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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철학 강의

선 禪과 마그리트 Rene Magritte 2

by 丹野 2010. 12. 5.

 

선 禪과 마그리트 Rene  Magritte  2

 


                                  이 승 훈 (시인, 한양대 교수)

 

 

 

2. 보는 작용이 없으므로 보는 자도 없다.

  요컨대 이젤로 받친 캔버스의 그림은 그림이고 동시에 실제 공간이다. 캔버스의 공간과 실제 공간의 경계는 해체되고 이런 해체는 환상과 현실의 해체라는 명제로 발전하고 나는 이런 해체를 선적 사유로 해석한다. 이른바 不二 사상에 의하면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해체된다. 현실은 환상이 아니지만(불일) 환상이 아닌 것도 아니고(불이) 거꾸로 환상은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이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현실로 인식되는 것은 눈, 귀, 코, 혀, 몸, 생각 등 六根의 활동 영역이고 육근은 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용수는 다음처럼 말한다.


   5. 보는 작용에 보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보는 작용이 아닌 것에도 보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이미 보는 작용을 논파했다면 결국 보는 놈도 논파된다.


     見不能有見 非見亦不見 若已跛於見 見爲跛見者

 

   6. 보는 작용을 떠나서건 떠나지 않건 보는 놈은 얻을 수 없다. 보는 놈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보는 작용이나 보이는 것이 있겠느냐?


     離見不離見 見者 不可得 以無見者故 何有見可見4)


 이 게송에서 용수가 강조하는 것은 보는 작용은 볼 수 없고 따라서 보는 자도 없다는 것,보는 작용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눈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볼 수 없기 때문이고 이렇게 보는 작용이 없으므로 보는 자도 없다. 요컨대 보는 작용과 대상의 관계는 대립적인 것도 아니고 인과적인 것도 아니다. 보는 작용(인)이 있어서 대상이 있다면(과) 대상이 두 번 있게 되어 모순이고 그렇다고 보는 작용 속에 대상이 없다면 보는 작용이 아니기 때문에 모순이 된다. 나는 용수의 이런 중도사상을 두 개의 공식 S(O)+ O 와 SO= S 로 나타낸 바 있다. 첫 째 공식은 주체의 보는 작용 속에 대상이 있다면 이 대상 외에 그러니까 주체 밖에 다시 대상이 있게 된다는 것, 둘 째 공식은 주체에게 보는 작용이 없다면 곧 대상이 없다면 이런 주체는 보는 주체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결국 이런 중도 사상이 강조하는 것은 주체, 작용, 대상이중도 인과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용수처럼 비트겐슈타인도 우리는 실제로 눈을 볼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눈과 시야의 관계를 다음처럼 말한다.


 5-633 당신은 눈과 시야의 관계가 전적으로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신은 실제로 눈을 보지는 않는다. 그리고 시야 속에 있는 어떤 것도 그것이 눈에 의해서 보여지고 있다는 추론을 허용하지 않는다  5)  


 용수와 비트겐슈타인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눈을 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용수는 눈(보는 작용)과 대상의 관계를 중심으로 비트겐슈타인은 눈과 시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강조하는 것은 이 두요소가 중도, 불이의 관계에 있다는 것, 나는 다른 글에서 이 문제를 살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는 생략한다.6)

그렇다면 마그리트는 보는 작용과 대상 혹은 눈과 대상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다음은 「인간의 조건 1」에 대한 마그리트의 말,


  창문의 문제가 이 작품을 낳았다. 방의 내부에서 바라본 창문 앞에다 그림에 의해 지워진 풍경의 부분을 묘사한 그림을 놓았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우리 외부에 있는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비록 우리 내부에는 하나의 표현만이 있지만7)


  프리츠커에 의하면 이런 고백에 의해 마그리트가 강조하는 것은 현실과 환상의 긴장이다. 말하자면 실제 공간과 캔버스의 환상적 공간 사이의 차이를 조화시킬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이 그림이 강조하는 것, 그리고 마그리크의 고백이 강조하는 것은 현실과 환상의 단순한 긴장 너머 외부 세계를 바라보는 이른바 보는 작용의 문제이다. 실제 공간은 캔버스에 재현되며 동시에 캔버스 밖에 있고, 이런 이중구조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전통적인 재현 원리를 해체하고 이 해체는 현실과 환상이 중도, 불이의 관계에 있음을 암시한다. 곧 현실이 캔버스의 그림이고 동시에 캔버스의 그림이 현실이다. 불이사상에 의하면 현실은 캔버스의 그림이 아니고 캔버스의 그림이 아닌 것도 아니다.

 둘째로 이 그림은 창문을 모티프로 하고 창문은 많은 화가, 시인들이 다룬 소재로 흔히 안과 밖의 동시성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창문은 방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그림은 안과 밖의 공간적 경계를 해체하고 안과 밖이 불이의 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

 셋째로 우리는 과연 이 그림에서 무엇을 보는가? 이 그림 속에는 두 개의 그림이 있다. 하나는 방안과 창 밖의 풍경, 다른 하나는 창문 앞에 이젤로 받쳐진 캔버스의 풍경, 밖의 풍경은 이 캔버스 때문에 소멸하고 대신 캔버스에 그림으로 존재한다. 그림 속에 그림이 있고재현의 재현이다. 이 두 개의 그림이 문제이다.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개블릭은 다음처럼 말한다.


 「그림 안의 그림」이라는 주제는 ‘현실을 보는 창문’으로서의 르네상스 회화개념에 대한 멋진 대치이다. 우리는 방 안의 캔버스 위에 그려진 풍경을 보는 것인가 아니면 창문 밖에 있는 풍경을 보는 것인가? 「인간의 조건 1」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접점에서 일어나는 이 두 현상과의 상호관계, 즉 내부세계와 외부세계 간의 동일성을 확산시킨다.8)

  

 주체와 객체의 접점, 내부와 외부의 동일성 확산이라는 이런 개블릭의 주장은 좀 더 비판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그림이 암시하는 것은 내부세계와 외부세계의 동일성 확산이 아니라 동일성 /차이의 경계를 해체하는 것이고 이런 해체가 그도 인용하듯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특히 본다는 것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낳기 때문이다.


앞에서 나는 캔버스의 그림과 창 밖의 풍경을 환상과 현실, 그림과 대상의 관계로 해석했지만 이런 해석은 어디까지나 해석의 편의를 위한 것이고 정확하게 말하면 환상도 현실도 모두 환상이고 그림도 현실도 모두 그림이다. 있는 그대로 보자. 어디 현실이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한편 캔버스는 어떤 형상도 그리지 않는 투명한 창유리인지 모른다. ‘인간의 조건 1’은 캔버스의 풍경(A), 방안의 풍경(B), 창 밖의 풍경(C)이라는 세 풍경으로 구성되고 이 세 풍경이 모여 전체 캔버스, 곧 하나의 풍경(D)을 구성한다. 물론 풍경 A는 투명한 창의 일부라는 점에서 A 와 B 의 경계가 해체된다. 결국 우리는 전체 풍경 (D)을 보는 것도 아니고(不一)보지 않는 것도 아니다(不異).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이 그림을 존다고 할 수 있는가/ 구체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이 그림이 암시하는 철학적 명제는 보는 작용(눈)과 대상의 관계가 대립적인 것도 아니고 인과적인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눈과 대상의 경계는 해체되고 눈과 대상의 인과관계도 해체된다. 나는 이런 해체를 不二 , 中道, 空으로 해석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다른 모양일 수도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 역시 선적 사유에 가깝고 이런 명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인간의 조건이고 혹은 이런 명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출처 / 세상과 세상사이 -나호열 시인의 철학 강의실 http://blog.daum.net/prhy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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