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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풍경 너머의 풍경

[나무 생각] 한 톨의 씨앗이 지어내는 우주의 신비를 그리며

by 丹野 2011. 4. 7.

[나무 생각] 한 톨의 씨앗이 지어내는 우주의 신비를 그리며

   제주 곶자왈, 눈 속에서도 생명을 이어가는 푸르름.

   [2011. 2. 28]

   대학에서 젊은 시인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동무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나무를 좋아하는 까닭에 서로 마음을 열게 된 동무입니다. 만나서는 나무와 시를 이야기하는 좋은 동무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페이스북에서도 인용했던 책 ‘씨앗의 자연사’를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그 책을 허투루 읽어치운 건지, 책 속에서 제가 기억하는 문장을 그이는 나보다 더 또렷이 기억하는데, 나는 그이가 이야기하는 문장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읽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만큼 좋은 책으로 기억되는 책입니다. 씨앗에 얽힌 신비로운 이야기를 흥미롭게 적은 책입니다. 어쩌면 식물 공부를 오래 하신 분들로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신 이야기일 수 있겠지요. 새로운 지식이 담긴 때문이라기보다는 과학적인 지식을 깔끔하고 서정적인 문장으로 풀어낸 게 돋보이는 책이지요. 또 기억에 남을 만한 스토리텔링으로 구성해내는 글쓴이의 능력이 매우 출중해 보이는 책입니다.

   충북 보은 풍림정사 대문 앞 은행나무의 우람찬 줄기.

   씨앗은 제가 대중 강연회와 같은 자리에서 나무의 신비로운 생태를 이야기할 때에 빼놓지 않는 대상입니다. 일테면 아무리 큰 나무라 해도 그 시작은 한 알의 작은 씨앗에서 시작된다는 걸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모든 생명의 신비겠지요. 이 책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놓습니다. 한 알의 씨앗은 바로 하나의 생명이 펼쳐나갈 하나의 우주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싶습니다.

   충북 보은의 한적한 시골길을 걸으며 만난 지난 가을의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에는 그렇게 생명의 우주를 간직한 은행 씨앗이 흐드러지게 흩어져 있었습니다. 마을 가까이에 있는 나무이건만, 마을 분들로서는 이 씨앗을 주울 여력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었더군요. 은행 씨앗을 이야기하니, 벌써 그 고약스러운 냄새도 떠올리실 수 있겠지요.

   풍림정사 은행나무의 근사한 풍경.

   그때 은행 씨앗이 널부러진 풍경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씨앗들의 풍경을 떠올리며, 답사 수첩의 사진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분명히 땅바닥을 나동그는 씨앗의 풍경이 인상적이었다고 기억함에도 불구하고, 씨앗을 사진으로 남긴 건 한 장도 없네요. 잎진 은행나무의 전체 모습이나, 하늘 향해 솟아오른 가지와 줄기 표면 등의 사진은 2백 여 장이나 되면서도 인상적인 걸로 기억되는 씨앗의 풍경은 사진으로 남기지 않았네요.

   나무 곁에서 긴 시간을 머물렀으면서도 그랬습니다.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은행 열매를 밟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발을 떼어놓기만 했던 겁니다. 돌아보면 그게 처음은 아닌 듯합니다. 평소에 식물의 씨앗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던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생각으로는 씨앗에 담긴 우주의 신비를 이야기하지만, 실제 몸으로는 씨앗에 대한 관심이 모자랐던 겁니다. 다시 ‘씨앗의 자연사’를 펼쳐 들며, 숲을 나동그는 도토리 한 알, 솔방울 하나에도 더 많은 관심을 가지리라 생각하게 됩니다.

   어두운 곶자왈 숲으로 비쳐든 한 줌 햇살에 의지해 자라는 식물.

   이 땅 위에 고이 내려앉은 씨앗은 지난 겨울 찬바람 오기 전에 제가끔 자신에게 맞춤한 방식으로 땅에 내려앉았을 겁니다. 그 중의 상당 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겠지만, 몇몇은 분명히 지금 한창 불어오는 봄 기운 따라 땅 아래에서 또 하나의 생명을 틔워내느라 안간힘을 다 하고 있을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씨앗들은 마침내 사람보다 더 오래, 더 크고, 더 아름답게 살아가는 참 생명을 이루겠지요.

   ‘적막의 힘으로 한 해 동안 열매를 만들어낸다’고 한 건 시인 조용미입니다. 열매, 씨앗이 지어내는 거대한 우주를 지어내는 힘을 적막이라고 표현한 거죠. 적막의 힘이든 땅의 힘이든 열매를 맺고, 싹을 틔우는 생명의 약동이 신비스럽기만 합니다.

   봄의 발걸음이 코 앞까지 다가왔습니다. 곳곳의 동무들이 꽃샘 추위를 뚫고 피어나는 봄 꽃 소식을 전해옵니다. 하얗게 혹은 노랗게 피어나는 봄꽃 향한 아찔한 그리움에 몸도 마음도 야단법석입니다.

   지난 해 봄, 순천 송광사의 봄을 노랗게 밝힌 요사채 담장의 산수유.

   시와 나무, 그리고 씨앗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는 행복한 밤길에 땅콩 한 알을 잘못 깨물다가 혀 안쪽의 깊숙한 곳을 물었습니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었어요. 밤잠을 설칠 만큼 뻐근한 통증이 계속되네요. 한 알의 씨앗에 대한 깨우침을 오래 가지게 하려는 씨앗의 혹은 이 우주의 생생한 가르침으로 받아 들여야 하지 싶네요.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