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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열 시인/철학 강의

선 禪과 마그리트 Rene Magritte 1

by 丹野 2010. 12. 5.

 

 

 

선 禪과 마그리트 Rene  Magritte  1

 


                                  이 승 훈 (시인, 한양대 교수)


1. 그림 속에 그림이 있다


  르네 마그리트 Rene Magritte는 1898년 11월 21일 벨기에 출생의 초현실주의 화가로 1967년 타계한다. 대체로 이런 글을 쓸 때는 나도 그렇지만 많은 필자들이 출생년도만 밝히지 이렇게 태어난 달까지 밝히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글에서 마그리트가 태어난 달까지 밝히는 것인가? 그것은 그가 태어난 11월이 전갈좌에 속하기 때문이다. 전갈좌에 대해서 개블릭1)은 다음처럼 말한다.


  전갈좌는 수다스럽지 않고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전갈좌에 태어난 사람들은 비밀스럽고 기이하고 불안해하고 유별난 예감과 직관으로 가득 차 있는 경향이 있다. 종종 이상하고 파괴적이며 신비하고 까다로운 것에 대해 특별한 취향을 갖고 괴기스러운 것을 좋아하기도 한다. 비밀스럽게 幻影에 홀리기도 하고 유령과 쉽게 교류하기도 한다. 연구와 분석에 대한 열정과 탐욕스러운 호기심으로 인하여 그들은 뛰어난 첩보원이나 형사의 기질을 갖고 있다. 마그리트가 평범한 사람으로 가장한 부르주아 생활을 하면서 파괴적인 본능을 어떻게 감추었는지 이미 수많은 작가들이 서술하였다. 그는 르네 프랑스와 가스랭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이런 연유로 첫 번째 저작물에 랑기스 형사라고 서명하였다. 


 피카소, 키리코, 도스토에프스키등이 전갈좌에 속하고 내가 알기로는 김춘수가 전갈좌에 속하고 나도 전갈좌에 속한다. 전갈좌에 태어난 예술가들에 대해서는 좀 더 조사할 필요가 있고 아무튼 내가 마그리트의 생년월일에 흥미를 갖는 것 역시 내가 전갈좌 생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생년 월일 같은데 관심을 갖는 것도 그런 연유에선지 모른다. 나는 마그리트의 그림에 대해 글을 쓴 바 있고 그러므로 이번이 두 번 째이다. 처음 쓴 글은 주로 그의 그림이 보여주는 초현실주의적 기법을 정신분석과 관련시켜 해석한 것2).

 그러나 이번에 다시 그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그의 그림이 보여주는 초현실주의적 요소가 선불교적 요소와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20세기 전위예술을 선불교와 관련시켜 새롭게 해석한 바 있고 그런 점에서 이 글은 그런 해석의 일부가 된다. 과연 마그리트의 그림을 禪과 관련시켜 해석하는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가?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다. 한편 다시 생각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예술작품이 있는게 아니라 해석이 있고 해석이 작품의 의미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작품이 예술가의 증상이라면 이 증상은 해석에 의해 의미를 소유하고 해석 이전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라캉에 의하면 낱말, 망각, 실어, 실수 같은 증상들은 해석 이전에는 의미가 없다. 이런 증상은 우리의 삶을 괴롭히면서 완강하게 자신을 고집한다. 그러나 언어 질서, 이른바 대타자가 개입하면서, 곧 해석자의 해석에 의해 의미가 부여되면서 고통은 의미로 전환되고 이런 해석이 주체에게 영향을 준다. 말하자면 주체가 억압한 진리가 드러난다. 프로이트는 기차 여행 중 Signerolli 라는 낱말을 망각하고 그의 또 하나의 자아인 반자아 alter ego 와의 대화를 통해 이 망각이 의사로서의 무력감을 은폐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곧 그는 망각이라는 증상에 의해 의사로서의 무력감을 억압하고 혹은 거꾸로 무력감의 억압이 증상을 낳고 이 증상이 그를 괴롭히지만 반자아와의 대화, 곧 해석에 의해 그 의미가 드러난다3)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증상이고 따라서 이런 증상 역시 해석에 의해 그 의미, 곧 작품의 진리가 드러나고 드러나야 한다. 마그리트는 그가 그린 그림들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들이 많고 그런 점에서 그는 자신의 의도를 억압하고 이런 억압이 그림이라는 증상으로 나타나고 혹은 거꾸로 증상이 억압을 낳는다. 이런 억압은 해석에 의해 그 의미가 드러나고 드러나야 한다. 물론 나는 이 글에서 마그리트의 증상을 정신분석의 시각이 아니라 선의 시각에서 해석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선적 사유를 억압하고 있는지 모르고 이런 억압이 증상으로 그러니까 작품으로 형상화되었는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선적 사유는 그의 무의식이고 내가 관심을 두는 것은 이 무의식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그가 선불교를 공부했느냐 혹은 불교의 영향을 받았느냐 여부가 아니다. 그는 선에 대한 의식적 사유가 없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들이 선에 대한 그의 무의식, 라캉 식으로는 진리를 노정한다. 이런 시각에서 마그리트 뿐 만 아니라 그가 참여했던 초현실주의 역시 선의 시각에서 새롭게 해석해야 할 것이다. 과연 그는 선에 대한 그의 무의식을 어떻게 노정하는가?

 내가 그동안 강조한 선은 참선이나 수행이 아니라 사물을 새롭게 보는 방식, 그러니까 전통적인 이원론적 사유 방식을 부정하고 초월하는 사유 방식으로 요약하면 不二 思想과 나가라주나 龍樹 의 中論이다. 나는 불교 학자도 아니고 선에 대해 깊은 이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선이 지향하는 불이, 곧 중론의 사유 방식이 새로운 시대의 예술이 나갈 방향이라는 점에서 그동안 선의 시각에서 전위 예술에 대해 글을 썼고 지금도 쓰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조건1 1933

 

 마그리트가 「인간의 조건 1」(1933)에서 강조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림에는 커튼이 젖혀진 커다란 창문이 나오고 창 너머 들판과 작은 산과 나무 한 그루가 보이고 하늘에는 구름이 떠 있다. 그러나 다시 보면 창 밖 풍경을 막는 이젤, 곧 다리 달린 받침대가 나오고 이 캔버스는 투명하기 때문에 창밖 풍경을 그대로 보여준다. 말하자면 그림 속에 그림이 나오는 구조이다. 실제 공간은 어디 있고 캔버스의 공간은 어디 있는가? 아니 도대체 이 그림은 실제 공간을 재현한 것인가? 이 그림이 제기하는 문제는 하나 둘이 아니다. 첫째로 재현문제, 전통적으로 모든 그림을 실제 공간을 재현하고 르네상스 이후 회화는 2차원적인 평면에 원근법을 매개로 3차원적 현실을 재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런 점에서 마그리트의 그림은 이런 원칙을 해체한다. 해체한다는 것은 파괴한다는 말이 아니다. 파괴나 부정은 모더니즘 회화가 보여준다. 예컨대 피카소를 중심으로 하는 입체파는 2차원적 평면에 원근법을 매개로 하는 3차원의 현실이 눈속임이고 따라서 이런 눈속임을 부정하고 캔버스에 있는 그대로의 3 차원적 현실, 곧 입체를 분석적 방법에 의해 표현한다. 그런가 하면 추상표현주의를 지향한 칸딘스키는 입체의 외부 공간을 그리지 않고 화가의 내적 심리세계, 일종의 무의식을 즉흥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르네상스 이후의 재현 미학을 부정하고 파괴한다. 그러나 마그리트의 그림에는 이런 의미로서의 재현 미학이 부정되는 것도 아니고 파괴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해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이런 문맥에서이다. 이 그림은 창 밖 풍경을 재현하고 방의 창문도 재현한다. 그러나 전통적 회화와 다르다. 아니 유사하며 다르다. 유사하다는 것은 이 그림이 창문과 창 밖 풍경을 재현한다는 점이고 다르다는 것은 창문이 그림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창문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출처 / 세상과 세상사이 -나호열 시인의 철학 강의실 http://blog.daum.net/prhy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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