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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풍경 너머의 풍경

[나무를 찾아서] 언제나 변함없이 흐르는 나무의 시간을 찾아서

by 丹野 2011. 4. 11.

[나무를 찾아서] 언제나 변함없이 흐르는 나무의 시간을 찾아서

   천리포수목원에서 봄에 가장 먼저 피어나는 목련 '비욘디아이'.

   [2011. 4. 11]

   봄 내음 완연합니다. 집 앞 벽돌 담에 붙어있는 목련에서도 하얀 꽃이 피어났습니다. 목련 아래 낮은 울타리에는 노란 개나리가 활짝 피어나서, 아침 산책 길을 화려하게 밝혀줍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어둑어둑하던 시간이, 지금은 개나리 꽃이 불러온 환한 봄 햇살로 환합니다. 해마다 이 즈음에 활짝 피어난 개나리 꽃을 바라보며 봄은 화들짝 다가온다고 썼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나무들은 그렇게 갑자기 봄을 불러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나무들은 아주 천천히 봄 내음을 감지하고, 살금살금 봄을 불러오느라 애썼습니다. 땅 속 깊이 내린 뿌리에서부터 봄 기운을 알아채고 물을 빨아올려서 줄기의 빛깔부터 바꾸었고, 천천히 새 잎과 꽃봉오리를 내밀었지요. 매운 바람에 몸을 웅크리기만 했던 우리가 그걸 알아채지 못했던 것일 뿐입니다.

   영암 월곡리 느티나무의 이른 봄 풍경.

   그래서 나무들을 스쳐지나는 시간의 속도가 궁금합니다. 언제나 하는 생각이긴 하지만, 가늠하기 어려운 나무의 변화를 바라보면 또다시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큰 나무들을 찾아보러 다니는 길에서는 더 그렇지요. 십년 넘게 그들을 만났건만 도무지 그 변화의 속도를 맞추기는 어렵기만 합니다. 가을에 단풍 들 때도 그렇고, 이른 봄에 새 잎이나 꽃을 피워낼 때도 그렇습니다. 다른 풀이나 작은 나무들에 비해 훨씬 늦거든요. 하릴없이 헛걸음일 때가 많습니다.

   얼마 전에 찾아본 전남 영암 군서면 월곡리 느티나무를 만났을 때에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혹시라도 봄볕을 느낄 수 있으려나 생각했지만, 언감생심이었지요. 나무 뿌리 부근에는 이미 이름 모를 작은 풀들이 푸른 잎을 돋워내 초록 카펫을 이뤘지만, 커다란 느티나무는 아무런 변화도 없이 그저 무뚝뚝하게 봄 오는 소리를 모른 체 시치미떼고 있었어요.

   땅 속 깊이 내린 뿌리로부터 물을 끌어올려 봄빛으로 몸단장한 줄기.

   키가 23미터나 되고, 사방으로 펼친 가지의 폭은 그보다 훨씬 넓은 이 큰 느티나무의 가지에는 새 잎이 하나도 돋아나지 않았지요. 여전히 겨울 모습과 다를 바 없었지요. 하지만 가만히 톺아보자면, 이 나무도 차분히 새 봄을 준비하고 있는 걸 알 수 있어요. 특히 줄기 표면, 즉 수피의 빛깔은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땅 속 깊은 곳의 뿌리에서부터 물을 힘겹게 빨아올린 흔적이 뚜렷한 거죠.

   조금 느릴 뿐입니다. 덩치가 크다 보니, 다른 나무들이 이미 가지 끝까지 물을 다 빨아올려도 이 나무는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은 겁니다. 앞으로도 며칠 더 그렇게 천천히 물을 끌어올려 하나 둘 잎을 피워올리겠지요. 가지 끝까지 물을 다 끌어올릴 즈음에 나무는 어느 순간 화들짝 온 가지에 푸른 잎을 피워올릴 겁니다. 언제나처럼 무려 5백 만 장이나 되는 무성한 잎을 한꺼번에 피워올리겠지요.

   오랜 세월 동안 이 마을에 천천히 봄을 알려준 월곡리 느티나무.

   그 찬란한 연초록의 나뭇잎을 바라보면서 다시 또 우리는 월곡리 느티나무에 잎이 화들짝 돋아났다고 호들갑을 떨지도 모릅니다. 지금 나무가 물을 빨아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건 돌아보지 못하는 거죠. 그러고 보면 나무는 언제라도 제게 주어진 시간을 아무런 변화 없이 수굿하게 맞이합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처음 그가 태어났을 때 흘려보내던 그 시간의 속도로.

   점점 더 빠르게 흘러가는 사람의 시간과 언제나 같은 속도로 흘러가는 나무의 시간은 그래서 차츰 더 차이가 나겠지요. 그런 생각으로 지난 주에는 이 월곡리 느티나무를 바라보며 시간의 속도 혹은 느림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마침 밀란 쿤데라의 소설 '느림'에 나오는 시간의 속도 이야기가 떠올라, 그이의 이야기도 한 줄 인용하며 썼습니다. 여유 되시면 살펴 보세요. 신문칼럼 보기

   언제나 변함없이 일정한 속도로 흐르는 느티나무의 봄 시간.

   오늘은 이른 아침에 '춘마곡 추갑사'라며 봄에 가장 아름답다는 공주 마곡사로 떠납니다. 마곡사에는 여러 아름다운 나무들이 있지만, 그 중에 김구 선생이 광복 직후 손수 심은 향나무가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마침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이 들어있거든요. 천천히 다녀와 김구 향나무의 안부 전해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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