 자신을 여는 것 이외의 것이 아니다. 그러면 무는 여타의 존재자를 근거지우는 최고의 존재자와 같은 것인가? 오히려 무의 무화 안에서 존재자 전체는 그것의 근원적인 충만에 있어서 자신을 드러내고 이에 더 이상의 정초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다. 존재자는 자신의 근거로서 드러나는 것이며, 현존재의 과제는 그 존재자의 외부에 존재하는 그것의 근거를 파악하는 것에 의하여 존재자를 자신의 통제 하에 두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의 충만한 진리에 자신을 여는 것, 존재자를 그러한 진리로서 존재케 하는 것 이외의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 형이상학은 모든 것을 자신 앞에 세워 두고 표상하면서(vor-stellen) 항상 파악가능한 궁극적 근거에로 그것들을 환원시키는 것에 의해 그것으로부터 여타의 존재자를 자신의 통제권 하에 두려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궁극적 안전을 확보하려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의 비본질은 모든 존재자가 인간의 수단으로서 나타나는 과학기술시대로서의 현대에서 정점에 달한다. 과학과 기술이란 권력에의 의지로서의 인간주체가 존재자 전체를 계산하고 대상화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존립을 확보하기 위해 정립한 조건인 것이다(전집 9, 303 쪽 참조). 전통형이상학이 존재자 전체를 존재자 배후의 존재자의 일반적 근본구조들과 최고의 존재자에로 환원함으로써 이해하고자 했다면, 근대의 과학(자연과학이든 정신과학이든)도 존재자를 관념적으로 구성된 존재자의 근본구조와 역사에 대한 해석들로부터 이해하려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근대과학의 성격은 '경험적인' 데에 있는 게 아니라 '합리적인'(rational) 데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전통형이상학이든 근대의 과학기술이든 인간이 접하고 사용하는 다양한 존재자들을 지배하기 위해서 관념적인 배후세계(ideale Hinterwelt)를 건설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존재는 인간이 존재자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신중심주의(Theozentrik)로서의 전통형이상학과 인간중심주의로서의 근대의 과학기술시대 사이에는 근대의 과학기술이 신중심주의의 파괴로서 나타났음에도 본질적인 연속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자가 신에 의해서 창조된 것일 경우에 다시 말해 존재자가 신에 의해 미리 합리적으로 사유된 것일 경우에는, 인간의 이성이 주도적인 것이 되고 심지어 자신을 절대적인 것으로서 정립하면서 피조물의 창조자에 대한 관계가 해소되자마자 존재자의 존재는 수학적인 순수한 사유 안에서 사유될 수 있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와 같이 계산가능하고 그리고 실제로 계산되어지는 존재는 존재자를 근대의 수학적으로 형성된 기술을 통하여 지배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은 이제까지의 우리에게 알려진 그 어떠한 도구사용과도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전집 40, 202 쪽). 우리는 머리말에서 왜 과학기술시대가 우리에게 고향이 될 수 없는지를 보았었다. 기술시대에서는 존재자 전체에 대한 지배의지의 맹목적인 관철을 위해서 자연과 인간이 총동원되는 바, 과학과 기술에 의해서 인간을 비롯한 존재자 전체는 "조작가능한 원인들과 근본구조들에로 즉 하나의 관념적인 배후세계"에로 환원되는 것이다. 고향이란 자유로운 인간 개개인의 안식처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고향을 인위적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고향이란 과학과 기술 그리고 형이상학을 추구하기 이전에 또한 그것들이 가능하기 위해서 이미 개시되어 있고,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면서 그 안에서 항상 거주하고 있고 우리의 삶의 지반이 되고 있는 생활세계이다. 하이데거에 있어서는 이러한 세계의 인위적인 건설이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세계가 우리가 진정으로 거주할 수 있는 세계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사건 즉 존재의 개현의 사건이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고향으로서의 세계에서는 존재자는 그것 배후의 관념적인 배후세계에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존재는 인간에 의해서 합리적으로 파악되거나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부터 자신을 여는 것(Von-sich-aus-Aufgehen)으로서 즉 퓌지스(physis)로서 사유된다. 그리고 이렇게 존재가 퓌지스로서 열릴 때 그것은 존재자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 자체가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여는 것으로서(das Aufgehende)의 존재자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는 현대에서는 불안과 경악이라는 기분을 통하여 자신을 은닉된 형태로 드러내고 있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과제는 존재가 이렇게 자신을 고지하는 근본기분에서 자신을 도피하지 않고 그것에 직면함으로써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탄생하고 세계와 존재자 전체가 그것의 본래적인 자태로 존재하도록 행위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는 과학과 기술을 폐기하고 원시적인 전원생활로 돌아가자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과학과 기술을 그것의 한계 안에 두자는 것, 과학과 기술에 의해서 형성된 인위적인 세계가 고향으로서의 세계를 대치하게 하는 게 아니라 과학과 기술의 세계를 그것의 근거인 고향으로서의 세계에 편입시키고 과학과 기술에서 이해된 것보다 근원적인 것에 근거하도록 하자는 것이 요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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