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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丹野의 깃털펜/시집『내가붉었던것처럼당신도붉다』

젖꽃판이 꽃이었다

by 丹野 2019. 8. 13.






프라하 구시가지  2011년 2월


     

 

 


 

젖꽃판이 꽃이었다 / 김경성


 

 

1

 

첨탑은 어느 쪽에서든 빛이 났다. 청동거울 속으로 들어갔던 비둘기 십여 마리씩 떼 지어서 날았다

 

황금빛 첨탑이 있는 청동지붕에서 

산호초처럼 구부러진 나무의 즙을 먹고 사는 붉은 집으로 날아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만 구겨져도 금세 무언가 쏟아낼 것 같은 젖은 구름이 하늘에 걸려 있었다

 

방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서 노를 젓듯 허공을 저었다

 

척척 달라붙는 구름의 실타래, 나도 하늘 끝자락에 걸리면 먼 곳까지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던

 

 

 

 

2

 

직립으로 서 있는 하현달을 압정처럼 머리채에 박아놓고

창문에 매달려서 날갯짓했던 것이다

 

가슴속에 고여서 꼼짝 못 하는 것들은 왜 조금만 움직여도 휘청거리게 하는 것일까

 

머리가 자라는 속도보다 더 빨리

하현달 모서리를 접더니 젖가슴으로 파고들다가

아침이 오기 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부리를 씻은 새들이 골목길을 누비며 비에 젖은 자국들을 닦아 나갔다

 

젖은 구름도 사라지고

다시 첨탑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가슴이 오롯했다  

가슴에 얼굴을 묻고 날이 밝도록 한잠 들었던 하현달의

자국 선명한 젖꽃판이 꽃이었다

 

꽃이 피어 있었다

 

 

 

 - 계간 『 시인시각』 201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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