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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철학 강의

선 禪과 마그리트 Rene Magritte

by 丹野 2010. 12. 5.

 

 

 

 

 

선 禪과 마그리트 Rene  Magritte   


                                  이 승 훈 (시인, 한양대 교수)


1. 그림 속에 그림이 있다


  르네 마그리트 Rene Magritte는 1898년 11월 21일 벨기에 출생의 초현실주의 화가로 1967년 타계한다. 대체로 이런 글을 쓸 때는 나도 그렇지만 많은 필자들이 출생년도만 밝히지 이렇게 태어난 달까지 밝히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글에서 마그리트가 태어난 달까지 밝히는 것인가? 그것은 그가 태어난 11월이 전갈좌에 속하기 때문이다. 전갈좌에 대해서 개블릭1)은 다음처럼 말한다.


  전갈좌는 수다스럽지 않고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전갈좌에 태어난 사람들은 비밀스럽고 기이하고 불안해하고 유별난 예감과 직관으로 가득 차 있는 경향이 있다. 종종 이상하고 파괴적이며 신비하고 까다로운 것에 대해 특별한 취향을 갖고 괴기스러운 것을 좋아하기도 한다. 비밀스럽게 幻影에 홀리기도 하고 유령과 쉽게 교류하기도 한다. 연구와 분석에 대한 열정과 탐욕스러운 호기심으로 인하여 그들은 뛰어난 첩보원이나 형사의 기질을 갖고 있다. 마그리트가 평범한 사람으로 가장한 부르주아 생활을 하면서 파괴적인 본능을 어떻게 감추었는지 이미 수많은 작가들이 서술하였다. 그는 르네 프랑스와 가스랭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이런 연유로 첫 번째 저작물에 랑기스 형사라고 서명하였다. 


 피카소, 키리코, 도스토에프스키등이 전갈좌에 속하고 내가 알기로는 김춘수가 전갈좌에 속하고 나도 전갈좌에 속한다. 전갈좌에 태어난 예술가들에 대해서는 좀 더 조사할 필요가 있고 아무튼 내가 마그리트의 생년월일에 흥미를 갖는 것 역시 내가 전갈좌 생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생년 월일 같은데 관심을 갖는 것도 그런 연유에선지 모른다. 나는 마그리트의 그림에 대해 글을 쓴 바 있고 그러므로 이번이 두 번 째이다. 처음 쓴 글은 주로 그의 그림이 보여주는 초현실주의적 기법을 정신분석과 관련시켜 해석한 것2).

 그러나 이번에 다시 그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그의 그림이 보여주는 초현실주의적 요소가 선불교적 요소와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20세기 전위예술을 선불교와 관련시켜 새롭게 해석한 바 있고 그런 점에서 이 글은 그런 해석의 일부가 된다. 과연 마그리트의 그림을 禪과 관련시켜 해석하는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가?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다. 한편 다시 생각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예술작품이 있는게 아니라 해석이 있고 해석이 작품의 의미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작품이 예술가의 증상이라면 이 증상은 해석에 의해 의미를 소유하고 해석 이전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라캉에 의하면 낱말, 망각, 실어, 실수 같은 증상들은 해석 이전에는 의미가 없다. 이런 증상은 우리의 삶을 괴롭히면서 완강하게 자신을 고집한다. 그러나 언어 질서, 이른바 대타자가 개입하면서, 곧 해석자의 해석에 의해 의미가 부여되면서 고통은 의미로 전환되고 이런 해석이 주체에게 영향을 준다. 말하자면 주체가 억압한 진리가 드러난다. 프로이트는 기차 여행 중 Signerolli 라는 낱말을 망각하고 그의 또 하나의 자아인 반자아 alter ego 와의 대화를 통해 이 망각이 의사로서의 무력감을 은폐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곧 그는 망각이라는 증상에 의해 의사로서의 무력감을 억압하고 혹은 거꾸로 무력감의 억압이 증상을 낳고 이 증상이 그를 괴롭히지만 반자아와의 대화, 곧 해석에 의해 그 의미가 드러난다3)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증상이고 따라서 이런 증상 역시 해석에 의해 그 의미, 곧 작품의 진리가 드러나고 드러나야 한다. 마그리트는 그가 그린 그림들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들이 많고 그런 점에서 그는 자신의 의도를 억압하고 이런 억압이 그림이라는 증상으로 나타나고 혹은 거꾸로 증상이 억압을 낳는다. 이런 억압은 해석에 의해 그 의미가 드러나고 드러나야 한다. 물론 나는 이 글에서 마그리트의 증상을 정신분석의 시각이 아니라 선의 시각에서 해석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선적 사유를 억압하고 있는지 모르고 이런 억압이 증상으로 그러니까 작품으로 형상화되었는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선적 사유는 그의 무의식이고 내가 관심을 두는 것은 이 무의식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그가 선불교를 공부했느냐 혹은 불교의 영향을 받았느냐 여부가 아니다. 그는 선에 대한 의식적 사유가 없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들이 선에 대한 그의 무의식, 라캉 식으로는 진리를 노정한다. 이런 시각에서 마그리트 뿐 만 아니라 그가 참여했던 초현실주의 역시 선의 시각에서 새롭게 해석해야 할 것이다. 과연 그는 선에 대한 그의 무의식을 어떻게 노정하는가?

 내가 그동안 강조한 선은 참선이나 수행이 아니라 사물을 새롭게 보는 방식, 그러니까 전통적인 이원론적 사유 방식을 부정하고 초월하는 사유 방식으로 요약하면 不二 思想과 나가라주나 龍樹 의 中論이다. 나는 불교 학자도 아니고 선에 대해 깊은 이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선이 지향하는 불이, 곧 중론의 사유 방식이 새로운 시대의 예술이 나갈 방향이라는 점에서 그동안 선의 시각에서 전위 예술에 대해 글을 썼고 지금도 쓰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조건1 1933

 

 마그리트가 「인간의 조건 1」(1933)에서 강조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림에는 커튼이 젖혀진 커다란 창문이 나오고 창 너머 들판과 작은 산과 나무 한 그루가 보이고 하늘에는 구름이 떠 있다. 그러나 다시 보면 창 밖 풍경을 막는 이젤, 곧 다리 달린 받침대가 나오고 이 캔버스는 투명하기 때문에 창밖 풍경을 그대로 보여준다. 말하자면 그림 속에 그림이 나오는 구조이다. 실제 공간은 어디 있고 캔버스의 공간은 어디 있는가? 아니 도대체 이 그림은 실제 공간을 재현한 것인가? 이 그림이 제기하는 문제는 하나 둘이 아니다. 첫째로 재현문제, 전통적으로 모든 그림을 실제 공간을 재현하고 르네상스 이후 회화는 2차원적인 평면에 원근법을 매개로 3차원적 현실을 재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런 점에서 마그리트의 그림은 이런 원칙을 해체한다. 해체한다는 것은 파괴한다는 말이 아니다. 파괴나 부정은 모더니즘 회화가 보여준다. 예컨대 피카소를 중심으로 하는 입체파는 2차원적 평면에 원근법을 매개로 하는 3차원의 현실이 눈속임이고 따라서 이런 눈속임을 부정하고 캔버스에 있는 그대로의 3 차원적 현실, 곧 입체를 분석적 방법에 의해 표현한다. 그런가 하면 추상표현주의를 지향한 칸딘스키는 입체의 외부 공간을 그리지 않고 화가의 내적 심리세계, 일종의 무의식을 즉흥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르네상스 이후의 재현 미학을 부정하고 파괴한다. 그러나 마그리트의 그림에는 이런 의미로서의 재현 미학이 부정되는 것도 아니고 파괴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해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이런 문맥에서이다. 이 그림은 창 밖 풍경을 재현하고 방의 창문도 재현한다. 그러나 전통적 회화와 다르다. 아니 유사하며 다르다. 유사하다는 것은 이 그림이 창문과 창 밖 풍경을 재현한다는 점이고 다르다는 것은 창문이 그림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창문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2. 보는 작용이 없으므로 보는 자도 없다.

 

  요컨대 이젤로 받친 캔버스의 그림은 그림이고 동시에 실제 공간이다. 캔버스의 공간과 실제 공간의 경계는 해체되고 이런 해체는 환상과 현실의 해체라는 명제로 발전하고 나는 이런 해체를 선적 사유로 해석한다. 이른바 不二 사상에 의하면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해체된다. 현실은 환상이 아니지만(불일) 환상이 아닌 것도 아니고(불이) 거꾸로 환상은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이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현실로 인식되는 것은 눈, 귀, 코, 혀, 몸, 생각 등 六根의 활동 영역이고 육근은 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용수는 다음처럼 말한다.


   5. 보는 작용에 보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보는 작용이 아닌 것에도 보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이미 보는 작용을 논파했다면 결국 보는 놈도 논파된다.


     見不能有見 非見亦不見 若已跛於見 見爲跛見者

 

   6. 보는 작용을 떠나서건 떠나지 않건 보는 놈은 얻을 수 없다. 보는 놈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보는 작용이나 보이는 것이 있겠느냐?


     離見不離見 見者 不可得 以無見者故 何有見可見4)


 이 게송에서 용수가 강조하는 것은 보는 작용은 볼 수 없고 따라서 보는 자도 없다는 것,보는 작용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눈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볼 수 없기 때문이고 이렇게 보는 작용이 없으므로 보는 자도 없다. 요컨대 보는 작용과 대상의 관계는 대립적인 것도 아니고 인과적인 것도 아니다. 보는 작용(인)이 있어서 대상이 있다면(과) 대상이 두 번 있게 되어 모순이고 그렇다고 보는 작용 속에 대상이 없다면 보는 작용이 아니기 때문에 모순이 된다. 나는 용수의 이런 중도사상을 두 개의 공식 S(O)+ O 와 SO= S 로 나타낸 바 있다. 첫 째 공식은 주체의 보는 작용 속에 대상이 있다면 이 대상 외에 그러니까 주체 밖에 다시 대상이 있게 된다는 것, 둘 째 공식은 주체에게 보는 작용이 없다면 곧 대상이 없다면 이런 주체는 보는 주체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결국 이런 중도 사상이 강조하는 것은 주체, 작용, 대상이중도 인과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용수처럼 비트겐슈타인도 우리는 실제로 눈을 볼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눈과 시야의 관계를 다음처럼 말한다.


 5-633 당신은 눈과 시야의 관계가 전적으로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신은 실제로 눈을 보지는 않는다. 그리고 시야 속에 있는 어떤 것도 그것이 눈에 의해서 보여지고 있다는 추론을 허용하지 않는다  5)  


 용수와 비트겐슈타인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눈을 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용수는 눈(보는 작용)과 대상의 관계를 중심으로 비트겐슈타인은 눈과 시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강조하는 것은 이 두요소가 중도, 불이의 관계에 있다는 것, 나는 다른 글에서 이 문제를 살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는 생략한다.6)

그렇다면 마그리트는 보는 작용과 대상 혹은 눈과 대상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다음은 「인간의 조건 1」에 대한 마그리트의 말,


  창문의 문제가 이 작품을 낳았다. 방의 내부에서 바라본 창문 앞에다 그림에 의해 지워진 풍경의 부분을 묘사한 그림을 놓았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우리 외부에 있는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비록 우리 내부에는 하나의 표현만이 있지만7)


  프리츠커에 의하면 이런 고백에 의해 마그리트가 강조하는 것은 현실과 환상의 긴장이다. 말하자면 실제 공간과 캔버스의 환상적 공간 사이의 차이를 조화시킬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이 그림이 강조하는 것, 그리고 마그리크의 고백이 강조하는 것은 현실과 환상의 단순한 긴장 너머 외부 세계를 바라보는 이른바 보는 작용의 문제이다. 실제 공간은 캔버스에 재현되며 동시에 캔버스 밖에 있고, 이런 이중구조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전통적인 재현 원리를 해체하고 이 해체는 현실과 환상이 중도, 불이의 관계에 있음을 암시한다. 곧 현실이 캔버스의 그림이고 동시에 캔버스의 그림이 현실이다. 불이사상에 의하면 현실은 캔버스의 그림이 아니고 캔버스의 그림이 아닌 것도 아니다.

 둘째로 이 그림은 창문을 모티프로 하고 창문은 많은 화가, 시인들이 다룬 소재로 흔히 안과 밖의 동시성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창문은 방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그림은 안과 밖의 공간적 경계를 해체하고 안과 밖이 불이의 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

 셋째로 우리는 과연 이 그림에서 무엇을 보는가? 이 그림 속에는 두 개의 그림이 있다. 하나는 방안과 창 밖의 풍경, 다른 하나는 창문 앞에 이젤로 받쳐진 캔버스의 풍경, 밖의 풍경은 이 캔버스 때문에 소멸하고 대신 캔버스에 그림으로 존재한다. 그림 속에 그림이 있고재현의 재현이다. 이 두 개의 그림이 문제이다.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개블릭은 다음처럼 말한다.


 「그림 안의 그림」이라는 주제는 ‘현실을 보는 창문’으로서의 르네상스 회화개념에 대한 멋진 대치이다. 우리는 방 안의 캔버스 위에 그려진 풍경을 보는 것인가 아니면 창문 밖에 있는 풍경을 보는 것인가? 「인간의 조건 1」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접점에서 일어나는 이 두 현상과의 상호관계, 즉 내부세계와 외부세계 간의 동일성을 확산시킨다.8)

  

 주체와 객체의 접점, 내부와 외부의 동일성 확산이라는 이런 개블릭의 주장은 좀 더 비판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그림이 암시하는 것은 내부세계와 외부세계의 동일성 확산이 아니라 동일성 /차이의 경계를 해체하는 것이고 이런 해체가 그도 인용하듯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특히 본다는 것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낳기 때문이다.


앞에서 나는 캔버스의 그림과 창 밖의 풍경을 환상과 현실, 그림과 대상의 관계로 해석했지만 이런 해석은 어디까지나 해석의 편의를 위한 것이고 정확하게 말하면 환상도 현실도 모두 환상이고 그림도 현실도 모두 그림이다. 있는 그대로 보자. 어디 현실이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한편 캔버스는 어떤 형상도 그리지 않는 투명한 창유리인지 모른다. ‘인간의 조건 1’은 캔버스의 풍경(A), 방안의 풍경(B), 창 밖의 풍경(C)이라는 세 풍경으로 구성되고 이 세 풍경이 모여 전체 캔버스, 곧 하나의 풍경(D)을 구성한다. 물론 풍경 A는 투명한 창의 일부라는 점에서 A 와 B 의 경계가 해체된다. 결국 우리는 전체 풍경 (D)을 보는 것도 아니고(不一)보지 않는 것도 아니다(不異).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이 그림을 존다고 할 수 있는가/ 구체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이 그림이 암시하는 철학적 명제는 보는 작용(눈)과 대상의 관계가 대립적인 것도 아니고 인과적인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눈과 대상의 경계는 해체되고 눈과 대상의 인과관계도 해체된다. 나는 이런 해체를 不二 , 中道, 空으로 해석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다른 모양일 수도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 역시 선적 사유에 가깝고 이런 명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인간의 조건이고 혹은 이런 명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3. 그는 도처에 있고 아무 곳에도 없다

 

 

백지위임장 1965


 눈과 대상과의 이런 관계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 발전되고 따라서 주체는 객체를 하나의 실체로 객관적으로 지각한다는 고전적 명제는 부정된다. 마그리트의 그림 「백지 위임장」(1965)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 그렇다. 이 그림에는 정식 승마복을 입고 말을 타고 가는 한 여인이 나온다. 여인은 말을 타고 숲 속 커다란 나무 사이를 지나간다. 그러나 말은 두 개의 나무 사이에서 분할되고 이 분할된 부분이 공백으로 제시됨으로써 말은 두 토막이 난 형상이다. 말의 몸통은 머리 부분과 뒷부분이 분할된 상태로 어디론가 가고 있다. 한편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여인은 나무의 중간 부분에 그려진 것 같고 말의 위치 역시 모호하다. 말은 나무 앞에 있는가 뒤에 있는가? 왜냐하면 말이 두 부분으로 분리되고 일부분은 나무 앞에 있지만 뒷부분은 나무 뒤에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이 제기하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말이 분할된 것, 다른 하나는 이 말이 과연 움직이는가? 이다.

 

 첫 째로 마그리트가 말을 이렇게 하나의 통일체, 유기체, 객체로 그리지 않고 두 부분으로 분할한 것은 말에 대한 일상적 지각을 부정하고 그러니까 객체의 존재에 대한 회의와 부정을 암시한다. 비트겐슈타인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보는 것은 다른 모양일수도 있다는 것. 이런 객체 인식은 「금강경」에 나오는 형상을 갖는 모든 것은 환상이라는 명제 凡所有相 皆是虛妄 나 모든 형상은 형상이 아니라는 명제 諸相非相 로 해석할 수 있다. 임제 臨濟 는 진리를 깨닫는 네 단계, 곧 사료간 四料揀을 다음처럼 나눈다.


  사람을 빼앗고 경계를 빼앗지 않는다 奪人不奪境

  경계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지 않는다 奪境不奪人

  사람도 경계도 모두 빼앗는다    人境俱奪

  사람도 경계도 빼앗지 않고 둘 다 그대로 내버려둔다 人境俱不奪9)


 여기서 사람은 주체, 경계는 객체에 해당한다. 주체는 안이비설신의 六根을 가지고 있고 객체는 이 육근이 작용하는 세상, 곧 六境이지만 불교가 강조하는 것은 이런 만남이 모두 연기의 소산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진리, 깨달음은 이런 만남이 六塵, 곧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때 진리를 성취한다는 것. 말하자면 주체도 공이고 객체도 공이라는 것 我空法空을 깨닫고 실천하자는 것. 임제가 말하는 것은 이런 진리에 도달하는 네 단계이다. 첫째 단계는 안이비설신의를 움직이지 말고 객체와 만나는 것, 둘째 단계는 주체는 그대로 두고 객체, 곧 색수상행식 六境을 부정하는 것.10)

 

 마그리트의 「백지위임장」이 강조하는 것은 둘째 단계이다. 주체에 해당하는 마그리트는 온전하고 다만 객체, 곧 말과 여인이 일상의 객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대상을 왜곡하고 변형시키는 그림들은 모두 禪 과 관계된다는 말인가? 물론 아니다. 대상을 모방하는 재현 회화는 대상을 그대로 그린다는 점에서 선과 관계가 없고 재현의 원리를 부정하는 모더니즘 회화도 화가의 의식, 혹은 무의식의 문제이다. 그런 점에선 대상을 모방하는 사실주의 회화 역시 화가의 의식 혹은 무의식이 문제이다.

 

 예컨대 참선하는 스님이나 해탈한 스님이 그린 사실적인 그림들은 비록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렸지만 그림이 암시하고 전달하는 것은 이런 사실성을 초월하는 선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임제의 사료간 가운데 넷째 단계, 곧 사람도 경계도 빼앗지 않고 그대로 두는 단계를 암시한다. 1981년 1월 대한불교조계종 제 6대 종정에 취임하며 성철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종정 취임 법어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바 있고 이 때 스님이 강조한 것이 사람도 경계도 빼앗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경지가 아닌가 싶다. 그런가 하면 많은 선승들의 경우 선종의 초조인 달마의 초상을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들이 많다. 물론 달마를 본 사람은 없지만 오랫동안 전해져 오는 모습을 따라 그린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그림 역시 강조하는 것은 달마의 형상이 아니라 달마의 가르침, 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고 나도 우연한 기회에 스님이 그린 달마 초상을 구하게 되어 지금 내 연구실 벽에 걸어놓고 있지만 그 그림을 보면서 아 달마 스님이 저런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거레스님으로 불리던 중광 重光 스님은 많은 달마 초상을 그렸고 스님의 달마는 우리가 흔히 보던 달마가 아니고 매우 기형적인 모습이다.  임제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逢佛殺佛’고 했던 것처럼 중광이 노린 것 역시 달마를 죽이고 달마라는 이름도 우상이고 이런 우상에서 벗어나는 자유자재를 노린 것 같다. 한편 천연 단하 丹霞 선사의 행의 역시 비슷하다. 그는 낙동의 혜림사에서 추운 겨울 법당의 나무부처 木佛을 태워 불을 쪼인다. 중광의 경우는 굳이 부연하자면 임제의 사료간 가운데 첫째 단계곧 사람을 빼앗고 경계를 빼앗지 않는 단계에 해당한다고 할까? 그의 달마도가 강조하는 것은 순진성과 천진함이고 이런 경지가 천진 단하의 행위와 통한다.

 둘째로 마그리트의 「백지위임장」이 제기한 문제는 말의 움직임, 이 말은 가고 있는가 멈춰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가는 것도 아니고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말은 도처에 있고 아무 곳에도 없다. 왜냐하면 이 말은 말인 것도 아니고 말이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그리트는 그림의 제목을 ‘백지 위임장’이라고 부쳤다.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마르셀 뒤샹은 남성용 변기를 전시장에 옮기고 제목을 ‘샘’이라고 부쳤다. 이런 제목은 작품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따라서 이런 제목으로 그가 강조한 것은 제목과 작품, 언어와 현실의 괴리이다. 그렇다면 마그리트는? 그는 ‘마음대로 하시오’이다. 그는 제목에 관해 우리에게 백지위임장을 준다. 그러므로 이 그림의 경우 제목과 작품, 언어와 현실에 대한 인식은 뒤샹보다 한걸음 더 나가고 그것은 뒤에 살펴볼 예정이다.11)

 

 

 

 

 

 

4. 관 속에서 자다


「백지위임장」이 강조하는 분할의 기법은 위에서 살핀 것처럼 캔버스 속의 이미지, 예컨대 말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마그리트의 경우 이런 분할의 기법은 화면의 이미지가 아니라 캔버스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도 많고 한편 분할이 아니라 응축 혹은 합성의 기법이 강조되는 그림도 많다. 캔버스 자체를 분할하는 것으로는 「신문 보는 남자」 (1928),「꿈의 열쇠」(1930), 「개의치 않고 잠자는 사람」 (1928) 등이 있고 이와는 반대로 사물들을 응축 혹은 합성하는 그림으로는 「정상의 부름」(1942), 「설명」(1952), 「공동발명」(1953), 「자연의 은혜」(1963), 「붉은 모델 」(1935), 「능욕 」(1934), 「기억」 (1948)  등이 있다.

 분할이든 응축이든 이런 기법에 의해 마그리트가 강조하는 것은 사물에 대한 일상적 지각의 부정, 말하자면 객체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고 이런 부정은 그의 경우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부정하면서 긍정하고 거꾸로 긍정하면서 부정하는 독특한 미학을 낳고 이런 미학이 선적 사유와 통하고 나는 그것을 不二 , 空, 中道 개념으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먼저 「신문 보는 남자」혹은 「신문을 읽고 있는 남자」에서 마그리트는 하나의 화면을 4등분하고 동일한 실내풍경을 반복한다. 네 개의 화면 가운데 좌상의 화면에만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탁자 옆에 앉아 신문을 읽고 나머지 세 개의 화면에는 남자가 없는 실내 풍경이 그대로 반복된다. 이 그림이 제기하는 문제는 많다. 그가 이런 그림을 그린 것은 1920년 생계를 위해 상업 미술에 손을 대면서 신문, 잡지, 광고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고 이 그림은 어느 잡지에 게제된 가정용 스토브 광고를 그대로 모사한 것으로 다만 광고의 한 구석에 있던 남자를 지워버리고 광고를 그대로 세 번 반복한 점이다.12) 광고 패러디 혹은 광고 복사는 그 후 앤디 워홀에 의해 새로운 미학으로 발전하고 나는 워홀에 대해 별도의 글을 쓸 예정이지만 내가 강조하는 것은 이런 그림의 사회적 역사적 문맥보다는 철학적 미학적 문맥이다. 말하자면 광고와 회화의 관계, 일상적 공간과 미적 공간의 관계이다. 아방가르드가 강조한 것은 이런 2항 대립의 해체이고 그것은 미적 공간의 자율성이 함축하는 당대 부르주아 의식에 대한 비판과 관계된다. 나는 다른 글에서 이 문제를 해명한 바 있다.13)

 그런 점에서 이 그림이 강조하는 것은 회화와 광고, 미적 공간과 일상적 공간의 경계가 해체된다는 점이고 이런 해체는 주관과 객관,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해체함으로써 임제식으로 말하면 ‘ 사람도 경게도 모두 빼앗는 단계’를 암시한다. 그렇지 않은가? 이 그림은 그림인가? 광고인가?  좌상의 화면은 광고를 그대로 복사하고 이런 복사는 광고(객체)에 대한 미적 거리(주체의 의식)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다. 복사는 그대로 베끼는 행위이고 이런 행위는 주체 소멸과 통하고 주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객체도 사라진다. 더구나 이 그림의 경우 객체는 광고이고 광고 이미지는 현실적인 객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그림에서 우리가 읽는 것은 객체가 소멸한 이미지의 세계(광고)와 주체의 관계이고 광고를 그대로 옮긴다는 점에서 주체는 소멸한다. 소멸하는가? 따지고 보면 소멸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무슨 말놀이를 하는게 아니다. 사람도 경계도 모두 빼앗는 것은 사람과 경계, 주체와 객체가 不二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편 나머지 세 화면에선 남자의 이미지가 사라진다. 광고의 이런 변형이 암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남자가 있는 화면은 광고를 그대로 옮긴다는 점에서 주체/객체 (이미지)의 경계 해체가 나타나고 광고속의 남자를 지우는 행위는 마그리트라는 주체의 의식이 개입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좌상의 화면과 나머지 세 화면은 대조적이고 이런 대조, 일종의 병치를 통해 주체 부재/ 주체 존재의 경계는 해체된다. 병치는 이질적인 두 사물을 단순히  나란히 놓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병치에 의해 두 사물이 동일시되는 이른바 병치은유로 발전한다.14)

 그러므로 주체 부재/ 주체 존재의 관계는 대립이 아니라 동일성의 관계에 있고 이 동일성이 문제이다. 두 항목이 같다는 것인가 다르다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같은 것도 아니고(불일) 같지 않은 것도 아니다(불이) 한편 세 화면은 같은 화면의 반복이고 이런 반복은 화면의 균형 상 마그리트가 자신의 의도, 의식, 이른바 주체성을 강조한 것 같지만 나는 그렇게 읽지 않는다. 반복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반복은 시간의 차원에서 전개되고 반복에 의해 어떤 관념, 이미지, 사물이 강조된다. 그러나 이 그림이 강조하는 것은 반복의 시간성이 아니라 공간성이다. 시간적 반복이 지향하는 것이 강조라면 공간적 반복, 병치가 지향하는 것은 이런 강조의 소멸이다. 이 그림의 경우 세 화면이 차례로 반복되는 게 아니라 세 화면이 동시에 같은 캔버스에 놓이고 이런 병치, 배열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이상한 충격, 환상 같은 풍경, 꿈같은 풍경, 유령같은 풍경이다. 남자가 없는 이 세 화면은 꿈의 풍경같다. 한 개의 화면만 있다면 이런 미적 충격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 그림에 나오는 남자에서 병치의 논리에 의하면 그림 속에 존재하며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세 화면의 병치, 혹은 좌상의 화면과 세 화면의 병치가 주는 충격은 물론 캔버스의 분할을 동기로 한다. 이런 분할은 캔버스에 대한 전통적인 인습을 부정한다. 부정하는가? 말하자면 이 그림의 경우 캔버스는 사라지는가? 그렇지 않다. 이런 분할에 의해 캔버스는 존재하고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캔버스는 이렇게 분할되는 게 아니라 유기적 미적 통일성을 소유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통일성이 해체된다. 네 개의 화면은 네 개의 캔버스 같지 않은가? 앞에서 나는 세 화면의 병치 혹은 네 화면의 병치가 꿈과 같은 느낌을 준다고 했거니와 ‘개의치 않고 잠자는 남자’ 혹은 ‘무모하게 자는 남자’야 말로 꿈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낳는다.

 이 그림 역시 두 개의 화면으로 분할된다. 상부에는 한 남자가 관처럼 생긴 커다란 나무 상자에 누워 이불을 덮고 잔다. 이 남자는 무모하게, 그러니까 어떤 수단도 방법도 없이 그 무엇에도 개의치 않고 자는 남자이다. 無謀하게 자는 남자는 無毛의 남자이고 無帽의 남자이다. 이 남자는 대머리이고 따라서 無毛의 남자이고 이 남자는 모자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無帽의 남자이다. 신문 보는 남자는 대머리가 아니고 대체로 마그리트의 그림에 나오는 모자, 그것도 중절모를 쓰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의 경우 모자는 공포, 불안으로부터의 방어를 상징하고 이런 방어의 한 수단이 자신을 숨기고 익명으로 사는 것, 그러므로 모자를 쓴 남자는 익명성, 곧 자아나 주체를 은폐하고 부정하는 이미지이다. 모자를 쓴 남자는 대체로 손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 「마그리트」 , 1965) 동일한 남자가 한 이미지는 앞을 보고 한 이미지는 옆을 보거나(「작가의 이중초상화」 1965)뒤를 보이고 서 있다. (「모험정신」, 1960)한편 모자를 쓰지 않는 남자는 신문을 보거나 곧장 소멸한다.( 「신문보는 남자」 1928)그렇다면 대마리는? 대머리는 모자를 쓴 남자 이후의 단계, 곧 사라진 남자이고 소멸한 남자이고 그가 사라지는 것은 불안, 공포 때문이다.

 이 그림에 나오는 대머리 남자가 관 속에 누운 것이 이런 사정을 암시한다. 사라진 남자의 이미지? 사라진 남자가 여기 존재한다고? 그렇다면 이 남자는 죽었는가? 살았는가? 혹은 죽었는가? 자고 있는가? 내가 어떻게 알랴? 다만 그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그가 관 속에 누워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림 하부에 나오는 이미지, 사물들과의 관계이다. 그림 하부를 전제로 하면 이 남자는 죽은 게 아니라 꿈을 꾸고 따라서 현실에 개의치 않고 어떤 수단도 없이 무모하게 잠을 잔다. 그러나 그는 침대가 아니라 관 속에서 잔다. 그러므로 그는 자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다. 신라 불교의 고승 원효는 의상과 함께 두 번째 入唐을 시도하던 길에 무덤에서 밤을 새우다 해골 바가지에 고인 썩은 물을 마시고 아침에 되어 이 사실을 알고 소리친다. 마음이 없으므로 땅굴과 무덤이 둘이 아니고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는 진리, 이 진리를 깨닫고 그는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도중에 돌아온다. 갑자기 왜 원효가 떠오르는가?

 마그리트의 이 그림을 보고 갑자기 원효가 떠오르는 것은 단순한 연상이 아니다. 관 속에 누워있는 남자는 자신이 관 속에 누워 있다는 것을 모른다. 어떻게 그가 알겠는가? 그는 마그리트가 그린 이미지이고 말하자면 헛것이고 환상이다. 그러나 깨어나면 그는 자신이 관 속에 누워잤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잠이 든다는 것은 잔다는 것을 모른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잠을 자지만 잠을 잔다는 것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잠을 잘 때 우리는 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다 과연 누가 잠을 자는가? 잠 속에서 나, 자아 주체, 의식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이 남자는 자는 것도 아니고 자지 않는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다. 땅굴과 무덤이 둘이 아니듯이 침대와 관, 삶과 죽음도 둘이 아니다.

 한편 이 남자는 꿈을 꾸고 그 꿈의 내용이 하부의 이미지들로 제시된다. 그림 하부에는 녹색 관이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고 상부에는 남자가 갈색 이불 혹은 천을 덮고 잔다. 상부에는 남자가 관 속에 누워 자고 있지만 그가 불안한 느낌을 주는 것은 그가 그림 상부에, 하늘 위에 누워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관이든 침대든 우리는 이렇게 하늘, 그것도 어두운 하늘 위에 떠서 자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남자는 자면서도 계속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고 그런 꿈을 꾸고 그 꿈의 이미지들이 하부에 나오는 모자, 거울, 나비 넥타이, 새, 사과, 양초이다. 이 사물들은 고른 형태가 아닌 녹색 관에 새겨진 것 같고 따라서 이 사물들은 캔버스가 아니라 무덤 벽에 새겨진 것 같다. 남자는 무덤 위 상부에 누워 자고 하부는 무덤 벽에 해당하고 그러나 이 벽은 벽이면서 벽이 아니다. 왜냐하면 벽은 위에는 어두운 하늘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가? 먼저 모자와 사과, 그의 경우 모자와 사과의 상징적 의미는 비슷하다. 대체로 모자를 쓴 남자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사과로 얼굴을 가리고 ( 「대전투」, 1964)혹은 모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사과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관념」) 모자는 현실의 공포로부터 자신을 은폐하고 방어하는 것을 상징한다. 이런 모자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는 사과 역시 비슷하지만 사과는 이 때 ‘관념’이고 이제 그를 방어하는 것은 관념이다. 사과는 사과가 아니라 관념을 상징하고 이런 문제는 별도의 글을 요구한다. 거울은 두 말 할 필요 없이 자아의 정체성 찾기를 상징한다. 새와 양초는 다 같이 초월, 상승을 상징하고 따라서 영혼의 세계를 상징하고 나비 넥타이 역시 크게 보면 영혼의 세계를 상징한다. 왜냐하면 나비는 애벌레에서 날개 달린 나비로 변신하고 이런 변신이 초월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결국 관 속에 자면서 이 남자가 꾸는 꿈, 그러니까 무의식적 소망의 내용은 자아찾기, 자아 은페, 초월이다.

 그러나 이런 무의식 역시 그림 상부에 나오는 남자가 잔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것 이고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자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라는 不二 의 시각에서 보면 복잡한 의미를 생산한다. 나는 지금까지 마그리트 그림이 보여주는 분할의 미적 특성을 선적 사유로 해석했다. 이런 사유, 공 불이, 공, 중도의 사유는 분할과 대립되는 응축, 혹은 합성의 기법에도 나타난다. 예컨대 (「정상의 부름」)에서는 독수리와 바위가 하나로 응축된 독수리 바위가 나타난다. 이 바위는 독수리인가? 바위인가? 이런 이미지들은 「설명」에서는 당근과 병의 합성으로 「공동발명」에서는 여인의 다리를 지닌 물고기로, 「자연의 은혜」에서는 새와 나뭇잎의 합성으로, 「붉은 모델」에서는 인간의 발과 구두의 합성으로 나타난다, 물론 응축과 합성은 엄격하게 말하면 다른 개념이다. 응축은 프로이트가 꿈의 작업으로 해석한 것이고 합성은 두 요소를 화학적으로 결합해 새로운 사물을 생산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응축은 정신분석의 시각에서 읽을 수 있고 살바도르 달리는 편집증적 비판의 방법으로 발전시켰다. 브래들리는 마그리트의 그림이 보여주는 응축의 기법을 편집증적 비판, 혹은 시각의 창조적 오독, 혹은 이중 이미지로 읽고15) 나 역시 다른 글에서 마그리트의 그림을 정신분석의 방법으로 해석한 바 있다.16)

 그러나 선불교의 시각으로 접근하면 응축이 분할이고 분할이 응축이다. 한 마리 말의 몸이 분할된 이미지나 인간의 발과 구두가 합성된 이미지나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시각에 대한 회의와 부정이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들에 대한 선적 인식, 곧 존재/부재, 유기체/파편, 독수리/바위, 발/구두의 경계 해체이고 이런 해체가 선이 강조하는 불이, 중도, 공과 통한다.

 

 

 

 


 

1) 수지 개블릭, 르네 마그리트, 전수원 옮김, 시공사 2000, 18-19쪽

2) 이승훈, 마그리트는 「피로를 모른다」, 『이승훈의 현대회화 읽기』천년의 시작, 2005

3) C, Soller, The Symbolic Order , Reading Seminars 1,2 ed, R Feldstein, State Univ, of New York Press, 1966 pp 43-45

4) 용수보살저, 청목 석, 구마라습 한역, 깅성철 역주, 경서원, 1996, 83-84쪽

5) 비트겐규타인, 논리철학논고, 이영철 옮김, 천지, 2000, 119쪽

6) 이승훈, 「선과 마르셀 뒤샹 1」, 현대시, 2005,10

7) 파멜라 프리츠키, 「마그리트의 생애와 작품 세계」, 마그리트, 서문당, 107 재인용

8) 수지 개블릭, 위의 책 91쪽 

9) 이기영, 『임제록 강의』상권, 한국불교연구원, 1999, 103쪽

10) 이기영, 『임제록 강의』 상권, 한국불교연구원, 1999, 103쪽-104쪽 참고

11) 마르셀 뒤샹의 언어 인식에 대해서는 이승훈, 「선과 마르셀 뒤샹1」, 앞의 논문 참고바람

12) 마그리트, 박서보, 서문당, 1982, 20쪽

13) 이승훈, 선과 다다이즘, 현대시, 2005, 12

14) 병치 은유에 대한 좀 더 자세한 것은 이승훈, 『시론』, 태학사, 2005 237- 241쪽 참고바람.

15) 피오나 브래들리, 『초현실주의』, 김금미 옮김, 열화당, 2003, 38-41쪽

16) 이승훈, 「마그리트는 피로를 모른다」, 『이승훈의 현대회화 읽기』, 천년의 시작,2005

 

 

 

 

 

 

 

 

 

 

 

 

 

 

출처 / 세상과 세상사이 -나호열 시인의 철학 강의실 http://blog.daum.net/prhy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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