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禪과 마그리트 Rene Magritte 4
이 승 훈 (시인, 한양대 교수)
4. 관 속에서 자다
「백지위임장」이 강조하는 분할의 기법은 위에서 살핀 것처럼 캔버스 속의 이미지, 예컨대 말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마그리트의 경우 이런 분할의 기법은 화면의 이미지가 아니라 캔버스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도 많고 한편 분할이 아니라 응축 혹은 합성의 기법이 강조되는 그림도 많다. 캔버스 자체를 분할하는 것으로는 「신문 보는 남자」 (1928),「꿈의 열쇠」(1930), 「개의치 않고 잠자는 사람」 (1928) 등이 있고 이와는 반대로 사물들을 응축 혹은 합성하는 그림으로는 「정상의 부름」(1942), 「설명」(1952), 「공동발명」(1953), 「자연의 은혜」(1963), 「붉은 모델 」(1935), 「능욕 」(1934), 「기억」 (1948) 등이 있다.
분할이든 응축이든 이런 기법에 의해 마그리트가 강조하는 것은 사물에 대한 일상적 지각의 부정, 말하자면 객체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고 이런 부정은 그의 경우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부정하면서 긍정하고 거꾸로 긍정하면서 부정하는 독특한 미학을 낳고 이런 미학이 선적 사유와 통하고 나는 그것을 不二 , 空, 中道 개념으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먼저 「신문 보는 남자」혹은 「신문을 읽고 있는 남자」에서 마그리트는 하나의 화면을 4등분하고 동일한 실내풍경을 반복한다. 네 개의 화면 가운데 좌상의 화면에만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탁자 옆에 앉아 신문을 읽고 나머지 세 개의 화면에는 남자가 없는 실내 풍경이 그대로 반복된다. 이 그림이 제기하는 문제는 많다. 그가 이런 그림을 그린 것은 1920년 생계를 위해 상업 미술에 손을 대면서 신문, 잡지, 광고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고 이 그림은 어느 잡지에 게제된 가정용 스토브 광고를 그대로 모사한 것으로 다만 광고의 한 구석에 있던 남자를 지워버리고 광고를 그대로 세 번 반복한 점이다.12) 광고 패러디 혹은 광고 복사는 그 후 앤디 워홀에 의해 새로운 미학으로 발전하고 나는 워홀에 대해 별도의 글을 쓸 예정이지만 내가 강조하는 것은 이런 그림의 사회적 역사적 문맥보다는 철학적 미학적 문맥이다. 말하자면 광고와 회화의 관계, 일상적 공간과 미적 공간의 관계이다. 아방가르드가 강조한 것은 이런 2항 대립의 해체이고 그것은 미적 공간의 자율성이 함축하는 당대 부르주아 의식에 대한 비판과 관계된다. 나는 다른 글에서 이 문제를 해명한 바 있다.13)
그런 점에서 이 그림이 강조하는 것은 회화와 광고, 미적 공간과 일상적 공간의 경계가 해체된다는 점이고 이런 해체는 주관과 객관,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해체함으로써 임제식으로 말하면 ‘ 사람도 경게도 모두 빼앗는 단계’를 암시한다. 그렇지 않은가? 이 그림은 그림인가? 광고인가? 좌상의 화면은 광고를 그대로 복사하고 이런 복사는 광고(객체)에 대한 미적 거리(주체의 의식)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다. 복사는 그대로 베끼는 행위이고 이런 행위는 주체 소멸과 통하고 주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객체도 사라진다. 더구나 이 그림의 경우 객체는 광고이고 광고 이미지는 현실적인 객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그림에서 우리가 읽는 것은 객체가 소멸한 이미지의 세계(광고)와 주체의 관계이고 광고를 그대로 옮긴다는 점에서 주체는 소멸한다. 소멸하는가? 따지고 보면 소멸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무슨 말놀이를 하는게 아니다. 사람도 경계도 모두 빼앗는 것은 사람과 경계, 주체와 객체가 不二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편 나머지 세 화면에선 남자의 이미지가 사라진다. 광고의 이런 변형이 암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남자가 있는 화면은 광고를 그대로 옮긴다는 점에서 주체/객체 (이미지)의 경계 해체가 나타나고 광고속의 남자를 지우는 행위는 마그리트라는 주체의 의식이 개입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좌상의 화면과 나머지 세 화면은 대조적이고 이런 대조, 일종의 병치를 통해 주체 부재/ 주체 존재의 경계는 해체된다. 병치는 이질적인 두 사물을 단순히 나란히 놓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병치에 의해 두 사물이 동일시되는 이른바 병치은유로 발전한다.14)
그러므로 주체 부재/ 주체 존재의 관계는 대립이 아니라 동일성의 관계에 있고 이 동일성이 문제이다. 두 항목이 같다는 것인가 다르다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같은 것도 아니고(불일) 같지 않은 것도 아니다(불이) 한편 세 화면은 같은 화면의 반복이고 이런 반복은 화면의 균형 상 마그리트가 자신의 의도, 의식, 이른바 주체성을 강조한 것 같지만 나는 그렇게 읽지 않는다. 반복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반복은 시간의 차원에서 전개되고 반복에 의해 어떤 관념, 이미지, 사물이 강조된다. 그러나 이 그림이 강조하는 것은 반복의 시간성이 아니라 공간성이다. 시간적 반복이 지향하는 것이 강조라면 공간적 반복, 병치가 지향하는 것은 이런 강조의 소멸이다. 이 그림의 경우 세 화면이 차례로 반복되는 게 아니라 세 화면이 동시에 같은 캔버스에 놓이고 이런 병치, 배열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이상한 충격, 환상 같은 풍경, 꿈같은 풍경, 유령같은 풍경이다. 남자가 없는 이 세 화면은 꿈의 풍경같다. 한 개의 화면만 있다면 이런 미적 충격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 그림에 나오는 남자에서 병치의 논리에 의하면 그림 속에 존재하며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세 화면의 병치, 혹은 좌상의 화면과 세 화면의 병치가 주는 충격은 물론 캔버스의 분할을 동기로 한다. 이런 분할은 캔버스에 대한 전통적인 인습을 부정한다. 부정하는가? 말하자면 이 그림의 경우 캔버스는 사라지는가? 그렇지 않다. 이런 분할에 의해 캔버스는 존재하고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캔버스는 이렇게 분할되는 게 아니라 유기적 미적 통일성을 소유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통일성이 해체된다. 네 개의 화면은 네 개의 캔버스 같지 않은가? 앞에서 나는 세 화면의 병치 혹은 네 화면의 병치가 꿈과 같은 느낌을 준다고 했거니와 ‘개의치 않고 잠자는 남자’ 혹은 ‘무모하게 자는 남자’야 말로 꿈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낳는다.
이 그림 역시 두 개의 화면으로 분할된다. 상부에는 한 남자가 관처럼 생긴 커다란 나무 상자에 누워 이불을 덮고 잔다. 이 남자는 무모하게, 그러니까 어떤 수단도 방법도 없이 그 무엇에도 개의치 않고 자는 남자이다. 無謀하게 자는 남자는 無毛의 남자이고 無帽의 남자이다. 이 남자는 대머리이고 따라서 無毛의 남자이고 이 남자는 모자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無帽의 남자이다. 신문 보는 남자는 대머리가 아니고 대체로 마그리트의 그림에 나오는 모자, 그것도 중절모를 쓰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의 경우 모자는 공포, 불안으로부터의 방어를 상징하고 이런 방어의 한 수단이 자신을 숨기고 익명으로 사는 것, 그러므로 모자를 쓴 남자는 익명성, 곧 자아나 주체를 은폐하고 부정하는 이미지이다. 모자를 쓴 남자는 대체로 손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 「마그리트」 , 1965) 동일한 남자가 한 이미지는 앞을 보고 한 이미지는 옆을 보거나(「작가의 이중초상화」 1965)뒤를 보이고 서 있다. (「모험정신」, 1960)한편 모자를 쓰지 않는 남자는 신문을 보거나 곧장 소멸한다.( 「신문보는 남자」 1928)그렇다면 대마리는? 대머리는 모자를 쓴 남자 이후의 단계, 곧 사라진 남자이고 소멸한 남자이고 그가 사라지는 것은 불안, 공포 때문이다.
이 그림에 나오는 대머리 남자가 관 속에 누운 것이 이런 사정을 암시한다. 사라진 남자의 이미지? 사라진 남자가 여기 존재한다고? 그렇다면 이 남자는 죽었는가? 살았는가? 혹은 죽었는가? 자고 있는가? 내가 어떻게 알랴? 다만 그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그가 관 속에 누워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림 하부에 나오는 이미지, 사물들과의 관계이다. 그림 하부를 전제로 하면 이 남자는 죽은 게 아니라 꿈을 꾸고 따라서 현실에 개의치 않고 어떤 수단도 없이 무모하게 잠을 잔다. 그러나 그는 침대가 아니라 관 속에서 잔다. 그러므로 그는 자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다. 신라 불교의 고승 원효는 의상과 함께 두 번째 入唐을 시도하던 길에 무덤에서 밤을 새우다 해골 바가지에 고인 썩은 물을 마시고 아침에 되어 이 사실을 알고 소리친다. 마음이 없으므로 땅굴과 무덤이 둘이 아니고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는 진리, 이 진리를 깨닫고 그는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도중에 돌아온다. 갑자기 왜 원효가 떠오르는가?
마그리트의 이 그림을 보고 갑자기 원효가 떠오르는 것은 단순한 연상이 아니다. 관 속에 누워있는 남자는 자신이 관 속에 누워 있다는 것을 모른다. 어떻게 그가 알겠는가? 그는 마그리트가 그린 이미지이고 말하자면 헛것이고 환상이다. 그러나 깨어나면 그는 자신이 관 속에 누워잤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잠이 든다는 것은 잔다는 것을 모른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잠을 자지만 잠을 잔다는 것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잠을 잘 때 우리는 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다 과연 누가 잠을 자는가? 잠 속에서 나, 자아 주체, 의식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이 남자는 자는 것도 아니고 자지 않는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다. 땅굴과 무덤이 둘이 아니듯이 침대와 관, 삶과 죽음도 둘이 아니다.
한편 이 남자는 꿈을 꾸고 그 꿈의 내용이 하부의 이미지들로 제시된다. 그림 하부에는 녹색 관이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고 상부에는 남자가 갈색 이불 혹은 천을 덮고 잔다. 상부에는 남자가 관 속에 누워 자고 있지만 그가 불안한 느낌을 주는 것은 그가 그림 상부에, 하늘 위에 누워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관이든 침대든 우리는 이렇게 하늘, 그것도 어두운 하늘 위에 떠서 자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남자는 자면서도 계속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고 그런 꿈을 꾸고 그 꿈의 이미지들이 하부에 나오는 모자, 거울, 나비 넥타이, 새, 사과, 양초이다. 이 사물들은 고른 형태가 아닌 녹색 관에 새겨진 것 같고 따라서 이 사물들은 캔버스가 아니라 무덤 벽에 새겨진 것 같다. 남자는 무덤 위 상부에 누워 자고 하부는 무덤 벽에 해당하고 그러나 이 벽은 벽이면서 벽이 아니다. 왜냐하면 벽은 위에는 어두운 하늘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가? 먼저 모자와 사과, 그의 경우 모자와 사과의 상징적 의미는 비슷하다. 대체로 모자를 쓴 남자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사과로 얼굴을 가리고 ( 「대전투」, 1964)혹은 모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사과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관념」) 모자는 현실의 공포로부터 자신을 은폐하고 방어하는 것을 상징한다. 이런 모자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는 사과 역시 비슷하지만 사과는 이 때 ‘관념’이고 이제 그를 방어하는 것은 관념이다. 사과는 사과가 아니라 관념을 상징하고 이런 문제는 별도의 글을 요구한다. 거울은 두 말 할 필요 없이 자아의 정체성 찾기를 상징한다. 새와 양초는 다 같이 초월, 상승을 상징하고 따라서 영혼의 세계를 상징하고 나비 넥타이 역시 크게 보면 영혼의 세계를 상징한다. 왜냐하면 나비는 애벌레에서 날개 달린 나비로 변신하고 이런 변신이 초월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결국 관 속에 자면서 이 남자가 꾸는 꿈, 그러니까 무의식적 소망의 내용은 자아찾기, 자아 은페, 초월이다.
그러나 이런 무의식 역시 그림 상부에 나오는 남자가 잔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것 이고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자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라는 不二 의 시각에서 보면 복잡한 의미를 생산한다. 나는 지금까지 마그리트 그림이 보여주는 분할의 미적 특성을 선적 사유로 해석했다. 이런 사유, 공 불이, 공, 중도의 사유는 분할과 대립되는 응축, 혹은 합성의 기법에도 나타난다. 예컨대 (「정상의 부름」)에서는 독수리와 바위가 하나로 응축된 독수리 바위가 나타난다. 이 바위는 독수리인가? 바위인가? 이런 이미지들은 「설명」에서는 당근과 병의 합성으로 「공동발명」에서는 여인의 다리를 지닌 물고기로, 「자연의 은혜」에서는 새와 나뭇잎의 합성으로, 「붉은 모델」에서는 인간의 발과 구두의 합성으로 나타난다, 물론 응축과 합성은 엄격하게 말하면 다른 개념이다. 응축은 프로이트가 꿈의 작업으로 해석한 것이고 합성은 두 요소를 화학적으로 결합해 새로운 사물을 생산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응축은 정신분석의 시각에서 읽을 수 있고 살바도르 달리는 편집증적 비판의 방법으로 발전시켰다. 브래들리는 마그리트의 그림이 보여주는 응축의 기법을 편집증적 비판, 혹은 시각의 창조적 오독, 혹은 이중 이미지로 읽고15) 나 역시 다른 글에서 마그리트의 그림을 정신분석의 방법으로 해석한 바 있다.16)
그러나 선불교의 시각으로 접근하면 응축이 분할이고 분할이 응축이다. 한 마리 말의 몸이 분할된 이미지나 인간의 발과 구두가 합성된 이미지나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시각에 대한 회의와 부정이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들에 대한 선적 인식, 곧 존재/부재, 유기체/파편, 독수리/바위, 발/구두의 경계 해체이고 이런 해체가 선이 강조하는 불이, 중도, 공과 통한다.
1) 수지 개블릭, 르네 마그리트, 전수원 옮김, 시공사 2000, 18-19쪽
2) 이승훈, 마그리트는 「피로를 모른다」, 『이승훈의 현대회화 읽기』천년의 시작, 2005
3) C, Soller, The Symbolic Order , Reading Seminars 1,2 ed, R Feldstein, State Univ, of New York Press, 1966 pp 43-45
4) 용수보살저, 청목 석, 구마라습 한역, 깅성철 역주, 경서원, 1996, 83-84쪽
5) 비트겐규타인, 논리철학논고, 이영철 옮김, 천지, 2000, 119쪽
6) 이승훈, 「선과 마르셀 뒤샹 1」, 현대시, 2005,10
7) 파멜라 프리츠키, 「마그리트의 생애와 작품 세계」, 마그리트, 서문당, 107 재인용
9) 이기영, 『임제록 강의』상권, 한국불교연구원, 1999, 103쪽
10) 이기영, 『임제록 강의』 상권, 한국불교연구원, 1999, 103쪽-104쪽 참고
11) 마르셀 뒤샹의 언어 인식에 대해서는 이승훈, 「선과 마르셀 뒤샹1」, 앞의 논문 참고바람
12) 마그리트, 박서보, 서문당, 1982, 20쪽
13) 이승훈, 선과 다다이즘, 현대시, 2005, 12
14) 병치 은유에 대한 좀 더 자세한 것은 이승훈, 『시론』, 태학사, 2005 237- 241쪽 참고바람.
15) 피오나 브래들리, 『초현실주의』, 김금미 옮김, 열화당, 2003, 38-41쪽
16) 이승훈, 「마그리트는 피로를 모른다」, 『이승훈의 현대회화 읽기』, 천년의 시작,2005
출처 / 세상과 세상사이 -나호열 시인의 철학 강의실 http://blog.daum.net/prhy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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