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과 상처에게 말 걸기
박 남 희
‘주변부’에 서식하는 것들은 한결같이 보잘 것 없고 초라한 것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주목받지 못하는 삶을 짊어지고 스스로 결핍과 상처 속에서 살아간다. 이들은 중심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 스스로부터도 소외되어 이중적인 소외를 겪게 된다. 이러한 소외는 관습화되고 세습화되면서 끝없는 소외의 연결고리를 낳는다. 이러한 소외의 연결고리를 끊어보려는 노력은 근래 들어 서구를 중심으로 점점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주변을 중심부로부터 배제된 추방당한 자의 공간이 아니라 저항의 공간, 급진적 열림과 가능성의 공간”으로 정의한 흑인 여성 비평가 벨 훅스의 주장은 그 좋은 예에 해당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아직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벨 훅스는 주변부가 보여주는 결핍의 공간을 단지 억압의 결과물로만 보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는 저항의 공간으로 볼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소외된 현실을 뛰어넘으려는 적극적인 동인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운동성’과‘효율성’이 강조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페미니즘 같은 사회운동의 차원에서는 유용한 것이지만, 소외된 영혼들의 상처와 결핍을 정서적으로 치유해주지는 못한다.
필자가 김유석 시인의 시를 논하는 자리에서 벨 훅스의 이론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그의 시가 상처와 결핍의 자리에 위치하면서도, 자신을 포함한 소외된 무수한 타자들과 내밀한 대화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유석 시인이 등단 15년 만에 펴낸 첫 시집『상처에 대하여』는 상처, 배고픔, 외로움, 기다림, 망설임, 그리움 같은 결핍의 정서들을 시인의 체험적 삶과 직관을 통해서 새롭게 환기시켜주는 시집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런 관점에서 표제 시 「상처에 대하여」는 그의 시 쓰기와 삶을 하나의 관점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시 중의 하나이다.
탱자나무를 감고 먼 길을 가는 호박넝쿨은
몸이 곧 길이다.
따끔거리는 곳마다 꽃을 피우고
쉬어가고 싶은 곳엔 열매를 매달며 장난처럼,
어쩌면 자해하듯 살 속에 가시를 찔러 넣는다.
무엇엔가 상처받는다는 건 그것을 사랑하는 일보다 한한 아픔인 줄,
온 몸을 쥐어틀며 견디어나가는 호박넝쿨은
박혀든 가시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빠질 때 생길 고통까지를 살로 삭혀서
흠집 하나 없이 매끄란 호박덩이를
완고한 가시 사이에 저렇듯 매달아놓는다
―「상처에 대하여」부분
인용 시에서 “탱자나무를 감고 먼 길을 가는 호박넝쿨”이 시인 자신처럼 읽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인이야말로 “몸이 곧 길”인 존재이고, “따끔거리는 곳마다 꽃을 피우고”무엇엔가 상처 받는다는 것이 그것을 사랑하는 일보다 환한 아픔인 줄을 아는 사람이다. 더군다나 시인은 “박혀든 가시가 미처 생각지 못한/ 빠질 때 생길 고통까지를 살로 삭혀서/ 흠집 하나 없이 매끄란 호박덩이”인 시를 “완고한 가시 사이에” 매달아 놓을 줄 아는 존재인 것이다. 시인은 이렇듯 상처나 결핍을 내면화시켜서 호박덩이 같은 시를 낳는다. 시인의 이러한 태도는 고통이나 상처를 단순히 넘어서기 보다는 그것을 끌어안음으로써 그런 것들과 말 걸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건강성이 느껴진다. 그는 자신의 사랑이나 욕망조차도 부끄러움이라는 정서 속에 감추려들지 않는다. 그는 “퇴폐적일수록 마음은/혹하는 것들과 닮아간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욕망의“그 텅 빈 항아리 속에서/ 뭔가 썩는 냄새가 난다”(「세월의 감옥」)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면서도 그는“무얼 심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따뜻한 확신인가”( 「봄날은 간다」)를 깨달음으로써 생의 긍정에 이른다. 그에게 있어서 “아물 수 있는 것은 상처도 아니다”왜냐하면 그는 “어지럼병처럼/ 사랑이 있던 자리는 늘 아프다”( 「별사」)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인의 태도는 종종 극심한 고통을 온몸으로 감내해내는 견인주의적인 태도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시인의 견인주의는 단순히 욕망을 의지의 힘으로 견디어내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일상적인 의미의 견인주의자라기보다는 일종의 비판적 견인주의자이다.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철판 위에 오리를 올려놓고 불을 지핀다
물론 오리는 살아있다
오리 알에서 곧 오리를 꺼낼 수 없듯, 살아있다는 것은
이내 별난 요리가 되고 말 한 마리 살진 오리를 말하지 않는다
미운 오리새끼가 되고
때론 무수정의 알을 낳기도 해야 하는 오리는
자신이 먹이라는 것에 대하여 회의하거나
불우라 탓하지도 않는다 오직
뒤뚱거리던 세상의 한 부분을 맛있게 먹어줄 사람들의
초조한 낯빛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먹이와 울에 길들여진 날개처럼
서서히 달구어지는 철판의 뜨거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그것을 던져준다
―「오리 발바닥 요리에 관한 一考」부분
시인은 중국의 요리법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요리법 중의 하나인 ‘오리 발바닥 요리’를 시적 소재로 차용하고 있는데, 시인의 이러한 의도는 단순히 잔혹한 장면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시의 오리가 “살아있는 오리”라는 점과 과거에 “미운 오리새끼”도 되고 “무수정의 알을 낳기도 해야”했던 오리라는 점에서 그 단순성이 극복된다. 살아있는 오리가 불이 지펴진 철판위에 올라가서 “자신이 먹이라는 것에 대하여 회의하거나/불우라 탓하지도 않”고 오직 “자신을 맛있게 먹어줄 사람들의/ 초조한 낯빛을 멀뚱히” 쳐다보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오리의 분노, 즉 시인의 내면에 감추어진 분노를 본다. 시인이 이 시를 통해서 바라보는 오리는 단순히 맛있는 오리요리이기에 앞서서 소외되고 결핍된 존재의 환유적 대상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여기서“오리 발바닥 요리”는 시인이 온갖 고통을 견디고 얻어낸 시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의‘발바닥’은 비천함과 주변부적 삶에 대한 제유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듯 시인은 시의 내부에 비판의 눈빛을 숨기고 있지만, 그것을 노골화하지 않는 것은 자칫 그의 시가 알레고리나 아포리즘에 떨어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시에 이렇듯 비판의 포즈가 숨어 있다는 것은 그의 현실극복의지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상처와 결핍을 단순히 견디는 차원에 두지 않고 시를 통해서 극복해보려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태도는 이번에 선보이는 일련의 시들을 통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까마귀 문양이 걸려 있는 그 곳의 통로는
구름이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심심한 하품 구름
부글거리는 거품 구름
먼지보다 가벼운 추억이라는 뭉게구름, 구름들
삶은 은폐된 구름공장
숨구멍 같은 수많은 굴뚝들을 공중에 감추고 있다
외로움을 담은 욕망이 그 증거다
중독을 전제로
오래도록 불어놓은 풍선 같은 구름들
하품구름과 뭉게구름이 만나 부풀고 있다
옅게 내비치는 하늘색 커튼을 치고
끈적끈적한 분비물이 나올 때까지
전희처럼 서로의 삶을 어루만진다
닮아있을수록 몽롱하게 빠지는 일탈의 자리
실제보다 꼿꼿한 픽션을 끼워 넣으려면
좀 더 강렬한 자극이 필요하다
―「모텔 <오작교>」부분
시인은 남녀가 만나서 자신의 욕망을 발산하는 장소인 모텔 <오작교>를 다양한‘구름’의 이미지에 수렴시키고 있다. 특히 3연에서 ‘하품구름’과 ‘뭉게구름’이 모텔에서 만나서 하는 무료하고 가벼운 사랑을 노골적인 성 묘사를 통해서 보여줌으로써 그 이면에 일회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가벼운 성에 대한 비판을 숨기고 있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구름이 없다면 하늘은 어떻게 떠있나/구름이 없다면/세상은 희미한 옛사랑처럼 늙어버릴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사랑의 육체성과 욕망을 긍정하고 있다. 그런데 김유석 시인의 이러한 논리는 본질적으로 이율배반적이라는 점에서 그 안에 갈등을 내장하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세상을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을 넘어설 수 없다는 한계를 동시에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이러한 딜레마는 종종 전도된 상상력을 낳기도 한다. 그는 윤동주의 시 제목을 패러디 한「별 밟는 밤」에서, 그가 평소에 우러러보던 하늘을 물구나무를 서서 밟는다. 그의 발밑에서 그가 꿈꾸던 “바람望과 날개와 공상”같이 평소에 그의“발꿈치를 세우게 하던 것들”이 밟히고, 하늘에 떠 있던 별 조차“건들면 밤송이처럼 톡 벌어지”거나 “혼자 징징거리다 흘러”버린다. 그는 물구나무서서 하늘 밟기를 통해서 그가 평소에 꿈꾸던 것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절실하게 깨닫는다. 그리하여 시인은 하늘을 보면서 “허방이다. 떠있는 것들/잠시 들어본 지상이 더 가볍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는 현실주의자이다. 그는 현실의 모순을 형이상학적이나 이상적 방법으로 넘어서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현실 속에서 삶의 진리를 발견하고 싶어 한다. 그의 시 「못질」은 현실적인 삶의 한 단면인 육체적인 사랑을 ‘못질’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못을 치다보면
치는 힘보다 더 강하게 튕기는 망치질이 있다.
하나의 못이 아닌
벽 전체가 망치를 받아내고 있다는 생각
벽에 갇힌 찡찡한 울음을 꺼내며
못이 휜다. 벽이 감당해내야 하는 저릿함을
제 몸에 먼저 받아보는 거다
못을 받아들이는 벽은
완강하던 힘으로 못을 조인다. 그 걸 주려고
몇 번이나 못을 굽게 하였던 것
수건이 걸리고 시간이 걸리고
몸통처럼 벽이 걸린다.
빼내기가 더 힘든 구부러진 못
―「못질」전문
시인은 벽에 못을 박는 행위를 통해서 사랑이나 삶의 작용과 반작용의 이치를 깨닫는다. 망치로 벽에 못을 박는 행위는 단순히“하나의 못이 아닌/벽 전체가 망치를 받아내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이러한 사유만 보더라도 사소한 것에서 삶의 총체성을 발견해내는 시인의 혜안이 느껴진다. 망치질에 못이 휘는 것 역시 “벽이 감당해내야 하는 저릿함을/제 몸에 먼저 받아보는”것이며, 벽이“몇 번이나 못을 굽게 하였던 것”은 자신의 몸을 주려고 그랬던 것이라는 깨달음에 이른다. 벽에 구부러진 채 박혀있는 못이 빼내기가 그렇게 힘든 것은 벽과 못과 망치가 어우러져 이룩해 낸 ‘의미 있는’노력의 결과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도 구부러진 못과 같다. 운명이라는 벽에 더 박히지도, 그렇다고 다시 쉽게 빼낼 수도 없는 것이 사랑이다. 어쩌면 사랑은 ‘재즈’같은 것이다. 시인은 「한밤중 혼자 재즈를 듣는다」에서, 재즈의 가사 속에 흐르는 흑인 노예들의 배고픈 삶을“무엇엔가 끌려왔음을 느껴야 하는/내 안에 갇힌 노예들의 흐느낌”으로 전이 시킨다. 이러한 내적인 전이는 시인이 한밤중에 혼자 재즈를 듣는 행위가 단지 사회적 모순을 자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은 오히려 외적인 노예상태보다 내적인 노예상태에 주목한다. “재즈는 삼키는 거다/설득당한 듯 꾸역꾸역,/노예들의 몸속에 더 가엾은 노예들이 살고 있다”는 이 시의 마지막 연은 시인의 이러한 의식을 대변해준다. 이 시는 시인과 재즈 속의 노예가 동일시되는 지점에서 평소에 우리가 깨닫지 못하던 내적 노예상태에 대한 자각을 환기시켜준다. 시인이 꿈꾸는 진정한 삶이란 이러한 내적인 노예상태를 부수어나가는 과정이지만, 그것을 부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재즈는 클래식과는 달리 자유로움과 파격을 지향하지만 그 나름대로의 형식이 엄연히 존재한다. 일종의 자유로운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재즈의 형식은, 고전적 인듯하면서도 자유나 파격을 꿈꾸는 김유석 시인의 삶이나 시 쓰기를 이해하는데 또 다른 시사점을 제공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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