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적 섬에 갇힌 詩들
백현국
모더니즘 작가들이 詩的으로 독특한 스타일을 보이는 것은 시적 '상상력의 확대'와 관련 있다고 믿는다. 물론 이는 시적 스타일과 내용을 말하는 것이다. 때로는 특이하고 다소 기벽스러운 패러디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러한 것들은, 그개별적이고 특이한 특징에도 불구하고 어떤 언어적 기준을 통해 풍자하게 되는
데, 그 풍자의 대상은 '과거의 것'을 모방하는 것을 뜻한다. 모방이란 대상에 대한 해석(관념)에 관한 재해석을 말한다. 모더니즘계열 작가들은 바로 이러한 원본에 대한 은밀한 공감대를 반드시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모던'이란 첨단의 유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유행'이란 시대에 곧 뒤떨어지지만 진정한 의미의 '모던'은 세월이 지나면 다시 '고전'적인 것이 되기 때문에 '모던'은 '고전'적인 것과 은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모던'이란 과거로부터 현재로의 전이 결과를 보기 위해 오랜 과거와 연결시키는 획기적인 시대의식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이는 17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벌어진 신구파 논쟁을 보면 확연하다.
오늘날, 급진적인 모더니스터들은 과거(전통)과 현재간의 추상적 대립에만 더 골몰하였다. 미래를 위한 기대나 예찬이 현재의 고양을 의미한다는 것을 간과했다. Bergson의 경우 새로운 시간의식(사회 내의 유동성, 역사 내의 가속, 일상 생활 내의 단절 경험)이나 새로운 가치관(일시성, 모호성, 단명성)은 미래적인 것이라기 보다 오히려 안정된 현재에의 갈망이라는 측면을 강조한다. 과연, 현재의 단절과 해체를 통해 미래를 암중모색한다는 시인들의 의식이 진정한 의미에서 모던한 것인지 그 인식의 깊이를 스스로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때로는 여러 가지 시적 스타일과 독특한 정서가 엄청난 속도와 갈래로 파편화되어 나타나는 것 자체가 복잡한 현대문명을 해석하는 좀 더 분명한 코드를 제공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상상력이 오늘날 예술의 이름을 붙이고 나타나는 여러 패러다임 속에서 전문화된 심미성을 드러내는데 상당히 유용한 성질의 것이기도 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입장에서 보는 '현재의 것'들은 어떠한 것들일까? 그것은 바로 현재의 것들에 대한 맹렬한 부정이다. 따라서 낯설고 특이한 감각적 환기를 불러일으키는 시인의 독특한 상상력만이 현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는 논리를 펴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세계에 대한 부정에 관하여 현실과 상상력에 관한 윌러스 스티븐슨(Wallace Stevens)의 견해를 잠시 생각해 보자.
스티븐슨은 현실세계에 대한 인식이란 곧 '관념에 의한 허구'이며 이를 nothing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있음(Being)'을 전제로 한 nothing이다. 윌러스 스티븐슨(Wallace Stevens)이 말하는 추상 개념을 살펴보면, 현실은 고안된 세상(invented world)이며, 보다 바람직하게 최고의 세상을 구현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 또한 최상의 허구란 즉 '시와 현실', '상상력과 현실' 사이의 관계를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이 곧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긴다. 만약 '현실'보다 '상상력'이 더 우위를 가질 때, 불균형이 초래되며 마침내 '상상력'은 파괴적인 속성을 갖게 된다는 경고도 아울러 하고 있다. '시적 진리'가 '사실적 진리'라고 한 스티븐슨의 말은 곧 사실이 감수성과 상상력에 의해 시인의 인식 속으로 들어 온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대상이 상상력을 발휘하기 전에 이미 상상적인것이 내재했다고 말함으로써, 인위적인 상상력에 대한 문제를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스티븐슨은 "현실보다도 더 위대한 것은 세상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말과 함께 "상상력만 유일한 생산 능력이다"라는 말도 한다. 이는 현실과 상상력의 균형관계를 말한 것이다. 결국 '최상의 허구'란(Supreme Fiction) 상상력과 현실은 궁극적으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명제를 가지고 있다. 스티븐슨이 말한 '최상의 상상력'이란 작금의 시인들이 '기발한 언어'나 '상상력'에만 매달린 채, 언어의 진술이 어떤 기준과 규범을 무시하고, 모순의 중첩, 진술의 모호함, 암호 같은 언표, 개인적 감정의 난립시키는 것 등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단순히 스타일 상의 다양함만을 주장하게 되면 결국 이질적인 요소만 남게 되는데 이를 '죽은 언어'요 '언어의 섬에 갇힌 언어'라고 한다.
정통 모더니즘의 미학적 성격이란 독특한 세계관 형성과 스타일 속에 독특한 자아와 사적인 정체성의 단단함, 고유한 퍼스넬리티와 아이덴티티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과 관련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계는 분명하다. 지금까지 누적된 모든 예술적 발현들이 독자적인 경험과 개념, 그리고 정체성이 더 이상 새로운 세계로의 진전이나 새로운 경험, 그리고 독자적인 스타일의 발생을 이미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독창성'이란 엄밀히 말해서 과거의 것을 '재모방'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을 한다. 이 것을 '심미적인 딜레마'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심미적 딜레마'를 해소하는 것은 내용이지 형식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내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용'이 곧 '형식'을 결정한다는 것인데, '내용'은 다른 형식을 선택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절대적일 때, 그 스타일은 독자적인 방식으로 인정될 것이다. 이규보는 시의 '미적 본질'을 말함에 있어, 시가 어떤 유형의 것이든 인습적으로 관념화된 사물과 세계의 일상적인 관계를 깨뜨리는 작업에서 스스로 미적 공간을 발견하게 된다고 볼 때, 시인은 사물에 대한 인식의 갱신을 수행해야 하는 일차적 사명을 가진다" 고 생각하였다. 이는 '사물'과 '세계'에 대한 순수한 실체(내용)을 드러나게 해야한다는 시 본질의 관계를 말한 것이다. 따라서 스티븐슨이 말한 '최상의 허구'가 곧 '최상의 현실 반영'과 관련 있듯이, 인습적으로 관념화된 사물과 세계에 대한 관계를 깨는 것은 오히려 사물과 세계의 순수한 본질을 드러내는 도구라는 측면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결국 현실의 문제를 인식하는 시인의 의식저변이 어떠한가 하는 깊이와 해석에 따라 그 스타일(상상력, 기법, 해석)이 결정되는 것이지 얄팍한 스타일이 시 내용을 나타내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시를 쓰는 작가들이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올바른 천착과 깨달음 없이 기묘하고 비일상의 관념(상상력)에 휘둘릴수록 스스로 '언어의 섬'에 갇힌 시를 양산하게 된다. 이러한 딜레마는 많은 시인들이 현재를 '심미적인 비극'으로 이해하게 됨으로 인해,'언어적 이상', 즉 언어와 기표 사이의 관계를 무너뜨리게 된다.
따라서 언어가 갖고 있는 '시간의 연속성'이 무너지고 가장 쉽게 물화시킬 수 있는 '현재 경험'만을 강렬하고 환각적으로 제시하게 된다. '기의'를 상실한 '기표'는 이미지가 왜곡 될 수밖에 없다. 이미지의 왜곡은 곧 폭력이라는 장·보드리야르의 견해를 생각해봐야 한다. 현재 주목되는 시인들의 시작들과 공모 당선작들이 시인의 '미적 의식'이나 '현실 인식'과는 별개로 특정 집단에 의해 주목되는 것을 본다. 하지만 난 이런 시를 '언어적 섬에 갇힌 시'라고 부르고 싶다. 당면한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현실을 왜곡하고 부정하는 감각적인 상상력만을 최대 무기로 삼는 시인들과 그 아류의 시작을 모방하여 시작을 양산하는 시인들을 보면서, 사물에 대한 존중심과 생명에 대한 경외심, 삶에 대한 신선하되 근본적인 감각, 기계적이고 합리주의 사고보다 道家的 상상력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시적 인간'이란 바로 '가슴으로 말하는 이'를 뜻한다. 이 모든 문제에 대하여 굳이 시작의 표본을 밝히지 않은 것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적어도 시인은 스스로 판단할 최소한의 능력이 있다고 보는 까닭이다.
<계간 현대시문학 2005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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