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풍경 너머의 풍경

[나무를 찾아서] 천안 태조산 성불사의 법당 오르는 길에 서있는 느티나무

by 丹野 2011. 4. 7.

[나무를 찾아서] 봄길잡이에 나선 나무들… 나무와 바위가 이뤄낸 변증의 생명력

   천안 태조산 성불사의 법당 오르는 길에 서있는 느티나무.

   [2011. 3. 7]

   입춘에서 우수 경칩 다 지났고, 남녘의 봄꽃 소식으로 나그네의 마음이 한껏 설레긴 하지만, 아직 봄이라 하기엔 이릅니다. 옷깃을 스미는 바람에는 여전히 칼바람의 매서움이 남아 있습니다.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길가에는 개나리 꽃이 먼산에는 진달래꽃이 활짝 피어나겠지요. 우리 눈에 봄은 늘 그렇게 난데없이 찾아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무들은 벌써 한참 전부터 천천히 봄길잡이를 준비해 왔습니다.

   나무들의 봄길잡이는 서서히 풀린 땅 밑의 뿌리에서부터 시작했을 겁니다. 언 땅이 녹으면서 보드라워진 흙에 한 방울 두 방울 물기가 올랐을 때 말입니다. 씨앗과 마찬가지로 식물을 바라볼 때 매우 궁금한 부분 가운데 하나가 뿌리입니다. 천년을 살아온 나무를 바라볼라치면, 도대체 이 나무의 뿌리는 땅 밑 어디까지 혹은 마을의 어느 집 아래까지 뻗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하릴없이 눈에 보이는 것만 믿을 수밖에 없는 사람의 한계일 겁니다.

   여느 오래 된 느티나무와 별 다를 게 없어 보이는 성불사 느티나무.

   뿌리를 이야기할 때면 떠오르는 나무가 있습니다. 수도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천안 태조산 성불사의 느티나무입니다. 10미터 정도의 키를 가진 이 느티나무는 절집 오르는 길고 가파른 돌계단의 중간 참에 앉아있어요. 얼핏 보아서는 그냥 평범한 느티나무와 별다른 게 없는 나무이지만, 가까이 다가서서 보면 그의 놀라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뿌리가 그렇습니다.

   얄궂게도 이 나무가 뿌리를 내린 자리는 바위 위입니다. 처음에는 바위 위쪽의 평평한 곳에 쌓였을 흙먼지가 바람 결에 날아온 씨앗을 포근하게 감싸 주었을 겁니다. 사람이라면 이 자리에 심지 않았겠지요. 필경 느티나무와 바람이 선택한 자리입니다. 흙먼지 한 줌에 파묻혀 포근하게 잠을 자던 나무가 봄볕을 내리자 물 한 방울, 바람 한 올, 햇살 한 줌 챙기며 한껏 기지개를 켜고 싹을 틔웠어요. 그런데 아뿔싸! 그가 깊숙이 뿌리내려야 할 자리는 단단한 바위였습니다.

   바위를 쪼개며 살아야 하는 힘겨운 운명으로 4백년을 살아온 자취.

   애면글면 싹을 틔운 어린 나무는 하지만 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가능할 지는 모르지만, 조금씩 물과 바람과 해의 힘을 빌려 바위를 뚫고 파고 들어 뿌리를 뻗었습니다. 뿌리가 자라면서 어느 틈에 그 육중한 바위가 서서히 쪼개졌습니다. 나무는 말없이 웅크리고 있던 바위를 무너뜨리는 게 미안했지만, 하염없이 뻗어나가야 하는 제 뿌리를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어요. 살아야 했으니까요. 큰 바위의 균열이 조금씩 더 커지자, 나무는 제 몸을 지탱해주는 바탕을 잃을 지도 몰랐습니다.

   나무는 가운데의 뿌리 말고 새로 옆으로 뿌리를 뻗으며 바위를 끌어 안았습니다. 스스로도 살아야 했지만, 그보다는 자기에게 생명이 터전을 마련해준 바위를 더 이상 무너뜨리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쪼개져 나가는 바위 조각들을 하나 둘 그러모으기 위해 나무는 뿌리를 더 넓게 펼쳐야 했습니다. 그건 보드라운 흙 속에서 서서히 뿌리를 펼치는 일보다 훨씬 힘이 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무는 무너앉는 바위를 보듬어안는 게 좋았습니다.

   마치 고행의 수도승처럼 서있는 나무와 바위의 신비로운 모습.

   바위도 처음에는 난데없이 날아온 씨앗에서 자라는 나무 뿌리가 성가셨지만, 홀로일 때보다는 외롭지 않아 좋았습니다. 날마다 파고드는 나무 뿌리의 날카로운 부리짓으로 단단했던 몸이 뜯기는 아픔이 있었지만, 그럴수록 바위는 아픔을 잊으려고 나무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바위에게 한없이 미안한 탓에 나무도 바위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수다한 나무가 된 거죠. 봄이면 무려 5백 만 장이나 되는 초록 잎을 바위 위로 펼쳐 넉넉한 그늘을 드리웠습니다. 바위도 느티나무의 초록 그늘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바위와 느티나무가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살아온 시간이 벌써 사백년입니다. 이제 절집을 찾는 사람들은 나무와 바위를 그냥 스쳐지나지 않습니다. 가운데에서는 쪼개고 바깥에서는 다감하게 붙들어 안고 있는 나무와 바위의 신비로운 모습을 어찌 그냥 지나치겠습니다. 대개는 나무 앞에서 마치 예불 올릴 때 하는 것처럼 공손히 합장을 하고는 고개 숙여 인사를 올리고 지나갑니다. 나무와 바위는 사람들과 눈을 맞출 수 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이 봄 성불사 느티나무와 바위가 이뤄낸 변증의 생명력에 응원의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경남 하동의 소나무.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나무들은 볼 수록 신비롭다.

   도저히 공존하기 어려울 듯한 나무와 뿌리가 공존하는 예는 또 있습니다. 위 사진은 소나무와 바위입니다. 성불사 느티나무의 바위보다 훨씬 더 큰 바위 위에 뿌리내린 소나무입니다. '문암송'이라고 불리는 이 소나무 이야기는 또 다른 기회를 만들어 전해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