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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철학 강의

합침의 불교

by 丹野 2010. 5. 16.

합침의 불교 - 원효와 경주 남산
원효는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승려의 몸으로 요석공주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았으며, 탈을 쓰고 항아리를 두드리며 춤추고 노래 부르면서 불교를 전파하였다. 술자리도 마다하지 않았고 걸인들과도 어울렸으며, 밥 먹다가 느닷없이 밥상을 걷어차고 뛰어나가 설법을 하기도 하였다.

한국 불교의 원류가 된 원효

40대 이상 연배에게 경주는 수학여행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나 또한 경주를 처음 간 것이 중학교 수학여행이었으니 40년이 넘은 세월이 되었다. 하지만 80년 여름 윤경렬 선생님을 만나 함께 경주 남산을 오른 뒤 경주는 내게 새로운 눈을 주었고, 이제는 최부자집의 아름다운 이야기와 함께 윤선생님을 떠올리는 곳이 되었다. 윤선생님은 흙으로 빚어 만든 토우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하여 일생 우리 혼을 보존하기 위해 애쓰신 분이다. 해방 이후부터 경주에 터를 잡고 경주 문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린이부터 가르쳐야 한다고 어린이 박물관 학교를 세우셨으며, 경주 남산을 자기 집처럼 드나드시며 경주 문화 연구와 보존을 위해 애쓰던 ‘마지막 신라인’이셨다.

경주를 가 본 사람은 곳곳이 절이요 탑임을 알 것이다. 참으로 신라는 불교의 나라였으며 한국불교의 원류가 된 곳이다. 그렇다면 신라 불교의 중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원효(元曉 : 617-686)의 사상이다. 원효는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승려의 몸으로 요석공주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았으며, 탈을 쓰고 항아리를 두드리며 춤추고 노래 부르면서 불교를 전파하였다.
술자리도 마다하지 않았고 걸인들과도 어울렸으며, 밥 먹다가 느닷없이 밥상을 걷어차고 뛰어나가 설법을 하기도 하였다.
그의 이런 기행 때문이었을까? 원효는 당시 궁궐에서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앉아 고승을 모셔놓고 설법을 듣던 백고좌강회에 한 번도 초대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역사에 남은 것은 불청객 원효이며 그의 사상은 한국불교의 원형이 되었다.

논쟁의 조화원리를 담은 화쟁(和諍)국사, 원효의 합침의 불교

일반적으로 한국불교를 ‘통(通)불교’, ‘원융(圓融)불교’, ‘총화(總和)불교’라고 부르는데, 이를 다른 말로 바꾼다면 ‘합침의 불교’이다. ‘통불교’는 막힘없이 모든 것에 통한다는 뜻이고, ‘원융불교’나 ‘총화불교’는 모나지 않아서 모든 것과 두루 어울린다는 뜻이며, ‘합침의 불교’는 서로 다른 주장들을 한 가지도 부정하거나 거부함 없이 다 끌어안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원효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원효는 그 이전까지 왕실 중심으로 발전해 온 불교를 민중을 위한 불교로 바꾸어 놓았다. 이 점은 아무리 뛰어난 진골도 성골이 될 수 없고 아무리 뛰어난 6두품도 진골이 될 수 없었던 신라의 골품제 하에서 6두품으로 태어난 원효 자신의 신분과도 연관이 있으리라 짐작된다.

원효가 완성한 합침의 불교에 담긴 기본 논리는 화쟁(和諍)이었다. 그래서 고려 때 대각국사 의천이 왕실에 건의하여 원효에게 내린 칭호도 화쟁국사였다. 화쟁이란 말다툼, 즉 논쟁을 조화시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원효가 무슨 논쟁을 어떤 논리로 조화시킨 것일까? 원효가 살던 신라에는 교종만 들어와 있었다. 교종은 석가모니와 그의 어록인 불경을 포함하여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는 선종과 달리 부처의 가르침에 충실 하려는 종파였다. 당시 중국의 불교는 여러 종파로 갈라져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을 놓고 논쟁을 벌이던 부파불교 시기였다.
본래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공식적인 기록은 기원 후 67년이다. 하지만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머물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사상이 가장 훌륭하다는 우월의식 때문에 변방에서 들어온 불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중국 지식인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이민족에게 북쪽 땅을 빼앗겨 중국인들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졌던 위진시기 이후의 일이다. 하지만 중국인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때에는 이미 거의 모든 불교 경전이 중국에 들어와 있었다. 사실 경전들 모두가 석가모니의 말씀을 모아 놓은 것이지만 석가모니가 살아 계실 때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이었는가에 따라 내용이 달랐기 때문에 이 경전과 저 경전의 말씀이 서로 모순처럼 보이기도 했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어떤 경전이 부처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을 담고 있는지를 따져서 그 경전을 기준으로 다른 경전을 해석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화엄경을 중심에 놓은 사람들은 화엄종을 만들고 묘법연화경을 중심으로 보는 사람들은 법화종을 만드는 방식으로 다양한 종파들이 생겨났으며, 그들 모두가 부처님 말씀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들고 나와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바로 이런 논쟁들을 하나로 합쳐 들인 사람이 원효였다.

나도 옳고 너도 옳고 모두가 옳다

원효의 화쟁 철학은 화엄철학의 바탕 위에 서 있으며, 화엄의 기본 논리는 하나가 곧 전부요 전부가 곧 하나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늘을 예로 들어 보자. 어떤 날 같은 시간 서울에서 보는 하늘은 비가 퍼붓고 있지만 인천에서 보는 하늘은 맑게 갠 모습일 수도 있다. 그 뿐 아니라 대전 하늘에서는 우박이 퍼붓고 뉴욕 하늘에서는 눈이 올 수도 있으며, 유럽 하늘은 별이 총총한 밤하늘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서울 하늘 모습이 진짜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부산 하늘 모습이 진짜라고 하면서, 내가 맞니 네가 틀렸니 하고 싸운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 사실 각 지역에서 보는 하늘 모습은 다 다르지만 모두 같은 하늘일 뿐이다. 그러니까 나누어 보면 다 다른 하늘이지만 합쳐 보면 다 같은 하늘인 것이다. 사람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해석하면서 다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석가모니가 세상에 살아 계실 때에는 의문이 생기면 석가모니에게 직접 물어서 답을 얻었다. 그러나 석가모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석가모니가 남긴 말에서 답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각자 나름대로 경전을 해석하면서 자기 해석은 옳고 다른 사람의 해석은 옳지 않다고 하거나 또는 이 사람의 해석은 옳고 저 사람의 해석은 틀리다고 함으로써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무수히 많은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원효는 쪽빛과 남색이 하나이고 물과 얼음이 근본적으로 같듯이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주장들도 모두 부처님의 말씀을 해석한 것이므로 다 맞는 주장이고 따라서 합칠 수 있다고 보았다. 해석하면 무수히 많은 주장이 나오지만 되돌리면 한 말씀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같은 원효의 입장은 해인사에 일부분만 남아 있는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 잘 나타나 있으며, ‘십문화쟁론’이란 온갖 학파의 논쟁을 화합시킨다는 뜻이다.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원효는 「열반경종요」,「화엄경종요」, 「법화경종요」처럼 경전 이름에 ‘종요(宗要)’라는 말을 붙인 책을 17권이나 지었다. ‘종’은 연다는 뜻으로 여러 가지로 나뉘는 것을 말하며, ‘요’는 하나로 합쳐 들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나누어 보든 합쳐 보든 참 모습은 달라질 것 없다는 것이 원효의 입장이며 그런 관점에서 각 경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하나로 묶어 들였다.
그렇다면 남의 주장들을 합친 것이 자신의 주장이 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의 주장도 부정하지 않고 다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주장은 없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원효의 결론은 어떤 주장과도 같지 않았다. 따라서 어떤 주장도 틀렸다고 부정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의 주장 모두를 부정한 것이 되며,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았지만 자신의 주장을 한 셈이다. 이런 논리가 어떻게 가능한지 서해바다를 가지고 보자. 서해바다로는 황허강, 양자강, 압록강, 한강 같은 온갖 강물이 흘러든다. 하지만 서해바다는 황허강이든 한강이든 더럽다고 못 들어오게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서해바다가 한강이나 황허강이 되는 것은 아니며, 온갖 강물이 모여 이루어진 서해바다는 이미 어떤 특정한 강이 아니라 서해바다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남의 주장을 부정하지 않았으되 결국 부정한 것이 되며,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았으되 결국 자신의 주장을 만든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원효의 합침의 불교이다.

이러한 논리를 통해 원효는 있다와 없다, 다르다와 같다, 그렇다와 아니다의 구분 의식을 넘어설 수 있었다. 원효는 자신의 논리가 만 가지 흐름을 한 맛으로 돌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비빔밥을 가지고 예를 들어 보자. 비빔밥은 온갖 나물과 육류, 계란, 고추장, 참기름, 깨소금을 합쳐 버무리는 음식이다. 숟가락으로 한참 비빈 뒤 맛을 분석하는 기계로 실험해 보니 짠 맛 20%, 매운 맛 30%, 단 맛 30%, 신 맛 15%, 쓴 맛 5%였다고 하자. 하지만 우리는 한 숟가락 듬뿍 떠서 입에 넣은 다음 ‘아, 이 비빔밥은 20% 짜고, 30% 맵고, 5% 쓰고……’ 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맛있는데’, 아니면 ‘무슨 맛이 이래’라고 할 뿐이다. 이처럼 나누어서 말하면 여러 맛이지만 합치면 한 맛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비빔밥은 짜다고 해도 맞고 달다고 해도 맞으며 맵다고 해도 맞는다. 그리고 맛있다고 해도 맞고 맛없다고 해도 맞는다.

경주 남산에서 보는 합침의 불교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신라는 불교의 나라였고 그 중심은 경주였다. 그리고 합침의 불교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합치는 원동력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한국불교의 원형이 되었다. 경주 남산에 가면 사진과 같은 불상들이 절벽 곳곳에 새겨져 있다. 이 그림을 잘 보면 바위에 부처를 새겼으되 윤곽이 분명하지 않다. 이런 부처는 남산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윤곽이 불분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각을 하면서 윤곽을 분명하게 하면 뒤는 바위이고 새겨진 것은 부처이지만 윤곽이 불분명함으로 바위 전체가 부처가 된다.

이번에는 남산에서 만난 탑을 보자. 사진에 보이는 탑을 보고 탑의 어디가 이상한지를 찾아보자. 탑의 상륜부에 꼭지가 없는 것은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떨어져 나간 것이니 이상할 것이 없다. 문제는 받침돌인 지대석이 없다는 점이다. 지대석 대신 바위를 깎고 그 위에 탑을 세웠으니 바위가 지대석이며 더 크게 본다면 산 전체가 지대석이다. 그런 점에서 산 전체가 탑인 것이다.



이번에는 안압지 사진을 보자. 안압지를 가 본 사람은 그 규모가 크지 않음을 잘 알 것이다. 나 또한 처음 안압지를 보고 신라 왕권이 이렇게 작은 연못 밖에 못 만들 정도로 약했나 하는 실망감을 느꼈다. 그런데 이 안압지는 작지만 구불구불 돌아 들어간 곳이 많아서 연못가에 서면 어떤 위치에서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마치 동해바다 물이 이어져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한다.

바위와 하나 된 부처, 산과 하나 된 탑, 바다와 하나 된 연못. 이러한 구조는 우연이 아니다. 바로 합침의 불교를 그 속에 담은 구조인 것이다. 원효가 합침의 불교를 가지고 깨우치려 했던 대상은 신라인들이었을까 아니면 고구려, 백제, 신라로 나뉘어 살던 우리 겨레 모두였을까? 어떠한 구분의식도 넘어서려던 원효가 사람을 나누었을 까닭이 없다. 그러니 아마도 원효의 머릿속에는 모든 인류가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신라를 벗어나보지 못한 원효였지만 그 속에 온 세계가 있었으며 경주 한 귀퉁이의 남산 또한 그 안에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담고 있는 것이다.
 
김교빈의 철학 에세이 < KB레인보우 인문학>에서 퍼옴
 
출처/세상과 세상사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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