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禪과 마그리트 Rene Magritte 3
이 승 훈 (시인, 한양대 교수)
3. 그는 도처에 있고 아무 곳에도 없다
백지위임장 1965
눈과 대상과의 이런 관계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 발전되고 따라서 주체는 객체를 하나의 실체로 객관적으로 지각한다는 고전적 명제는 부정된다. 마그리트의 그림 「백지 위임장」(1965)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 그렇다. 이 그림에는 정식 승마복을 입고 말을 타고 가는 한 여인이 나온다. 여인은 말을 타고 숲 속 커다란 나무 사이를 지나간다. 그러나 말은 두 개의 나무 사이에서 분할되고 이 분할된 부분이 공백으로 제시됨으로써 말은 두 토막이 난 형상이다. 말의 몸통은 머리 부분과 뒷부분이 분할된 상태로 어디론가 가고 있다. 한편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여인은 나무의 중간 부분에 그려진 것 같고 말의 위치 역시 모호하다. 말은 나무 앞에 있는가 뒤에 있는가? 왜냐하면 말이 두 부분으로 분리되고 일부분은 나무 앞에 있지만 뒷부분은 나무 뒤에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이 제기하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말이 분할된 것, 다른 하나는 이 말이 과연 움직이는가? 이다.
첫 째로 마그리트가 말을 이렇게 하나의 통일체, 유기체, 객체로 그리지 않고 두 부분으로 분할한 것은 말에 대한 일상적 지각을 부정하고 그러니까 객체의 존재에 대한 회의와 부정을 암시한다. 비트겐슈타인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보는 것은 다른 모양일수도 있다는 것. 이런 객체 인식은 「금강경」에 나오는 형상을 갖는 모든 것은 환상이라는 명제 凡所有相 皆是虛妄 나 모든 형상은 형상이 아니라는 명제 諸相非相 로 해석할 수 있다. 임제 臨濟 는 진리를 깨닫는 네 단계, 곧 사료간 四料揀을 다음처럼 나눈다.
사람을 빼앗고 경계를 빼앗지 않는다 奪人不奪境
경계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지 않는다 奪境不奪人
사람도 경계도 모두 빼앗는다 人境俱奪
사람도 경계도 빼앗지 않고 둘 다 그대로 내버려둔다 人境俱不奪9)
여기서 사람은 주체, 경계는 객체에 해당한다. 주체는 안이비설신의 六根을 가지고 있고 객체는 이 육근이 작용하는 세상, 곧 六境이지만 불교가 강조하는 것은 이런 만남이 모두 연기의 소산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진리, 깨달음은 이런 만남이 六塵, 곧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때 진리를 성취한다는 것. 말하자면 주체도 공이고 객체도 공이라는 것 我空法空을 깨닫고 실천하자는 것. 임제가 말하는 것은 이런 진리에 도달하는 네 단계이다. 첫째 단계는 안이비설신의를 움직이지 말고 객체와 만나는 것, 둘째 단계는 주체는 그대로 두고 객체, 곧 색수상행식 六境을 부정하는 것.
10)
마그리트의 「백지위임장」이 강조하는 것은 둘째 단계이다. 주체에 해당하는 마그리트는 온전하고 다만 객체, 곧 말과 여인이 일상의 객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대상을 왜곡하고 변형시키는 그림들은 모두 禪 과 관계된다는 말인가? 물론 아니다. 대상을 모방하는 재현 회화는 대상을 그대로 그린다는 점에서 선과 관계가 없고 재현의 원리를 부정하는 모더니즘 회화도 화가의 의식, 혹은 무의식의 문제이다. 그런 점에선 대상을 모방하는 사실주의 회화 역시 화가의 의식 혹은 무의식이 문제이다.
예컨대 참선하는 스님이나 해탈한 스님이 그린 사실적인 그림들은 비록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렸지만 그림이 암시하고 전달하는 것은 이런 사실성을 초월하는 선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임제의 사료간 가운데 넷째 단계, 곧 사람도 경계도 빼앗지 않고 그대로 두는 단계를 암시한다. 1981년 1월 대한불교조계종 제 6대 종정에 취임하며 성철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종정 취임 법어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바 있고 이 때 스님이 강조한 것이 사람도 경계도 빼앗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경지가 아닌가 싶다. 그런가 하면 많은 선승들의 경우 선종의 초조인 달마의 초상을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들이 많다. 물론 달마를 본 사람은 없지만 오랫동안 전해져 오는 모습을 따라 그린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그림 역시 강조하는 것은 달마의 형상이 아니라 달마의 가르침, 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고 나도 우연한 기회에 스님이 그린 달마 초상을 구하게 되어 지금 내 연구실 벽에 걸어놓고 있지만 그 그림을 보면서 아 달마 스님이 저런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거레스님으로 불리던 중광 重光 스님은 많은 달마 초상을 그렸고 스님의 달마는 우리가 흔히 보던 달마가 아니고 매우 기형적인 모습이다. 임제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逢佛殺佛’고 했던 것처럼 중광이 노린 것 역시 달마를 죽이고 달마라는 이름도 우상이고 이런 우상에서 벗어나는 자유자재를 노린 것 같다. 한편 천연 단하 丹霞 선사의 행의 역시 비슷하다. 그는 낙동의 혜림사에서 추운 겨울 법당의 나무부처 木佛을 태워 불을 쪼인다. 중광의 경우는 굳이 부연하자면 임제의 사료간 가운데 첫째 단계곧 사람을 빼앗고 경계를 빼앗지 않는 단계에 해당한다고 할까? 그의 달마도가 강조하는 것은 순진성과 천진함이고 이런 경지가 천진 단하의 행위와 통한다.
둘째로 마그리트의 「백지위임장」이 제기한 문제는 말의 움직임, 이 말은 가고 있는가 멈춰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가는 것도 아니고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말은 도처에 있고 아무 곳에도 없다. 왜냐하면 이 말은 말인 것도 아니고 말이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그리트는 그림의 제목을 ‘백지 위임장’이라고 부쳤다.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마르셀 뒤샹은 남성용 변기를 전시장에 옮기고 제목을 ‘샘’이라고 부쳤다. 이런 제목은 작품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따라서 이런 제목으로 그가 강조한 것은 제목과 작품, 언어와 현실의 괴리이다. 그렇다면 마그리트는? 그는 ‘마음대로 하시오’이다. 그는 제목에 관해 우리에게 백지위임장을 준다. 그러므로 이 그림의 경우 제목과 작품, 언어와 현실에 대한 인식은 뒤샹보다 한걸음 더 나가고 그것은 뒤에 살펴볼 예정이다.11)
출처 / 세상과 세상사이 -나호열 시인의 철학 강의실 http://blog.daum.net/prhy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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