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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철학 강의

이데아론

by 丹野 2009. 2. 4.

 

 

출처-세상과 세상사이

 

 

                                                               이데아론

 


『국가론』의 중간쯤에 와서, 그러니까 5권 후반부터 7권 끝에까지, 정치문제에서는 떠나서 주로 철학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문제는 좀 당돌하게 도입되는데, 아래와 같은 이야기로 시작된다.


 철학자들이 임금이 되거나, 아니면 세상의 임금들이나 군주들이 철학의 정신과 능력을 갖게 되고, 정치적인 위대성과 자혜가 하나로 융화되어 지혜를 버리고 정권을 쥐려는 속된 본성이 물러나지 않고서는 나라들은 결코 그 많은 악에서 벗어날 길이 없고, 인류가 언제까지나 악에 젖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우리의 국가는 삶의 가능성을 지니게 될 것이며, 번성케 될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철학자는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이고, 또 철학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다음의 서술은 『국가론』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대목으로, 또 아마 제일 영향이 큰 부분일 것이다. 특히 군데군데 문학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 내용에 대해서는 공감을 느끼지 못하는 독자(나는 그렇다)들도 감동을 받게 될 것이다.

  

 플라톤의 철학은 實在와 現象을 구별하는 기반 위에 서 있다. 이 양자는 파르메니데스가 처음으로 구별하였다.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이 논의에는 파르메니데스 학파의 用語와 이야기가 언제나 되풀이되어 있다.

  그러나 플라톤에게는 파르메니데스의 색채보다 피타고라스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종교적인 어조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즉 거기에는 수학이나 음악에 관한 것이 많으며, 이것은 피타고라스 학도들에게서 직접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파르메니데스의 논리와 피타고라스의 내재적인 것 otherworldliness과 올페우스적인 것들이 합쳐서, 理知와 종교적인 감정을 고루 충족시키는 하나의 학설이 생긴 것이다.

  

 이리하여 매우 강력한 종합과 여러 가지 변형으로 헤겔에 이르기까지 모든 위대한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단 철학자들만이 플라톤의 영향을 빋은 것은 아니다. 청교도들puritans이 어찌하여 카톨릭의 음악이나 그림, 그밖에 화려한 儀式들을 반대하였는지, 우리는 그 대답을 『국가론』10권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학교에서 아동들이 배워야 하는 이유는 7권에서 설명이 되어 있다.

  

 우리가 문제삼는 것은 철학자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다. 우선 語源에서 대답을 얻을 수 있다. 즉 철학자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것은 호기심이 많은 사람을,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사용할 수 있는 愛知者는 아니다. 비속한 호기심은 철학자라를 만들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의는 수정되어야 한다. 철학자란 「진리의 환상 vision」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 환상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사람, 즉 새로운 비극을 보고, 그림을 감상하고 음악을 듣는 것을  즐기는 사림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이런 사람은 결코 철학자는 아니다. 왜냐하면, 철학자는 미 자체 beauty in itself를 사랑하는데, 그는 아름다운 것 beautiful things을 사랑할 뿐이기 때문이다. 絶對美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을 가리켜 깨어 있는 자라고 한다면, 단지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데 불과한 자는 꿈을 꾸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전자가 지식을 갖고 있다면, 후자는 단지 일반의견 (opinion - 철학에서는 특히 億見이라고 번역함)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럼 지식과 의견은 어떻게 다른가? 지식을 소유한 사람은 어떤 것에 관한 지식을 갖게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어떤 존재자에 대한 지식일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이론은 파르메니데스를 연상케 한다) 그러므로 지식은 허위일 수 없다. 지식이 허위라는 것은 논리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견은 허위일 수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의견은 아무것도 아닌 것 what is not에 대한 것 일수는 없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것 what is에 대한 것도 아니다. 이 경우에는 지식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견은 어떤 것에 관한 것이기도 하고,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해결을 볼 수 있다. 즉 개개의 사물들은 언제나 상반되는 성질을 내포하고 있다. 가령 아름다운 것은 어떤 면에서는 흉하고, 義로운 것은 어떤 면에서는 불의하다. 플라톤에 의하면 개개의 感性的인 대상은 모순성을 지니게 마련이며. 따라서 존재 Being와 비존재 Not- being 중간에 처하고, 이것은 지식의 대상이 되기보다 의견Opinion의 대상으로서 더욱 적합하다. 「그러나 절대적이고,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을 보는 사람은 의견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리하여 우리는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즉 의견은 감각에 나타나는 세계에 대한 것이며, 지식은 감각을 넘어선 영원의 세계에 대한 것이요, 美 자체에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논의는 이러하다. 즉 한 가지 사물이 동시에 아름답기도 하고 또 아름답지 못하기도 하며, 의롭기도 하고 의롭지 못하기도 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런데 특수한 사물들은 그런 모순되는 성질을 아울러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특수한 사물들은 實在가 아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했다.

 

 「우리는 동일한 강물에 들어가며, 동시에 들어가지 않는다. 우리는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이러한 주장과 파르메니데스를 결부시켜 생각해 볼 때, 우리는 플라톤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플라톤의 학설 중에, 그 이전의 철학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이데아  또는 形相Form에 대한 것이다. 이 학설은 일부는 논리적이고, 또 한편으로는 形而上學的이다.

  논리적인 부분은 일반 낱말의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이것은 고양이다」하는 식으로 말 할 수 있는 많은 동물들이 있다. 이 경우에 이 「고양이」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분명히 개개의 고양이와는 다른 것을 의미한다. 어떤 한 마리의 동물이 고양이로 불리는 것은, 모든 고양이에게 공통된 어떤 일반적인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은 고양이와 같은 그런 일반적인 낱말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또 그런 낱말들은 확실히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고양이라는 말이 어떤 뜻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이 고양이나 저 고양이가 아닌 무엇, 즉 어떤 보편적인 고양이universal cattyness를 뜻할 것이다. 이 보편적인 어떤 것은 특수한 고양이가 생겼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죽었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공간이나 시간의 어느 부분도 차지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하다. 이것이 그 학설의 논리적인 부분이다.  이 주장은 구경 옳든 그르든 간에 강력하게 전개되며, 그 학설의 형이상학적인 면과는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 

  

 플라톤의 학설의 형이상학적인 부분에 의하면, 고양이라는 말은 어떤 이상적인 고양이를 뜻한다. 그리고 이(이상적인) 고양이는 신이 창조한 유일한 것이다. 개개의 고양이들은 이 고양이의 성질을 다소 불완전하게 分有하며, 고양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양이가 여러 마리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오지기 이 불완전성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이 (이상적인) 고양이는 實在요, 개개의 고양이들은 오직 現象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론』마지막 卷에 나오는 화가들에 대한 공박의 서론에서, 이데아 곧 形相에 대하여 분명하게 해명하고 있다. 플라톤은 이렇게 설명한다. 많은 개체들이 공통된 명칭을 가질 때, 그것들은 언제나 하나의 이데아, 즉 형상을 갖는다. 가령 침대는 무수히 많지만 침대의 이데아 즉 그 형상은 오직 하나이다. 이것은 하나의 침대가 거울에 비칠 경우에, 그 침대는 거울에서 그렇게 비칠 뿐 실재가 아니듯이, 여러 가지 개개의 침대는 실재가 아니며, 오직 그 이데아의 模寫에 의해 만들어졌을 따름이다. 그 이데아만이 유일한 참된 실재의 침대이며, 신으로부터 창조된 것이다. 이 유일한 침대에 대한 것은 지식이 될 수 있으나, 목수가 만든 개개의 침대에 대해서는 오직 의견 Opinion이 있을 뿐이다.

  이리하여 철학자는 오직 하나의 이상적인 침대에만 흥미를 갖고 있을 뿐이며, 감각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침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즉 그는 이 하루하루 영위되는 세속의 일에 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이며, 모든 시간 및 존재자를 관망하는 자가 어떻게 인간 생활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철학자가 될 수 있는 청년은 친구들 사이에서 의롭고 아름답고 배우기를 즐기며, 기억을 잘 하고, 선천적으로 조화된 정신을 갖는 우수한 자라야 한다. 이런 젊은이는 철학자가 될 수 있도록 교육되어야 하며, 또한 통치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항의를 제기한다. 자기는 소크라테스와 토론을 시작하면, 언제나 차츰차츰 잘못 끌려가 나중에는 자기가 전에 가졌던 모든 생각이 뒤집어지는 것 같다고 한다. 아닌게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무엇을 말하든지, 누구나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철학에 집념하는 사람들은 이상한 괴물- 악한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이 되어버리는 것은 사실이다. 가장 우수한 사람도 철학할 때에는 쓸모 없는 인간이 되어버린다.

  소크라테스는 지금 세상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지만. 이에 대하여 철학자들이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비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명한 사회라면 철학자가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賢人들은 어리석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지혜롭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러한 딜렘마에 봉착하여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의 이상국가를 다스리는 방법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통치자들이 철학자가 되는 것이다. 첫째 방법은 시작하기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이미 철학과 거리가 먼 도시국가에서는 철학자의 인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군주가 되도록 태어난 사람은 철학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도 충분하다」

 

 이제 한 도시국가를 자기 뜻에 따르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자. 그는 세상에서 의구심을 품고 대하는 그 이상적인 정치 체제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시라쿠사의 폭군, 젊은 디오니시우스가 그런 군주가 되어 줄 것을 바라고 있었으나, 이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어지고 말았다.

  

 

 

 

 

 

 

 

 

 

 국가론 6권과 7권에서 플라톤은 두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다. 첫째는 철학이란 무엇이냐. 둘째는 적당한 기질을 타고난 어린 남녀를 교육시켜 어떻게 철학자가 되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철학은 플라톤에 있어서 일종의 환상, 즉 진리의 환상Vision of truth이다. 이것은 순전히 知的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혜일뿐더러 지혜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다. 스피노자의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이 이와 유사하다. 이것은 사고와 감정의 일치이다.

  

 창조적인 일 - 무슨 종류이건-을 해본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어떤 정신상태를 체험할 것이다. 즉 오래 동안 노력을 한 연후에 진리의 아름다움이 갑자기 영광스럽게 나타나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 진리가 매우 사소한 일에 관여해 있건, 혹은 온 우주에 관여해 있건 간에 그 체험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순간에 그 체험은 무척 확신이 따르는 것으로, 나중에 의혹이 일어나더라도 그 순간만은 분명한 확실성을 갖게 된다.

  

 그것이 예술에 있어서나, 과학, 또는 문학에 있어서나, 혹은 철학에 있어서나 간에 가장 뛰어난 창조적인 작품은 다 그런 순간적인 결과가 아닌가 한다. 물론 남들에게도 나에게 일어나는 것 같이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나한테는, 내가 어떤 제목을 놓고 책을 쓸려고 하면, 나는 우선 그 세부에 몰두하여 그 문제에 관련된 모든 것을 다 분명히 알게되면, 나중에 어느 날 운수가 트여- 즉 그 모든 부분들을 망라한 - 전체가 머리에 떠오른다. 그 후에 내가 목격한 것을 써 나갈 수 있다.

  

 이것을 적절한 비유로 말하면, 우선 안개 속에서 산 속의 모든 길 산, 등성이, 산골짜기 등에 대해 잘 알게 될 때까지 걸어다니고 나서, 산에서 멀리 떨어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밝은 햇빛 아래 그 산 전체를 보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나는 이런 경험이 훌륭한 독창적인 작품을 쓰는데 필요한 것으로 믿고 있다. 실제로 이 체험에 따르는 주관적인 확실성이란 致命的인 과오를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윌리엄. 제임스 William James는 催笑 개스에 마취된 사람에 대하여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그 사람이 그 가스에 마취되어 왔을 때에는, 언제나 우주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깨어나면, 그 비밀을 모조리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무척 애서 그 환상이 사라지기 전에 그 비밀을 기록하곤 하였다. 이윽고 그는 그 환상에서 깨어나자마자 자기가 무엇을 썼는지 알려고 뛰어가는 것이었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석유냄새가 사방에 가득 차 있다」

 갑자기 무슨 洞察이라도 한 것으로 알았는데, 이처럼 허무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은 그 신성한 도취에서 깨어났을 때 냉정히 재검토해야 한다.

  

 플라톤은 『국가론』을 쓸 때, 확신을 가졌던 자기의 환상 vision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비유를 들어, 그 환상의 내용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데아 세계의 필연성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여러 가지 예비적인 토론을 벌인 연후에 비유를 들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선 睿智界 The world of the intellect와 感官界 The world of senses를 구별한다. 그리고 지능 intellect과 지각 sense perception을 다시 각각 두 가지로 구분한다. 지금 우리에겐 지각의 구분은 필요 없다. 지능은 이성 Reason과 悟性 understanding 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이 둘 중에서 이성이 더욱 높은 위치를 차지하여, 순수한 이 테마와 관련되며, 그 방법은 辨證法的이다.

  오성은 수학에서 사용되는 종류의 지능이며, 증명될 수 없는 假定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성보다 못하다.

  가령 幾何에서는 「직선, BC로 된 삼각형」이라고 말하는데, 이 경우 BC가 정말 직선인가의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완전한 직선을 그릴 수  없으므로(아무리 육안으로는 직선으로 보여도 엄격히 따지면 반드시 다소의 결함이 있게 마련이다) 분명히 그것은 직선으로 된 삼각형이 아니지만, 그런 것을 문제삼아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수학에서는 무엇이 어떻다고 단언하지 않고 단지 무엇이 어떠하면, 어떻게 될 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인간의 감각세계에는 직선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학이 假言的인 진리 이상의 무엇을 지녀야 한다면, 그런 초감각적인 직선의 존재를 超感覺界애서 찾아야 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그러나 이것은 悟性이 할 일이 아니라 이성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성이 하늘에는 직선으로 되어 있는 삼각형이 있음을 보여주고 여기서 비로소 기하학의 정리가 가언적이 아니라 定言的으로 긍정될 수 있다.


  여기에는 플라톤이 미처 알지 못한 하나의 난점이 있지만, 오늘날 觀念論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은 분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 플라톤은 신이 오직 한 개의 침대(이데아로서)를 만들 뿐 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직선도 하나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하늘에(진정한) 삼각형이 있다면 직선도 최소한 세 개는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또 기하학의 대상도, 설사 이데아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여러 가지 예가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圓弧intersecting circle 가 직선으로 잘린 부분도 최소한 두 개가 가능할 것이다. 이것도 플라톤의 학설에 의하면, 기하학은 궁극의 진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現象界의 연구에 일부가 될 수 밖에 없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루지 않기로 하겠다.

  

 플라톤의 視覺을 비유로 들어, 명백한 知的인 환상과 혼란된 환상의 차이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에 의하면, 시각은 다른 감각과는 달리 눈과 대상만 필요하는 것이 아니라 빛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태양이 비추고 있는 대상은 분명히 볼 수 있으나, 희미한 곳에서는 사물을 혼동하게 되고, 캄캄한 곳에서는 전혀 보지 못한다. 이데아의 세계는 우리가 햇빛이 비치는 데서 사물을 보는 것과 같고 生滅하는 사물들의 세계는 이를테면 혼동된 희미한 세계와 같다. 눈은 영혼과 비교되고, 태양은 빛의 근원으로서 진리 또는 善에 해당된다.

                  

  영혼은 눈과 같은 것이다. 영혼은 진리와 존재가 비추는 사물로 향할 때에, 인식하고 깨달으며, 예지로 말미암아 빛을 발산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혼이 생멸계의 어둠으로 행할 때에는 의견 Opinion을 가질 뿐이며, 진리는 보지 못하는 듯이 보인다. 또 여러 가지 의견에만 기울어져 예지도 못 가지는 것 같다.....이제 알려진 사물에는 진리를 나눠주고, 알려는 자에게는 아는 능력을 나눠주는 것을 나는 신의 이데아 the idea of God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은 학문의 근본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한 洞窟의 비유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이 비유에 의하면, 철학을 모르는 사람은 동굴 속에 얽매어 있는 죄수와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죄수는 오직 한 방향만 볼 수 있다. 그는 쇠사슬에 매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등 뒤에서 불이 비쳐오고, 앞은 담벽으로 막혀 있으며, 그 죄수들과 담벽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죄수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담에 비치는 그들 자신의 그림자와 그들의 뒤에서 움직이는 사물들의 그림자뿐이다. 따라서 그들이 이 그림자를 實在라고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누가 이 동굴에서 해가 비치는 곳으로 도망쳐 나왔다면, 그는 처음으로 실재하는 사물을 목격하고, 자기는 지금까지 그림자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그가 통치자가 될만한 철학자라면, 그는 전에 나온 그 동굴로 다시 내려가 함께 죄수로 있던 그들을 만나 진리에 대하여 가르쳐주어야겠다는 책임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 동굴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런데 이 때 그는 그들을 설복하는데 괴로움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햇빛을 받고 있다가, 갑자기 어둠 속에 들어왔으므로 그들보다 그늘을 잘 보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그는 전에 그 동굴에서 빠져나오기 전보다 더 어리석어 보일테니 말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우리의 본성이 얼마나 밝게 드러나고, 또 얼마나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가를 비유로 이야기하겠네. 땅 밑에 있는 한 동굴에서 살아가는 자들을 보게! 이 동굴은 빛을 향해 하나의 입구를 갖고 있으며, 그 입구에서는 왕래가 빈번하네. 인류는 이 동굴 속에서 어릴 적부터 지내며, 그 다리와  목이 쇠사슬에 매어 있으므로 움직일 수 없네. 오직 앞만 바라볼 따름이지. 사슬로 묶어 목을 돌리지 못하니까. 그들의 머리 위와 등 뒤에는 멀리서 한줄기 빛이 비추고 있으며, 이 빛과 罪囚들의 사이에는 높다랗게 잘 닦은 길이 나 있는데, 이 길과 평행해서 죄수 앞에 만들어 놓은 하나의 얕으막한 담이 보이네. 마치 無言劇에 연출하는 배우들이, 그들의 전면에 친 하나의 幕 뒤에 인형을 보이려는 것처럼, 하나의 막과 같은 담이 거기에 있는 걸세」

「잘 알겠습니다」

 나는 말을 계속하였다.

「이 담과 평행된 길을 따라 온갖 기구와 나무며 돌, 여러 가지 재료로 된 동물들의 초상등을 운반하는 사람들이 그 담에 비치는 것이 보이네. 그들 중에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고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도 있네」

「실로 괴상한 비유올시다. 또 그들도 참말로 이상한 죄수들입니다」

  나는 그에게 대답하였다.

「그들은 단지 그 동굴이 맞은 편에 있는 담에서 불빛으로부터 그의 그림자를 보고 있을 뿐이지. 우리는 안 그런가, 우리도 매한가지네」


 

 

 

 

 

 


 플라톤의 철학에서 주장하는 善의 위치는 독특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과학과 진리는 선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선이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선은 본질과 판이하다. 그 위엄과 능력에 있어서 본질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것이다」

  辨證法에 의해 絶對善을 인식하여 예지계의 궁극에 이른다. 변증법에서 수학자의 假定이 필요치 않는 것은 선 때문이다.

  플라톤의 철학에 있어서 한 초석으로 놓인 가정은, 現象과 대립되는 실재는 완전히 선한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선을 인식하는 것은 실재를 인식하는 것이 된다. 플라톤의 철학에서는 전반적으로 피타고라스주의자와 마찬가지로, 지식과 신비주의가 융합되어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신비주의는 구경의 절정에서 최고도에 도달해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은, 분명히 여러 가지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데아론은 철학에서 중요한 발전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이데아론은 보편개념의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학설이다.

  

 이 보편개념의 문제는 여러 가지 형태로 오늘날까지 존속되어 왔다. 시작에서는 조잡하게 되기 쉬운 법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근원성을 저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플라톤에서 수정해야 할 것이라고 해서 다 버리더라도 여전히 남는 것이 있다. 플라톤의 철학은 누구보다도 반대하는 자라도 다음과 같은 점만은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고유명사만으로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 개, 고양이 따위의 일반적인 낱말도 사용해야 한다. 또 이런 낱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같은, 앞에 등, 관계를 표시하는 낱말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낱말들은 결코 무의미한 음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세계가 만일 고유명사로만 표현할 수 있는 개별적인 사물들만으로 이루어진다면, 그런 낱말들은 의미를 갖기 어려울 것이다.

 설사 이러한 난점들을 피하는 길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장은 보편개념에 유리한  것만은 사실이다. 나는 우선 이 견해를 어느 정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플라톤에 대해 이 정도만 용인하면, 그에게 그 이상의 문제는 남지 않을 것이다.

  

 플라톤은 무엇보다도 철학적인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혹은 플라톤은 인간이다 하고 말할 수 있다. 이 경우에 인간이라는 말은 정확하게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인간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든 간에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그 밖에 인류를 이루고 있는 다른 어떤 개인과도 다른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한 형용사요, 인간은 인간이다 라고 말한다면 이무 의미도 없게될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인간은 인간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과오를 범하고 있다. 그는 美는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또한 보편개념인 인간은 신이 창조한 하나의 모범적인 인간의 명칭이라고 생각했다. 실제의 인간은 표본이 되는 이 인간의 불완전한, 어느 의미에서는 비실재적인 模寫이다.

  

 그는 보편개념과 특수개념 사이에 놓인 간격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하였다. 그의 이데아는 사실상 또 다른 특수개념에 지나지 않았으며, 단지 윤리적으로나 審美的으로 다른 개념들 보다  우월하였을 뿐이다. 후일에 플라톤 자신도 이러한 난점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것을 그의 『파르메니데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이 대화편에서 철학자가 역사상 가장 심각한 자기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플라톤의 이복 형제고) 안티폰의 입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안티폰만이 그 이야기를 상기하고 있는데, 지금은 馬術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 마침 안티폰이 馬具를 가지고 가는 것을 붙잡아 그를 간신히 설복시켜서, 유명한 파르메니데스와 제논 및 소크라테스 사이의 토론을 진술하게 한다.

  

 이 토론은 파르메니데스는 늙었고(약 65세) 제논은 중년 (약 40세)쯤 되며, 소크라테스는 아주 젊었을 때에 있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이데아론을 설명하여, 類似性, 正義, 美등의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하지만, 인간의 이데아가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자신을 갖지 못한다. 그는 머리털이나 흙탕, 쓰레기와 같은 이데아도 있느냐는 물음에 대해 화를 내며 이를 거부한다. 그래도 역시 그런 견해를 피할 수밖에 없는 것은 무의미에 빠질까 염려해서이다.

「소크라테스」하고 파르메니데스가 말하였다.

「그건 아직 자네가 젊은 탓이네. 아마 철학이 자네를 꽉 붙잡을 때가 올걸세. 그땐 자네는 가장 비참한 사물도 무시하지 않을 테지」

 이 말에 소크라테스는 동의한다.

「이데아 중에는 모든 다른 사물들이 이에 관여되어 있는 그런 이데아들이 있네. 그 명칭들은 이 이데아에서 비롯되네. 가령 유사한 사물들이 유사하게 되는 것은, 그 사물들이 유사성과 관련되기 때문이며, 의롭고 아름다운 사물들이 그처럼 의롭고 아름답게 되는 것은, 그것들이 의롭고 아름다운 것과 관련을 맺기 때문이네」

파르메니데스는 계속해서 이데아론의 난점을 지적한다. 

 

 ① 개체는 어떤 이데아에 전체적으로 관여하는가, 혹은 부분적으로 관여하는가? 그 어느 쪽이라고 대답해도 난점이 있다. 즉 만일 전체적으로 관여한다면, 한 사물이 동시에 여러 장소에 있는 것이 된다. 또 부분적으로 관여한다면 이데아는 분할된다. 그리고 작은 것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어떤 사물은, 분명히 작은 것보다 더욱 작게 될 터이니, 이건 모순이다.

 

② 어떤 개체가 하나의 이데아에 참여할 경우에는 그 개체와 그 이데아는 비슷할 것이다. 따라서 이 개체들과 본래의 이데아 전체를 포함하는 또 하나의 이데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이데아와 전체들을 포함하는 또 하나의 이데아가 있을 터이니, 이와 같이 해서 끝이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이데아는 하나가 아니라, 수 없이 많은 이데아의 연속이 될 것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재 3의 인간」의 논의와 같다)

③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이데아는 단지 思惟일 따름이라고 말하지만, 파르메니데스는 사유란 언제나 무엇에 대한 것이라야 한다고 지적한다.

④ 이데아는 위에서 말한 ②에서의 이유로 하여 그 이데아에 참여하는 그 개개의 사물들과 유사할 수 없다

⑤ 이데아가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알려져서는 안된다. 인간의 지식은 절대적인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⑥ 신의 지식이 절대적이라면, 신은 우리를 알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우리를 다스리지도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데아론은 완전히 포기되지는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말에 의하면, 이데아가 없다면. 마음이 지향할 곳이 없어질 것이며, 따라서 推論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소크라테스에게 말하기를, 그런 곤란은 그가 아직도 예비적인 연단이 부족한데서 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떤 결정적인 결론에 이르지는 못한다.

 

  플라톤이 감성적인 개개의 사물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 논리적인 반대 이론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아름다운 것은, 어떤 면에서는 추하고, 두 갑절되는 것은 또 절반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예술작품에 대하여, 어떤 면은 아름답고 어떤 면은 추하다고 말할 때에, 이 말을 분석해 보면, 언제나(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이 부분 또는 이런 점은 아름답고 저 부분은  또는 저런 점은 추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갑절이나 절반에 대해서 보더라도, 이것들은 관계를 나타내는 낱말이다. 2는 1의 갑절이고, 4의 절반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아무 모순도 없을 것이다.

  

 플라톤은 관계를 나타내는 낱말들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어려움 속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에게는 만일 A가 B보다 크고, C보다 작으면, A는 동시에 크고 작으므로, 모순인 것처럼 보였다. 이런 난점은 철학의 기본적인 폐단에 속하는 것이다.

  

 실재 reality 와 현상 appearance 의 구별도 파르메니데스나 플라톤 및 헤겔이 생각한 결과처럼 될 수는 없다. 만일 현상이 실재로 나타나 보인다면, 이 현상은 無와는 다르며, 따라서 실재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이것은 파르메니데스와 같은 주장이다. 만일 현상이 나타나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런 현상에 대하여 머리를 썩힐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현상은 실재로 나타나 보이지도 않고, 단지 나타나 보이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 말은 옳지 않다.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로 나타나 있는 것 같이 보이는가, 또는 단지 외관상으로만 나타나 보이는 것처럼 보이는가?」

현상이 나타나 보이는 것 같이 보이더라도, 우리는 나중에 실제로 나타나 보이는 어떤 것에 接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결국은 實在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플라톤은 신이 만든 유일한 실재의 침대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침대가 존재하는 듯이 보이는 것을 부인하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가 많은 현상이 존재하는 듯이 보이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 다양성 자체는 실재의 한 부분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이 사실에 대하여 슬기롭게 대처한 것 같지 않다. 세계 전체가 실재이며, 부분이 비실재인경우에, 세계를 부분으로 나누려는 企圖는 다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플라톤의 건해 중에서 또 한 가지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지식과 의견이 각삭 다른 문제에 관련되어 있는 점이다. 눈이 올듯하다고 말할 때에는 의견이며, 나중에 눈이 오는 것을 실재로 보고 눈이 오는 것이 보인다고 말하면, 이것은 지식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 둘 다 문제는 한결같이 눈이 오는데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일단 의견에 속하는 문제는 결코 지식에 속하는 문제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지식은 분명하여 거짓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의견은 거짓될 수가 있을 뿐더러, 자연히 오류를 범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의견은 현상에 지나지 못하는 것을 실재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되풀이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플라톤의 형이상학에는 파르메니데스의 그것과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파르메니데스에 있어서는 일자 The one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플라톤에 의하면 많은 이데아들이 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거기에는 진. 선. 미가 있을뿐더러 신이 창조한 하늘의 침대, 하늘의 사람, 하늘의 개, 하늘의 고양이 등, 노아의 방주에서 나온 것들이 다 거기에 있다.

  

 그러나 『국가론』에서는 이런 것들까지도 충분히 고찰한 것 같지 않다. 그의 이데아나 형상Form은 사유가 아니지만, 사유의 대상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신이 이데아를 어떻게 창조하였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데아의 존재는 無時間的이니 말이다. 그가 그것을 창조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그의 사유는 우선 그 사유의 대상으로서 앞으로 만들려고 하는 플라톤 식의 침대를 갖지 않으면, 그 침대를 창조하려는 결심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시간적인 것 timeless 는 창조될 수 없다. 여기서 많은 철학적인 신학자들이 봉착한 난점에 봉착하게 된다.

  그런데 이 우유적인 세계는 하나의 착각에 지나지 않으며, 저주된 하루하루의 언짢은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창조자는 결과적으로 오직 착각과 惡만을 가져올 뿐이다. 일부의 그노스틱주의자(Gnosis 즉, 예지의 개념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설명하려던 기원 2세기 경의 이단 기독교도)들은 그의 견해를 일관시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에게는 이 난점은 표면화되지 않고 있다. 『국가론』에서 이 점에 대하여 한번도 注意를 환기시킨 적이 없는 것 같다.

  

 그에 의하면 수호자가 되어야 할 철학자는 다시 동굴 속에 돌아가 아직도 진리의 햇빛을 보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신 자신도 만일 자기의 피조물들을 바로잡고자 한다면, 이러한 일들을 해야할 것으로 생각된다.

  기독교의 플라톤주의자는 受肉(예수가 육신의 몸으로 태어남을 가리키는 말)을 그처럼 설명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신의 이데아의 세계의 하나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가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가?

  철학자는 동굴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자비심으로 하여 그 속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창조자는 만일 그가 모든 것을 창조하였다면 - 누구나 한번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동굴을 전혀 만들지 않으면 좋을 뻔하지 않았는가?


  이러한 난점들은 오직 기독교의 神觀에서만 일어날 성질의 것이고, 플라톤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플라톤에 있어서는 신이 만물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선한 것만 창조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에 의하면, 감각적인 세계의 다양성은 신 이외의 다른 어떤 근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데아도 아마 신에 의해 창조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신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이 창조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데아의 다양성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의견상의 多元主義는, 궁극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궁극적인 것으로 신God이나 선이 있을 따름이며, 이데아는 여기에 부수되는 것이다. 어째든 플라톤을 이렇게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수호자가 되어야 할 어린이들이 받아야 할 교육에 대하여 흥미있게 묘사하고 있다. 이 영예를 얻을 청년을 선발하는 기준에 대해서는,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지능과 도덕적인 우월성을 아울러 지니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의롭고, 친절하고 향학심이 많고, 기억력이 풍부하며, 마음의 조화를 이룬 자라야 한다.

  

 이를 위해 택함을 받은 소년들은 20세부터30세에 걸친 여러 해 동안을 파타고라스학파에서 주장하는 네 가지 교육, 즉 산술, 기하(평면과 입체), 천문학 그리고 음악과 체육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공리주의정신에서 이루어져서는 안되며, 오직 영원한 사물들을 통찰하는 정신을 갖추기 위해 수행되어야 한다. 가령 그는 천문학에서 실제의 천체에 대하여 지나치게 고심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관념적인 천체의 운동에 대한 수학을 더 열심히 연구해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경향은 경험 천문학에 비춰보더라도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입장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것은 어찌하여 그렇게 될 수 있는지 흥미있는 일로, 고찰해 볼 만하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流星들의 운동은, 그것들을 깊이 분석해 보기 전에는 불규칙적이고 복잡한 것 같다. 이것은 피타고라스 학파의 창시자가 그 학파를 세울 때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희랍인들은 저마다 천체가 분명히 수학적인 美를 실증해 보여 준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유성들이 圓運動을 해야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에 있어서 특히 분명한 일이었다. 그의 선에 대한 강조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문제가 제기되었다. 다시 말해서 유성들이 외관상 무질서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질서와 미와 단조로움 속에 움직이도록 하는 어떤 假定이 없을까,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만일 이런 가설이 존재한다면, 이데아론은 우리로 하여금 그런 가정을 더욱 확신을 갖고 주장하게 할 것이다. 사모스의 아리스탈코스는 그러한 가정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모든 유성들이, 지구까지도 포함하여. 태양을 중심으로 운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2000년 동안이나 묵살되어 왔다. 그 이유의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 때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와 유사한 가정을 오히려 피타고라스 학파에게 돌렸던 것이다. (『천체에 관하여』p293 ) 그러나 이 가설을 코페르니쿠스가 부활시켰다. 그리하여 천문학에 있어서의 플라톤의 심미적인 편견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케플러는, 유성은 원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타원운동을 하며, 또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초점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리고 뉴튼은 유성은 정확하게 타원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플라톤이 추구한 기하학적인 단순성은 드디어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표면상 사모스의 아리스탈코스에 의해 발견된 가정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한 토막의 科學史는 우리에게 일반적인 가르침을 준다. 즉 어떤 假說- 설사 그것이 어리석은 것이라도-을 발견한 자들에게, 사물의 인식에 어떤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준다면, 과학에서는 유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행히 그 가설이 이 목적을 위해 사용된 후에는 그것은 그 이상의 발전을 위해서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 같다. 선에 대한 신앙은 천문학이 발달된 어느 단계에서는 세계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는데 열쇠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유용한 것이었지만, 그 후에는 언제나 해로운 것이었다. 플라톤의 윤리적 및 심미적인 편견과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편견은 희랍 과학의 발달에 큰 장애가 되었다고 하겠다.

 

 오늘날의 플라톤주의자들은 거의 다 수학에 무지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산술과 기하학을 매우 중요시하였으며, 또 산술과 기하학이 그의 철학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그런데 오늘의 플라톤주의자들은 수학에 대하여 무식하다. 이것은 학문의 분화에서 비롯되는 나쁜 결과의 한 보기이다. 오늘날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희랍어의 습득에 소모하여, 플라톤이 중요시한 것을 위해 소모할 시간 여유가 없는 사람들만 플라톤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서양철학사 (B,럿셀) 제 1권 1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