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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열 시인/철학 강의

[스크랩] 유교문화의 이해

by 丹野 2009. 9. 27.

유교문화의 이해

                                 나 호 열 (경희대학교 사회교육원 교수)

1. 유교의 정의

 

 '유교 儒敎'라는 개념은 우리에게는 매우 친숙하면서도 친숙한 만큼 낯설게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儒敎, 儒學, 儒家, 또는 孔子學派 Confucianist School 등 다소간의 의미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유교로 통칭되는 사상 체계를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잘못으로부터 유교의 본질적 요소를 간과하기 쉽다. 司馬談( ? - BC 110)은 중국의 諸子百家를 陰陽家, 儒家, 墨家, 名家, 法家, 道德家로 구분하였는 바, 그중 유가는 儒 즉, 학자, 또는 文士로서 옛 경전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고대 문화유산의 상속자임을 자임하는 사람들을 뜻했다. 유흠 劉歆(BC 46 ~ 23AD)은 제자백가를 10家 로 구분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章學誠(1738 ~1801)및 章炳麟 은 周나라가 멸망하기 전에는 백성들의 교육을 맡았던 司徒들로서 군주를 도와 천지, 인간사, 자연의 도에 순응하며 교화를 밝히던 직책을 수행했다고 주장한다. 즉 儒들은 주의 멸망 이후 각 방면의 전문가로서 관리와 사상가의 구분이 없었던 前代의 관행에서 벗어나 자기의 사상을 타인에게 전수하는 직업적 교사로서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고 고전을 가르치고 예악을 실천하는 전문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유는 예에 밝았기 때문에 장례,제례, 혼례 등의 의식이 행해질 때 경전을 가르치거나 의식의 숙련된 보좌역을 수행함으로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유교의 사상적 특징과 발전 단계

 

  유교의 사상적, 학문적 체계는 公子 (BC 551~ 479) 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유흠에 따르면 유가는 六藝,六經을 연구하고, 인의도덕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易, 詩, 書, 藝, 樂, 春秋는 귀족을 가르치기 위한 교양교재로서 사용되었으나 봉건사회가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고유한 기능을 상실하였다. 육예, 육경 저술에 대해서 今文學者들은 공자의 저작이라고 주장하고 古文學者는 周公의 옛 문헌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述而不作의 정신을 되살펴 볼 때, 춘추를 저술하고, 역경을 서술하며, 예악을 개혁하고, 시서의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하였다는 고문학자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유교의 발전이 중국 전 시대에 걸쳐 발흥되었던 것은 아니다. 도가라 일컬어지는 老莊사상, 불교 등이 번갈아 각 왕조의 이념으로 자리잡음으로서 浮沈盛衰가 거듭되었음을 알 수 있다. 봉건제도가 붕괴되고 중국 최초의 중앙집권국가인 秦 나라가 등장한 전후를 구분으로 法家 이전의 유가를 선진유가, 宋에 이르러 주자에 의해 집대성된 유학, 즉 성리학으로 대별하여 유교의 체계를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중국 각 왕조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자. 중국의 역사는 기원 전 3000년 전 三皇五帝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삼황오제는 전설 속의 인물들로 역사적 사료로 논구될 수 없는 것으로 중국의 최초의 왕조로 간주되는 夏 (BC 2205 ~ 1766) 또한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바가 없다. 商 ( BC 1766~ 1123)은 역사적으로 고증이 가능한 국가로서 점을 치기 위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거북껍질이나 뼈에 새긴 갑골문이발견되고 있다. 周( BC 1122 ~ 256)는 황화지역에 산재한 군소국을 거느린 봉건국가였으나 말기로 갈수록 군소국가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격렬한 사회변동이 야기되었다. 앞서 언급한 제자백가가 등장한 것도 바로 이 때였으며 이 시기를 전국시대라고 칭한다. 기원 전 221년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봉건국가에서 중앙집권제 국가로 등장한 秦은 法家를 통한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려 하였으나 漢(BC 206 ~ 220AD)에 의하여 멸망하고 유가와 도가의 영향력이 증대되어 갔다. 한의 멸망 이후 약 400년간 ( 221- 589)분열의 시대가 지나고 신도가와 불가가 성행하였다. 隋(590 ~ 617)와 唐(618 ~906),특히 당 왕조는 불교의 융성이 극에 달한 시기로서 문화적으로도 고도의 발전을 이룬 시기였다. 宋은 정치,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유약하였으나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신유학, 즉 불교의 논리적인 측면을 받아들인 성리학이 주자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선진유학과 더불어 성리학은 우리의 정치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상이 되었다. 이후 元(1280 ~1367), 明( 1368 ~ 1643), 淸(1644~ 1911)에 이르기까지 정치, 문화 ,사상적 측면에서 우리에게 밀접한 영향을 끼쳤음을 간과할 수 없다.

선진 유가의 대표자는 공자, 맹자, 순자를 꼽을 수 있다. 그밖에도 兼愛說을 주장한 墨翟과 순자를 계승하여 법치를 주장한 법가도 크게 보아 유가에 포함할 수 있겠으나 그 영향력이 지속적이지 못했다는 점에서 논의에서 제외하고 위 세 사람의 주요한 주장을 요약하도록 하겠다. 유가 사상의 특징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정치적 이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유교라고 할 때에는 유가 사상이 통치이념화 하거나 유가의 성현이 종교적 추앙대상으로 받아들여졌을 때이다. 공자가 천하를 주유한 것은 열국이 쟁탈의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전쟁의 참화가 극에 달해 민중의 고통이 헤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제시한 仁은 오늘날에도 그러하지만 당시에도 현실화되기에는 너무나 이상적인 꿈에 불과했다. 그러나 공자는 인의 철학이 이루어질 수 없다하더라도 그것이 대의명분에 합당하다고 생각했으므로 그 뜻을 꺾지 않았다. 난세의 치유는 그의 正名論에 입각한다. 논어 顔淵 편에 君君, 臣臣, 父父, 子子 라 하였거니와 자신의 직분에 합당한 행위를 해야할 책임과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논어 里仁)에 표명된 바 義는 마땅히 해야 할 당위이며 따라서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 행위이다. 仁은 당위의 구체적인 실천내용이다. 인은 愛人이며 이는 忠恕로 행해야 한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絜矩之道라고도 할 수 있다. 공자는 인간은 일생동안 교육을 통하여 자기의 정신세계를 갈고 닦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인의의 실천을 통해서 참다운 德을 쌓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 爲政 편에는 열 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고 심십에 이립하고 사십에 불혹하였으며 오십에는 지천명하고 육십에는 이순하였으며 칠십이 넘어서는 아무 거리낌없이 행동하여도 법도에 그르치지 않았다고 술회하는 것이다.

孟子는 공자의 손자인 子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성선설을 주장하였다. 맹자에 의하면 인간 본성에 대한 세 가지 설이 있는데 그 첫 번째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설로 告子가 주장하였으며, 인간의 본성은 착해질 수도 있고 악해질 수도 있다는 설이두번 째이며, 마지막으로 어떤 인간의 본성은 선하고, 어떤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설이 있다는 것이다. 맹자의 성선설은 두 번째 설과 흡사한데, 거기에 덧붙여 인간에게는 동물에게는 없는 차마 남의 고통을 참지 못하는 不忍人之心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으로부터 四端說이 드러난다. 사단이란 惻隱之心, 羞惡之心, 是非之心, 謙讓之心이며, 仁義禮智의 四德을 이루는 근본이 된다고 본다. 맹자도 공자와 마찬가지로 천하를 순방하며 왕도정치를 부르짖고 패도정치를 혐오하였으며, 민본정치의 핵심을 강조했다. 즉 백성이 가장 귀히고 社稷이 그 다음이며 임금이 가장 가볍다고 하여 (맹자: 盡心下 14) 임금이 임금답지 못할 때는 혁명을 일으켜도 무방하다고 함으로서 공자의 정명론을 강화하였다.

荀子는 맹자의 성선설에 대립하여 성악설을 주장하였다. 순자가 생존했던 시기는 공자나 맹자가 활동했던 시대보다 상업적 부흥이 이루어지고 그만큼 사회의 약육강식 상태가 심각했을 것이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인간의 본성은 착하지 않으므로 마땅히 敎化되어야 하고 인간에게는 사단이 존재하지 않다는 의식이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순자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하고, 감각적 쾌락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려 했고, 인간은 지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악행을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순자는 예치로서 국가의 평안을 구하려는 노력을 경주했다. 순자 王制篇에서 '천지는 생명의 시원이며, 예의는 정치의 시원이다'라고 주장하면서 후에 법가의 기반을 이루는 형법정치의 기틀을 마련했다.

공자로부터 시작된 유학은 한에 이르러 武帝가 유학을 官學으로 선포하는 등 세를 이루는 듯 하였으나 隋와 唐代에는 불교의 상대적 융성으로 쇠퇴하고 송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새로운 기운을 북돋게 되었다. 선진유학의 취약점인 논리학적 개념의 부족, 우주론에 대한 이론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주염계(1016- 1073)는 우주의 근원이 태극이며 이것이 無極이라고 한다. 한 번의 움직임으로 양의 변화가 일어나고 고요해짐으로서 음이 생기며 이 양과 음이 결합하여 화수목금토의 五行이 생기고 오행의 기가 퍼져 사계절의 운행이 있게 된다고 하였다. (太極圖說), 이 밖에도 소강절, 장횡거도 세계의 구성 원리를 규명하려는 탐구에 힘을 기울였다.

 

 

 

 

 

 

 

주희 朱熹( 1130 - 1205)는 이와 같은 宋初의 우주론적 토대를 기반으로 성리학을 완성하였다. 즉 理는 실체의 논리적 선행조건이고, 氣는 음양과 오행의 순수한 내용이라고 파악했다. 그의 性卽理는 구체적 사물의 이가 性임을 밝히고 만물의 통합된 본체가 하나의 태극이며, 각각의 사물은 하나의 태극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만물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음양과 오행의 기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것이다. 本然之性은 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따라서 본연지성은 이 자체이므로 당연히 선할 수 밖 없으며 氣質之性은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므로 자연히 선악의 구별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주희는 이와 같은 우주론적 관점을 기반으로 인간의 교육 목표는 기질지성을 본연지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으로 본다.

大學은 예기에 속했던 편명이나 韓愈와 李翶에 의해서 재인식되면서 별도의 경으로 독립하였다. 주희는 대학을 국가가 백성을 가르치고 양속을 이루는 의도를 가지고서 학자가 修身과 治人을 행하는 방도를 가르치는 책이라고 인식했다. 대학은 三綱領과 八條目으로 구성되어 있는 바 그 대략적 요의는 다음과 같다. 삼강령은 明明德, 親民 혹은 新民, 止於至善으로서 명덕을 밝히는 일로서: 修己의 이념, 백성을 친하게 여김, 백성을 새롭게 함: 치인의 이념, 최선의 경지에 이르는 일: 최고의 포괄적 이념을 말한다. 팔조목은 格物,治知, 誠意, 正心, 修身은 修己의 단계적 과제이며 齊家, 治國, 平天下는 治人의 단계적 과제로 이 모든 과정이 대학의 道를 이루는 방책이 되는 것이다.

 

3. 우리나라의 유교 전파

 

 중국과 한민족이 교류가 이루어진 시기는 BC 13세기 까지 소급하여 볼 수 있는데 오랜 역사를 통하여 중국의 문화가 우리 민족에게 전래 되었음은 山海經에 기록된 바로 알 수 있다. 즉, 동이의 군자국은 의관을 갖추고 사양하기를 좋아하며, 다투지 않았다는 것은 유교의 예법이 존숭되었음을 뜻하며 부여의 喪俗이 5개월의 상례를 행하며, 흰빛의 상복을 입어 중국과 흡사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유교가 일찍이 우리나라에 유입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삼국시대에도 논어, 곡례, 효경 등이 경전으로 채택되어 忠,孝, 勇의 실천적 규범을 일상화하였고 화랑의 세속오계도 선진유학의 실천적 경향을 충실하게 따랐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는 달리 12세기 宋에서 발생한 신유학, 즉 주자의 성리학은 고려 충열왕 16년 1290년 安珦이 주자서를 베껴 오는 것으로부터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다. 고려의 통치기반인 불교가 쇠퇴하고 새로운 이념의 출현이 갈망되는 시기에 주자학은 불교에 대체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반을 착실하게 닦아나갔다. 牧隱 李穡( 1328 - 1396)은 이제현의 학맥을 이어받은 李穀(1298- 1351) 의 문하로서 1367년 성균관을 중수하고 대사성이 되어 주자학의 선봉에 서게 되는 것이다. 포은 정몽주, 삼봉 정도전, 양촌 권근 등은 이색의 문하에서 주자학을 크게 선양했던 인물들이다. 1392년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조선을 건국하게 되었을 때의 명분은 고려의 왕조가 왕씨 혈통을 이어받지 못했다는 것이었지만. 이들의 행보는 매우 달랐다. 정몽주는 대의를 저버리지 못한다 하여 척살 당하였으나 정도전은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활약하였고, 권근은 조선에 출사하기를 사양하였으나 후에 조정에 나가게 된다. 조선 초의 崇儒抑佛 정책은 왕실 내부의 추종자들의 불교 비호로 완전한 척결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儒彿 간의 분쟁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지속되었으며, 조선 초기의 의리중심의 유교는 조선의 안정기에 들어서는 성리학의 심도 깊은 궁리로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의 걸출한 성리학자를 배출하게 되었고,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유학이 지나치게 사변적이고 이념적인 방향으로 흘러감으로서 파생하게 되는 국치의 문란과 경제적 피폐함을 극복하기 위한 방향 전환으로서 실학적 관점에서 서학과 결합한 이용후생, 경세치용의 방편이 다산 정약용에 의해서 추진되고 있었다. 조선의 유학은 중국의 유학보다 더 철저하게 군왕의 덕치를 강조하였으며 군왕은 마땅히 獨樂을 버리고 與民同樂의 가치를 실행하여야 하는 막중한 책무를 떠맡게 되었다. 사대주의의 오명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오백 년의 역사를 통해서 유학의 실천적 과제를 잊지 않았고 大同社會의 구현을 위해서 몸을 던진 수많은 儒林에 의해 견제와 반성을 요구받았다고 볼 수 있다. 과거제도, 관직의 임용과 면직에 있어서는 오늘날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감독과 관리 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세습제 군왕은 군왕으로서의 자질을 함양하기 위해서 經筵의 수련을 게을리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西世東点의 세태를 이기지 못하고 東道西器 의 방책으로 맞서려고 하였으나 끝내 폐망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조선 유교사회를 살펴보면서 붕당과 파쟁의 폐해를 비난하고 현실을 도외시한 허례허식의 일면을 들추어내고 있으나 그것을 반드시 유교의 폐해라고 주장하는데에는 견강부회의 또 다른 축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4. 현대사회에서의 유교의 위치

 

 1910년 국치를 당하고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국가를 맞이하였다. 참혹한 3 년간의 전쟁과 군사 독재 속에서도 경제부흥을 이룩하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세계 10위 권 이내에 드는 경제강국으로 도약하게 되었고 서양의 문물과 정신이 당연히 우리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에 살게 되었다. 가족주의가 해체되고, 공동체 의식이 와해되고 있으며, 德보다는 法으로 분쟁을 해결하려 하는 송사 만능주의,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실종된 빈부의 갈등과 성 범죄의 증가, 목적을 상실한 입신양명의 교육 현장 등은 과연 100년 전 까지 유교국가였던 우리의 역사가 실존했는지 조차 의심하게 만드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형국에서 아직도 유교 때문에 우리 삶이 망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합당한 것인가?

1. 유교는 인문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법치가 되지 않는다

2. 공자의 온고지신 때문에 과거에 묻혀 산다.

3. 유교의 조상 숭배 의식은 주검을 숭배하는 의식이다.

이런 세 가지 이유 때문에 한국사회는 발전하지 못한다.

유교는 분명 우리나라에서 자생된 사상이 아니다. 공자로부터 시작된 유교는 어느 면에서는 우리나라에 활착되어 그 꽃이 만개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지면 상 사례들을 열거할 수는 없으나 역사에 이름을 올린 淸白吏들,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기개를 꺾지 않았던 忠烈志士들은 인의와 도덕의 실현이 결코 멀리 있지 않음을 증명한 사람들이다. 유교를 비판하는 세 가지 문제점에 대한 반박은 필요하지 않다. 진실로 공자를 이해하고 유학을 이해한다면 공자가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이며, 인간다움의 구현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에서 끝나는 것인지 저절로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

1)

사마담의 6가에 縱橫家, 雜家, 農家, 小說家 등을 포함하였으나 이중 소설가는 학파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2)

춘추는 BC 722 ~ 479년 까지 魯나라의 편년사이다. 易 은 卜書였으나. 유가들에 의해서 형이상학적 연구 대상이 되었다. 樂은 남아 있지 않다.

3)子曰 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 <<論語:述而>>

4)

법가는 荀子의 성악설을 이어받아 韓非子,李斯에 의해 성립되었다. 秦의 통치이념으로 유가의 德治에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주장이다

5)

子曰: 五十有吾而之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6)

孟子 公孫丑上 3에서 무력으로 仁을 가장하는 것을 覇道라 하고 도덕으로 인을 실행하는 것을 왕도라 한다. 힘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으로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며, 힘이 부족하니까 복종하게 된다. 그러나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는 것은 사람이 진심으로 기뻐서 복종하는 것이다.

7)

荀子: 正論篇에서 순자는 형법정치의 근간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사람을 벌주는 본의는 난폭함을 금하고 악함을 미워하며 미래를 밝혀가자는 것이다. 살인한 자가 죽지 않고 사람을 해친 자가 벌 받지 않는 것은, 난폭함을 은혜로 대하고 해침을 관대하게 하는 것으로서 악함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8)

근래에 들어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유교의 폐해를 밝히는 주장들이 있으나 오늘날 우리가 유교의 틀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 유교가 정신적 지주로서의 기능을 작동하고 있는지는 깊은 논구가 필요하다.

출처 : 세상과 세상 사이
글쓴이 : 장자의 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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