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경험과 시 쓰기
고재종(시인)
1. 경험과 소재
서거정은 “시는 마음에서 발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마음 속의 情이건 意건 그것을 일으키는 데는 대상이 있다. 이 대상은 사물이건 사람이건 현상이건 사건이건 모두 우리가 살아가는 데서 만나고 부딪히고 사랑하는 가운데 생기는 체험의 산물이다. 동양시학의 논리 가운데 先景後精이라는 게 있는데 이것도 풍경에 대한 체험이 먼저 있고서야 감정이나 정서가 동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체험에는 일상적 삶의 체험, 독서 체험, 여행 체험 등이 있는데 이런 근원적이고 감각적인 체험 소재들이 지성, 언어, 의식 작용 등을 거쳐 경험으로 올라서게 된다.
이런 경험의 소중함에 대하여 릴케가『말테의 수기』에서 한 말을 보자. “젊을 때 시를 쓰는 일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다. 시는 언제까지나 끈질기게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일생동안 그것도 70년 또는 80년 걸려서 우선 벌처럼 꿀과 의미를 모아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열 줄의 훌륭한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다. 시가 만일 감정이라면 젊어서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을 것이다. 시는 바로 경험인 것이다.”
시가 감정의 발산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질타 때문에 한 얘기이지만 그렇더라도 경험의 핍진성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시적 경험은 자잘한 일상사에서부터 도저한 정신적 사유에까지 다양하다. 어쩌면 총체적 삶 자체가 우리의 시적 경험 소재가 아니겠는가.
자칫 지나치기 쉬운 자잘한 일상사 하나가 시인의 시적 카메라에 스냅사진처럼 잘 포착된 시를 보는 것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인연> - 최영철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고
자장면집 한켠에서 짬뽕을 먹는 남녀
해물 건더기가 나오자 서로 건져주며
웃는다 옆에서 앵앵거리는 아이의 입에도
한 젓가락 넣어주었다
면을 훔쳐 올리는 솜씨가 닮았다
이 시의 주인공 남녀는 아마도 결혼기념일을 맞았거나 어느 한쪽의 생일을 맞아서 외식을 나온 모양이다. 한데 그 특별한 날 온 곳이 기껏해야 자장면집인 걸로 보아 노동자나 서민의 삶을 면치 못한 부부일 것이다. 그럼에도 해물건더기가 나오자 서로 건져주며 웃는 걸로 보아 아직도 그들 사이엔 꿋꿋하고 씩씩한 사랑이 존재하고 있다. 더구나 그들에겐 옆에서 앵앵거리는 아이도 있지 않는가. 한데 아이에게 한 젓가락 넣어주자 그 면을 훔쳐 올리는 솜씨가 부모를 닮았다고 하는, 그 사실을 포착해내는 시인의 예리한 눈을 보라.
참으로 흔하디 흔하게 겪는, 그리고 그냥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일상의 한 장면을 시적 경험으로 포착하여 우리에게 가족과 사랑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수일한 시다.
<그믐밤> - 장석주
커피 물을 끓이려고 가스레인지 불을 켠다
새벽 네시다
가스레인지의 스위치를 비트는 하얀 손이
낮엔 복숭아나무 죽은 가지 두어 개를 툭툭 분질렀다
아주 가까운 둔덕에서 소쩍새가 운다
그믐밤인가 보다
내가 청혼했던 여자의 잠도 깊겠다
내겐 벌써
저기 아득히 흘러가 버린 과거가 있다
당신도 알다시피 매우 숭고한
쓰라린 과거다
이 시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시인은 새벽 세시에 홀로 깨어나 커피 물을 끓인다. 낮엔 밭에서 복숭아나무를 손질한 손으로 말이다. 그때 가까운 데서 소쩍새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주 깜깜한 그믐밤 홀로 그 소리를 듣다가 한때 청혼까지 했을 정도로 사랑했던 여자를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흘러가 버린 과거다. 쓰라린 과거지만 그럼에도 그 과거가 숭고했다고 말하는 시인을 보라. 우리는 부끄럽고 괴롭고 힘들었던 과거들을 떠올리기 싫어하고 오히려 어서 빨리 지워버리려 하지만 시인은 이를 숭고하게까지 여기는 것이다.
어쨌거나 위의 두 시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경험한 사소한 일을 가지고 삶의 외로움과 사랑을 적절하게 표현함으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山頂墓地․1> - 조정권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山頂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天上의 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同列에 서는 것.
그러나 한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이 시는 조정권의「산정묘지․1」의 일부분이다. 이 시는 보다시피 분명히 풍경의 서술이다. 그러나 또 풍경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 육체의 감각기관이 포착한 풍경이라기보다는 어떠한 도저한 정신이 투사하는 내면풍경이기도 하다.
통속과 허영만이 난무하고, 기품 없고 향기도 없이 썩은내만 진동하는 지상의 저자에서 시인은 孤高지향의 淸淨의지를 꿈꾼다. 그러므로 겨울 산을 오르며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을 노래하는 것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는 것이 산정의 실체라는 것을 말하고자함이며, 시인이 고고와 청정의지를 꿈꾸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이란 경구적 구절은 이렇게 해서 태어난다.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기본적 충동의 하나로 주어진 자연상태로부터 벗어나려는 욕구가 있다. 사람들이 옷가지를 걸치려는 것, 또 문자 획득 이전의 사회에 산 사람들이 몸에다 색칠을 했던 것 등도 그 때문이다. 억제하기 어려운 슬픔을 당했을 때 사람들이 동물적인 비명이나 육체언어에 고스란히 자기를 떠맡기기보단 이를 억제하고 조정하려는 것도 모두 자연으로부터 문화로의 이행이라는 오랜 훈련과 양식화의 결과일 것이다. “금수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라는 준열한 상기는 동양문화권에서 가장 유서 깊은 지엄한 윤리적 수사였다.
이런 문화와 윤리의 정립 속에서도 오히려 금수보다 더한 인간이 난무하는 세태 속에서 시인이 지향하는 고고와 청정의지는 필요하고 또 필요하다. 시적 경험은 사소한 일상의 순간에서부터 이렇듯 도저한 정신의 사유 속에도 편재 돼 있는 것이다.
<史記에서>-이시영
세상에서 이처럼 단순한 기록을 남긴 왕도 있다.
惠王의 이름은 季이며 明王의 둘째아들이다. 昌王이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2년(599)에 왕이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惠라고 했다.
말하자면 왕이 된 그 즉시 세상을 떠났으므로 아무런 치적도 패악도 남길 새 없었다.
깨끗하다. 백제 제 28대 왕.
이 시는『삼국사기』를 읽고 쓴 시다. 시적 화자는 1연에서 독자들을 삼국사기로 인도한다. 그리고는 2연에서 백제 제28대 왕의 기록을 사기 기록 그대로 보여주는데, 그 왕은 왕위에 오른 즉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그런 뒤 3연에서 다시 시인의 직접서술이 나오는데, 그런 왕이었으므로 세상에 아무런 치적도 패악도 남기지 않은 깨끗한 왕이었다는 것이다.
흔히 권력을 잡으면 그 권력자들은 세상에 자기의 치적을 남기고자 과욕을 부리기 마련이다. 특히 독재자일수록 그 치적과 질서를 조장하기 위해 각종 억압과 착취의 행위를 일삼기 마련이다. 우리의 현대사는 한마디로 그런 지배자들에 왜곡되어 민중들의 고통만이 가중되어 왔다. 이 시는 그 지배자들에 대한 통렬한 일갈로 그 의의를 다한다.
한데 나는 여기에서 이 시의 내용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시는 독서 경험을 통해서도 많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직업을 가진 일개 존재로서 모든 삶을 경험할 수는 없다. 또 우리는 우리의 많은 경험을 가지고도 그것을 표현할 세계관이나 지식의 한계 때문에 시적 형상화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당연히 요구되는 것이 독서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세계 최고의 독서가라면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이다. 그는 사후에 “20세기 중후반의 모든 인문과학의 사조가 그에게서 출발했다”라는 극찬을 받는 사람이다. 그는 어릴 적 집안의 도서관에서부터 문학교수와 도서관 사서 그리고 나중엔 국립도서관의 관장을 역임하기까지 평생을 도서관에서 살았다. 그는 영국의 브리태니커, 프랑스의 디드로, 독일의 브록하우스 등 그동안 출간된 모든 백과사전을 외우다시피 반복해서 읽었는데,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실제세계와 백과사전 중에서 선택하라면 백과사전을 택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나중에 장님이 되기까지 한 그 왕성한 독서력을 통해 ‘20세기의 창조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깊은 사유의 작품들을 발표하여 오늘날 수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그는 “모든 곳은 도서관이다”라고 했는 바, 그렇다면 우주란 “신이 쓴 하나의 거대한 책”이겠다.
물․불․공기․흙의 4원소에 대한 ‘물질 상상력’ 이론을 정립함으로써 금세기 최고의 시인 철학가로 불리는 가스통 바슐라르 역시 독서광이었다. “새로운 책들은 우리들에게 얼마나 가득한 덕을 베풀어주는가! 젊은 이미지들을 말하는 책들이 하늘에서 내 바구니에 매일같이 가득히 쏟아져 내렸으면 싶다. 이 기원은 자연스러운 것, 이 기적은 손쉬운 것, 저 위의 하늘나라에서 낙원이란 다만 거대한 도서관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한 그는 독서를 통해 상상력의 끝간데까지를 가보았다.
터키의 소설가 오르한 파묵은『하얀 성』에서 “편도 마차 승차권으로는 한번 여행이 끝나고 나면 다시는 삶이라는 마차에 오를 수 없다. 그렇지만 만약 당신이 책을 한 권 들고 있다면, 그 책이 아무리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하더라도, 당신은 그 책을 다 읽은 뒤에 언제든지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읽음으로써 어려운 부분을 이해하고 그것을 무기로 인생을 이해하게 된다” 라고 말했다. 그의 또 다른 소설『새로운 인생』의 첫 문장은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인생은 바뀌었다.”로 시작된다. 그는 책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책을 통해 보르헤스처럼 깊고 드높은 사유의 힘으로 세계와 우주를 통찰할 수도 있고, 바슐라르처럼 상상력의 무한한 시공간을 넘나들 수도 있으며, 파묵처럼 새로운 인생이해의 길로 나갈 수도 있다. 또 누군 소박하게 지식을 습득하고 다른 세계를 간접체험하기도 할 것이다. 나는 말년에 장님이 된 보르헤스의 ‘책 읽어주는 사람’으로 고용되어 독서에 탐닉한 알베르토 망구엘이 그 독서경험을 바탕으로 지은『독서의 역사』란 명저를 통해 책과 독서에 관한 인류의 끝없는 갈망과 그 위대한 승리의 6000년 간의 역사를 본다. 이 책을 보면 “결국 세계는 한권의 아름다운 책에 이르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 시인 말라르메의 말이 되새겨진다.
요새 영상의 시대를 운운하며 책의 종말을 얘기하지만 인간은 언어의 동물이다. 어쩌면 우주보다 더 오래 남을 그 언어의 기록, 곧 헤르만 헤세의 말대로 “인류가 자연으로부터 선물로 받지 않고 인간의 정신으로 창조한 수많은 세계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것인 책의 세계”가 인간세상에서 어찌 사라지랴.
<寄港地 1>- 황동규
걸어서 港口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중의 어두운 龍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港口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數三 個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이 시는 낭만적 우울에 바탕을 둔 낭만적 동경이 현실과 교섭하는 과정을 빼어나게 보여주는 시다.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라는 첫 구절은 이 시가 젊은 날의 방랑과 관련된 나그네의 입장에서 쓰여진 시임을 알 수 있다. 동반자 없이 혼자 무전여행을 하는 것 같은 젊은 나그네는 물론 일상의 단조로움과 권태로움을 넘어 모험과 멀리 있는 것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하여 항구에 도착했을 것이다. 경험과 모험에의 충동은 특히 젊은 날엔 에로스의 충동과 연결되는데, 항구는 멀리 있는 것에 대한 확실한 시적 기호일 것이다. 지상의 끝이자 다시 먼 출발을 약속하는 지점이며 나그네에겐 이국정서를 환기해주는 곳이기에.
한데 그 항구에 막상 도착해보니 찬바람은 길게 불어 바다 앞의 녹슨 집들을 흔들고 하늘은 눈이라도 내릴 듯 음산히 내려앉아 불빛마저 낮게 낮게 비친다. 그래도 지전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 곧 돈과 관련된 세상의 합리적 사고나, 또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버리고, 그러니까 이제 어두워진 하늘이 지워버리는 그림자처럼 어떤 절망이나 운명에 대한 생각도 꺼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그런데 웬걸, 정박 중의 배들은 그 머리를 거북선의 거북처럼 쳐들고 모두 육지를 향해 있는 것이다. 육지 끝으로 걸어온 나그네가 만난 것은 오히려 바다 끝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용골인 것이다. 곧 낭만적 동경이나 모험이 현실적 경험 속에서 새로운 눈을 얻게 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래도 젊은 나그네에게 허망함이나 황량함, 그리고 아픔은 남을 터. 어두운 하늘에 수삼개의 눈송이가 떠돌고 그것을 새들이 따르고 있다는 풍경의 묘사는 바로 그것이 사실적이기보다는 喚情的인 만큼 시방 젊은이의 마음 속에 자리하는 황량한 아름다움과 제휴되어 있는 것이다.
이 시는 황동규의 젊은 날의 여행체험에서 얻어진 시다. 이 시인은 시 쓰는 일과 강의 외엔 거의 모든 날들을 여행에 바쳤다 할 정도로 여행을 좋아해서 이후 그 속에서 건져진 수많은 시들을 낳았고, 그 중에서도『풍장』 같은 연작시는 그 시적 성과도 만만치 않다.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도저한 정신의 사유에까지 뻗쳐있는 각종 경험과 독서 및 여행 체험이 어떻게 시적 형상화를 입는가에 대해 몇 편의 시를 통해 알아보았다. 여러분의 삶의 나날을 모두 시적 텍스트로 보는 눈을 통해 시는 탄생한다. 여러분은 그런 나날을 늘 응시하고 그것을 언어화하는데 게을리 하거나 두려워 말라.
2. 주제와 상상력의 문제
체험 혹은 경험만으로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경험에는 언제나 상상력이 결합하여 그 경험의 시공간은 시인만의 창조적 시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상상력은 인간만이 지닌 독특한 힘이다. 꿀벌이 아무리 정교하게 집을 짓더라도 가장 서투른 목수에게 미치지 못한다. 목수는 집의 용도에 맞는 설계도를 작성할 줄 알기 때문이다. 연애에도 상상력이 필요하다. 나는 이 사람과 어떻게 어떻게 교제하고, 결국 교제에 성공하여 결혼을 하게 되면 아들딸은 몇을 낳고, 집은 언제쯤 사고, 또 이 사람과의 행복을 위해 나는 어떻게 어떻게 해야겠다는 상상력이 없다면 그 연애가 어찌 되겠는가.
상상력에 관하여 우선 다음 시 한 편을 보자.
<인식의 힘 -절망한 자는 대담해지는 법이다 -니체> - 최승호
도마뱀의 짧은 다리가
날개 돋친 도마뱀을 태어나게 한다
흔히 ‘날개 돋친’이라는 자리에 괄호를 치고 그 말을 비운 뒤 채워보라고 하면 별별 소리가 다 나온다. ‘긴 다리의’ ‘뛰는’ ‘달리는’ ‘꼬리를 끊는’ ‘독을 가진’ 등등 짧은 다리의 한계를 극복해야한다는 강박관념으로 현실적 대안만을 찾는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주제가 총체적으로 담겨 있는 제목을 보아야 한다. 그건 ‘인식의 힘’이다. 그 다음 왜 주제에 니체의 철학적 경구가 붙어 있고 그것은 무엇이지 살펴야 한다. 그건 ‘절망한 자는 대담해지는 법이다’ 이다. 다시 말해 절망한 자는 대담해지는 것이 인식의 힘이라면 우리는 그것의 한계에 대한 현실적 대안보다는 좀더 고차원의 직관력을 통해 세계를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그 인식의 힘이 결국 ‘날개 돋친’이라는 비약적 표현을 낳은 것이다. 이 시에서는 이걸 인식의 힘이라고 했는데 결국 이건 상상력의 힘일 수밖에 없다.
두 개의 하얀 유방이 그녀의 블라우스 속에서 나왔다
이 표현은 너무나 단조로운 설명적 묘사다. 흠잡을 데는 없지만 우리 눈을 환히 열리게 하거나 우리의 인식에 별다른 충격을 가하지 않는다. 상상력이 없는 경험 그 자체의 표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크누트 함순이란 사람은 이 문장에서 ‘유방’을 ‘신비로움’으로 바꾸었다.
두 개의 하얀 신비로움이 그녀의 블라우스 속에서 나왔다
유방과 신비로움은 본질적 유사성이 있다. 사실 팽팽한 젊은 아가씨의 젖가슴은 누가 뭐라 해도 신비로움 그 자체일 것이다. 이를 잘 직관한 크누트 함순의 상상력은 그 단어 하나를 바꿈으로 우리의 눈을 부시게 한다.
일상적 삶은 지독히 평범하고 진부하다. 바람 빠진 풍선 같고, 찐 달걀 같은 삶의 이 비극적 단조로움과 폭폭함을 어린애 같은 경이의 눈길로 낯설게 보는 것이 시적 상상력의 본질이자 삶의 허무를 넘어서는 확실한 대안이기도 하다.
<동백이 활짝> - 송찬호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
허공으로의 네 발
허공에서의 갈기
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 한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
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이 비범한 재능을 보라. 상상력의 놀라운 힘을 보라. 사자가 솟구쳐오르듯 꽃이 활짝 피다니, 허공으로 네 발 치켜올리며 허공에서 갈기 날리며 사자가 솟구쳐오르듯 꽃이 활짝 피다니! 여기까지도 비상한데 또 다음은 어떤가. “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 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란다. ‘나는 어서 시를 완성해야만 한다. 바람에 동백꽃이 다 지기 전에’ 라는 정도의 말인데 이를 뒤집는 상상력의 힘을 보아라. 그러니 숫제 이 시에선 뛰어난 상상력이 동백을 활짝 피우고 있는 형국이다. 이게 귀신의 소리가 아니라면 누가 이보다 더 은유를 잘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상상력은 주제의식과 연관되지 않으면 한낱 마술지팡이 밖에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시적 내용과 형식으로 시작품의 형상화를 이루어낼 경험 소재들은 상상력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시적 세계를 창조해내는데, 여기에서 상상력이란 시적 주체의 인생관, 세계관, 혹은 대상에 대한 주체의 태도가 정립되어야 힘차게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의 특수한 경험을 다수의 보편적 경험으로 올려놓을 수 있는 이 주제의식은 시를 이끌어 가는 철학적, 사상적 배경이다. 흔히 상상력 하면 형식과 표현의 새로움에 관계하는 무슨 마술지팡이 같은 걸로 알지만, 나는 근본적으로 그 시의 주제를 이끌어 가는 철학적․사상적 배경을 상상력과 연관시킨다.
가령 존재론적 상상력이니 사회정치학적 상상력이니 혹은 생태학적 상상력이란 소리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바로 주제의식에 의한 상상력의 활용을 위한 말들이다. 하지만 오늘은 얼마 전 한계전 교수가『한계전의 명시 읽기』에서 갈래 지은 전통․자연 그리고 인생을 노래한 시, 순수서정과 내면의 울림에 천착한 시, 새로운 감수성의 언어를 지향한 시, 현실인식과 역사를 껴안은 시, 사물의 비밀과 존재의 탐구에 주력한 시 한두 편씩을 살펴보며 상상력과 주제의식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살펴보겠다.
(1) 전통, 자연 그리고 인생을 노래한 시
<수정가> -박재삼
집을 치면, 정화수 잔잔한 위에 아침마다 새로 생기는 물방울의 선선한 우물집이었을레. 또한 윤이 나는 마루의, 그 끝에 평상의, 갈앉은 뜨락의, 물냄새 창창한 그런 집이었을레. 서방님은 바람 같단들 어느 때고 바람은 어려올 따름, 그 옆의 順順한 스러지는 물방울의 찬란한 춘향이 마음이 아니었을레.
하루에 몇 번쯤 푸른 언덕들을 눈 아래 보았을까나. 그러면 그때마다 일렁여오는 푸른 그리움에 어울려, 흐느껴 물살 짓는 어깨가 얼마쯤 하였을까나. 진실로, 우리가 받을 산신 령은 어디 있을까마는, 산과 언덕들의 만리 같은 물살을 굽어보는, 춘향은 바람에 어울린 수정빛 임자가 아니었을까나.
서정주가 유일하게 자기 제자로 인정한 박재삼은「울음이 타는 가을 강」「추억에서」등의 명편으로 이미 전통, 자연 그리고 인생을 노래한 시의 일가을 이루고 있는 시인이다. 그런데 이「수정가」또한 춘향이의 마음을 자연에 비유해 읊은 수일한 시다.
먼저 1연에서 춘향과 이도령을 자연적 존재인 집과 바람으로 비유한다. 즉 춘향을 집으로 친다면 정결한 물냄새가 풍기는 집, 곧 물로 만들어진 집이었을 것이고 이도령은 바람 같지만 그렇다 해도 바람은 물에 녹아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2연에서는 이도령을 향한 춘향이의 마음과 존재의 면모가 형상화되고 있다. 이도령을 향한 춘향의 그리움이 깊어갈수록 춘향은 바람을 머금은 수정빛 물이 된다. 춘향의 푸른 그리움은 그 흐느낌 때문에 물살을 일으키지만 결국 춘향은 그 바람에 어울리는 수정빛 물이 되는 것이다.
이 계열의 시들이 대개는 눈물과 그리움과 한의 정서를 주제로 취하고 있는데 이 시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춘향이의 그리움이 물이라는 질료로 형상화된 점, 그리고 결국 이 물이 수정빛을 띰으로서 한의 정서가 승화된다는 점은 새롭다. 그리고 춘향을 집에 비유하고 이도령을 바람에 등치시켜 춘향은 정착적인 존재요 이도령은 부유하는 존재로 형상화한 점도 신선하고, 특히 집을 “정화수 잔잔한 위에 아침마다 새로 생기는 물방울의 신선한 우물집” 등으로 묘사하여 비유와 상상력의 기발함과 함께 이미지의 깊이를 얻은 점도 흥미롭다. 마지막으로 산문시임에도 ‘-이었을레’ ‘-을까나’라는 종결어미를 사용하여 춘향과 이도령이라는 허구적 인물과 그를 감싸는 신화적인 공간에 신비감을 더해주는 것도 주목할만하다.
이런 전통, 자연을 통해 사랑의 노래를 읊는 젊은 시인 중에 장석남이 있다. 물론 장석남은 여기에 모더니즘까지 가미하고 있으나 역시 그의 정서는 세상에 온 모든 생들을 측은히 여기는 전통적 서정에 그 뿌리를 대고 있다. 다음의 시를 보라.
<배를 밀며> - 장석남
배를 민다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득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넣고는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 없이 밀려드는 배여
남녀 관계엔 항상 사랑과 이별의 변주가 있다. 김소월의「진달래꽃」, 한용운의「임의 침묵」이 그렇고 서정주의「歸蜀道」와 박목월의「하단에서」가 그렇다.
마찬가지로 장석남의 이 시에도 사랑과 이별의 변주가 공식처럼 자리하고 있다. 지금 시적 화자는 사랑을 하다가 누군가와 헤어져야 할 시간인 모양이다. 그래서 안타깝지만 그를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것을 그는 어느 가을날 바닷가에서 배를 밀어보는 아주 독특한 경험 혹은 상상력을 통해서 비유해낸다. 먼저 이별을 모양새 있게 하는 것은 사실 배를 밀어보는 것만큼이나 아주 드문 경험일 게다. 대개는 이별의 순간에 울고불고 하거나, 원망의 비수를 들이대거나, 아니면 철저히 계산적이어서 위자료부터 챙기는 오늘의 세태에 되레 떠나겠다고 하는 상대의 등을 희번득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넣듯이 한껏 더해 밀어주는 시적 화자를 보라. 아마 꿋꿋하게 잘 살으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밀어주었을 것이다.
한데 너무 많이 밀다간 자기의 온몸이 배 쪽으로 추락해버릴 수도 있으므로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 그 순간에 아슬아슬히 배에서 손을 떼는 것이다. 한껏 더해 밀어주다가 그만 이별의 격정에 겨워 상대 쪽으로 다시 쏠리거나 안겨버리면 참으로 대장부답지 못할 것 같아 그 아슬아슬한 순간에 허공에서 손을 거두는 사내의 안타까운 마음이 너무도 선연히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사랑은 참 부드럽게 잘도 떠난다. 보이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 잘도 나간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배를 한껏 세게 밀어냈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을 떠나보내고 슬픔을 밀어낸다고 해서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처럼 잠시 머물다 가라앉을 마음이겠는가. 오히려 나의 내부로 밀려드는, 아무 소리도 없이 밀려들어오는 사랑과 슬픔의 배에 다시 잠식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애처로움이여. 아니 사랑은 오고 가고 또 가고 오는 것일진대, 오는 사랑 막지 말고 가는 사랑 잡지 말진저!
(2) 순수서정과 내면의 울림에 천착한 시
<부억의 불빛> - 이준관
부엌의 불빛은
어머니의 무릎처럼 따뜻하다.
저녁은 팥죽 한 그릇처럼
조용히 끓고,
접시에 놓인 불빛을
고양이는 다정히 핥는다.
수돗물을 틀면
쏴아 불빛이 쏟아진다.
부엌의 불빛 아래 엎드려
아이는 오늘의 숙제를 끝내고,
때로는 어머니의 눈물,
그 눈물의 등유가 되어
부엌의 불빛을 꺼지지 않게 한다.
불빛을 삼킨 개가
하늘을 향해 짖어대면
하늘엔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첫 별이
태어난다.
이 시는 순수 서정시의 전형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다. 부엌의 불빛을 어머니의 무릎처럼 따뜻하다고 보며 부엌의 온기와 어머니의 사랑을 동일화한 수법은 세계를 자아화하여 정서를 주관적으로 드러내는 서정시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현실주의적 시각에 치우친 사람은 이 시가 복잡다단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슨 효용이 있겠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시골도 이젠 도시화되어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던 부엌이 사라진지 오래며 고양이와 개가, 또 어머니와 아이가 하나의 공간 속에 화합을 이루는 장면도 이제는 보기 힘들다고 말할지 모른다. 차라리 도시문명의 침윤에 의해 파편화 되어가는 농촌의 삶을 비판적으로 묘사한다든가 인간의 본원적인 모습을 상실해가는 인간부재의 정황을 고발하는 것이 시인이 할 일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시인의 상상력은 꼭 그렇게 당위적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사라져가기 때문에 아름답고, 보기 힘들기 때문에 의미 있는 그런 장면을 복원하는 데 시인의 상상력이 기능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그 상상력은 과학자의 정밀한 분석력이나 집중적 탐구력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시의 상상력은 소설이나 희곡 등 다른 문학갈래에서 볼 수 없는 본질에의 육박성을 갖는다. 그것은 과거가 현재로 회감하고 자아와 세계가 융합하는 신화시대의 본원적 체험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근대 이후 신화적 세계관은 무너지고 우리의 의식에는 과학적 세계관이 터를 잡았다. 생의 모든 국면에 있어서 우리는 계량적이고 분석적인 시각으로 사물과 세계를 대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시에서 신화적 상상력이 작용하여 사물이 재구성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부엌의 불빛과 어머니의 무릎은 다른데 시에서는 그것을 동일화한 것이나, 저녁이 팥죽처럼 끓고 고양이가 접시의 불빛을 핥는다거나, 수돗물에도 불빛이 쏟아지고 어머니의 눈물이 등유가 되어 부엌의 불빛을 계속 밝힌다거나, 마지막으로 부엌의 불빛을 삼킨 개가 하늘을 향해 짖으면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첫별이 태어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겠는가.
부엌의 불빛은 어머니로 표상되는 인간의 자애로움 속에 부엌의 모든 사물이 온화한 불빛을 나누어 갖는다. 고양이가 핥는 작은 접시에서부터 하늘의 별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의 마음이 두루 퍼진다고 생각하는 경지는 인간과 인간의 갈등, 인간과 세계의 갈등을 모두 무화시키는 경지다. 모든 갈등이 합일의 공간에서 해소되어야 한다는 염원을 형상화하는 경지다. 그 염원은 갈등에 시달리는 현재의 곤고한 삶에 위안을 준다.
이제 순수 서정이 내면의 울림과 조우한 시를 한 편 보자.
<사람들은 왜 모를까> - 김용택
이별은 손 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 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꽃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 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김용택은『섬진강』연작을 통해 순수서정과 사회 역사적 분노를 결합할 수 있는 시를 수일하게 보여준 시인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바로 그 순수서정과 내면의 울림이 행복하게 조우한 모습을 보여주며 아울러 그의 많은 시에서 드러나는 시의 평면성을 극복해낸다.
지금 시인은 저문 산아래 쓸쓸히 서있는 한 사람을 보고 있다. 그는 아마 이별의 서러움을 겪고 있는 사람인 모양이다. 그런 그 앞에는 풀잎들이 돋아나고 꽃들이 피어나서 햇살 속에 빛난다. 그럼에도 사람마다 어디에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고, 그 까닭에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의 흰 이마도 서럽다. 하지만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그 꽃은 겨울의 삭풍한설에 찢긴 자리에서 피어난다고 어느 시인이 말했듯이 고통 속에서 피어나고 그 고통은 또 꽃처럼 천천히 피어난다. 비록 오늘 고통스럽지만 몽땅 산 뒤에 있는 그리운 것들을 다시 그리워하다 보면 뒤로 오는 다정한 여인처럼 손에 닿지 못하는 것들이 꽃들이 되어서 돌아오리라. 그렇게 한 사람을 위로하지만 사실 저문 산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은 그런 내면의 울음에 귀 기울이고 있는 시인 자신이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고자 하는 시인의 상상력이 그 사람을 거기에 세웠을 뿐이지 실상은 시인 자신의 내면이 형상을 입은 경우라는 이야기다.
(3) 현실인식과 역사를 껴안은 시
<踏靑> - 정희성
풀을 밟아라
들녘엔 매맞은 풀
맞을수록 시퍼런
봄이 온다
봄이 와도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봄은 스스로 풀밭을 이루었다
이 나라의 어두운 아희들아
풀을 밟아라
밟으면 밟을수록 푸른
풀을 밟아라
『書經』에 ‘詩言志 歌咏言’이라는 말이 나와 있다. 그러니까 그 책이 나오기 전부터 시는 그러했다는 전제하에 그런 말이 나왔다고 해야 하리라. 그러므로 서경이 말하는 시의 정의는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현재에도 이 정의에 따라 시를 쓰고 시를 해석, 음미하는 사람들이 동서에 그득하다. 어쩌면 7-80년대 민중시들은 대개 여기에 포함된다고 하겠다. 하지만 詩言志, 말로 뜻을 세우는 게 시라고 정의했을 때 시에서 내용 혹은 주제와 논리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아 이게 문제가 된다.
대작『황무지』를 쓴 엘리엇은 시를 ‘잘 빚은 항아리’라고 했다. 그렇다면 결국 시의 형태를 생각지 않을 수 없는데 정희성의 이 시는 리듬이나 “맞을수록 시퍼런 봄이 온다” 라든가 “밟으면 밟을수록 푸른 풀을 밟아라” 라든가 하는 행에서 보여주는 비유는 핍진한 내용과 논리를 넘어서며 오히려 이를 미학적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위의 엘리엇은 스물여섯이 넘어서도 시를 쓰려면 역사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또한 말했다. 그런데 그가 밝힌 그의 역사의식은 자기의 시대가 불안의 시대라는 것이었다. 즉 기독교 신념이 무너진 시대라는 것이다. 20년대의 유럽 정신계를 그는 그렇게 보았다. 말하자면 역사를 내면적, 심리적으로 파악한 것이다.
우리도 80년대 민중시의 시대를 지나오며 많은 사람들이 이제 그 역사를 일상화, 내면화해야 한다는 말을 해왔다. 하지만 우리는 그 80년대적 화두를 청산하기에 급급해서 욕망, 섹스, 죽음, 상품 등으로 우루루 달려갔지 그것을 시 속에 내면화시킨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 점에서 다음 이정록의 시는 시사하는 바가 크리라.
<붉은 풍금새> - 이정록
누나 하고 부르면
내 가슴 속에
붉은 풍금새 한 마리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린다
풍금 뚜껑을 열자
건반이 하나도 없다
칠흑의 나무 궤짝에
나물 뜯던 부엌칼과
생솔 아궁이와 동화전자 주식회사
야근부에 찍던 목도장,
그 붉은 눈알이 떠있다
언 걸레를 비틀던
굽은 손가락이
무너진 건반으로 쌓여 있다
누나 하고 부르면
내 가슴 속, 사방공사를 마친 겨울산에서
붉은 새 한 마리
풍금을 이고 내려온다
누나! 하고 부르면 금방이라도 풍금소리를 낼 것 같은 누나에 대한 시다. 아마 누나는 풍금을 잘 쳤던 모양이다. 그러기에 누나 하고 부르면 내 가슴 속에 그 풍금이 붉은 풍금새가 되어 내려온다. 아니 마지막 행대로라면 붉은 새 한 마리가 풍금을 이고 내려온다. 한데 누나를 생각하면 어떤 슬픔 같은 것이 마음을 저며 온다. 그 풍금 뚜껑을 열자 아뿔사! 건반은 하나도 없고 그 칠흑의 나무 궤짝에 어리던 날 나물을 뜯던 부엌칼과 연기 꾸역꾸역 내며 생솔가지를 태우던 아궁이가 들어있다. 그리고 누나는 커서 ‘공순이’가 되어 동화전자 주식회사를 다닌 모양인데 그 야근부에 찍던 목도장이 졸음을 이기느라 충혈된 붉은 눈알처럼 되어 떠 있고, 더 아득한 것은 그때 흔히 난방도 제대로 못한 자취방 생활을 하느라 언 걸레를 곧잘 비틀곤 했던 그 굽은 손가락들이 무너진 건반으로 거기에 쌓여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누나 하고 부르면 내 가슴은 사방공사를 마친 겨울산처럼 단정하고 엄정해져 붉은 새 한 마리가 풍금을 이고 내려오는 것이다.
버드나무껍질에 세들고 싶고 제비꽃 여인숙을 차려 특실 한 칸을 영구 분양해주고 싶다던 이 시인의 상상력은 참으로 기발하면서도 아름답다. 어떻게 누나의 힘든 생의 기억을 지상에 있지도 않은 풍금새를 상상하고 빌려와 이렇게 눈물겹게 노래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상상력 까닭에 이 시는 자칫하면 내용의 무게에 짓눌릴 것을 미학적으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4) 새로운 감수성의 언어를 지향한 시
<요리사와 단식가> - 장정일
1
301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요리사다. 아침마다 그녀의 주방은 슈퍼마켓에서 배달된 과 일과 채소 또는 육류와 생선으로 가득 찬다. 그녀는 그것들을 굶거나 삶는다. 그녀는 외롭 고, 포만한 위장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잠시 잊게 해준다. 하므로 그녀는 쉬지 않고 요리를 하거나 쉴새없이 먹어대는데, 보통은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한다. 오늘은 무슨 요리를 해 먹을까? 그녀의 책장은 각종 요리사전으로 가득하고, 외로움은 늘 새로운 요리를 탐닉하 게 한다. 언제나 그녀의 주방은 뭉실뭉실 연기를 내뿜고, 그녀는 방금 자신이 실험한 요리 에다 멋진 이름을 지어 붙인다. 그리고 그것을 쟁반에 덜어 302호의 여자에게 끊임없이 갖다준다.
2
302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단식가다. 그녀는 방금 301호가 건네준 음식을 비닐봉지에 싸서 버리거나 냉장고 속에 딱딱하게 굳도록 버려 둔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먹지 않기 위 해 노력한다. 그녀는 외롭고, 숨이 끊어질 듯한 허기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야간 상쇄시켜 주는 것 같다. 어떡하면 한 모금의 물마저 단식할 수 있을까? 그녀의 서가는 단식에 대한 연구서와 체험기로 가득하고, 그녀는 방바닥에 탈진한 채 드러누워 자신의 외로움에 대하 여 쓰기를 즐긴다. 흔히 그녀는 단식과 저술을 한꺼번에 하며, 한번도 채택되지 않을 원고 들을 끊임없이 문예지와 신문에 투고한다.
3
어느 날, 세상 요리를 모두 맛본 301호의 외로움은 인육에까지 미친다. 그래서 바싹 마 른 302호를 잡아 스플레를 해먹는다. 물론 외로움에 지친 302호는 쾌히 301호의 재료가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의 외로움이 모두 끝난 것일까? 아직도 301호는 외롭다. 그러므로 301호의 피와 살이 된 302호도 여전히 외롭다.
이 시는 현대 도시문명의 상징인 아파트의 단절된 공간성을 301호와 302호로 압축시켜 구도화하고, 이 속에 기생하는 인간의 원초적 단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구도하에, 소통의 가능성이 철저히 차단된 아파트와 같은 현대 도시문명 속에서 인간이 겪는 단절과 외로움이 인육을 먹는 여자와 철저히 굶는 여자라는 충격적인 일화를 통해 담담히 서술되고 있다. 차분한 서술과 그 속에 담긴 충격적 내용의 대비는 이 시인의 능숙한 시적 기교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사실은 이 시적 기교와 장치 속에 시인의 전언이 폭풍 전의 고요처럼 잠재되어 있다. 시적 내용에 있어, 시적 언어의 마술에 가려지거나 신비화된 부분은 없다. 담담한 산문체는 내용을 직접적으로 서술한다. 이건 장정일 시의 특징이기도 하다.
새로운 감수성의 언어를 통하여 현대문명의 부정성에 집중하고, 또 거기에서 발생하고 극단화하기 마련인 인간의 이기와 소외와 외로움을 이처럼 아무 감정적 수사도 없이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정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 담아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이 시는 기형도 시인의 비극적 세계관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시적 화자는 어쩌다가 집을 떠나와 정거장에서 서성거리나 이미 집으로 돌아갈 길이 이 지상에는 존재치 않고 추억은 황량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몰려와 멎고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 무렵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1행에서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라고 쓰고 있다. 정말 희망의 길을 찾고자 해서 그렇게 다짐했던가. 하지만 시는 중반 너머 종반이 다 되도록 어떤 희망의 조짐도 표현하지 않는다. 되레 그 사이 사람들은 참으로 느린 속도로 죽어갔고, 많은 나뭇잎들은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으며 그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그 길을 묻던 혀는 흉기처럼 단단해진 상태다. 끝내는 지금까지 나의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쓰는 것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한마디로 모든 길들은 흘러오고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니, 이제 더 이상 불안 따위에 시달릴 것이 없다. 그러니 어쩌면 그게 희망인지도 모른다.
결국 이 시는 인간의 실존적 불안에 시달려온 시적 화자가 그간 많은 길을 찾아 헤매었으나 황량한 추억과 고향상실감만을 안은 채 마음의 한 정거장에 당도하여 죽음 쪽으로 발길을 옮기려는 상태를 서술한 시다. 그러기에 마른나무에서 연거푸 떨어지는 물방울은 목숨을 다한 나무에서 이탈한 수액으로 시신에서 흘러내리는 죽은 피를 닮았고, 종반부 화자가 “나그네의 말을 들으면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이라고 타이르는 물방울도 기력이 다해 움직이기를 그친 비가 되는 것이다. 아울러 노트는 시의 처음부터 천천히 덮이는데 사실 이 노트는 인간의 불안과 권태와 죽음을 캐고자 했고, 나뭇잎과 우주와 자연의 비밀을 캐려 했으며, 나아가선 삶의 참된 길을 찾고자 늘 의심을 품던 노트였으나 끝내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닫힌다. 그러니 희망, 물방울, 노트, 추억, 개, 길 등은 이제 죽음의 희망을 노래하려는 시적 화자의 심리를 추적케 하는 화려한 수사에 불과했던 것이다.
장정일과 기형도 80년대 민족, 민주, 민중이라는 거대담론의 광장 속에서도 새로운 감수성의 언어를 통하여 현대적 도시문명 속의 인간소외를 묘파해내거나 광장이라는 외면적 실존보다 거기에서 불안이나 허무라는 내부적 실존의식을 묘파해서 나름대로의 독창성을 확보해낸다. 하지만 이 시들에 그러면서도 도저한 문명비판이나 시 밑바탕에 깔린 현실정치비판이 건강하게 자리하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5) 사물의 비밀과 존재 탐구에 주력한 시
<문의 마을에 가서> - 고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의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이 시는 작가가 동료시인인 신동문의 모친상을 접하여 충북 청원군에 있는 文義 마을에 가서 장례식을 주관한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시인이 직접 호상이 되어 장례절차를 주관하였는데, 시인은 거기서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었다. 흔히 죽음은 절망이나 공포, 비애 등의 격렬한 감정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시에서는 죽음이 친근한 것이 되어 있고 그 친근성은 인간의 삶에 대한 경건함을 동반하고 있다.
1연에는 어느 해 겨울 문의마을에 가서 죽음을 보았다는 상황이 설정되어 있다. 즉 장례식이 있었다는 뜻이다. 문의마을까지 닿는 길은 몇 갈래의 길들이 하나로 합쳐져서 통해 있는데, 그 길이 적막한 것과 같이 죽음의 길도 적막하다. 그 길이 죽음의 길이기에 추운 쪽으로 뻗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죽음을 애도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은 길에서 돌아가 죽은 사람의 유품을 태우는데, 그 태운 재들이 마치 잠든 것처럼 고요한 마을을 향해 흩날리고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는 문득 팔짱을 끼고 먼 산을 바라보는데, 그 산이 무척 가깝게 여겨진다. 즉 죽음과 삶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 장례식날 눈마저 날리어 죽음을 덮고 있다. 그 눈은 죽음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만물을 덮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것은 죽음을 통해 삶의 경건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된다.
그것이 2연에서는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으로 표현된다. 망자가 죽음 받기를 끝까지 사절하다가 이 세상의 살아있는 것들의 인기척을 듣고는 마침내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죽음을 향해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보는 것을 시적 화자는 마음의 눈으로 본 것이다. 엄숙한 장례의식을 통해 죽음과 삶의 관계와 그것들의 경건함을 깨달은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죽음 앞에서 낮아지고, 곧 겸허해지는데, 그 위로 눈이 내리고 있다. 이는 바로 엄숙함이자 경건함이다. 이런 장례절차도 끝나 죽음은 이승을 향해 떠나서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눈이 내리는 겨울날 문의 마을에서는 장례식이 있었다. 눈은 내려 죽음을 덮고 마침내 이 세상마저 모두 덮어버리고 있는 광경을 그리고 있다.
이렇게 시적 상상력은 삶과 죽음, 곧 존재의 비밀을 살짝 엿보게도 하는 것이다.
<별빛들을 쓰다> - 오태환
필경사가 엄지와 검지에 힘을 모아 철필로 원지 위에 글씨를 쓰듯이 별빛들을 쓰는 것 임을 지금 알겠다.
별빛들은 이슬처럼 해쓱하도록 저무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墨蘭 잎새처럼 쳐 있는 것 도 또는 그 아린 냄새처럼 닥나무 닥지에 배어 있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어린 갈매빛 갈매빛의 계곡 물소리로 반짝반짝 흐르는 것도 아니고 도장처럼 붉게 찍혀 있는 것도 아 니고 더구나 별빛들은 반물모시 옷고름처럼 풀리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여리여리 눈부셔 잘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수평선 위에 든 흰 섬들을 바라보 듯이 쳐다봐지지도 않는 것임을
지금 알겠다 국민학교 때 연필을 깎아 榧子열매빛 재활용지가 찢어지도록 꼭꼭 눌러 빼뚤빼뚤 글씨를 쓰듯이 그냥 별빛들을 아프게 아프게 쓸 수밖에 없는 것임을 지금 알겠 다.
내가 늦은 소주에 푸르게 취해 그녀를 아프게 생각하는 것도 바로 저 綠靑기왓장 위 별 빛들을 쓰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음을 지금 알겠다.
“별빛을 쓰다”니? 별이 그의 빛을 쓴다는 것인가? 아니다. 별의 빛을 쓰는 것은 시인 자신이다. 별빛을 쓰는 시인은 스스로 아름다운 별로 태어날 것 같다.
이 시는 아프고 아픈 한 편의 연시로도 읽힌다. 발에 밟힐 듯 긴 스란치맛자락 같은 다섯 행으로 이루어진 이 시의 끝부분에서 ‘그녀’를 만나기 전에, 시의 젖가슴께에 놓인 ‘반물모시 옷고름’에서 눈이 밝은 독자들은 어렴풋이 사랑스런 여인의 그림자를 만났을 것이기에.
그러나 이 아름다운 시는 한 여인에 대한 헌시로서의 빼어난 문학적 성취에 그치지 않고 시적 우주를 창조하게 된다. ‘그녀’의 고유명사 위에 크고 아픈 모성으로서의 시가 덧씌워지는 大變轉의 회오리를 이 여릿여릿한 시편은 감추고 있다.
시인이 사는 마을의 하늘에는 이슬과 묵란과 계곡 물소리와 반물빛 치마저고리와 함께 참으로 아름다운 별들이 살고 있다. 이렇듯 사물이 잘 어우러진 좋은 시를 읽는 기쁨은 새로운 우주에 동참하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상 우리는 다섯 갈래의 주제에 합당한 시를 살펴보면서 그 주제의식과 상상력이 빚어내는 참으로 아름답고 슬프고 높고 깊은 시세계들을 볼 수 있었다. 시는 시적 경험의 소재에다 주제의식과 불가분의 관계인 상상력을 결합하여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 세계는 슬픔과 한과 아름다움이 뒤범벅된 세계일 수도 있고, 맑고 착한 순수서정이 내면의 고요한 울림과 만나는 세계일 수도 있으며, 또 진실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계일 수도 있고, 언어로 세운 존재의 집일도 있으며, 모든 사물들이 제 존재 그대로 빛을 던져 하나의 융융한 화엄을 이루는 세계일 수도 있는 것이다.
3. 시적 구조, 그리고 직관력
E. 뮤어의『소설의 구조』라는 책에는 소설의 구조를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그 하나는 극적 구조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은 구조다.
극적 구조란 다르게 말하면 메인 스토리가 있는 구조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개의 주된 사건이 전개되면서 인물이 바뀌지 않는다. 나도향의「물레방아」같은 것이 그 전형적인 예가 된다. 이 소설은 애정의 삼각관계를 다루고 있다. 발단과 절정과 끝이 선명히 드러난다.
반면 극적이 아닌 구조란 메인 스토리가 없고 에피소드로 연결돼 있는 구조다. 등장인물이 에피소드가 바뀔 때마다 바뀐다. 김동인의「감자」같은 것이 그 전형적인 예가 된다. 복녀라는 한 농민의 딸이 가난 때문에 몸을 더럽히며 끝내는 파멸해가는 모습을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는 에피소드 두 개가 연결돼 있을 뿐 메인 스토리는 없다. 인물이 바뀐다. 에피소드는 얼마든지 연결시켜 갈 수가 있다.
시에서도 이런 따위 구조의 유형이 있다. 가령 서정주의「국화 옆에서」와 같이 다음 조지훈의「僧舞」는 극적 구조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기승전결로 아주 동적 기계적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희의 동작으로 채우는데 마침내 그녀의 동작이 절정을 거쳐 끝을 맺는다. 직접 시를 보자.
<僧舞> - 조지훈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아서 서러워라 .
빈 臺에 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기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서서 날아갈 듯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煩惱는 별빛이라
휘여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合掌이냥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三更인데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이 시는 본래 2행이 1연이 되어 모두 9연 18행으로 된 시인데 내가 기승전결의 한시 형식이 어떻게 짜여져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편의상 4연으로 배열했다. 처음 고깔과 고깔 속의 얼굴 묘사로 시작되어(기) 다음으로 배경과 춤동작의 찰나 포착(승), 그 다음 형이상학적 내면세계에 초점을 맞추고는(전) 마지막 시간의 경과 속에 지속되는 춤의 표현(결) 등이 너무도 확연한 기승전결 구조다.
특히 이 시는 제10행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와 제14행 “세사에 시달려도 煩惱는 별빛이라”라는 두 행에 핵심이 있다. 이 두 행은 모두 이 시의 중심축이 되는 승, 전의 터전을 마련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이 시행들을 통해서 시적 화자는 춤으로서의 승무와 정신적 내면성을 지닌 인간의 고뇌를 시적으로 결합시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 시가 단순한 소재 차원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여기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시적 구조에 대한 얘기를 하려는 참이었으니 여기서 그 내용의 해석은 그만 두기로 하자. 시에서 구조가 요구되는 것은 시적 형상화의 성공을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의 짜임새가 설득력 있게 전개되어야 한다. 나는 동양시학의 기승전결 구조를 시 창작에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계절의 자연적 구조와 일치하기도 하고 소년, 청년, 장년, 노년의 인생구조와도 부합되어서이다.
그런데 이런 극적 구조와 반대로 그렇지 않은 구조를 가진 시가 있다.
<鄕愁>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이 시는 정지용의「향수」일부분이다. 이 시는 아까「승무」와 다르게 연마다 다른 장면이 나온다. 앞연과 뒷연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 그러기에 이런 시는 극적 구조를 가지지 않은 시에 해당된다.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선운사에서 ‘동백’이 피고 지듯 시적 화자인 시인의 내부에서 ‘그대’로 지칭되는 한 사람이 피고 진다. 생성되고 소멸되어버렸으며 만나고 헤어졌다. 그러나 한 존재의 진정한 소멸 혹은 진정한 결별은 기억 속에서 지우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고통없이 기억하는 것이며 그리움에 허덕거리지 않고 낡은 사진첩을 넘기듯 담담하게 떠올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피고 짐’이나 ‘만나고 헤어짐’은 분명하나 동백꽃이 우리 속에서 꿈틀거리듯 그대 역시 잊혀지지 않고 내 안에서 쉼없이 고통을 자아내며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이다. 결코 닿을 수 없는 ‘멀리서’ 여전히 사랑을 담고 ‘웃는’ 그대는 산 넘어가지만, 잊는다는 것이 영영 한참일 수밖에 없는 이 괴로움을 어찌하는가.
짐짓 남의 일처럼 시의 종결어미를 ‘-이더군’ 이라고 쓰며 겉으로는 툭툭 말을 던지지만, 그 속엔 그대와 헤어지고 선운사에 여행을 가서 그 붉은 동백꽃의 피고 짐을 바라보며 그대에 대한 갈망과 탄식하는 것을 감추고 있다. 그럼에도 시적 장치인 기승전결의 안정적 구조와 대립과 병치를 반복하는 수평적 구조가 긴밀히 교직하여 상상력의 형식화에도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강변 마을> - 노향림
찻집 ‘째즈’에 올라간다.
카펫 붉게 깔린 3층 계단 옆에서
제 몸짓보다 더 큰 트럼펫을 들고
흑인 가수 루이 암스트롱의 커다란 눈망울이
나를 노려본다.
브랜드 커피엔 하얀 각설탕을!
카푸치노? 아니, 아니
나는 블랙만 마실거야,
블랙홀보다 검은 커피 한 잔이
내 앞에 당도한다.
나는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창가가 좋다.
오늘따라 바람이 센지 짱짱한 구름떼만
하늘에서 펄럭인다.
브레지어가 흘러내리고
흰 속치마가 절반쯤 뜯기고 찢겨나간
구름을 보는 것이 좋다.
아직 봄은 일러서 오지 않고
꽃샘바람에 눈꺼풀 닫은 채
종일 공중을 향해 팔을 벌리고
벌서듯 서 있는 나무들,
매캐한 매연 속에
푸른 잎을 틔울까 말까 생각 중이다.
그 슬픔을 하나의 보석으로 마음의
블랙홀에 켜 놓았다.
나트륨등이 반짝 켜진다.
밝은 미색 커튼 흔들리는 창가에서
블랙 커피나 한잔!
노향림의 이 시는 극적 구조가 없는 시다. 이 시에도 등장인물인 ‘나’가 등장하고 그가 처음과 끝에 나타나서 어떤 동작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내면적이건 외면적이건 어떤 사건과 연결돼 있지 않다. 그냥 어느 날 강변 찻집에 들러 이 커피를 마실까 저 커피를 마실까 유희하듯 생각하고, 창밖에 헝클어진 구름 떼를 바라보고, 아직 봄이 일러 푸른 잎 틔울까 말까 망설이는 나무를 생각하며, 그렇게 가볍고 하찮아진 자신에게 슬픔을 느낀다. 하지만 그러한 존재가 우리 인간이라면 그 슬픔을 하나의 보석으로 바꾸어 마음의 블랙홀에 나트륨등처럼 반짝 켜고, 블랙홀보다 검은 커피 한잔을 마심으로 인생을 씹을 수도 있는 것!
한데 이렇듯 극적 구조를 가진 시와 그렇지 않은 구조를 가진 시를 살펴보다 보면 시에서 구조는 꼭 어떤 논리를 수반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시가 시적 논리를 가져야 함에는 분명하지만 그래도 ‘詩三百이 思無邪’라는 말이나 시는 어떤 영감과 관계되어 있다는 말을 들을 때는 그런 논리적 구조 없이도 되어지는 시들이 있는 것 같다. 바로 이때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직관력’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직관이라는 것은 진리나 실재는 사고나 판단 등에 의하지 않고 분별지 곧 이성을 넘어선 본질로의 순간적 육박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를 철학화한 직관주의는 베르그송이 주창한 설이다. 직관력에 의한 자아와 세계의 동일화는 서정시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 원리에는 세계에의 동화와 투사가 있다. 하지만 그런 직관력에 의한 시나 순간성과 압축성을 생명으로 하는 짧은 시에도 구조는 존재한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전 설> - 서정춘
길고 긴 두 줄의 강철 詩를 남겼으랴
기차는, 고향역을 떠났습니다
하모니카 소리로 떠났습니다.
먼저 이 시를 해설해 보자. 기차가 고향역을 떠났다. 하모니카 소리로 떠났다. 물론 기차가 고향역을 떠났다는 것은 그 기차를 탄 어떤 사람이 떠났다는 것이다. 또 하모니카 소리로 떠났다는 것은 하모니카로 상징되는 우리 고향의 오륙십 년대를 떠났다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기차가 떠난 뒤에 남는 것은 길고 긴 두 줄의 강철 레일뿐이다. 그런데 이 ‘레일’이 시인의 직관력에 의해 순식간에 ‘詩’로 바뀌어 첫 행으로 올려지니 평면적인 시가 지각 변동을 일으키며 겹무늬를 만들어낸다. 시를 남기고 떠난 사람, 그것도 길고 긴 두 줄의 강철 시를 남기고 떠난 사람은 어떤 이였을까. 어쩌면 우리 고향의 오륙십 년대에 만연했던 혹독한 가난과 못배움의 설움, 그것으로 인한 한 때문에 길고 긴 두 줄의 시를 남겼겠다. 또 가난과 못배움의 한을 딛고 기어이 성공해보겠다는 다짐이 있었기에 강철의 시를 남겼겠다. 그럼에도 이 사람은 그가 객지에서 성공을 했건 실패를 했건 결코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없었던 사람이겠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가 이미 ‘전설’이 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 시인은 그의 첫 시집에서 대나무를 빌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의 어려움을 앞서 피력했다.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竹篇․1」)라고. 그런데 이 시가 ‘전설’이 된 이유의 또 하나는 사실 백년이 걸려서 찾아가 보아야 “대꽃이 피는 마을”로 상징되는 고향, 혹은 길고 긴 두 줄의 강철 詩를 남긴 고향은 이미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시인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겠다. 우리의 꿈과 다짐이 있던 순수의 고향은 그리하여 이제 마음 어느 한켠으로 거두어진다.
결국 <전설>이란 시는 주로 직관력에 의해 형상화된 시지만 바로 해설을 통해서 보듯 극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시가 아니고 무엇인가.
<사랑이 거리에서> - 채호기
내가 엎질러 버린 물
언 얼음 속에 네가 갇혀 있다
햇빛에게 떨어지며 네 몸은
보석의 파편처럼 반짝인다
얼음 풀리는 시내처럼
슬픔은 거리를 흐르고
시냇가에 핀 맑은 꽃처럼
너의 눈이 나를 바라본다
사랑에는 두 개의 극단이 있다. 불과 얼음. 사랑할 땐 불이지만 그 상처는 얼음이다. 사랑은 보석의 파편처럼 반짝이다가 때로는 슬픔으로 흐른다. 사랑은 잔인한 경험이다. 슬픔 앞에서는 누구도 이길 수 없다. 그래서 슬픔이나 고통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슬픔 뒤에 너의 눈은 시냇가의 맑은 꽃처럼 나를 바라본다고 한다.
이 짧은 시도 찬찬히 보면 2행 4연 구조를 갖추고 있다. 한 연이 다음 연에 對句하는 방식으로 쓰여진 시인데 영락없이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추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시에서 잘 짜여진 짜임새는 독자에게 시적 내용의 설득력을 갖게 된다. 그것이 외형적인 짜임새도 중요하지만 시에서도 갈등과 깨달음의 구조가 존재함으로 더욱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면 내용의 굴곡은 곧잘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
출처 / http://feelpoem.com
'이탈한 자가 문득 > 램프를 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겹눈의 상상력과 시의 명징성 / 박남희 (0) | 2010.12.19 |
---|---|
시적 진술 / 오규원 (0) | 2010.12.19 |
상상력의 힘, 새로운 세계 / 이건청 (0) | 2010.12.18 |
시 쓰기, 시 앓기 / 김기택 (0) | 2010.12.18 |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24 (0) | 2010.1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