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 |
― 시와 불교적 상상력 ― |
장석주 <시인, 문화평론가> |
연꽃은 진흙 뻘에서 피어난다. 저 물의 정령은 여름 아침 이슬을 머금고 청초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연꽃은 흠결 하나 없는 정결함과 범접하기 어려운 화사함으로 초연하다. 여름 아침 저 초연한 연꽃 앞에서 숙연해지는 까닭은 연꽃이 진흙 뻘에 뿌리를 내리고 있되 그것과 무관하게 물과 태양이 합작하여 빚은 기적이기 때문이다. 연꽃은 진흙 뻘 속에서 청정한 현존을 유지할 수 있는 자양분을 구하지만 진흙 뻘의 칙칙함과 불투명한 윤리성에 종속되지 않는다. 연꽃은 저 스스로의 원심력으로 너끈히 진흙 뻘의 내재적 상징인 무명과 어리석음, 그리고 타락과 오욕이라는 낮은 윤리적 자장(磁場)을 벗어나 고고하고 높은 빛의 세계로 나아간다. 연꽃은 여름 아침이 만드는 기적이다. 무엇이 진흙 뻘 속에서 저것을 수직으로 일으켜 세워 물 위로 떠오르게 했을까. 고요한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이 보여주는 저 찰나적 현존의 눈부심은 우리 내면을 피안에 대한 계시로 환한 빛으로 물들인다.
그러나 아주 섭섭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연꽃은 불교적 상징을 집약하는 꽃이다. 연꽃은 절이요, 만다라요, 부처요, 수행자다. 관음보살이 왼손에 든 연꽃은 중생이 본디 갖고 있는 불성을 뜻한다. 《아미타경》에서 연꽃은 극락정토를 은유한다. 서정주의 시는 인연과 윤회에 대해 말한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에서 바람은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이다.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이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이다. 현생의 세계는 금은(金銀)의 소리가 “지, 징, 지, 따, 찡” 하고 우는 세계다(〈두 향나무 사이〉). 육신이란 제법이 우연히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육신이나 바람은 다를 바 없다. 육신이 흩어지면 우연으로 육신을 이루었던 살과 피와 뼈는 물이 되고 흙이 되고 구름이 되고 바람이 된다. 연꽃을 만나고 가는 바람은 누군가 우연으로 이루었다가 흩어 버린 육신이었을 것이다. 연꽃과 헤어진 바람은 그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고 믿는다. 영원한 이별이 아닌 것은 내세가 있는 까닭이다. 만남은 이별을 불러오고, 이별은 또한 새 만남을 기약한다. 현생과 후생은 전생과 현생이 인연의 끈으로 이어져 있듯 이어져 있다. 바람은 내세에서 연꽃을 다시 만날 것이다. 그러니 헤어지되 너무 섭섭해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 시의 중심 사유는 불교에서 말하는 삼세인연관(三世因緣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석가모니는 사람들을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으로 보았다. 어떤 자는 진흙 뻘 속에 있고, 어떤 자는 진흙 뻘을 벗어나려 하고, 어떤 자는 간신히 물 위로 머리만 내밀고 있다. 열반피안(涅槃彼岸)으로 나아가려는 자는 진흙 뻘 같은, 생계를 세우고 애를 낳아 키우는 현실적 바탕, 즉 세속의 오탁과 생사고해(生死苦海)를 딛고 나아가야 한다. 만해도 “불교가 출세간의 도가 아닌 것은 아니나, 세간을 버리고 세간에 나는 것이 아니라 세간에 들어서 세간에 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미 내 안에 부처가 있고, 부처 안에 내가 있다. 물과 얼음의 관계다. 물이 얼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생이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되는 것이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면 중생이다. 산을 내려오는 길은 곧 산을 오르는 길이다. 내려오는 길과 오르는 길이 한 길이다. 내려옴이라는 관념을 버리면 내려옴과 올라감에는 아무 차이가 없다. 내려옴이라는 관념에 집착하면 내려옴과 올라감의 분별에 갇히는 법이다. 분별에 갇히면 번뇌를 떨쳐낼 수가 없다. 선가(禪家)에서는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不思善不思惡).”고 가르친다. 삼가 선업을 지으려고 굳이 애쓰지 않는다면 악업에 들지도 않는다. 불교를 하나의 제도화된 종교로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것은 이미 우리 의식의 일부로 들어와 있다. 인생을 고(苦)라고 본다든가, 일체가 무(無)요, 공(空)이라는 인식, 그리고 물아일여(物我一如)의 인식은 우리에게 그다지 낯선 사유가 아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불교의 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자연과 사물세계, 나날의 경험들을 의미 있는 상징으로 독해하고자 할 때 윤회·열반·인연론과 같은 불교에서 나온 준거틀에 의지한다. 한국불교 1천 5백 년의 역사 동안에 불교는 이미 우리 안에 일상화, 내면화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불교에서 말하는 교의들은 우리의 사유와 상상세계 속에 녹아 있다. 동아시아인의 사유 체계에는 불교가 이미 종교가 아니라 유전자에 새겨진 고유의 형질과 마찬가지로 생득적이다.
똑같은, 별나도 노란빛을 발하는 하오 5시의 여름 햇살이 아파트 단지 측면 벽을 조명(照明)할 때 단지 전체가 피안 같다 내가 언젠가 한번은 살았던 것 같은 생이 바로 앞에 있다 어디선가 웬 수탉이 울고, 여름 햇살에 떠밀리며 하교한 초등학생(初等學生)들이 문방구점 앞에서 방망이로 두더지들을 마구 패대고 있다 ― 황지우, 〈아주 가까운 피안〉 해 속의 검은 장수하늘소요 눈먼 것은 성스러운 병이다 활어관 밑바닥에 엎드려 있는 넙치, 짐자전거 지나가는 바깥을 본다, 보일까 어찌하겠는가,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었을 때 알지만 나갈 수 없는, 무궁(無窮)의 바깥 : 저무는 하루, 문 안에서 검은 소가 운다 ― 황지우,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황지우의 시에서 불교적 레토릭을 찾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의도하지 않아도 나오는 아주 자연스러운 발상의 산물이다. 그의 시가 보여주는 문자의 율동 속에 내면화된 불교는 이미 언어로 침착(沈着)되어 있다. 그만큼 불교적 사유가 체질화되어 있다고나 할까. 시인은 감각의 표피로 스쳐가는 세계의 한 순간을 날카롭게 붙잡는다. 그때 벼려진 감각으로 감촉한 세계의 순간은 시적 오성(悟性)의 순간이다. 여름 햇살이 “아파트 단지 측면 벽을 조명할 때 단지 전체가 피안”으로 거듭난다. 그 피안의 저쪽에서 난데없이 수탉이 울고, 하교한 초등학생 한 떼가 “문방구점 앞에서 방망이로 두더지들을 마구 패대고” 있다. 하나의 풍경에서 피안과 현실이 찰나적 현상으로 동시 현전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지금-여기 이승의 삶은 동시에 과거 속에 지나간 “언젠가 한번 살았던 것 같은 생”이다. 이 물물(物物)의 세계에서 감각의 존재로 살며 감촉하는 순간들은 처음이 아니다.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되풀이되는 것이다. 다음 시를 보자. “활어관 밑바닥에 엎드려 있는 넙치”가 “짐자전거 지나가는 바깥을 본다”. 수족관이 있고, 그 앞으로 짐자전거 한 대가 지나간다. 그것은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범상한 세계의 한 순간이다. 그 범상한 풍경을 비범한 순간으로 바꾸는 것은 자유자재로 사물의 관계를 비약하는 시인의 상상력이다. 시인은 길거리와 면해 있는 횟집의 수족관 바닥에 엎드려 있는 넙치를 보고, 그 가시적 현상성을 넘어서 욕망과 인연 때문에 현세라는 수족관에 갇힌 ‘나’의 운명을 투명하게 응시한다. 활어관 밑바닥의 넙치는 다시 검은 소로 바뀐다. “저무는 하루, 문 안에서 검은 소가 운다”. 바깥으로 나가지 못 하는 검은 소는 현세의 매임 때문에 고달프고, 그 고달픔 때문에 운다. 안과 바깥의 경계는 뚜렷하다. 이승과 피안은 현재 속에 모호한 형태로 뒤섞여 있다. 생의 안쪽에서 바라보는 바깥은 “알지만 나갈 수 없는, 무궁(無窮)의 바깥”이다. 불교적 사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바깥이 피안에 대한 은유라는 걸 읽어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떠올릴 말 있으면 풀꽃 한 송이 피워 내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사람 떠나 버려진 것들 데리고, 마치 부처의 고행상(苦行像)처럼 뼈만 앙상해질 때까지 견디고 있는 것 같은 풀들 인적 끊겨 길 잃은 것들, 그래도 못난이 부처들처럼 세월을 견디는 그것들을 껴안고, 가만히 제 집으로 데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흙벽 무너지고 덩쿨풀 우거진 폐가 사람살이 떠나 풍화에 몸 맡긴 집, 그 세월의 무게 못 견뎌 문짝 하나가 떨어져도, 제 팔 하나 뚝 떼어 던져주고 홀로 뒹구는 장독대의 빈 항아리, 마치 소신공양하듯 껴안고 등신불이 되는 풀들, 그렇게 풀들의 집으로 고요히 돌아가고 있는 폐가. 그 폐가 앞에 서면 마치 풀들이, 설산 고행을 하듯 모든 길 잃은 것들 데리고 귀향하는 것 같을 때가 있다 풀의 집은 풀이듯 데려와, 제 살의 흰죽 떠먹이고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 ― 김신용, 〈도장골 시편―폐가 앞에서〉 김신용의 〈도장골 시편―폐가 앞에서〉에서 시의 화자는 폐가 앞에 서 있다. 사람이 떠난 뒤 흙벽이 무너지고 풀들은 무성하다. 이 폐가 풍경을 중심 심상으로 펼쳐지는 사유는 불교적이다. 묵언 수행, 부처의 고행상, 못난이 부처들, 소신공양, 등신불, 설산 고행 등이 다 불교와 유관하다. 풀들은 묵언 수행 중이다. 곡기마저 끊고 용맹정진하는 수행의 삼매가 얼마나 깊은지 풀들은 뼈만 앙상하다. 이 수행자들은 “인적 끊겨 길 잃은 것들”을 자비심으로 품는다. 사람이 떠난 집은 소신공양 중이다. 허기진 세월에게 제 팔을 잘라주듯 문짝을 떼어주고, 흙을 구하는 바닥에게는 다리 한 짝을 떼어주듯 서 있던 흙벽을 헐어 내준다. 설산 고행 끝에 한 깨달음을 얻은 풀들은 “모든 길 잃은 것들”을 데리고 저 불법(佛法)의 세계로 귀의하는 중이다. 불법을 굳이 구하지 않아도 불법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화엄경》의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는 “부처, 중생, 그리고 마음 이 셋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心佛衆生是三無別差)”라는 구절이 나온다. 폐가를 무성하게 덮은 풀은 일체중생의 표상이면서 동시에 부처요, 부처를 닮고자 하는 ‘나’의 마음이다. 불교는 계율을 따르고 선정(禪定)을 닦는 승려의 것도 아니요, 산 속에 들어앉은 절의 것도 아니다. 더더구나 불법을 말하는 많은 경들과 교의 속에서 부처를 찾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임제종(臨濟宗)의 선사들은 경전과 좌선 일체를 부정한다. 학인들이 진지하게 물음을 구하면 선사들은 몽둥이 세례를 하거나, 경전은 밑 닦는 휴지에 지나지 않는다거나, 좌선해서 깨달음을 얻으려는 놈은 미친 녀석이라는 말로 능멸하기 일쑤다. 이 능멸은 중생은 본디 부처인데, 굳이 먼 곳에서 부처를 찾는 어리석음에 대한 꾸짖음이다. 임제(臨濟, ?∼867) 자신이 황벽(黃檗, ?∼850)을 만난 자리에서 서른 대의 몽둥이 세례를 받고 홀연 깨달음을 얻는다. 오히려 불교는 대중 속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열반경》에 따르자면 일체 중생에게 불성이 있고(一切衆生 悉有佛性),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 폐가와 더불어 성불하는 저 무성한 풀들을 보라. 시인은 풀들도, 폐가도 불성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불성이란 무엇인가? 부처로 나아가는 기반이요, 촉매다. 《화엄경》에 따르자면 불성은 천지만물에 뻗쳐 있다. 그런 바탕에서 남송 소동파의 “산은 부처의 얼굴이고, 시내는 부처의 설법”이라는 발상이 자연스럽다. 산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풀 한 포기, 길가에 뒹구는 돌 하나에도 부처가 들어 있다.
깨진 얼음장 속에 꽁꽁 얼어 있는 물고기를 보았다 물이 서서히 얼어오자 막다른 길목에서 물고기는 제 피와 살 버리고 투명한 얼음 속에 화석처럼 박혔다 귀 기울여도 심장 뛰는 기척이 없다 조식(調息)을 하는지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사랑하면 사랑에 목숨 묻기도 하듯이 물 속에 살기 위해선 얼음이 되는 것을 두려워 말아야 한다 이글루 짓고 들어앉은 에스키모처럼 은빛 지느러미 접고 아가미 닫고 사방 얼음벽 둘러친 무문(無門)의 집에서 물고기는 다시 올 봄을 아예 잊었다 얼음장이 그대로 고요한 대적광전이 되었다 ― 주용일, 〈얼음 대적광전〉 주용일의 〈얼음 대적광전〉에서 계곡으로 물고기를 잡으러 간 시인은 “얼음장 속에 꽁꽁 얼어 있는 물고기”를 본다. 피와 살을 버리고 투명한 얼음장에 얼어붙어 있는 물고기에서 부처를 본다. 참다운 수행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수행이 깊은 선사가 입적을 하듯 물고기 역시 계곡 물이 영하의 날씨 속에 꽝꽝 얼어붙은 어느 날 홀연 법계로 옮겨간 것이다. 물고기를 품은 얼음장은 대적광전(大寂光殿)이다. 대적광전은 화엄전, 혹은 비로전이라고도 한다. 대적광전은 비로나자불을 모신 절집이다. 그러니까 시인의 상상세계에서 얼음장이 품은 물고기는 비로나자불이다. 마음의 분별을 끊으면 밖에 홀려 물물의 형상에 대한 집착과 안에 홀려 공에 집착하는 현상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마음의 집착에서 벗어나면 일체중생의 현상에서 부처의 해탈을 볼 수가 있다.
무심 속에서 온통 물을 이루는 물방울 물보라 물거품들 수심을 들여다보다 무심코 ! 없을 무(無)에 대해 생각해본다 무욕과 무등(無等)과 무소유의 나날들 그동안 집착하던 것들로 목이 메었다 몸은 벌써 강물에 젖고 마음이 밀물처럼 빠져나간다 무슨 억하심정으로 일생이여. 속세에 갇혀 속수무책인가 나는 유한한 존재로서 세상에 혹하고 싶었다 불혹이든 물혹(勿惑)이든 달랑거리면서 무언(無言)이든 묵언이든 무슨 업이든 생(生)으로. 낚싯줄 몇, 길게 던진다. 파문의 생기(生氣) ! 문득 살얼음 드는 생의 생각들 수초처럼 잠겨 없을 무(無) 없을 무(無) 흘러간다 생이 어떻게 무감동인가 무의미한가 무력한가 무색하여 나는 오늘 흰눈썹울새처럼 이동하고 싶다. 무단횡단하고 싶다 강 ― 남 ― 으 ― 로, 강의 남쪽으로 강의 끝으로, 무한대로 무시무종으로 무조건으로. 가다 보면 공중에 붕(鵬) 뜬 나의 진공(眞空) ! 무색계로 가네 이것이 혹 무릉도원인가 무량수전인가 아슬아슬하다. 춘천 하늘 저녁별이 춘·천·춘·천 깜빡거리고 무심천에 무심히 흐를 것들 뒤돌아보면 흐를 것은 저만치 흘러가 있다. 무심히. ― 천양희, 〈무심천의 한때〉 본래 동서가 없는데 어디에 남북이 있는가. 미망이기에 삼계는 성(性)이고, 깨달았기에 시방은 공(空)이다. 실상(實相)은 곧 무상(無相)이다. 부처를 찾으면 내 안에 있는 부처가 달아난다. 부처를 찾지 않으면 부처는 내 안에 그대로 있다. 부처를 찾아 여기저기를 떠도는 것은 가까이에 있는 것을 먼 곳에서 찾는 고행이다. 천양희의 〈무심천의 한때〉는 불성의 근본은 무(無)요, 공(空)이라는 사유에 바탕을 두고 있는 시다. 《임제록》에 “일심도 없으면 곳곳마다 해탈한다(一心無隨所解脫).”라는 구절이 있다. 집착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면 마음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지니, 해탈이 일어나는 것이다. 미와 추, 생과 사, 성과 속, 피안과 차안, 더러움과 깨끗함의 분별은 불성의 세계에서는 뜻 없는 짓이다. 모든 형과 색을 가진 상은 허상이다. 분별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은 허상을 실상으로 받아들이는 소아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분별이 없는 곳에는 미추, 생사, 피차, 선악이 따로 없다. 하나다.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다. 무심천에서 한때를 보내며 시인은 홀연 없을 무(無)에 대한 사유에 든다. “그 동안 집착하던 것들”을 마음에서 내려놓는다. “마음이 밀물처럼 빠져나간” 뒤 무심에 드는 것이다. 집착이 있으면 그 마음은 몸을 속박한다. 허나 마음을 놓아버리면 몸도 자유로워진다. 해탈은 바로 무심에 드는 것이다. 무심에 들면 융통무애(融通無碍)의 경지가 저절로 따라온다. 무심천변에서 문득 무심에 들어 있는 자각이 일면서, 무심히 무(無)자로 시작하는 무욕, 무등, 무소유, 무언, 무감동, 무의미, 무력, 무색, 무한대로, 무시무종, 무조건, 무색계, 무단횡단, 무릉도원, 무량수전……으로 생각은 가지를 뻗는다. 일종의 무(無)자 놀이다. 한마디로 마음을 내려놓고 무의 진경에서 노니는 것이다. 마음에서 마음을 놓으니 마음은 진공(眞空)에 든다. 대매(大梅)가 마조 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네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무엇이 법입니까?” “네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달마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네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조사는 아무런 뜻이 없었단 말입니까?” “부족함이 전혀 없는 네 마음을 알기 바란다.” 선(禪)의 화법은 이렇듯 말장난에 가깝다. 의미의 논리적 연쇄가 끊긴 곳에서 선의 화법이 비로소 성립한다. 선(禪)은 경험 사실의 인과관계를 따지지 않는다. 선에서 화법은 무지(無知)의 지(知)로, 혹은 무분별의 분별로 나아간다. 이를테면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라는 물음에 “뜰 앞의 잣나무다.”라고 대답한다. 문자의 소양이 전무한 육조 혜능이라면 무엇이라고 했을까. 아마도 이렇게 얘기하지 않았을까. “가거라. 여기에 똥을 싸지 말라.” 시도 마찬가지다. 좋은 시들은 문자의 막다른 곳까지 간다. 문자를 버리고 불립문자(不立文字)로 서려고 한다. 일본의 중세시인 바쇼(芭蕉)는 이렇게 썼다. “오랜 연못에 개구리 뛰어든다, 오! 저 물소리.” 이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무 뜻도 없다. 개구리가 연못 속으로 뛰어들고, 물은 ‘첨벙’ 하고 소리를 냈을 뿐이다. 불교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사법계의 일이다. 그러나 바쇼는 개구리가 오래된 연못으로 뛰어드는 순간 우주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한 순간을 직관한 것이다. 바쇼는 깊은 고요를 깨뜨리고 방금 물에 뛰어든 개구리와 자신이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바쇼가 개구리고, 개구리가 바쇼다. 이와 같이 경계가 없이 존재들이 노니는 세계가 사사무애법계다. 분별을 지우면 나는 개구리고, 연꽃이며, 연못이다. 사사무애법계에서 노니는 그게 바로 시의 세계다. ■ |
출처 / 유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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