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세상과 세상사이
Blade Runner 블레이드 러너
삶의 의미와 죽음
나는 더 살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최고의 SF 영화로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1982)를 손꼽는다. SF 영화에 관한 책 중 <블레이드 러너>를 빼놓은 책은 없다.
서기 2019년 로스앤젤레스, 어찌나 울울한지! 지구인의 대부분은 ‘오프월드’, 즉 다른 행성들로 이주했고. 기구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만이 지구에 남아 있다. 이들을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2019년 로스앤젤레스에는 늘 비가 온다. 기후뿐만 아니라 다른 면에 있어서도 오프월드는 지구보다 훨씬 뛰어나다. 특히 인간이라면 아무도 원하지 않는 시시한 일들은 이른바 ‘리플리컨트’라는 존재가 해준다. 리플리컨트란 생체기술로 완성된 휴머노이드 생명체로, 로봇과 생체를 결합시킨 것이다. 리플리컨트는 인간과 거의 똑같다. 오히려 인간보다 힘과 민첩성, 인내력, 지성 등이 뛰어나다. 리플리컨트를 만든 것은 타이렐 사다. 위험하고 단순하고 불쾌한 일을 떠맡길 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군인 리플리컨트, 경찰 리플리컨트, (환경미화원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청소원 리플리컨트, 그리고 성매매 여성 리플리컨트도 있다.
오프 월드에서 리플리컨트들이 단합해 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으로 인간이 잃을 것이라곤 시시한 일들을 해야 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다. 이후 리플리컨트는 지구로 와서 죽음을 맞게 된다. 지구로 돌아온 악당 리플리컨트를 찾아 죽이기 위해 ‘블레이드 러너’라는 엘리트 부대가 조직된다. 영화의 시작부에 등장하는 소개 광고로 알 수 있듯, 리플리컨트를 죽이는 일은 처형이 아니라 ‘은퇴’라고 불린다.
버림받고 쓸쓸한 네 명의 리플리컨트가 지구로 숨어든다. 로이, 레온, 프리스, 조라 . 이들은 ‘넥서스 식스’ 리플리컨트다. 넥서스 식스란 리플리컨트 가운데 최고의 모델로, 이들을 이끄는 것은 로이(룻거 하우어가 연기 경력 가운데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라는 군인 리플리컨트다. 그리고 프리스(다릴 한나 扮 )는 적어도 로이에게는 사랑스러워 보이는 성매매 여성 리플리컨트다. 그들은 오프 월드 어딘가에서 우주선을 납치한 뒤 승무원과 승객을 죽이고, 지구, 그 중에서도 로스앤젤레스로 향한다. 왜? 리플리컨트의 수명은 4년으로 제한되어 있다. 타이렐 사의 막후 세력인 천재 과학자 엘든 타이렐의 설명에 의하면, 이러한 수명 제한은 감정의 발달 때문이다. 리플리컨트는 감정을 갖지 않도록 만들어졌으나 일정한 시간이 흐르고 나면 사물에 대한 감정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리플리컨트가 감정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은 인간에게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시시한 일을 싫어하게 되고 시시한 일을 시키는 인간을 증오하게 될 수 있다. 그래서 4년이 지나면 리플리컨트를 죽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로이, 프리스, 레온, 조라는 모두 4 년의 목숨 중에 3년을 산 상황이었고 생명을 연장할 방법을 찾아 지구로 왔다. 로이가 자신을 만든 엘든 타이렐을 만났을 때 하는 인상적인 말을 빌자면 ‘이 새끼야! 나는 더 살고 싶어’ 가 지구로 온 이유다.
데커드(해리스 포드 扮 ) 는 은퇴한 블레이드 러너로, 이제는 망가진 블레이드 러너의 본보기다. 그의 옛 상관이 그에게 마지막 임무를 준다. 수사를 하는 동안 데카드는 숀 영을 만난다. 그녀는 자신이 리플리컨트인지 모르는 리플리컨트로. 데커드는 당연히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이로 인해 그는 리플리컨트의 입장에 대해 눈뜬다. (필립 딕의 원작이나 영화의 디렉터스 컷을 보면 데커드 역시 리플리컨트라는 암시가 있으니, 어쨌든 잘된 일이다). 리플리컨트는 감정적으로나 지적으로 예민한 존재로, 자신의 유한성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으며 따라서 죽음에 대한 공포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유한성은 어떤 면에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다. 데커드는 점차 리플리컨트의 진짜 본성을 깨닫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없애는 일을 그만 두지는 않는다. 하지만 데커드가 리플리컨트를 죽이는 경우는 대부분 정당방위의 상황이어서 데커드가 몰인정한 냉혈한으로 비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다릴 한나가 가랑이로 목을 조르는데 죽이지 않고 배기겠는가. 어쨌든, 로이가 데커드의 생명을 구하면서 데커드는 완전히 바뀐다. 로이는 데커드에게 자비를 베푼 뒤 죽는다. 영화 역사상 죽음을 앞 둔 독백 가운데 가장 감동적일 이 장면에서, 로이는 인간(엄밀히 말하자면 리플리컨트)의 한계를 빼어나게 형상화한 말을 남긴다. “나는 너희 인간들이 상상도 못할 것들을 보았다. 오리온의 어깨에 불을 댕긴 전투선에도 들어갔지. 탄하우저 게이트 근처에 바다의 물빛이 춤추는 것도 보았지. 이제 모든 그 순간들이 시간 속에 사라질 거다. 빗속의 눈물처럼, 이제 죽을 시간이다.”
죽음이 나쁜 일일까
과연 어떤 의미에서 죽음이 ‘나쁜 일’ 일까? 일반적으로는 죽음이 나쁘지 않지만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나쁜 것일까? 일반적으로는 죽음이 꽤 좋은 일일 수 있다. 죽음이란 인구 폭발에 대한 반작용이고 유전적 변이의 보호책이며 그 외에도 여러 좋은 일을 한다. 히틀러나 오사마 빈 라덴이 그 확실한 예가 되겠지만, 한 개인의 죽음이 다른 사람에게는 이익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죽음은 죽음을 겪어야 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이익을 주지 않는다. 사실, 대부분은 죽음을 ‘해로운 것’으로 가정하고 있다. 로이와 그의 리플리컨트 일당들도 확실히 그렇게 가정하고 있다. 우리 대부분도 그렇다.
물론, 죽음이 반드시 해로운 것이라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죽음이 진정한 ‘종말’ 이어야만. 죽음은 죽어가는 사람에게 해가 된다. 죽은 사람은 소멸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천국으로 가고 축복 속에서 영생을 누릴 수도 있다. 아니면 우리 중 몇몇 만 천국에 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죽음이 종말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하겠다. 당신이 죽음이 종말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 행운아라면, 질문을 다르게 보면 된다. 한 개인이 종말을 맞이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나쁜 일일까? 죽음 혹은 한 개인의 종말이 나쁜 일일까? 아니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면, ‘만약 종말이 온다면, 그것이 나쁜 일일까?’로 바꾸어 생각해 보라.
물론, 지금의 문화는 종말이나 죽음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일이 건강하지 못하고 암울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밝고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나는 죽음 자체를 위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죽음이 왜 나쁜 것인가?’란 문제보다 ‘삶이 왜 좋은 것인가?’란 문제에 더 관심이 있다. 로이와 그의 리플리컨트들은 더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죽음을 피하고자 한다. 그 기본 가정은 삶이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가정은, 우리 모두가 일반적으로 로이ㅘ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삶을 없애는 것이다. 그러므로 왜 죽음이 나쁜 것인가를 밝혀낼 수 있다면, 이를 통해 왜 삶이 좋은 것인가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즉, 죽음이 앗아가는 것의 가치를 밝혀낼 수 있다면, 삶의 의미를 밝혀낼 수 있다는 말이다. 삶의 ‘가치’를 밝혀낼 수 있다면,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이 책의 서두에 시작한 질문인 ‘삶의 의미’에 대한 해답을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에피쿠로스 논쟁
왜 죽음이 나쁜 것인가를 밝혀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죽음이란 생명과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문제가 시작된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 죽음은 ‘삶의 한계’다. 그리고 삶의 한계는 삶의 내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경계가 있는 들판을 떠올려보라. 그 경계는 들판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계란 내부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것의 한계란 그것에 포함될 수 없다. 포함된다면 그것은 한계가 아니다.
이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와 연관된 유명한 논쟁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 논쟁이란, 죽음이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는 것이다. 논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죽음은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 없는데,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죽음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따라서 아직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죽은 다음에는 해를 입힐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죽음이란 실제로 죽음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 없지만, 죽음이 일어났을 때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해를 입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면,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죽은 사람에게는 나쁜 것이 아니다.
이 논쟁에 잘못된 점이 무엇일까? 잘못된 점이 있기는 한 것일까?
죽음과 박탈
죽음이 삶의 한계라면, 그것은 삶의 내부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죽음이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죽음을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하는 바로 그 시점에 연관된 것이 아닌 다른 종류의 해가 있는 경우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죽음이 ‘t'라는 시각에 발생한다고 할지라도, 이 죽음이 가져올 해는 그 시각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야만 죽음이 해를 입힐 수 있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사건이 일어날 때에는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질문은 ‘이런 종류의 해가 과연 있을까’로 바뀌어야 한다.
나는 ‘있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일시적으로 연장된’ 그런 종류의 해가 있다. 이 의미를 대략 설명하자면, 이는 특정한 시각에는 존재할 수 없으나 시간의 흐름, 즉 어떤 시각으로부터 그 뒤의 어떤 시각까지의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해다. 고전적인 예를 들자면 철학자들이 ‘박탈의 해악’이라고 부른 해를 말한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처럼 엘든 타이렐이 로이의 공격을 받았다고 가정하자. 로이는 엘든 타이렐의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한다. 하지만 로이가 감상적이 되어 타이렐을 죽이지 않았다 치자. 그래서 타이렐이 심한 뇌손상만 입은 채 살아남았으나 뇌손상이 너무 심해 생후 3개월 짜리 아기의 지능만 가진 상태가 됐다. 우리 대부분은 타이렐이 뇌손상으로 해를 입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정확히 무엇에 대해 해를 입은 것일까? 부상을 당하기 전 타이렐은 충분히 행복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부상을 입은 후 역시 똑같이 행복할 수도 있다. 단지 그 행복이 아주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뿐이다. 부상 전에는 체스를 두고 리플리컨트를 개발하는 것에서 행복을 느꼈다면, 부상 후에는 깨끗하고 보송보송한 기저귀에서 행복을 느낄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타이렐이 뇌손상으로 해를 입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부상 전의 상태에도 부상 후의 상태에도 해는 없다. 해는 오직, 부상 이전의 그와 부상 이후의 그 사이의 ‘관계’ 특히 ‘대비’에 있어서만 나타난다. 그가 고통 받는 해악이란 이전 상태를 박탈당했다는 데 있고, 이 박탈은 부상 이전과 이후의 상태 사이의 관계내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박탈의 해악은 ‘특정한 시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시간을 관통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죽음이 어떻게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지 이해하려면, 첫 단계는 죽음이 박탈의 해악이란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죽음이 우리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죽음이 우리에게서 무엇인가를 앗아가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죽음의 해악은 특정한 시각보다는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뇌 부상과 죽음을 비유하는 것은 꼭 맞는 일은 아니다. 뇌 부상의 경우, 부상 전과 부상 후 모두 인간은 존재한다. 부상 전과 후가 ‘동일한’인간인지 불분명할 뿐이다. 그러나 죽음의 경우, 죽음이 일어난 후에는 인간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비유에 완전히 반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제4장<토탈 리콜>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 인간의 존재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심리학적 연속성’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타이렐의 예에서 뇌 부상이 일어나기 전의 그는 뇌 손상이 일어난 후의 그와 동일 인물이 아님이 거의 확실하다. 부상 전의 그와 부상 후의 그 사이에는 심리적 연속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심리적으로 단절되어 있다. 나중의 그는 이전의 그와 다른 사람이며, 이전의 그가 살아남아 나중의 그가 된 것이 아니다. 뇌 부상 전에 존재하던 엘든 타이렐이라는 개인은 부상을 당한 순간 존재를 멈춘 것이다. 뇌 손상은 그의 존재에 경계선이 됐다. 마치 우리가 죽음이 삶의 한계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부상을 입었을 때, 타이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해를 입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렐은 해를 입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한 개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해를 입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의해 해를 입을 수 있는 그런 해의 본성이란 과연 무엇인가? 죽음이 박탈의 해악을 입힌다고 말하는 것, 즉 죽음이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박탈하기 때문에 해악을 입힌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첫걸음에 불과하다. 이제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더욱 기본적인 것이다. 박탈이 일어날 때 우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박탈이 우리에게 해악을 끼칠 수 있는가?
죽음과 가능성
그러므로 이제 이것을 밝혀내야 한다. 우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박탈당하게 되는가, 그리고 이 박탈로 어떻게 해악을 입을 수 있는가. 즉,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려면 우리가 존재해야 하는데, 우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도 어떤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말이 되도록 해야 한다. 달리 말해,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것들이 우리 삶의 한계 안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말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의미 있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과연 이것이 말이 되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이 말이 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가능성’의 명제에 기초한 접근법이다. 해악이 일어날 때 우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해로부터 고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 때문이다. 즉, 죽음은 우리가 가능성을 실현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에게 해악을 끼친다는 말이다. 죽음이 죽는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은 죽음이 그 사람의 가능성을 박탈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과연 적절한 것일까?
나는 가능성을 논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능성이란 이른바 ‘무차별적인’ 이다. 로이의 죽음을 생각해 보자. 이 죽음은 적어도 로이에게는 불행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로이가 꽃꽂이 사범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실현되지 못해서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꽃꽂이 사범이 되는 것도 하나의 가능성이다. 하지만 그것은 로이의 죽음이 해가 되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으로 볼 때, 로이는 꽃꽂이 사범이 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혀 관심이 없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죽음이 박탈한다고 해서 그것이 해가 될 리는 없지 않을까?
이것은 가능성의 무차별성에 대한 일례다. 가능성이란 너무 많기 때문에, 진정한 로이의(혹은 나나 당신의)가능성이 될 단 하나의 가능성이란 있을 수 없다. 이 문제의 핵심은 이러한 무차별성이다. 가능성이 그 해답일 것처럼 보였던 원래의 문제는, 죽음 같은 사건에 어떻게 인간이 연관을 맺을 수 있는가, 그리하여 그 인간이 그런 사건을 겪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그러므로 그 문제는 그 인간과 그 사건들을 ‘묶을 수 있는’, 그리하여 그런 사건이 그 사람에게 정말로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존재하지 않아 해를 입을 수 없는데도 어떻게 죽음이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지를 설명하려면, 바로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가능성에서 해담을 찾으려면 이 문제는 어떤 사람이 그의 가능성과 어떻게 연관을 맺을 것인가를 설명하는 일이 되어 버린다. 그러면 논의는 조금도 진전되지 않는다. 하나의 문제를 다른 문제로 바꿔놓을 뿐이다.
미래를 잃는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 보자. 죽음이(죽는 사람에게)나쁜 것이라면, 이것은 분명 죽음이 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또 죽음이 해악을 끼친다면 그것은 분명 박탈의 해악 때문이다.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박탈하기 때문에 죽음이 우리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이다.
그러면 죽음이 발생할 때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죽음이 우리에게서 박탈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가능성을 박탈한다는 가정은 맞지 않는다. 그 가능성이란 너무 무차별적인 것이라서 가능성으로서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는 지나치게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서 주어진 가능성 가운데 타인의 가능성에 반하여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나의 가능성에 반하여 타인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 또한 없다. 간단히 말해, 가능성의 박탈이 해악을 끼치는 예가 되기는 어렵다는 애기다. 죽음은 우리가 가지고 있을만한 것을 박탈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박탈하는 것이어야 한다.
죽음이 앗아가는 것 가운데 하나는 ‘미래’다. 매 순간 삶을 지나쳐가는 것들을 생각해 보자. 그것이 무엇인지는 종에 따라 다르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인간과 리플리컨트 모두, 매 순간 삶을 지나가는 것은 경험과 신뢰, 욕망, 목표, 계획, 활동, 그 밖의 다양한 것들의 집합체다. 우리가 경험, 신념, 욕망, 목표, 계획,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현재 이후의 시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은 생에도 같은 일을 하거나 겪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내가 말하는 미래의 요점이 무엇인지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여기서 ‘미래’의 개념이란 이런 것들을 간단히 줄여서 말한 것이다. 우리는 죽을 때 이런 의미에서 미래를 잃게 된다. 이것이 죽음이 우리에게 해악을 끼치는 이유다. 간단하다.
혹은 간단하지 않다. 그저 간단해 보일 뿐이다. 생각해 보면 미래를 잃는다는 것은 아주 이상한 일이다.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잃을 수가 있단 말인가? 지금 미래를 가지고 있어야만 그것을 잃어 버릴 수 있는데,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가질 수 있단 있는가? 이러한 맥락에서 ‘소유’와 ‘손실’에 대한 개념은, 일상적인 맥락과는 어느 정도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미래를 갖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미래를 갖는다는 것이 건장한 가슴을 갖고 싶다거나 롤렉스시계를 갖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다. 배신한 리플리컨트가 당신의 미래를 박탈하려 한다면, 그 박탈의 의미는 나이로 인해 근육이 흐물흐물해졌거나 강도가 시계를 빼앗아간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미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물론, 미래 그 자체로만 보자면 단순한 가능성 이상의 것은 아니라는 점이 문제다. 그렇다면 죽음이 우리의 가능성을 박탈함으로써 우리에게 해악을 끼친다는 아까의 생각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 생각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적절치 못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를 단순한 가능성 이상의 것으로 생각하는 이해 방식이다. 가능성이란 단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저 우리가 가질 ‘가능성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가지고 있는 어떤 것으로 만들어 줄 것으로 미래를 이해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 미래를 실제로 지금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비록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 이 시각 우리는 미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려운 문제다. 그래도 그것이 말이 되게끔 만들어보자.
최소한의 미래
사실, ‘미래를 갖는다’ 는 것은 적어도 세 가지 다른 방법으로 말할 수 있다. 먼저 최소한의 의미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즉시 파괴되지 않는 한 미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이 손에 잡고 있는 물리적 객체로서의 이 책도 적어도 하나의 의미에서는 미래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단순히 현재 이후의 시간에도 이 책이 존재할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당신이 이 책이 고리타분한 졸작일 뿐이라고 오해해서 불에 던져버리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이 책은 더 이상 미래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불 속에 책을 던지면 책은 미래를 잃게 된다. 다 타기 바로 직전까지는 하나의 책이 존재하지만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히, 모든 것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것은 미래를 잃을 수 있다. 책이 불 속에 던져졌을 때 해악을 입는다고 할 수 있으므로, 그런 방식으로 ‘해악’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의 해악이란 인간이 생명을 빼앗길 때 고통 받는 해악과는 분명 아주 다르다. 두 경우 박탈의 의미가 크게 다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미래를 갖는다는 것은 어쩌면 가능성에 머무는 일일 것이다. 현재 이후의 시간은 물론 가능한 일이지만, 확실한 일은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의 미래는 실현될 개연성이 큰 하나의 가능성이라 생각할 수 있다. 결정적으로 현재 하고 있는 일 가운데 이런 의미에서의 미래와 자신을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미래를 잃는다는 개념에서 죽음의 피해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미래가 있으며 또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정당화할 수 있는 더 확실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미래를 향한 존재
죽는 것이 왜 그렇게 나쁜 것인가를 이해하려면 미래를 가질 수 있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미래가 비록 아직 존재하지 않더라도 현재 ‘실제로’ 가질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도 증명해야 한다. 현재 가지고 있지 않다면 죽음이 우리로부터 미래를 빼앗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
그럼 시작해 볼까. 이른바 ‘미래지향적’ 이라 부를 수 있는 정신 상태가 있다. 이러한 정신 상태는 지금 실제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지향적 정신 상태란, 현재 특정한 상태에서 현재보다 나중을 향해 가도록 하는 어떤 미래라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상태의 전형적인 예로는 ‘욕망’ ‘목표’ ‘계획’ 등을 꼽을 수 있다.
욕망이 어떤 의미에서 미래지향적인가? 예를 들어보자. 욕망이란 ‘충족’ 되거나 ‘좌절’되는 것이다. 맥주를 마시고 싶은 욕망은 냉장고에서 맥주 한 병을 꺼내면 충족된다.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맥주가 없으면 욕망은 좌절된다. 로이가 자신이 납치한 우주선의 승객과 승무원을 죽이고자 하는 욕망은 성공하면 충족되지만 실패하면 좌절된다.
욕망의 문제는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대체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냉장고로 걸어가 문을 열고 맥주병을 꺼내려면 시간이 걸린다. 우주선을 돌아다니며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욕망이 미래지향적이라 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목표와 계획은 모두 기본적으로 장기적인 욕망이므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올림픽 3종 경기에 나가고 싶다면, 일주일에 6일 동안 훈련하는 계획을 세울 것이다. 우주선을 공중 납치하여 지구로 간 뒤 엘든 타이렐을 납치하고 자신의 수명을 한정짓는 장치를 제거하려는 로이의 계획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욕망은 충족되거나 좌절된다. 목표와계획 역시 충족되거나 좌절될 수 있다. 그리고 충족과 만족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미래를 향해 나를 움직이고 있는 상태’에 있다. 로이도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욕망이 반드시 미래지향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과거가 달랐더라면’하는 욕망도 갖는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욕망들은 확실히 미래지향적이며 그래서 만족을 얻는데 시간이 걸린다.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기에, 진정한 의미에서 미래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 현재에 미래를 향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 미래가 지금 존재하지 않더라도 이 상태란 실제로 지금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 존재하는 이러한 상태는 미래지향적이다. 이 상태로 인해 우리는 자신의 미래와 연결되며, 은유적이지만 의미 있는 맥락에서 그 미래를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미래지향적인 자는 미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향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현실적 상태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개개인은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바와 같이 ‘미래지향적 존재’다. 우리 개개인은 본능적으로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향해 움직이게 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미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맨 처음의 가정에 불과하며, 두 가지 유형의 미래지향적 상태를 구별하는 것에는 명확한 해답을 주지 못한다. 어떤 정신 상태는 두 가지 다른 방식에서 미래지향적인 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내용면에서 미래라는 ‘개념’에 연관된 상태인 경우다. 이를 ‘개념적으로 미래지향적인 상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내용면에서는 미래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지만 현재를 넘어선 순간에 그것을 추구해야 만족할 수 있는 상태다. 이러한 상태를 ‘비개념적으로 미래지향적인 상태’라고 부르겠다. 이 두 유형의 상태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미래로 이끈다. 그 차이점은 왜 죽음이 해로운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래의 개념
다음 두 상황과 그에 연관된 정신 상태에는 큰 차이가 있다.
상황 1
로이는 우주선을 타고 있는 승객과 승무원을 없애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욕망을 충족시키려면, 로이는 우주선에 타서 승객과 승무원의 위치를 파악한 뒤 총을 쏘아야 한다. 미래에 최소한 얼마 동안이라도 그가 살아 있어야만 필요한 단계를 완수하여 욕망이 충족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의 욕망은 미래지향적이다. 이러한 욕망은 미래를 향해 로이를 끌고 가거나 묶어둔다.
상황 2
프리스는 수명 제한기를 없애기 위해 타이렐을 잡은 후, 로이에게 그가 삶에서 누리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20년 동안 있고 싶은 곳은 어디인지 등 미래에 대한 계획을 열거해보라고 한다. 자신의 계획과 목표를 충족시키기 위해 로이는 미래에도 계속 살아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계획과 목표는 미래지향적이다. 하지만 이 경우, 미래로 향하게 하는 방식에는 무언가 더 많은 요소가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계획과 목표가 ‘미래를 위한 것’이라는 점을 로이 자신이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는 지금은 만족스럽지 않지만 그의 현재 행동이 그 만족에 기여할 거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로이는 자신을 만든 사람을 만나 더 긴 생명을 얻고자 한다. 그것이 우주선을 납치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지구로 돌아가려는 이유다. 현재로선 불가능하지만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무엇, 즉 자기 수명제한기 제거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다.
첫 번째 상황은 그렇지 않지만, 두 번째 상황은 미래라는 ‘개념’과 연관 되어 있다. 승객과 승무원을 죽이고자 하는 로이의 욕망은 그들을 죽일 때 까지 계속 살아남아야 충족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미래지향적이다. 하지만 이런 욕망을 생각할 때 ‘내 욕망을 위해 이 우주선 안의 사람들을 죽이는 건 미래에 일어날 일이야’라고 로이 스스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로이는 미래에 대한 아무런 개념도 가질 필요가 없다.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욕망은 미래에 ‘연관’된다. 하지만 그 욕망은 미래에 대한 ‘개념’과는 연관이 없으며, 욕망을 갖는다는 것도 미래에 대한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두 번째 유형의 상황에서는 지금 자신의 욕망과 행동이 현재로선 만족될 수 없으며 미래에만 만족될 수 있는 향후 목표를 향한 것이라는 사실을 로이는 명백히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상황에서는 로이가 미래에 대해 명백히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두 번째 상황에서 로이가 갖는 욕망과 로이가 하는 일들은 미래에 대한 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래야만 의미가 생긴다.
위의 결론, 욕망, 목표, 계획 같은 정신 상태가 인간을 미래로 향하게 하는 데에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이 있다. 먼저 ‘비개념적’방식으로, 우주선에서 인간을 죽이고자 하는 로이의 욕망의 경우처럼 미래에 대한 명백한 개념을 내포하지 않은 것이다. 또 하나는 ‘개념적’방식으로, 수명 제한 장치를 제거하기 위해 타이렐을 찾고자 하는 로이의 욕망처럼 미래에 대한 명백한 개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명확히 구분 짓기 위해, 미래에 대한 개념을 전제로 한, ‘개념적으로 미래지향적’인 정신 상태와 미래에 대한 개념이 없는 ‘비개념적으로 미래지향적’인 정신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약한 미래와 강한 미래
어떤 정신 상태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데에는 개념적과 비개념적, 두 가지 다른 방식이 있다는 조건하에서 보자면, 나와 로이 혹은 당신 같은 개개인이 미래를 가질 수 있는 데에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이 있다. 한 개인이 미래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없다면 그는 ‘비개념적 의미’에서의 미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개인이 미래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있다면 그는‘개념적 의미’에서의 미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각각은 하이데거가 말했듯‘미래를 향한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는 비개념적과 개념적, 두 가지 방식으로 미래를 향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개념적 의미의 미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비개념적 의미의 미래만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그 미래에 더 가깝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여기에 직관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것을 논의해 볼 수 있을까?
논의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념적 의미에서 미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현재의 행동을 훨씬 잘 조절할 수 있으며 원하는 미래를 얻기 위해 현재 욕망을 자제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로이가 엘든 타일레이 있는 방가지 가기 위해 지금 온 힘을 다 쏟을 수 있는 이유는 미래에 대한 명백한 개념, 즉 수명제한기가 제거될 미래에 대한 명백한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획득될 수 없고 미래에만 획득될 수 있는 목표를 향해 자신의 정력을 다 쏟고 있으므로, 로이는 이 미래의 목표에 현재 시간과 정력의 대부분을 투자하고 있으며 이 투자는 미래에 대한 명백한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므로 미래에 대한 로이의 연관이 강하면 강할수록, 지금의 행동과 욕망, 그 밖의 정신 상태를 더 단련하고 집중하고 통제한다는 얘기다. 이렇게 정신 상태를 단련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미래의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그 미래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은 (최소한 어느 정도는) ‘내일을 위해 사는’ 경향이 있다. 현재 우리가 하는 많은 것들은 현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것이다. 교육을 받는 것, 경력을 쌓는 것, 유혹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배우자에게 충실한 것, 체중을 관리하는 것, 생명보험에 드는 것 등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미래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아주 사소하고 단순한 결정조차 종종 미래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안돼, 술을 한 잔 더 마시면 안돼, 내일 고생 할테니까, 안돼, 초콜릿 바를 먹으면 안돼, 식욕이 없어질 테니까. 우리 중 몇몇은 노이로제에 가까울 정도로 미래에 집중한다. 하지만 극히 평범한 사람조차 현재 하고 있는 일의 대부분(아마도 우리가 하는 행동의 거의 모두)은 미래에 기초할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미래에 대한 ‘개념’에 기초하기 때문에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들이다.
미래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고 또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로이 같은 개인은 미래에 대해 비개념적인 연관만을 갖는 사람보다 미래에 대해 더 많은 투자를 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미래를 어떤 식으로 만들고 싶다는 개념에 따라 현재의 행동을 지정하고 조절하며, 현재의 욕망을 명백히 단련하고 통제한다. 미래에 대한 개념 없이는 이런 일이 이루어 질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나는 다음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비개념적 의미에서의 미래를 가지고 있는 개인은 ‘약한’ 의미에서 미래를 가지고 있다고 칭하겠다. 그러나 개념적 의미에서의 미래를 가지고 있는 개인은 ‘강한’ 의미에서 미래를 가지고 있다고 칭하겠다. 그러므로 미래의 소유가 강한 것과 약한 것의 차이는 궁극적으로 그 사람이 그 미래에 대해 얼마나 투자하는가 하는 차이다.
이 둘 사이의 연관은 이런 것이다. 강한 의미에서 미래를 가지고 있다면, 자동적으로 약한 의미에서의 미래도 갖게 된다. 강한 의미에서 미래를 갖는다는 것은 약한 의미에서의 미래를 갖는 것을 포함한다. 미래에 대한 명백한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이 개념을 실현시키기 위해 현재의 행동을 조절하고 현재의 욕망을 단련하는 로이는 강한 의미에서 미래를 가지고 있다(따라서 약한 의미에서의 미래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강한 의미에서 미래를 가지지 않고 약한 의미에서 미래만 가질 수도 있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명백한 개념 없이 욕망을 가질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 보면 된다.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이 사실이 인간을 미래와 연결시킨다. 하지만 현재의 행동을 조절하고 현재의 욕망을 단련하도록 하는 명백한 개념의 미래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강한 의미에서의 미래와는 연결되지 않을 것이다.
미래의 상실과 죽음의 해
죽음은 우리에게 미래를 빼앗아가므로 나쁜 것이다. 어쨌든 이제 우리는 미래를 갖는 방식에는 강한 의미와 약한 의미,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강한 의미의 미래와 약한 의미의 미래의 차이가 죽음의 해악에 영향을 끼칠까? 죽음이란 약한 의미에서 미래를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강한 의미에서 미래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더 나쁜 것일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강한 의미에서 미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향해 지금의 행동을 조절하며 욕망을 절제한다. 이런 사람은 약한 의미에서 미래만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강하게 자신의 미래에 매여 있다. 그러므로 강한 의미에서 미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미래를 잃는다면 약한 의미의 미래만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아직도 이 개념이 명확하게 와 닿지 않는다면, 다음의 예를 생각해 보자. 올림픽트라이애슬론 경기에서 두 사람이 경쟁을 하게 됐다. 한 사람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생활을 가다듬고 행동을 조절하며 욕망을 자제하면서 수년 동안 훈련을 해 왔다. 다른 한 사람은 행정적인 착오(이를테면 동명이인)가 생겨 우연히 올림픽에 참가한 게으르고 의욕도 없는 선수다. 두 사람 모두 메달을 따지 못했다 치자. 첫 번째 선수는 메달이라는 목표달성에 자신의 삶을 맞춰 살아왔으므로 더 큰 손실을 입어 괴로울 것이다. 그의 인생의 대부분을 미래에 대한 목표를 위해 살아왔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가 후자보다 메달을 얻기 위해 더 많은 투자를 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의 손실이 더 크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미래를 잃는 것의 해악’이란, 기본적으로 위의 예와 비슷하다. 현재의 행동과 욕망을 조절하고 집중하며 자제하고 통제하는 개념에서, 미래를 위해 더 많은 것을 투자할수록 그 미래를 잃었을 때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개념적 의미 혹은 강한 의미의 미래를 가지고 있다면, 비개념적 의미 혹은 약한 의미의 미래만 가진 사람보다 죽었을 때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죽음은 강한 의미의 미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약한 의미의 미래만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죽음으로 더 많은 것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죽음과 삶의 의미
이와 같이 죽음이 죽는 사람에게 왜 나쁜 것인가를 살펴봤다. 다시 말해 죽음이 왜 우리에게 해악을 끼치는가를 살펴봤다. 죽음은 미래를 빼앗아가기 때문에 우리에게 해악을 입힌다. 하지만 우리가 미래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 각 개인이 ‘미래를 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 각 개인은 근본적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다. 단지 이것만이 우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해악을 입을 수 없을 때라도 죽음에게 해악을 입을 수 있는 이유다.
어쨌든, 죽음의 해악이란 죽음이 빼앗아가는 가치 때문이라고 해도 타당할 것이다. 만약 죽음이 우리에게 해를 입힌다면 가치 있는 무언가를 가져가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삶의 가치일 것이다. 죽음은 미래를 빼앗아간다. 우리는 ‘미래를 향한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미래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삶의 가치는 우리가 ‘미래를 향한 존재’라는 사실과 직접적으로 묶여 있는 것 같다. 삶의 가치가 이것과 묶여 있다면, 삶의 의미 역시 이것과 묶여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우리는 죽음이 삶의 한계이며 따라서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어떤 들판에 영역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 있다면 그 경계는 영역 안에 포함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생의 순간순간에 대해서도 같은 관점을 가질 수 있다. 한 사람의 삶을 시간 순에 따라 임의로 잘라 나누어보자. 나누는 시간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다. 각 시간의 조각을 ‘순간’이라 하자. 인생을 하나의 전체로 생각하는 대신, 한 삶의 삶에 있어 각 순간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제 한 순간이 다음 순간으로 넘어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해 보라. 각 순간의 전환점에는 이전 순간의 끝과 다음 순간의 시작이 되는 경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하나의 경계로서, 이 전환점은 이전 순간과 다음 순간 들 중 어느 하나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어느 한쪽에라도 포함되어 있다면, 그것은 각 순간의 경계가 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에서 각 순간의 죽음은 각 순간의 부분이 아니다.
이런 개념에서, 우리가 ‘미래를 향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각 순간마다 우리가 미래의 순간에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미래의 순간이 아직 존재하지 않더라도, 지금 이 순간은 미래와 연결되는 속성이 있다. 미래의 순간이 ‘우리 것’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속성 때문이다. 이 미래의 순간이 일직선으로 서로 연결되는 것도 바로 이런 속성 때문이다. 한 순간의 탄생이 그전 순간의 죽음이 되는 것도 바로 이런 속성 때문이다. 시간에 대한 일직선적 개념으로 인해 우리는 내 것인 무언가의 탄생이 동시에 내 것인 무언가의 죽음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직선적 시간 개념이 우리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다.
내 것인 무언가의 탄생이 역시 내 것인 무언가의 죽음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갖는다면, ‘제외’란 개념을 얻을 수 있다. 하나의 욕망이나 목표나 계획을 만족시키려면 그 밖의 것을 희생해야 한다. 왜냐? 시간은 일직선이기 때문이다. ‘미래를 향한 존재’인 우리는 미래에 존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이해한다. 다른 욕망을 희생함으로써 하나의 욕망을 충족하는 것, 다른 대안을 무시하면서 하나의 계획을 따르는 것, 이것이 인간의 존재방식이다. 이것이 지금 자신의 모습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모습은 다른 것들을 잃어버림으로써만 갖춰질 수 있다. 사람은 무언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무언가가 되어 있다. 이는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고 하나의 가능성을 따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하나의’ 존재 방식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의 존재 방식이 자동적으로 다른 존재 방식들을 배제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일 없이는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형태 없는 존재론적 덩어리’일 뿐이다.
시간, 특히 시간의 일직선상은 다른 존재 방식을 배제함으로써 하나의 존재방식을 가능케 한다. 한 순간은 다른 순간을 배제하므로, 하나의 존재 방식은 다른 존재 방식을 배제한다. 한 순간이 다른 순간을 배제하는 것은 우리가 ‘미래를 향한 조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래를 향한 존재’가 아니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것으로든 존재하려면 일직선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일직선의 시간에서는 한 순간의 탄생이 그에 앞선 순간의 죽음이 되어야 한다. 하나의 존재 방식이 있으려면 두 순간 사이의 전환이 필요하며, 그 전환이란 존재 방식을 가능케 하는 경계 또는 지평이다. 그 궁극적인 한계, 궁극적인 지평은 죽음이다.
예를 들어, 눈에 보이는 시야를 생각해 보자. 시야를 가능케 하는 필요조건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가령 시야의 경계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상상은 불가능하다. 사물의 시각적인 의미는 시야 안에서 이루어진다. 시야에 보이는 것들이 의미를 가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시야는 공간적으로 구성되고 순서가 매겨진다. 주변을 돌아보자. 책상은 창문 약간 아래 왼쪽에 있고 스탠드 불빛의 오른편에 있다. 이런 식으로 공간에 순서를 매기는 것은 비교가 될 대상에 대해 상대적인 의미만을 갖는다. 어떤 고정된 물건에 대한 기준점이 있어야 상대적으로 사물의 순서가 정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기준점은 경계를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보통은 시야의 경계 안에서 그 시야 중심으로부터 사물의 순서를 매긴다. 탁자는 중앙에서 약간 왼쪽에 있고, 스탠드는 그보다 더 왼쪽에 있다는 식이다. 하지만 시야에 경계가 없다면, 그 시야에는 중앙도 없다. 경계가 없이는, 시야는 아무런 구조나 아무런 순서를 가질 수 없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 각 개인에게 구조와 순서를 주는 것은 시간이다. 시간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시간 없이 우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시간이 존재하기 위해서 공간이 필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중요한 물건들이 존재하려면 그 전제조건으로 공간이 필요하다. 로이가 죽을 때하는 독백을 생각해보자. 그것이 왜 중요할까? 로이가 그런 독백을 삶의 다른 지점에서 했다면, 그 의미는 꽤 달라졌을 것이다. 로이가 그 독백을 한 뒤 금방 건강해졌다면 그 말은 아주 코믹하게 들렸을 것이다. 죽음이 턱에 와 있지도 않은데 그런 소리를 했다면, 그가 신경과민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집어치우라고 했을 것이다. 로이가 불안한 살인 리플리컨트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집어치우라고 했을 것이다.
삶에서 한 사건이 갖는 중요성은 그 사건이 삶의 어느 시점에서 일어나느냐에 달려 있다. 하지만 삶에 시간적인 한계가 없다면 삶에서 시간적인 위치를 가질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시야에 경계선이 없다면 어떤 사물이 더 이상 공간적 위치를 가질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공간적 경계가 없는 시야는 시야가 아니다. 시간적 경계가 없는 삶도, 결국 삶이 아니다. 삶의 유한성은 그 삶에 있는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주는 ‘지평’이다. 그리고 그 지평 없이는 무슨 의미에서건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이 형태가 없고 그러므로 의미도 없는, 존재론적 혼란일 뿐이다.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지나가는 통로인 시간은 우리를 지금의 존재로 만드는 지평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미래를 향한 존재’다. 하지만 죽음은 우리 삶 안에 있는 것들에 반하는 궁극적 지평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우리는 '미래를 향한 존재‘이지만, 또한 더 근본적으로는 ’죽음을 향한 존재‘이다.
모든 존재로부터 우리를 구분 짓는 지평으로서의 죽음은 우리 삶에 의미를 준다. 죽음은 우리의 삶을 앗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럼으로써 삶이 우리에게 제공해준 모든 가치를 앗아가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당초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준 것은 바로 죽음이다. 죽음의 해악과 삶의 가치는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근본적으로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죽을 때 이 모든 순간들은 시간 속에 사라질 것이다. 빗속의 눈물처럼, 하지만 이런 순간들을 발견할 수 있다면, 정말 존재했다면, 그것은 우리가 죽음과 결속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제 죽을 시간이다.
블레이드러너 Blade Runner 1982년 /감독 리들리 스콧 /출련 해리슨 포드,룻거 하우어, 숀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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