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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겹눈의 상상력과 시의 명징성 / 박남희

by 丹野 2010. 12. 19.

 

 

겹눈의 상상력과 시의 명징성

 

 

박남희(시인)

 

 

1.잠자리의 눈과 시

 

잠자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곤충들은 겹눈을 가지고 있다. 수만 개의 작은 눈이 모여서 하나의 눈을 이루고 있는 겹눈은 주로 원거리보다는 근거리를 바라보는데 유리하며, 사물의 선명성보다는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하는데 유리하다. 잠자리가 겹눈 뿐 아니라 홑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러한 편향성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리라. 만약 인간이 잠자리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전문가들은 인간이 잠자리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세상은 모자이크처럼 보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잠자리는 세상을 선명하게 바라보지 않는다. 그 대신 세상의 움직임의 미세한 부분까지 잡아내서 그것들을 관찰하고 주어진 상황에 반응한다. 그렇기 때문에 잠자리는 인간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고, 인간과는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그런데 이러한 잠자리의 눈을 생각해보면 쉽게 떠오르는 것이 시인의 눈이다. 시인의 눈이야말로 평면적인 세상을 중층적으로 본다는 점에서 겹눈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의 눈은 잠자리처럼 세상을 모자이크화해서 보는 겹눈이 아니다. 잠자리의 눈은 눈의 구조가 겹눈으로 되어있지만 시인의 눈은 세상을 중층적으로 바라본다는 차원에서의 겹눈이다. 하지만 시인의 눈은 잠자리의 눈처럼 흐릿하게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선명하게 보려는 노력을 아울러 기울이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시에서 사용되는 비유는 언뜻보면 대상을 흐릿하게 보이게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시에서 비유를 쓰는 목적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설명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려는데 있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인간의 본능 중 대상을 선명하게 이해하려는 본능은 매우 강한 본능에 속한다. 시에서 표현의 명징성과 내용의 투명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인간의 이러한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므로 좋은 시에는 중층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겹눈과 대상을 명징하게 바라보는 홑눈의 특장이 조화롭게 녹아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다음의 시는 잠자리와 시인의 상관성을 매우 강하게 암시해준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졸음에 있다

 

빳빳, 헛헛한 날개로 허공을 가린 저 졸음은

겹눈으로 보는 시각(視覺)의 오랜 습관이다

 

<아름답다>라는 말의 벼랑 위,

붉은 가시 끝이 제 핏줄과 닮아서

잠자리는 잠자코 수혈 받고 있다

 

링거 바늘에 고정된

저 고요한 날개!

잠자리의 불편한 잠은

하마, 꺾이기 쉬운 목을 가졌다

 

어쩌면 아름다움은

알면서도 위태롭게 졸고 싶은 것,

등이 붉은, 아주 붉은 현기증이다

 

그녀에게도 오래 떠밀리는 세월이 필요했는지

저기 저 꿈 속인 양 졸고 있는

등이 붉은, 아주 붉은 그녀

 

-천수호,「잠자리의 빨간 잠」전문(『작가세계』2005년 가을호)

 

이 시에서 잠자리는 흡사 시인을 닮아있다. 잠자리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것과 존다는 것과 벼랑 끝 가시에 앉아 있다는 점에서 시인과 닮아있다. 생각해보면 시인이야말로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서 벼랑 끝 가시 위에서 졸고 있는 존재가 아닌가? 이 시에서 졸음은 꿈꾸는 것과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속성과 닮아있다. 시인은 꿈꾸는 자이다. “뻣뻣, 헛헛한 날개로 허공”을 가리고 있는 것이나 오랜 습관처럼 겹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역시 시인의 속성으로 읽힌다. 이렇듯 시인은 정신 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의 관습에는 무디지만 시인 자신의 느린 삶의 방식에는 익숙한 존재인 것이다. 시의 내용처럼 아름다움을 위해서 ‘꺾이기 쉬운 목’을 가지고 ‘불편한 잠’을 자는 자야말로 시인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말한다. “어쩌면 아름다움은/알면서도 위태롭게 졸고 싶은 것”이라고. 그리하여 “등이 붉은, 아주 붉은 현기증”을 느끼고 싶은 것이 시인이라고. 시인의 말처럼 ‘붉은 현기증’을 느끼기 위해서는 “오래 떠밀리는 세월이 필요”하다. 시인 역시 시를 쓰는 희열 즉 ‘붉은 현기증’을 느끼기 위해서 세상의 헛된 것들에 떠밀리는 오랜 세월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시는 잠자리의 빨간 잠을 통해서, 관습적 세상의 문법과는 다른 시인의 삶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시이다.

 

2.겹눈과 시적 상상력

 

일반적으로, 세상을 겹눈으로 보는 것이 시인이지만, 그 양태는 시인에 따라서 매우 다르다. 세상을 거시적인 안목에서 바라보고 우주적 상상력으로 인간의 삶을 조망해 보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현미경으로 대상을 보듯 세상을 미세하게 분석적으로 바라보는 시인도 있다. 이 세상에는 큰 것과 작은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밝은 것과 어두운 것, 단단한 것과 물렁한 것들이 혼재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서로 상이할 수 밖에 없다. 시인은 대상을 본질적으로 낯설게 바라보는 존재이지만, 그 표현 방법은 역설, 아이러니, 반어, 알레고리, 은유. 환유, 대비, 병치 등 무수히 많다. 우선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들어갈 수록 솔밭에는 솔내음이 진동했다

용트림 우람할 수록 송진 범벅이었다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는

고추 서서 견디느라

뼈가 녹아 살이 녹아 흐른 소나무의 눈물이

한 천년 땅 속에 묻히면 금패錦貝가 되고

또 천년을 견디면 밀화蜜花가 되고

다시 천년을 더 견디면 호박琥珀이 된다고

땅의 숨결 땅의 내음 땅의 체온에

썩고 익고 썩고 익는 세천년을 견디고서야

한없이 가벼웁고 한없이 단단한 보석이 된다고

 

눈물이 아니면 보석이 될 수 없는, 끝없이 못 견디면 보석이 될 수 없는, 죽은 듯 묻혀야만 보석이 될 수 있는 그 뻔한 이치는 안내인의 믿음이자 학설이지만

 

뜨건 눈물 그대로가 더욱 보석이고

단명하여 더 아까운

나의 보석은 늘 그랬는데,

 

-유안진,「사라지고 마는 것」전문(『창작21』2005년 가을호)

 

유안진 시인은 요즘들어 부쩍 인간의 영원성과 유한성에 관심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인용 시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히는 시인데, 이 시를 살려주는 것은 마지막 연의 시인의 관점이다. 시인은 안내인을 따라 솔밭에 가서 송진이 수천년 후에 호박이 되는 과정을 듣는다. 시인에 의하면 송진은 일종의 ‘소나무의 눈물’인데, 이 눈물은 수천년이 지나서 굳어지면 보석이 된다. 하지만 시인은 눈물이 굳어져서 된 보석의 영원성과 고귀함 보다는, 금방 사라지고 마는 이 세상에서의 뜨거운 눈물보석의 고귀함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시인은 말한다. “뜨건 눈물 그대로가 더욱 보석이고/단명하여 더 아까운/나의 보석은 늘 그랬는데.”라고. 시인의 이러한 태도는 오래 견디고 연단을 받아야 보석이 되고, 그렇게 보석이 된 것이야 말로 귀한 것이라는 형이상학적 정신주의를 넘어, ‘눈물’로 상징되는 현세적 삶의 세목들이야말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지만 ‘보석’ 못지 않게 귀한 것이라는 깨달음에 이르고 있다. 유안진 시인은 이렇듯 세상적인 통념으로서의 보석의 자리에 ‘눈물’이라는 세속적 가치를 환치 시킴으로써 견인주의라는 홑눈으로 바라보던 ‘보석’의 가치적 범주를 일상의 자리에까지 확장시키고 있다. 액체로 된 보석인 눈물을 발견해 낼 수 있는 것이야말로 시인의 특권이다. 이 시를 읽는 묘미가 여기에 있다.

 

공터에 깨진 거울조각이 쌓여있다

서로 다른 각도로

서로 다른 크기로

주변을 쳐다보는 거울의 망막

계수나무를 감고 올라간 나팔꽃 줄기가 끊어져

꽃봉오리 터뜨린다

커다란 해바라기 얼굴이 조각나

싱싱하게 피어 있다

공터를 서성이던 내가 바닥에 박혀

찢어진 치마 속에 두 다리 감추고 있다

모서리마다 갇혀있는 하늘

긁히며 구름이 간다

바로 옆으로 건너가지 못하는 구름

바로 옆은 가까운 곳이 아니다

한 발짝만 움직여도

금방 다른 빛을 내며

다른 걸 담아내는 거울의 시선

바로 옆을 곁으로 삼지 않는다

 

-김산옥,「거울조각」전문(『현대시』2005년 11월호)

 

위에서 인용한 두 시가 시인의 겹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 시는 시적 소재인 ‘거울조각’ 자체가 겹눈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시인은 공터에 버려진 무수한 거울조각을 보면서 그들이 사물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각도에 주목하고 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시선을 지닌 수 많은 거울조각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계수나무를 감고 올라간 나팔꽃도 줄기가 끊어진 채 꽃을 피우는 것으로 보이고, 거울 조각 위에 서있는 시인의 다리 역시 찢어진 치마 속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하늘을 거침 없이 흘러가는 구름이 거울조각 속에서는 바로 옆으로도 건너가지 못하는 단절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 시가 새롭게 읽히는 것은 거울의 겹눈보다는, 깨어진 거울조각이 상징하는 파편화된 현대인의 삶을 감지해 내는 시인의 겹눈에 기인한다. 시인은 삶이라는 공터에 무수히 부서져 산재해있는 파편화된 인간들의 눈을 통해서 왜곡된 세상에서 서로 소통할 수 없는 현대인들의 단절을 이야기 하고 있다. “한 발짝만 움직여도/ 금방 다른 빛을 내며/ 다른 걸 담아내는 거울” 즉 파편화된 개인은 “바로 옆을 곁으로 삼지 않는다” 이처럼 하나가 될 수 없는 가치관의 극단에 거울조각들은 제각기 반짝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거울은 본래 깨어진 것은 아니다. 거울의 본 직분은 깨어지지 않은 온전한 몸으로 온전히 세상을 담아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음의 시는 깨어진 거울과 온전한 거울을 동시에 생각해 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온 동네가 가난을 식구처럼 껴안고 살던 시절

언니와 나는 일수 심부름을 다녔다.

우리집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던 일수(日收).

월곡동을 지나 장위동을 거쳐 숭인동까지

카시오페아좌처럼 뚝뚝 떨어져 있는 다섯집을 다 돌면

일수 수첩 사이에서 돈의 두께가 부풀어 오르고

내 가슴에 도장밥 빛깔의 별들이 철없이 떠올랐다.

일수 수첩 속에는 각각 다른 여러 겹의 삶들이

붉은 도장의 얼굴을 하고 칙칙하게 접혀있었다.

어느날 추위를 툭툭 차며 집에 도착했을 때

‘벌써 갔다 왔니?’하던 엄마의 이마에 송송

맺혀있던 땀방울과 아버지의 헐클어진 머리칼과

파도처럼 널브러진 이불, 들킨건 나였다.

아무 것도 못 본 척 문을 닫고 나오던 내 뒤통수를

쌔리며 사춘기는 내게로 다급하게 휘어들었다.

삽십대 후반의 젊은 부모에게

꼭 묶어 두어도 터져 나오던,

때론 밥 생각보다 더 절박했을,

한 끼의 섹스가 가난한 이불 위에

일수 도장으로 찍혀 있던, 겨울 그 단칸방.

언니와 나는 일수(日收) 심부름을 다녔다.

 

-김나영,「어느 섹스에 대한 기억」전문(『시와 반시』2005년 가을호)

 

한 가정을 온전한 한 장의 거울로 본다면, 부모와 자식은 같이 살면서 서서히 거울의 균열을 경험하게 된다. 그 시기는 대개 사춘기가 되는데, 이 시기는 어린 자식이 부모의 곁을 떠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기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시기는 라캉의 표현을 빌면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가는 시기에 비견된다. 물론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가는 일차적인 단계는 유아가 엄마와 자신을 분리해서 인식하기 시작하는 시기이지만, 또 다른 의미의 상징계로의 진입은 사춘기 이후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시를 보면 부모와 자식간의 어긋남, 즉 가족이라는 커다란 거울이 깨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부모와 자식간의 유대를 강화시켜주는 것은 가난이지만, 가난은 동시에 부모자식간의 금기를 깨뜨려서 일정한 간격을 갖게 해준다는 점에서 이중적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

시인은 어린 시절 언니와 함께 일수 심부름을 다니게 되는데, 어느 날 일수를 나간 사이에 부모님이 섹스를 한 흔적을 발견하고 당황하게 된다. 정작 섹스의 흔적을 들킨 건 부모님이었는데도 시인은 “들킨 건 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이미 시인이 사춘기 시절을 겪으면서 자신의 내부에 성을 꼭꼭 감춰두고 있었는데, 부모님의 섹스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면서 순간 자신의 성을 들켜버린 것과 같은 무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순간이야말로 짧은 시간이지만 부모와 자식의 성이 만나는 순간이고, 깨어졌던 거울이 일시적으로나마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시인의 성과 부모님의 성은 차츰 이해의 장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이제 “때론 밥 생각보다 더 절박했을” 부모님의 “한 끼의 섹스”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시는 내용상의 반전을 통해서 시인의 사춘기적 심리를 극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고, “들킨 건 나였다”는 진술에서 보듯 시인의 또 다른 눈, 즉 겹눈을 통해서 부모님의 성을 바라보던 사춘기의 내면이 진솔하게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감동을 더해준다.

 

종종 뒷산의 산새들이

학교 유리창에 부딪쳐 죽는다

유리창에 숨어 사는 뒷산 때문이라고도 하고

발효한 산열매를 쪼아먹고 음주비행을 했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새가 되고 싶은 유리창의 음모라는 풍문이 설득력이 있다

유리창에는 새의 충격이 스며있다

유리창은 종종 깊은 울음을 운다

비가 올 때는 눈물길이 열길 스무 길이 생긴다

유리창에 부딪쳐 죽은 새는 다시 살아나

유리창을 마음대로 통과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산맥과 달님도 마음대로 뚫으며 날아다닌다고 한다

 

-장인수,「유리창」전문(『시인세계』2005년 가을호)

 

새가 벽에 부딪쳐 죽었다는 말은 이미 신라 진흥왕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당시의 유명한 화가 솔거가 황룡사 벽에 그렸다는 노송도(老松圖)에 새들이 부딪쳐 죽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외국의 한 조류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새가 유리창에 와 부딪치는 것은 유리창에 나무 그림자가 반사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이런 일이 종종 있기 때문에 머리가 나쁜 사람을 일컬어 새대가리(bird brain)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렇듯 새는 때로 착각을 해서 사고를 당하기도 하는 것이다. 장인수 시인의 시 역시 이러한 모티브가 바탕이 되어 있다. 시인은 새가 유리창에 부딪치는 것이 유리창에 숨어 사는 뒷산 때문이라고, 새의 음주비행 때문이라고 하는 풍문을 소개하면서 “새가 되고 싶은 유리창의 음모라는 풍문”에 무게 중심을 가져간다. 하지만 이러한 풍문은 사실 실제로 존재하는 풍문은 아닐 것이다. 시인은 실재하지 않는 풍문을 실재하는 것처럼 끌어들여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펼쳐나간다. “유리창에는 새의 충격이 스며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쉽게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이지만, “유리창은 종종 깊은 울음을 운다”는 것이나, 비가 올 때 유리창에 “눈물길이 열길 스무 길이 생긴다”는 사실을 보아내는 눈은 범상한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유리창에 부딪쳐 죽은 새는 다시 살아나/유리창을 마음대로 통과하며 살아간다고 한다/산맥과 달님도 마음대로 뚫으며 날아다닌다고 한다”는 상상력은 일상인의 홑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일상인들은 유리창에 비친 그림자 정도를 보아내지만 시인은 유리창에 갇혀서 날아다니지 못하는 유리창 속의 새를 보고, 유리창 속에서 갇혀서 울고 있는 새의 울음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새가 유리창에 와서 부딪치는 것은 유리창 속에서 울고 있는 새가 그리워서 그렇게 하는 것이 된다. 물론 이러한 상상력은 과학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지만 과학적 사실과는 다른 차원에서 보아내는 시인의 겹눈이야말로 새로운 시세계를 창조하는 창조의 눈인 것이다.

 

3.겹눈으로 보는 명징성의 세계

 

이 글의 서두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잠자리의 눈은 겹눈이지만 세상을 명징하게 보아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시인의 눈은 세상을 겹눈으로 보면서도 명징한 세계를 보고 싶어한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관념을 감각화 해서 보여주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현상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형이상학적 현상들을 구체적인 사물들을 통해서 보여줄 수도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 중 인간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죽음의 세계이다. 하지만 이승에 사는 인간은 죽음의 세계를 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종종 초혼제를 지내거나 여러 가지 종교행위를 통해서 살아생전 그립던 사자(死者)와 만나고 싶어한다. 다음의 시는 보이지 않는 사자를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녀는 기차를 갈아탄다

한 줌 뼛가루로

굴참나무 밑에 하얗게 뿌려진다

보풀 많던 어머니라는 이름, 흙뿌리가 된다

팔십 년을 세운 몸의 사원을 헐고

다시 팔십년을 큰키나무로 꾸리시려나

옆구리로 싯달타를 낳은 마야부인처럼

옆으로만 누워 꿈을 꾸던 여자

매운 슬픔, 맹물로 삼켰듯

크고 작은 빗방울, 잎으로 잎으로 게워낼 거다

살아 생전 한번도 내비치지 않았던

가슴속 아라비아바다

붉은 열매로 출렁출렁 매달릴 거다

껍질 무거웠던 한 겹 생애

헝겊바람처럼 가볍게 가볍게 풀어놓으며

치익포옥 치익포옥

다음 역까지 흔들흔들 갈 게다

마중나온 옹이들 손붙잡으며

그 여자, 기차를 갈아탄다

굴참나무라는 저 푸른 환승역

 

-김수우,「수목장 樹木葬」전문(『신생』2005년 가을호)

 

수목장은 1999년 스위스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새로운 장묘방식이지만, 시신을 화장해 골분을 나무 밑에 묻는 자연친화적인 요소가 호응을 얻으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 새로운 장묘문화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시인은 인간이 이 세상에 왔다가 다른 세상으로 가는 죽음의 과정을 수목장이라는 장례행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죽은 어머니가 이 세상에 왔다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 시인은 마치 우리가 한 열차에서 다른 열차로 갈아타듯 환승하는 것이 죽음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이 시에서는 이렇듯 환승 모티브야말로 보이지 않는 사후의 세계를 생생하게 볼 수 있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시적 장치인 셈이다. 인용 시에 의하면 시인의 어머니는 “옆구리로 싯달타를 낳은 마야부인처럼/ 옆으로만 누워 꿈을 꾸던 여자”이다. 불교에서 싯달타 즉 석가가 옆구리로 태어났다는 것은 난산을 의미하기도 하고 탄생의 신비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시인의 어머니가 옆으로 누워서 꿈을 꾸고 있었다는 것은, 그 아래의 “매운 슬픔. 맹물로 삼켰듯”이라는 구절과 연결시켜 보면 노환이나 긴 병으로 병상에 누워있었다는 것을 추리해 볼 수 있다. 살아 생전에는 가슴 속에 감추고 내비치지도 못했던 가슴속의 아라비아바다, 즉 가슴 속에서 출렁거리던 회한이 붉은 열매로 출렁출렁 매달린다는 것은 분명히 축복이다. 시인은 이렇듯 수목장이라는 장례를 통해서 현세보다 더욱 행복한 세상으로 가는 열차를 갈아타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 보는 것이다.

시인이 지니고 있는 겹눈은 죽음 저 쪽의 세계도 명징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고감도의 눈이다. 그런데 요즘은 점점 시인의 겹눈이 그 기능을 잃어가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사물들이 시인의 겹눈을 기피하는 것인지 수 많은 문학잡지를 뒤져도 겹눈의 싱싱한 감각이 살아있는 시를 발견해내기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필자의 부족한 글에 선뜻 승차해준 위의 시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창작 21> 2005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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