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天的 綜合判斷선천적 종합진단
Immanuel Kant 1724- 1804
독일의 철학자. 그는 페니히스베르크에서 탄생하여 그 곳을 떠난 일이 없으며, 시계와 같은 일과 속에서 생애를 學究에 바쳤다. 그의 批判哲學은 18세기의 啓蒙思想의 완성이요 극복이었다. 주요 저서로는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A 1781, B 1787, 實踐理性批判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1788, 判斷力批判 Kritik der Urteilskraft 1790 이라는 三 批判書 이외에 단순한 理性의 限界內에 있어서의 宗敎 Die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ssen Vernunft 1793 가 있으며, 그밖에 프롤레고메나 Prolegomena zu einer jeden kunftigen Metaphisik, die als Wissenschaft wird auftrelen konnen, 1783, 第一批判에의, 道德形而上學의 基礎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1765는 第二批判에의, 입문적 敍述이라고 할 수 있다.
- 순수이성비판 제 2판의 서문
Ⅰ. 純粹認識과 經驗的 認識과의 區別에 關하여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된다고 하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식능력은 대상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에 의해서 자극되어 활동을 한다고 할 것인가? 대상이 우리의 감관을 觸發하여, 한편으로는 스스로 表象을 일으키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悟性을 활동시켜서 표상을 비교하고 이를 결합하거나 또는 분리함으로써 감성적 印象의 소재를 대상의 인식이 되도록 加工케 하는데, 이러한 대상의 인식이 곧 경험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상으로는 우리는 어떠한 인식도 경험에 앞서지 않으며, 모든 인식은 경험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된다 할지라도, 그 때문에 반드시 우리의 인식이 모두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경험적 인식조차도 우리가 인상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것과, 우리들 자신의 인식능력이 (감성적 인상에 의하여 단지 機緣이 주어져서) 스스로 내주는 것과의 合成體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랜 연습을 통하여 認識力이 내주는 이러한 附加物에 注意를 하게 되고, 그것을 분리하는 데에 숙달될 때까지는, 그러한 부가물을 인식의 근본소재와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험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감관의 모든 인상으로부터도, 독립된 인식이 있는가 어떤가 하는 것은 적어도 보다 精緻한 探究를 요하는, 그리고 얼른 보아서 곧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인식을 先天的이라고 불러, 경험적 인식과 구별하거니와, 경험적 인식이란 그 근원이 후천적인 것, 다시 말하면 그 근원이 경험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선천적이라는 표현도 당면한 무제에 적합한 의미를 완전히 나타내기에는 아직 적확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경험적 근원으로부터 도출된 많은 인식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이다.: 즉 그러한 인식들은 직접 경험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보편적 규칙- 그러나 이 규칙은 그 자신 경험으로부터 이끌어내진 것이다- 으로 부터 도출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선천적으로 그러한 인식을 할 수 있다던가 가질 수 있다고, 그리하여 어떤 사람이 자기의 집의 기초를 파냈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 관하여 이렇게 주장한다: 즉 그는 집이 붕괴되리라는 것을 선천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집이 실제로 붕괴된다는 경험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고. 그러나 그는 이것을 완전히 선천적으로만 알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물체는 무게가 있다는 것과, 따라서 물체로부터 支柱가 제거되면 떨어진다고 하는 것을 그는 미리 경험을 통해서 熟知하고 있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선천적 인식이라는 말은 어떤 개별적 경험으로부터 독립하여 성립되는 인식이 아니라, 단적으로 一切의 경험으로부터 독립하여 성립되는 인식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선천적 인식에는 경험적 인식이, 즉 후천적으로만, 다시 말하면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한 인식이 대립한다. 그리고 선천적 인식 가운데에서 경험적인 것이 전혀 섞여 있지 않은 인식은 순수하다고 일컬어진다. 그리하여 예를 들면, “모든 변화는 그 원인을 가진다”고 하는 명제는 선천적 명제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순수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변화한 경험으로부터만 이끌어내질 수 있는 槪念이기 때문이다.
Ⅱ. 우리는 일정한 선천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보통의 오성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인식을 가지는 않는 일은 없다
여기에서 우리가 순수한 인식과 경험적 인식과를 확실히 구별할 수 있는 징표가 문제된다. 경험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것이 이러이러하다는 것은 가르쳐 주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와 다를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첫째로 필연성을 가지고 사유되는 명제가 있다면, 그 명제는 선천적 판단이다. 그 위에 또한 그 명제가 그 자신 또 필연적 명제로서 타당한 명제 이외의 어떤 명제로부터도 도출된 것이 아니라면, 그 명제는 端的으로 선천적이다. 둘째로 경험은 그 판단에 대하여 결코 진정한 즉 엄밀한 보편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想定된 그리고 비교적인 보편성을 (歸納에 의하여) 부여할 뿐이므로, 원래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우리가 지금까지 관찰한 한에 있어서는 이 규칙 또는 저 규칙에는 예외가 없다고. 따라서 어떤 판단이 엄밀한 보편성에 있어서 사유된다면, 다시 말하면 어떠한 예외도 가능한 것으로서 승인되지 않는다면, 그 판단은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것이 아니라 단적으로 선천적으로 타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경험적 보편성이란 예를 들면“ 모든 물체는 무게가 있다”고 하는 명제에 있어서와 같이 대부분의 경우에 타당하는 妥當性으로부터 모든 경우에 타당하는 타당성에로 타당성을 임의로 끌어올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반해서 어떤 판단에 엄밀한 보편성이 본질적으로 속해 있는 경우에는, 이러한 보편성은 판단의 특수한 인식원천을, 즉 선천적 인식의 능력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필연성과 엄밀한 보편성은 선천적 인식의 확실한 標識이며, 또한 상호 不可分離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판단을 사용함에 있어서는 판단에 있어서의 우연성을 지적하기보다는 판단의 경험적 제한성을 지적하는 편이 때로는 더 용이한가 하면, 또한 판단의 필연성을 지적하기보다는 우리가 판단에 대하여 부여하는 무제한의 보편성을 지적하는 편이 때로는 더 알기 쉬운 까닭에, 어느 것이나 모두 그 자신 확실한 이들 두 標識는 따로 떼어서 사용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이와 같이 필연적이며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보편적인, 따라서 선천적인 순수한 판단이 인간의 인식 가운데에 실제로 있다고 하는 것은 용이하게 지적할 수가 있다. 만일 그러한 하나의 예를 學問에서 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수학의 모든 명제들을 보기만 하면 된다. 또 만일 그러한 예를 보편의 悟性使用에서 구하고자 한다면,“일체의 변화는 하나의 원인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명제가 그 예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後者의 경우에 있어서는 원인이라는 개념은 그 자신 결과와의 연결의 필연성이라는 개념과 규칙의 엄밀한 보편성이라는 개념을 명백하게 내포하고 있으므로 만일 우리가 흄이 했듯이 어떤 事象과 그의 先行事象이 자주 함께 일어난다고 하는 사실이나 이 사실에 기인하는 표상연결의 습관(따라서 단지 주관적인 필연성)으로부터 원인의 개념을 도출하려고 한다면, 이 개념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또한 우리는 선천적인 순수원칙이 우리의 인식 가운데에 실제로 있다는 것을 그와 같이 예증할 필요도 없이, 그러한 원칙이 경험 그 자체의 가능을 위하여 불가결하다는 사실을 밝히고, 따라서 그것을 선천적으로 명시할 수가 있을 것이다. 경험은 규칙에 따라 진행하는 것인데, 만일 이 규칙이 모두가 언제나 경험적이요 따라서 우연적이라고 한다면, 그리하여 이 규칙들이 제일원칙으로서 승인될 수가 없다면, 아무리 경험적이라 할지라도 그의 확실성을 어디에서 얻으려고 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의 인식능력의 순수한 사용을 그 標識와 함께 사실로서 진술했다는 것으로 만족할 수가 있다. 하지만 판단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개념에 있어서 조차도 그 중의 약간의 것의 기원은 선천적임이 명백하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물체라는 경험개념으로부터 경험적인 일체의 것, 즉 색과 硬軟, 무게와 不可透入性까지도 차례차례 제거해 보라, 그래도 그 물체(이제는 완전히 소멸해버린)가 점유했던 공간은 남는다. 여러분은 이 공간을 제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모든 물체적 또는 비물체적 객관의 경험적 개념으로부터 경험이 알려주는 일체의 성질을 제거할 경우에, 그 객관으로부터 제거할 수 없는 성질이 있는데, 그 성질에 의해서 여러분은 객관을 실체 또는 실체에 속하는 것으로서 사유하는 것이다. (비록 실체라는 개념은 객관 일반의 개념보다 더 많은 규정을 내포하고 있지만), 그리하여 이 개념이 여러분에게 필연성을 가지고 육박해 오므로, 여러분은 이 필연성에 의하여 說服되어, 이 개념이 여러분의 선천적 인식능력 가운데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승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Ⅲ. 철학은 모든 선천적 인식의 가능성, 원리 및 범위를 확정하는 하나의 學을 필요로 한다.
위에서 말한 모든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즉 어떤 인식은 일체의 가능적 경험의 영역까지도 버리고, 경험에 있어서는 어디에서도 그것에 대응하는 대상이 주어질 수 없는 개념에 의해서 우리의 판단의 범위를 경험의 모든 한계를 넘어서 확장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感性界를 넘어서 있어서, 거기에서는 경험은 어떠한 指導도 訂正도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의 이성이 추구하는 바는 바로 이러한 인식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추구는 오성이 現象의 영역에 있어서 알 수 있는 어떠한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며, 또 그 궁극의도는 훨씬 더 고귀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처럼 중대한 탐구를 그 어떤 의혹이나 또는 輕蔑과 무관심으로 하여 단념하기보다는 차라리 오류에 빠질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모든 것을 내걸고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다. 순수이성 자신의 이러한 불가피한 과제는 神과 (의지의) 自由와 (영혼의) 不滅이다. 그리고 본래 온갖 태세를 다 갖추고 단지 이 과제의 해결만을 궁극의도로 하는 學은 形而上學이라 일컬어지는데, 그 방법은 처음에는 독단적이다. 다시 말하면, 이성이 그러한 大企圖를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를 미리 음미함이 없이 안심하고 이 기도의 실행에 착수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경험의 地盤을 떠나자마자, 그 유래도 모르면서 소유하고 있는 인식을 가지고, 또 그 근원을 알지 못하는 원칙을 신뢰하여, 그 기초를 세심한 탐구에 의하여 미리 확인하지도 않고, 즉시 建築物(학적 체계)을 세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성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모든 선천적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선천적 인식은 어떠한 범위와 타당성과 가치를 가질 수 잇는가 하는 문제를 미리 제출해 두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 자연스럽다는 말이 당연히 그리고 이성적으로 일어나야 할 일을 의미한다면, 실제로 이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은 없다. 그러나 이 말이 통상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의미한다면, 이러한 탐구가 오랫동안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보다도 더 자연스럽고 이해하기 쉬운 것은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인식의 일부문인 수학적 인식으로 말하면 고래로 信憑性을 가지는 것이요, 그로 해서 다른 부문의 인식 - 비록 그것이 수학적 인식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에 대해서도 유리한 기대를 가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위에 또 우리가 일단 경험의 범위를 넘어서 있으면, 경험의 부정을 받을 우려가 없다. 자가의 인식을 확장하려고 하는 刺戟은 매우 크기 때문에, 우리는 명백한 矛盾에 부딪침으로써만 그 진행에 제지를 받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假構를 신중하게만 한다면, 그것이 여전히 假構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명백한 모순은 회피할 수가 있다. 수학은 우리가 경험에서 독립하여 선천적 인식에 있어서 얼마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는가 하는 훌륭한 실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수학은 물론 대상과 인식이 直觀에 있어서 나타나는 한에 있어서만, 그것들을 다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은 간과되기가 쉽다. 왜냐하면 이 직관이라는 것 자신이 선천적으로 주어질 수 있으며, 따라서 단순한 순수개념과 거의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학이 보여준) 이성의 힘에 관한 그러한 증명에 이끌린 나머지, 인식을 확장하려고 하는 충동은 한계를 모른다. 경쾌한 비둘기는 자유로이 공중을 날되 공기의 저항을 느낌으로 해서 진공 중에서는 훨씬 더 잘 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품을는지도 모른다. 그와 마찬가지로 플라톤은 감성계가 오성을 束縛한다는 이유로 감성계를 떠나서, 理念의 날개를 타고 감성계의 彼岸에, 즉 순수이성의 진공 속에 감연히 뛰어들었다. 그는 자기의 노력이 아무런 진전도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는데, 이는 그가 오성을 움직이기 위하여 이를테면 자기가 의지하고 힘을 쓸 수 있는 지점이 될만한 아무런 저항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성의 건축물을 가능한 한 빨리 완성하고,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그 기초가 잘 놓였는지 어떤지를 탐구하는 것이 思辨에 있어서의 인간이성의 통상적인 운명이다. 하지만 그때에는 그 기초가 견고하다는데 관해서 우리를 안심시키거나 또는 그러한 뒤늦은 위험한 검사를 차라리 아주 거부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변명이 案出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건축 중에 우리로 하여금 일체의 불안과 의혹에서 벗어나게 하며, 마치 기초가 튼튼한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정에 의한 것이다.; 즉 우리의 이성이 하는 일 가운데에서 큰 부문, 아니 아마도 가장 큰 부문은 우리가 대상에 관해서 이미 가지고 있는 개념을 분석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우리는 많은 인식을 얻게 되는데, 이 인식은 비록 우리의 개념 가운데에 (아직 혼란하게나마) 이미 사유되고 있는 것을 해명 또는 설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리고 이 인식은 비록 질료 즉 내용상으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분해하는데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새로운 洞察과 동등하게 평가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은 확실하고 유용한 발전을 하는 참된 선천적 인식을 부여하기 때문에, 이성은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에 현혹되어 전혀 다른 종류의 주장을, 즉 이성이 주어진 개념에 대하여 전혀 딴 개념을 덧붙이는, 그것도 더구나 선천적으로 덧붙이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성이 어떻게 하여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있게 되는지 알지도 못하며, 또한 그러한 문제를 着想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맨 먼저 이 두 가지의 인식의 종류의 구별을 논하고자 한다.
Ⅳ. 분석판단과 종합판단과의 구별에 관하여
판단에 있어서는 主語와 述語와의 관계가 사유되거니와 (나중에 부정판단에 적용하기는 쉬운 일이므로 여기서는 긍정판단만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모든 판단에 있어서 이 관계는 두 가지로 가능하다. 술어 B가 주개념 A 속에 (은밀히) 포함되어 있는 어떤 것으로서 이 주어 A에 속하거나, 또는 B가 A와 결합되어 있기는 하지만 B가 전혀 개념 A의 밖에 있거나이다. 나는 前者의 경우에는 판단을 분석적이라 부르고, 後者의 경우에는 종합적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분석적 판단(긍정판단)은 술어와 주어와의 종합이 동일성에 의해서 사유되는 판단이지만, 이 결합이 동일성 없이 사유되는 판단은 종합적 판단이라고 일컬어야 한다, 우리는 전자를 설명판단, 후자를 확장판단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술어에 의해서 아무 것도 주어개념에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어개념을 분석에 의하여 그 개념 안에서 이미(비록 혼란하게나마) 사유되어 있었던 부분개념으로 나누는데 불과하지만, 그에 반해서 후자는 주어개념 안에서 전혀 사유되어 있지 않았던 하나의 술어를, 따라서 그 개념을 아무리 분석해도 이끌어내질 수 없는 술어를 주어개념에 덧붙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모든 물체는 연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분석적 판단이다. 왜냐하면 延長性이 물체와 결합되어 있음을 알기 위해서 나는 내가 가지는 나는 내가 가지는 물체라는 개념을 넘어설 필요가 없고, 단지 이 물체라는 개념을 분석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 술어를 물체라는 개념 속에서 발견하기 위해서는 나는 내가 언제나 그 개념에 있어서 사유하고 있는 다양을 의식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분석적 판단이다. 그에 반해서 “모든 물체는 무게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 술어는 내가 물체 일반이라는 단순한 개념에 있어서 사유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술어를 덧붙이면 종합적 판단이 된다.
경험판단 그 자체는 모두가 종합적이다. 분석적 판단을 경험 위에 定礎하려고 함은 불합리한 일이겠기에 말이다. 왜냐하면 분석적 판단을 만들기 위해서는, 나는 전혀 나의 개념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경험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체가 延長을 가지고 있다고 함은 선천적으로 확실한 명제요, 경험판단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경험에로 나아가기 전에 이러한 나의 판단을 내리기 위한 모든 제약을 이미 개념 속에 가지고 있어서, 나는 이 개념으로부터 모순율에 의하여 술어를 이끌어 내기만 하면 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나는 경험이 나에게 결코 알려주지 않을 판단의 필연성을 의식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서 물체 일반이라는 개념 속에는 무게라는 술어가 전혀 내포되어 있지 않지만, 그러나 물체라는 개념은 경험의 한 부분을 통해서 경험의 대상을 표시하며, 따라서 나는 이 부분에 대하여 동일한 경험의 다른 부분을 먼저 부분에 속하는 것으로서 덧붙일 수가 있다. 나는 물체라는 개념을 延長性, 不可入性, 形態 등의 徵表 즉 모두 이 물체라는 개념에 있어서 사유되어 있는 징표에 의하여 미리 분석적으로 인식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제야 나는 나의 인식을 확장하는 것이다. 즉 나는 내가 물체라는 개념을 이끌어냈던 경험을 돌아다봄으로써, 무게라는 것도 항상 上記한 징표들과 결합되어 있음을 알게 되고, 따라서 이것을 술어로서 물체라는 개념에 종합적으로 덧붙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게라는 술어와 물체라는 개념과를 종합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은 경험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개념은 서로가 다른 것 속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러나 경혐- 그 자신 직관의 종합적 종합인 - 이라고 하는 하나의 전체의 부분으로서 비록 우연적으로나마 서로 依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천적 종합적 판단에 있어서는 (경험적이라고 하는) 일한 보조수단이 전혀 없다. 내가 개념 B를 개념 A와 결합된 것으로서 인식하기 위하여 개념 A를 넘어서야 할 경우에, 내가 依支하는 것은 무엇이며, 이 종합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경우에 나는 경험의 영역 안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고 하는 이익을 가지지 못한다. “生起하는 모든 것은 그 원인을 가진다”고 하는 명제를 생각해 보자. 생기하는 어떤 것이라고 하는 개념에 있어서 내가 사유하는 것은 물론 하나의 現存在- 어느 시간이 선행한다는 등의 규정을 가지고 있는 현존재요, 이로부터 분석적 판단이 이끌어 내지는 것이다. 그러나 원인이라는 개념은 전혀 이 생기하는 것이라는 개념의 밖에 있으며, 생기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지시하고, 따라서 생기하는 것이라는 표상 안에 전혀 함께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서 일반으로 생기하는 것에 관하여 그것과 전혀 다른 어떤 것(원인)을 立言하기에 이르며, 또 비록 원인의 개념이 생기하는 것이라는 개념 속에 내포되어 있지 않지만, 그러나 그것을 생기하는 것의 개념에, 그것도 필연적으로 속하는 것으로서 인식하기에 이르는 것인가? 오성이 A라는 개념 밖에서, 그 개념과 다르되 그러나 그 개념과 결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술어B를 찾아낸다고 믿을 경우에, 오성이 의지하는 不可知的인 것 = X는 이 경우 무엇인가? 그것은 경험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위에 든 원칙은 (경험이 공급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큰 보편성뿐만 아니라 또한 필연성의 표현을 가지고, 따라서 전적으로 선천적으로, 그리고 단지 개념에 의해서 후자의 표상을 (원인이라는 표상) 전자의 표상(생기하는 것이라는 표상)에 덧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思辨的인 선천적 인식의 全窮極意圖는 그와 같은 종합적 원칙, 다시 말하면, 확장적 원칙에 기초를 둔 것이다. 왜냐하면 분석적 원칙은 물론 극히 중요하고 또 꼭 필요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지 개념의 판명성에 도달하기 위해서만 그러할 뿐이요, 이 개념의 판명성이란 참으로 새로운(지식의) 획득이라고 하는 할 확실하고도 확장된 종합에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Ⅴ. 이성의 모든 이론적 學에는 선천적 종합적 판단이 원리로서 포함되어 있다.
1. 수학의 판단은 모두 종합적이다.
이 명제는 반대할 여지없이 확실하며 또 그 결과에 있어서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인간이성의 분석가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예상과 정반대이었던 듯이 보인다. 그들은 수학자의 추리가 모두 모순율에 의하여 진전한다는 사실(이것은 모든 必當然的 確實性의 本性이 요구하는 바다)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 원칙도 역시 모순율에 의해서 인식되는 줄로 믿었지만, 이 점은 그들이 잘못 생각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종합적 명제가 모순율에 의해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 명제가 추론될 수 있는 또 하나의 다른 종합적 명제가 전제될 때에만 그러한 것이요, 결코 이 명제 자체에 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맨 먼저 주의하지 않으면 안될 일은 본래의 수학적 명제는 언제나 선천적 판단이요, 경험적(판단)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수학적 명제는 경험으로부터는 이끌어낼 수 없는 필연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이것을 시인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좋다. 나는 나의 주장을 순수수학에만 국한시키겠다. 순수수학이 포함하고 있는 것이 경험적 인식이 아니라 단지 선천적 순수의식 뿐이라고 함은 순수수학의 개념에 이미 수반되어 있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X처음에는 물론 7+5=12라는 명제가 단지 분석적 명제요, 일곱과 다섯과의 和라는 개념으로부터 모순율에 의하여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더 세밀히 고찰해 보면, 7과 5의 和라는 개념은 두 數를 하나의 數에로 결합한다는 것 이상의 아무 것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그로 해서 두 수를 합한 이 단일의 수가 어떠한 것인가는 전연 사유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열둘이라는 개념은 내가 일곱과 다섯과의 그러한 결합만을 사유함으로써 이미 사유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그러한 可能的 和의 개념을 아무리 분석할지라도, 나는 그 분석에서 열둘이라는 수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열 둘 이라는 수를 발견하려면) 우리는 두 數 중의 어느 하나에 대응하는 직관을, 이를테면 다섯 개의 손가락이나 또는 (제그너Segner가 그의 算術書에서 말한 것처럼)다섯 개의 점을 이용하여, 이 직관에 있어서 주어진 다섯이라는 수의 단위들을 차례로 일곱이라는 개념에 부가함으로써 이들 두 개념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된다. 즉 나는 우선 7이라는 수를 취하고, 다음에 5라는 개념 대신에 나의(다섯 개의) 손가락을 직관으로서 이용함으로써, 내가 5라는 수를 구성하기 위하여 미리 모아둔 단위들을 이제야 나의 저 (손가락이라는)형상에 의하여 차례로 7이라는 수에 부가한다. 그리하여 나는 12라는 수가 나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5가 7에 부가되어야 한다는 것은 내가 和= 7+5 라는 개념에 있어서 사유했던 것이지만, 그러나 이 和가 12라는 數와 같다고 하는 것은 내가 사유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산술의 명제는 언제나 종합적이다. 우리가 다소 더 큰 수를 생각해 보면, 이것을 더욱 판명하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경우에는 우리가 우리의 개념을 아무리 교묘히 다룰지라도, 직관을 이용하지 않고 우리의 개념을 분석하기만 해서는 和를 결코 찾아낼 수 없으리라는 것이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순수기하학의 어떠한 원칙도 분석적이 아니다. 직선은 두 점 사이의 최단선이라고 하는 것은 종합적 명제다. 왜냐하면 곧다고 하는 개념은 量에 관한 것을 포함하고 있지 않고, 다지 質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最短이라는 개념은 전혀 덧붙은 것이며, 분석에 의해서 직선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직관이 이용되지 않으면 안되며, 직관에 의해서만 종합은 가능한 것이다.
기하학자들이 전제하고 있는 약간의 원칙들은 물론 사실상 분석적이며, 모순율 위에 기초를 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동일명제와 같이 방법의 연쇄로서만 사용될 뿐이요 원리로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a=a, 즉 전체는 그 자신과 동등하다든가 또는 (a+b)>a, 즉 전체는 그 부분보다 크다든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명제로 말하면, 그것이단지 개념상으로도 타당하기는 하지만, 수학에 있어서 허용되는 것은, 단지 그것이 직관에 있어서 표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보통 우리로 하여금, 마치 그와 같은 必當然的 판단의 술어가 이미 우리의 (주어)개념 속에 들어있는 것처럼 믿도록 하며, 따라서 이 판단이 분석적이라고 생각하도록 하는 것은 단지 表現의 曖昧性에 지나지 않는다. 즉 우리는 주어진 개념에 대하여 어떠한 술어를 덧붙여서 사유해야 하며, 이러한 필연성은 이미 개념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주어진 개념에 대하여 무엇을 덧붙여서 사유해야 하는가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어진 개념에 있어서 단지 막연하게나마 실제로 무엇을 사유하는가 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술어가 이 주어진 개념에 필연적으로 속하지만, 그러나 그 개념 자신에 있어서 사유되는 것으로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에 덧붙어야만 하는 직관에 의해서 속한다고 하는 것이 분명해진다.
2. 자연과학(자연학 Phisica)은 선천적 종합적 판단을 원리로서 내포하고 있다.
나는 다음의 명제와 같은 몇 몇개의 명제만을 예로서 들고자 한다; 즉 物體界의 모든 변화에 있어서 물체의 量은 一定不變이다 라든가 또는 운동의 모든 전달에 있어서 작용과 반작용은 언제나 서로 같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 두 명제는 필연성을 가지며 따라서 그 근원이 선천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종합적 명제라고 하는 것도 명백하다. 왜냐하면 물질이라는 개념에 있어서 나는 持續性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물질이 공간을 채움으로써 공간내에 현존한다는 것만을 사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물질이라는 개념에 있어서 사유하지 않았던 것을 이 개념에 선천적으로 덧붙여서 사유하기 위하여 실제로 이 개념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명제는 분석적이 아니라 종합적이요, 그럼에도 또한 선천적으로 사유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과학의 순수한 부문의 그 밖의 명제들도 마찬가지이다.
3.
형이상학은 지금까지 헛되이 시도되어 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성의 본성으로 말미암아 불가결한 學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이러한 형이상학에도 선천적 종합적 인식이 내포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형이상학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사물에 관해서 선천적으로 구성하는 개념들을 단지 분석하기만 하여 그것을 분석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인식을 선천적으로 확장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주어진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을 이 주어진 개념에 넘어서서 덧붙이는 원칙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돠며, 선천적 종합적 판단을 통해서 그 자신이 추종할 수 없을 정도로 이 개념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면 세계에는 최초의 始初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등의 명제가 그러하다. 그 목적으로 보아서 선천적 종합적 명제만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Ⅵ. 순수이성의 일반적 과제
다수의 연구를 단일한 과제의 형식 아래에 총괄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우리의 소득은 매우 큰 것이다. 왜냐하면 그로 해서 우리는 자신의 일을 정확하게 한정하여, 그 일을 스스로 용이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그것을 검토해 보려고 하는 다른 사람이 과연 우리가 우리의 기도를 충분히 성취했는가 못했는가 하는 판단을 내리기도 쉽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순수이성의 본래의 과제는
어떻게 해서 선천적 종합적 판단은 가능한가?
하는 물음 속에 포함되어 잇는 것이다.
형이상학은 지금까지 불확실과 모순이 동요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 원인은 전적으로 사람들이 이러한 과제나 아마도 선천적 판단과 종합적 판단과의 구별조차도 더 일찍이 착상하지 못했었다고 하는 데에 있다. 그런데 이 과제가 해결되는냐, 또는 이 과제가 설명되기를 요구하는 가능성(선천적 종합적 판단의 가능성)이 실제로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함이 충분히 증명되느냐에 , 형이상학의 성패는 달려 있다. 데이비드 흄은 모든 철학자들 가운데에서 이 과제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던 사람이지만, 그도 이 과제를 충분히 명확하게 그리고 전반적으로 사유했다고는 도저히 할 수가 없고, 단지 因果結合의 종합적 명제(因果律 Principium caudalitatis)에만 머물러, 그러한 선천적 종합적 명제가 전연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혔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의 추론에 의하면 소위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가, 사실은 단지 경험에서 나왔으나 습관에 의하여 필연성의 假象을 띠게 된 것을 이성의 통찰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단순한 妄想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모든 순수철학을 파괴하는 주장이라 하겠거니와, 만일 그가 우리의 과제를 전반적으로 고찰했더라면, 그는 결코 그러한 주장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랬더라면, 그는 자기의 논거에 의하면 순수수학도 존재할 수 없으리라.- 순수수학은 확실히 선천적 종합적 명제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는 사실을 인정했을 것이요, 그렇게 되면 그의 훌륭한 지성이 반드시 그러한 주장을 막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과제의 해결은, 순수한 이성사용이 대상에 관한 선천적 이론적 인식을 포함하고 있는 모든 학문을 정초하고 완성할 수 있다는 것, 다시 마라면 다음과 같은 물음의 해답을 동시에 포괄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 순수수학은 가능한가?
어떻게 해서 순수자연과학은 가능한가?
이러한 학문들은 실제로 주어져 있으므로, 그것이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를 묻는다는 것은 물론 적절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학문이 반드시 가능하다고 함은 이 학문의 현실성에 의해 서 증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에 관해서는, 이 학문이 지금까지 진전이 좋지 못했으며, 또 지금까지 논술된 어떠한 형이상학에 관해서도 그 본질적 목적으로 보아 형이상학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누구나 그 가능성을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인식도 어느 의미에서는 주어져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비록 學으로서는 현실적이 아니지만, 그러나 素質(자연적 형이상학 metaphysica naturalis)로서는 현실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은, 박식하다고 하는 단순한 허영심이 동기가 되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요구에 몰려서, 이성의 경험적 사용과 거기에서 이끌어내진 원리에 의해서는 해답할 수 없는 문제에까지 끊임없이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그의 이성이 思辨을 할 만큼 넓어지면 어느 시대에나 어떤 하나의 형이상학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또 언제나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형이상학에 관해서도 문제는 다음과 같다;
어떻게 해서 소질로서의 형이상학은 가능한가?
즉 순수이성이 스스로 제출하고, 가능한 한 잘 해답하도록 이성 자신의 요구가 강요하는 문제들이, 어떻게 해서 보편적인 인간 이성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가?
그러나 이러한 자연스러운 문제들, 예를 들면 세계는 시초가 있느냐, 아니면 영원으로부터 존재하느냐 하는 따위의 문제들에 해답하려는 종래의 모든 시도에는 언제나 피할 수 없는 모순이 있었으므로, 우리는 형이상학에 대한 한갓된 소질에, 다시 말하면 언제나 그 어떤 형이상학이(그것이 어떠한 형이상학이든 간에) 발생하는 근원이 되는 순수 이성 능력 자체에 만족학도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형이상학의 대상을 알 수 있는가 알 수 없는가가 확정될 수 있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형이상학의 문제의 대상에 관해서나, 아니면 이 대상이 무엇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이성 능력의 有無에 관해서 결정을 내리고, 따라서 우리의 순수이성을 안심하고 확장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순수이성에 대하여 명확하고 확실한 제한을 가해야 할 것인가에 관해서 결정을 내릴 수 있지 않으면 안된다. 이상의 일반적 과제에서 나오는 이 최후의 문제는 당연히 다음과 같은 문제가 될 것이다. 즉,
어떻게 해서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은 가능한가?
그러므로 이성의 비판은 결국 필연적으로 學에 이른다. 그에 반해서 비판이 없는 독단적 이성사용은 근거 없는 주장에 대하여 마찬가지로 그럴듯한 주장을 대립시켜서 결국 懷疑論에 이르는 것이다
또한 이 (순수이성의 비판이라는) 학은 놀랄 만큼 광범한 것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學은 이성이 무한히 다양한 객관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성만을 다루는 것이요, 이성의 품 속에서 나와, 이성과는 사물의 성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 자신의 성질에 의해서 이성에게 제출된 과제만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만일 이성이 경험에 있어서 자기에게 나타나는 대상에 관한 자기 자신의 능력을 미리 완전히 알고 있다면, 모든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서 시도되는 이성사용의 범위와 한계를 완전히 그리고 확실하게 규정하기란 반드시 쉬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을 독단적으로 세우려고 한 종래의 모든 시도는 없었던 일로 간주될 수 있고, 또 간주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어떤 독단적 형이상학에 있어서나 분석은, 즉 우리의 이성에 선천적으로 내재하는 개념의 단순한 분해는, 결코 진정한 형이상학의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형이상학을 위한,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인식을 선천적 종합적으로 확장하기 위한 준비에 불과할 뿐이요, 따라서 그러한 목적에는 무용한 것이다. 왜냐하면 분석은 이러한 개념 속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지시할 뿐이요, 우리가 어떻게 해서 선천적으로 그러한 개념에 도달하여 모든 인식일반의 대상에 관한 그 개념의 타당한 사용까지도 규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지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독단적 형이상학의) 모든 요구를 포기하는 데에는 그다지 자제가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거부할 수 없는, 그리고 독단적 방법에서는 불가피하기도 한 이성의 자기모순이 종래의 모든 형이상학으로부터 그 명예를 빼앗은지 이미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인내가 필요한 것은, 내부적 곤란과 외부적 반대에 좌절되지 말고 인간 이성에게 불가결한 하나의 學, 거기에서 뻗어 나온 줄기는 모두 베어버릴 수 있으나 뿌리는 뽑아 버릴 없는 하나의 학(형이상학)을 종래의 방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촉진하여, 마침내는 무성하고 풍요한 성장을 기하는 일이다,
Ⅶ. 순수이성비판이라는 명칭을 갖는 특수한 학의 관념과 구분
상술한 내용으로부터 이제 순수이성비판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의 특별한 학의 관념이 생긴다. 왜냐하면 이성이란 선천적 인식의 원리를 부여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수이성은 어떤 것을 전연 선천적으로 인식하는 원리를 포함하고 있는 이성이다. 이러한 원리의 총괄이 곧 순수이성의 機關(Organon)이요, 이러한 원리에 의해서 모든 선천적 순수인식이 획득될 수 있고, 실제로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관의 周到한 적용이 순수이성의 체계를 마련해 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많은 수고를 요하며, 또 이러한 체계에 있어서도 일반으로 우리의 인식의 확장은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떠한 경우에 가능한가 하는 것이 아직 확정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순수이성을 비판하고 그 원천 및 한계를 판정하기만 하는 학을 순수이성의 체계를 위한 예비학이라고 간주할 수가 있다. 그러한 학은 하나의 理設이 아니라 순수이성의 비판이라고만 일컬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효용은 사변에 관해서는 실제로 소극적일 뿐이요, 우리의 이성을 확장하는데 이바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화하는데 이바지 할 뿐이며, 이성을 오류로부터 해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미 매우 중요한 소득인 것이다. 대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관한 우리의 인식이 선천적으로 가능한 한에 있어서 이러한 대상 일반에 관한 우리의 인식방식을 다른 모든 인식을, 나는 선험적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개념들의 체계는 선험적 철학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그러나 선험적 철학이라는 것도 한편 처음에는 아직 지나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학은 분석적 인식도 선천적 종합적 인식도 완전히 포함하고 있지 않으면 안되겠지만, 우리의 의도에 관한 한 그러한 학은 범위가 너무 넓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분석을 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인 선천적 종합의 원리를 그 전범위에 있어서 통찰하기 위하여 필요 불가결한 한에서만 분석을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구는 인식 그 자체의 확장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시정을 목적으로 하며, 모든 선천적 인식의 가치 또는 무가치의 표준을 부여해야만 하기 때문에, 우리는 본래 그것을 理說이 아니라 선험적 비판이라고만 부를 수 있거니와, 우리는 지금 이러한 논구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비판은 가능하다면 기관을 위한 하나의 예비요, 만일 기관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적어도 순수이성의 規準Kanon을 위한 예비이다. 그리고 이러한 규준에 의해서 결국 언젠가는 순수이성의 완전한 체계가 - 그것이 순수이성의 인식을 확장하는 것이든 또는 순수이성의 인식을 단지 제한하는 것이든- 분석적으로나 종합적으로나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체계가 가능하다고 함은, 그, 뿐 아니라 그러한 체계가 완성을 기대할 수 없을 만큼 큰 범위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함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미리 추정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즉 순수이성의 체계에서는 무진장한 사물의 성질이 대상이 되는 것이아니라, 사물의 성질에 관하여 판단을 내리는 오성이, 그것도 선천적 인식에 관계하는 한에 있어서만, 대상이 되는 것이며, 또 이러한 대상의 내용은 우리가 그것을 외부에서 찾을 필요가 없으므로, 우리에게 숨겨져 있을 리가 없으며, 아마도 아주 작아서 완전히 파악되고 그 가치 무가치에 따라 판정되고 정당하게 평가될만한 것이다. 더욱이 여기에서 우리가 기대해도 좋은 것은 어떤 책의 비판이나 순수이성의 체계의 비판이 아니라 순수이성능력 그 자체의 비판이다. 단지 이러한 비판이 기초에 놓여 있는 경우에만, 우리는 이 분야의 고금의 저작의 철학적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확실한 표준을 가지게 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자격이 없는 주장을 마찬가지로 근거 없는 자기 자신의 주장에 의해서 판정하게 되는 것이다.
선험적 철학이란 순수이성의 비판이 그에 대한 전설계를 건축술적(체계적으로), 다시 말하면 우리로부터 입안하여, 이 건축물을 구성하는 모든 부분의 완전성과 안정성을 충분히 보증해야만 하는 하나의 학의 관념이다. 그것은 순수이성의 전원리의 체계이다. 이러한 비판이 그 자신 곧 선험적 철학이라고 일컬어지지 않는 것은, 단지 비판이 완전한 체계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전선천적 인식의 周到한 분석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데에 기인한다. 그런데 우리의 비판이 상술한 순수인식을 구성하는 모든 기간개념의 완전한 열거도 명시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비판이 이러한 개념 자체의 주도한 분석과 여기에서 도출되는 개념의 완전한 비평을 하지 않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종합- 원래 종합을 위해서 全 批判은 존재한다-에서 발견되는 의혹이 분석에는 없으므로, 이러한 분석은 목적에 맞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의도에서 보면 면할 수가 없는 책임, 즉 그와 같은 분석과 도출의 완전성이라는 책임을 다룬다는 것은 설계의 통일성에 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분석의 이러한 완전성과 또한 앞으로 주어지게 될 선천적 개념으로부터의 도출의 완전성은, 그러한 선천적 개념이 결합의 주도한 원리로서 존재하고, 또 이러한 본질적 의도에서 보아 아무런 결함도 없다고만 한다면, 용이하게 보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수이성의 비판에는 선험적 철학의 모든 구성요소가 속해 있으며, 따라서 순수이성의 비판은 선험적 철학의 완전한 관념이지만, 아직 선험적 철학이라는 학 그 자체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비판은 선천적 종합적 인식의 완전한 판정에 필요한 한에 있어서만 분석을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학을 구분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착안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 어떠한 경험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개념도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것, 즉 선천적 인식은 완전히 순수해야 한다는 것이 곧 그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성의 최고 원칙과 그 근본개념은 선천적 인식이지만, 그러나 선험적 철학에 속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快와 不快, 欲求와 傾向性 등, 모두 경험적인 근원을 가진 자신의 명령의 기초로 삼고 있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것을 의무의 개념에 있어서 극복되어야 할 장애로서, 또는 동기로 삼아서는 안될 자극으로서, 순수이성의 체계의 구조 내에 필연적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험적 철학은 단지 사변적인 순수이성의 철학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실천적인 것은, 그것이 동기를 포함하고 있는 한, 감정에 관계하며, 감정은 경험적인 인식원천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체계일반이라는 일반적 관점에서 이 학을 구분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지금진술하려는 구분은 첫째로 순수이성의 원이론과 둘째로 순수이성의 방법론을 포함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주요 부문은 어느 것이나 더 세분되겠지만, 여기는 아직 극 근거를 설명할 자리가 아니다. 다만 이것만은 서론 또는 예고로서 필요할 듯 하다; 즉 인간의 인식에는 두 개의 근간이 있는데, 감성과 오성이 곧 그것이다. 이 두 근간은 아마도 하나의 공통적인, 그러나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뿌리에서 나오는 듯하다. 전자에 의해서 우리에게 대상이 주어지고, 후자에 의해서 그것이 사유된다. 그런데 감성이 선천적 표상을 포함하고 있어서, 그 표상이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제약을 형성한다면, 그런 한에 있어서 감성은 선험적 철학에 속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선험적 감성론은 원이론의 제 1부에 속하지 않 으면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인식의 대상이 주어질 수 있는 유일한 제약은 대상이 사유되기 위한 제약보다 선행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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