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인문학 - 정재승이 만난 사람들 (3) 비교문화역사학자 임지현
[중앙일보] 입력 2011.06.13 01:00 / 수정 2011.06.13 10:27나도 축구 볼 땐 한국 응원하지요
그 뒤에 숨은 민족주의 알고 있지만 …
한양대 임지현 교수(오른쪽)는 “철학·역사·사회·정치·문화를 특정 국가의 경계 안에서만 바라보는 틀을 극복하기 위해 ‘트랜스 내셔널(trans-national, 국경을 넘은)’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종택 기자]
클릭 한 번으로 세계가 통하는 시대다. 우리의 문화적 자존심을 한껏 세워주고 있는 K팝 열풍도 유튜브라는 글로벌 소통매체의 덕을 톡톡히 봤다. 근대적 의미의 국가·국경의 의미가 약화되고 있다. 한양대 임지현(52·서양사) 교수는 바로 이 점을 주목하는 역사학자다. ‘민족의 해체’를 선구적으로 주창해온 임 교수는 요즘 ‘트랜스 내셔널리즘(Trans-nationalism·탈국가주의)’에 집중하고 있다. 국가 단위의 좁은 틀로는 세상의 복잡한 양상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라는 울타리를 완전히 벗어나 살 수 없는 게 엄연한 현실. 또 월드컵과 올림픽의 승패에 일희일비하는 게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다. 임 교수와의 묵중한 대화는 가벼운 축구 얘기로 시작됐다.
▶정재승=국가·민족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제 역사관을 흔들어 놓았어요. 꼭 여쭙게 싶은 게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축구 경기를 볼 때, 어느 쪽을 응원합니까.
▶임지현=당연히 한국이죠. 폴란드사를 전공하긴 했지만 국가대표 경기에서 다른 팀을 응원하기란 어려운 일이에요. 월드컵이나 올림픽은 경기 자체를 즐기기 보다 내셔널리즘(Nationalism)을 강화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니 한국을 응원하게 되죠.
▶정=저를 고민에 빠트리시고, 선생님은 즐기고 계셨군요.
▶임=하하. 내셔널리즘은 교과서 또는 정치 커뮤니티만이 아니라, 우리가 즐기는 스포츠를 통해서도 작동한다고 생각해요. “트랜스 내셔널리즘을 연구하니까 폴란드 팀을 응원합니다”라는 말이 안 나와요.
▶정=트랜스 내셔널리즘이 뭔지 쉽게 설명해주시죠.
▶임=국민국가 패러다임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인문학이라고 보면 됩니다. 국가를 단위로 구획하고 단절하는 기존의 인문학 커리큘럼을 대신하는 거죠.
▶정=예를 든다면요.
▶임=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볼까요. 원자력 위기가 고조된다고 했을 때 한국은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느냐는 것이죠. 방사능은 국경을 넘나들잖아요. 이를테면, 체르노빌 사태 후엔 어디서 원전이 터지든 그 원자력 발전소의 국적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죠. 그래서 지금은 체코에서 원자력 발전소를 지으려면 폴란드나 우크라이나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게 됐어요. 동북아시아 역시 마찬가지에요. 한국·중국·일본 중 어느 한 나라의 핵발전소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정=후쿠시마 사태를 보니 정말 국경의 의미가 무색하게 느껴지더군요.
▶임=그렇죠. 인문학은 시선의 변화를 중요시합니다. 국가주권이란 게 신성불가침의 권리는 아니에요. 우리 삶이 얽혀 있는 한, 민족주의적 틀만으로는 일상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탈(脫)국가적 시선으로 다른 답을 모색해야 합니다.
▶정=여러 나라 연구자들과 공동 연구가 필요하겠네요.
▶임=제가 히브리어는 못하지만, 폴란드어·독일어·일본어는 해요. 그리고 한국어. 대중독재 같은 주제는 스탈린, 파시즘, 나치즘, 프랑코, 박정희, 김일성, 마오쩌둥, 일본총력전 체제 등 광범위하게 국제 컨퍼런스를 통해 연구하고요.
▶정= 논문을 영어로 쓸 수밖에 없겠네요
▶임=그렇죠. 사실 영어로 크레올라이즈(creolize: 외부어와 토착어를 혼합해 혼성어로 만들다)하자고 주장해요. 영어 못쓰는 걸 창피해하지 말고, 아이디어를 표현하게 하고, 영어를 자꾸 크레올라이즈 하면 그것도 해법이 아닐까 합니다.
▶정=카이스트 100% 영어 강의에 도움이 되는 말씀인데요.(웃음)
▶임=사실 인문학을 영어로 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돼요. 모국어부터 잘 해야죠. 우리 아이들은 런던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는데요, 그 학교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하셨어요. “한국 책을 많이 읽혀주세요. 그게 영어 잘하는 방법입니다.” 정말 좋은 말이죠. 가장 익숙한 언어로 활자를 접하고, 사고가 발달하고, 그러면서 외국어도 잘하는 거죠. 그조차 안된 상태에서 외국어를 어떻게 잘해요.
▶정=대중독재론을 주장해오셨죠.
▶임=대중이 독재자를 원하기도 하고, 만들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대중독재에서 가장 중요한 건 대중의 자발적 참여입니다. 나치가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사람들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자발적으로 들어갔기 때문이죠. 어떻게 해야 과거를 청산할 수 있을 있을까요. “유신잔당 처단해라” “노태우 전두환 없애라”고 외치면 독재라는 과거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아니에요. 독재는 선거에서 나옵니다. 이명박 대통령 보고 왜 독재라고 해요. 민주주의죠. 정식 선거를 거쳐서 된 사람인데. 학자들이 물어야 하는 것은 국민은 왜 독재자에게 표를 던졌는가를 물어야 하는 겁니다.
▶정=독재자를 향한 국민의 심리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임=박정희 시대의 일정한 경제성장이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줬지요. 60년대에 박정희씨가 ‘마이카’ 시대를 예고했는데, 좀 늦게 왔지만 실제로 왔죠. 70년대 텔레비전·냉장고도 마찬가지이고요. 조국 근대화라는 슬로건이 대중들에게 먹혔죠.
▶정=경제적 풍요에 대한 갈망이었죠.
▶임=그렇죠. 대중독재라는 말은 근대적 시스템과 관련이 있습니다.
▶정=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이명박 정부에게 표를 던졌던 사람들의 심리는 뭔가요.
▶임=기본적으로 개발독재를 승인하는 거죠. 나름대로 가치체계를 부여했던 것들이 바뀌지 않은 거죠.
▶정=우리는 완전히 근대를 벗어나지 못했네요.
▶임=우리뿐 아니라 지식인들도 미완의 근대라고 하거든요. 하지만, 전 묻고 싶어요. 미완의 근대라뇨? 그렇다면, 꼭 완성을 해야 하나요? 미완의 근대라고 하는 과제를 설정하는 순간, 개발독재 논리에 빠지는 거예요.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저것은 독재!”라고 하는 건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됩니다. 저는 박정희 대통령의 ‘자식’은 박근혜씨가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이라고 생각해요.
▶정=그렇다고 박근혜씨가 아닐 건 없죠.
▶임=둘을 비교한다면 이명박 대통령이 박정희에 가깝다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표도 많이 받았죠. 개발독재의 과거와 결별하고, 비판적으로 보는 방식은 “저놈들 나쁜 놈들이야”라는 상투적 얘기를 되풀이 하는 게 아닙니다. 왜 그랬는가에 대해 연구해 봐야죠. 그래서 제가 ‘합의독재’라는 말을 쓴 거예요.
▶정=아, 합의독재!
▶임=난리가 났죠. 왜 독재자를 욕 안하고 애꿎은 민중을 욕하느냐 라면서요. 정말 답답했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죠. 왜 이런 행동이 나오는지. 그 메커니즘과 역사는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과거 청산은 불가능해요.
▶정=앞으로 역사학에서 주목해야 할 숙제는 무엇일까요.
▶임=트랜스 내셔널이라고 봅니다. 인문학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입니다. 저는 세계화가 되면서 오히려 그 나라간의 경계가 아니라 삶의 형태, 수준으로 친밀감을 느끼는 거죠. 민족·국가 경계가 아니라 클래스로 나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저는 학생들에게 ‘아이덴티티(정체성)’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말합니다. “넌 태어날 때부터 한국인이야”라고 하기 전에, 왜 당신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이 역사학자고 인문학자죠.
정리=이은주 기자, 김민영 (프리랜서 작가)
◆임지현(52)=한양대 사학과 교수,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서강대 사학과 박사. 폴란드 바르샤바대, 영국 포츠머스대, 영국 글래모건대,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국제일본문화센터 등에서 연구. 한국 사회의 역사 인식에 문제를 제기해왔다. 책을 출간할 때마다 학계에 뜨거운 논란을 일으켰다. 최근에는 국민국가적 시각을 넘어서는 ‘트랜스 내셔널리즘’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임지현 교수의 책·책·책◆『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 편지』(2010, 휴머니스트)=무솔리니·스탈린·로자 룩셈부르크·박정희·김일성·체 게바라·한나 아렌트 등 역사 인물들에게 쓴 19통의 편지. 파시즘·식민주의·홀로코스트 등 20세기 역사 유산과 결별하고 ‘나의 역사’를 창조할 것을 촉구했다.
◆『대중독재』(임지현·김용우 엮음·2004·책세상)=나치 등 독재에는 대중의 동의가 뒤따랐다는 논문모음집. 대중의 자발적 동원 체제를 만들어내는 다양하고 정교한 장치를 분석했다.
◆『우리 안의 파시즘』(임지현 외 지음, 2000, 삼인)=국수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파시즘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지 통찰. 가장 진보적이고 열려 있어야 할 진보 진영 조차 파시즘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지적했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다』(1999·소나무)=변화무쌍한 행로를 밟아온 민족주의의 궤적을 추적하며 민족주의가 체제를 옹호하는 권력의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을 비판했다.
※정재승·임지현 교수 대담 동영상과 내용 전문은 중앙일보·예스24가 함께 하는‘희망의 인문학’ 캠페인 홈페이지(http://inmun.yes24.com)에서 볼 수 있습니다. QR코드로도 동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분야별 추천 도서에 대한 서평을 홈페이지에 올려주세요. 선정된 독자에게 도서지원금을 드립니다. 5월 인문 서평이 총 263편 접수됐습니다. 우수작과 심사평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진 | 이름 | 소속기관 | 생년 |
임지현 (林志弦) |
[現] 한양대학교 인문과학대학 사학과 교수 |
195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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