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들
권 혁 웅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1. 좋은 시에 관하여
좋은 시, 빼어난 시란 어떤 시일까? 지금처럼 각자 다른 미학을 주장하는 시편들이 백가쟁명 하는 시대에는 좋은 시의 기준을 한 가지로 제시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서정적 공명(共鳴)을 우선시하면 낡은 외장(外裝)을 지적 받을 것이며, 공동체 의식을 내세우면 상투화된 발언, 자의식 없는 주체라고 한 소리 들을 것이고, 전위와 파격에 공을 들이면 삶의 실체를 망가뜨리는 자의적인 조작이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방식이든 하나의 특장은 다른 의미의 흠결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좋은 시, 빼어난 시를 알아보아야 할까? 나는 좋은 시, 빼어난 시란 시적인 영향력이 얼마만한가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미래의 지평에 열려 있어야 좋은 작품이다. 많은 이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좋은 시는 아니지만(서정을 내세우는 이들은 쉽게 이 함정에 빠진다. 서정만을 평가 기준으로 삼으면 감상성과 대중 추수주의에서 자유롭기가 어렵다), 많은 시인들이 따라 하는 시라면 좋은 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전언을 갖고 있다고 해서 좋은 시는 아니지만(예전에는 이런 지도 비평가가 흔했다. 시와 시인을, 시적인 실천과 정치적인 실천을 혼동하는 폐해는 적은 것이 아닌데, 지금도 시를 깨달음의 차원에서 가르치는 이들이 없지 않다), 미학적으로 올바른 전언을 갖고 있다면 좋은 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실험을 시도한 시 모두가 좋은 시는 아니지만(과격하게 말하자면, 실험은 그 의도를 통해서만 성취를 보장 받는다. 독자는 왜 이런 실험을 했을까를 궁금하게 여기고, 그 궁금증이 풀리면 실험의 의의를 인정한다. 실험의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니며, 실험 자체의 파격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실험 자체에 대해서는 미학적 기준을 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어떤 절박함만이 실험을 가능하게 한다), 그 실험이 새로운 미학으로 인정된다면 좋은 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시는 후대의 시편들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문학사의 정통을 이루는 것이 아니겠는가? 새로운 시어를 도입하고 새로운 어법을 소개하고 새로운 주체를 제시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힌 시가 좋은 시, 빼어난 시다. 전대의 전범은 후대의 상투형을 낳는다. 이 글의 목적은 전범을 살핌으로써 최근의 우리 시에서 반복되는 어떤 상투형을 짚어보려는 데 있다. 그래서 이 글은 일종의 시론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시의 방법론을 무반성적으로 차용한 시들이 있다면, 그 시들이 상투적인 시들이다.
2. 시어들
80년대 들어, 황지우가 특별한 시어 하나를 우리 시에 도입했다. “生”이란 말이 그것이다. 60년대에 김광섭이 「생의 감각」이란 시를 쓴 이래 몇몇 시인들이 이 말을 다루었지만, 적어도 황지우만큼 지속적이고도 일상적으로 이 단어를 쓴 시인은 없었다.
자기를 매질하여 一生一代의 물 위를 날아가는 그 새(「오늘날, 箴言의 바다 위를 나는」) 그 똥개의 角膜→水晶體→網膜 속의, 나의 이 全身, 이 全貌, 이 全生涯의 바깥, 어디선가, 언젠가 우리가 꼭 한 번 만났었던 생각도 들고,(「똥개의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 그 운동장으로부터 20년 후/이제 다른 生涯에 도달하여(「비 오는 날, 幼年의 느티나무」) 부활의산, 영생하는산, 생의산,(「無等」) 자작나무는 누구의 生을 향해/큰 팔 벌리고 서 있는가/손 한 뼘의 생애를 다하여(「崔南端의 자작나무 앞에서」) 따사로운 桃花나무 아래/잠이나 원 없이 잤으면/生前까지 갔다 오는 멀고 먼 잠, 잤으면/다시 生後로 내려와 나는(「桃花나무 아래」) 이 몸을 바꿔버렸으면 털어버렸으면, 환생했으면!(「잠자리야 잠자리야」) 一生一代의 一劃(「삶」) 一生이여. 이 부피만큼 살아왔구나. (…) 때를 벗기면 벗길수록 生涯는 투명하다.(「나의 누드」) 노랑나비가 그 이상한 꽃에 홀려/一生으로 못 갈 바다를 따라갔다.(「봄바다」) 生後의 거센 바람 속으로(「出家하는 새」)
시집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1985)에서 뽑은 구절들이다. 이 시집에는 “생” “인생” “생애” “일생”이란 말과 그것과 동의어인 “삶”이란 말, 그것의 술어인 “살다” “살아 있다”란 말, 그것과 근친관계인 “세월” “유년”이란 말이 무수하게 출몰한다. 이 말들은 시인이 80년대를 관통하면서 부여잡아야 했던 삶의 실감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했다. 우리는 엄혹하고 고통스러운 시대를 살아 있다는 바로 그 사실만으로 견뎌내야 했다. 그 다음 시집(?게눈 속의 연꽃?, 1990)에서 이 시어는(출현 빈도가 현저히 줄어들기는 했지만) 늙어가거나 낡아가는 삶의 실존적인 표면을 부각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를테면 “청소부는 가로수 밑의 生을 하염없이 쓸고 있다”(「12월」)나 “바다로 간 거북이여/不死보다는 生이 낫지 않은가”(「비로소 바다로 간 거북이」)와 같은 구절이 그렇다. 90년대에는 기형도가 “기억”과 “추억”이란 시어를 같은 방식으로 우리 시에 소개했다. 이 시인은 지금, 이곳에 놓인 사물들의 형상에서 그때, 그곳의 형상을 찾아내곤 했다. 시인은 지금, 이곳의 삶이 아닌 그때, 그곳의 삶을 그 기억을 통해 말했다(그의 시에 일종의 물주구문(物主構文)이 흔히 등장하는 것도 같은 연유에서다. 뒤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한다). 기억의 형상은 둥글다. 자기 보존하는 것들의 속성은 가능한 한, 둥글게 몸을 웅크리는 것이다. “둥글다”라는 시어가 그의 시에, 그토록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둥글다”라는 시어는 동시대 시인인 이문재의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1988)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었다고/말한다, 좀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오래된 書籍」) 대기는 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어느 푸른 저녁」)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진눈깨비」) 휴일의 대부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흔해빠진 독서」) 추억은 이상하게 중단된다(「추억에 대한 경멸」)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정거장에서의 충고」) 누군가 나의 고백을 들어주었으면 좋으련만/그가 누구든 엄청난 추억을 나는 지불하리라(「가수는 입을 다무네」)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갑자기 거칠어진다(「10월」) 그렇게 가을도 가고 몇 잎 남은 추억들마저 천천히 힘을 잃어갈 때 (…) 나 또한 내 지친 정신을 가을 속에서 동그랗게 보호하기 시작했으니(「포도밭 묘지․1」) 돌아보면 힘없는 추억들만을/이곳저곳 숨죽여 세워두었네(「植木祭」)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었네(「그 집 앞」)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나리 나리 개나리」) 둥근 것은 참 단순하죠(「나무공」)
시집 ?입 속의 검은 잎?(1989)에서 가려냈다. 기형도는 흔히 “추억”, “기억”을 개념어로 다루지 않고 물화(物化)된 대상으로 다루었다. 인용된 시들에서 추억과 기억은 각각 ‘기록’(「오래된 書籍」), ‘눈발’(「진눈깨비」), ‘독서’(「흔해빠진 독서」), ‘회상’(「추억에 대한 경멸」), ‘표지판’(「추억에 대한 경멸」), ‘잠’(「정거장에서의 충고」), ‘사연(이야기)’(「가수는 입을 다무네」), ‘풍경’(「10월」), ‘낙엽’(「포도밭 묘지․1」), ‘나무’(「植木祭」), ‘(한 사람에 대한) 생각’(그 집 앞」), ‘운지법(運指法)’(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얼음장’(「나리 나리 개나리」)을 대신하는 말이다. 그것들은 지금은 증발해버린 예전의 어떤 삶을 표상하는 것이었다. “둥글다”라는 말은 그런 추억, 기억의 자기 보존적 성향을 가진 형상이다. “생”과 “기억”, 나아가 이들의 유의어(類義語)들은 후대 시인들의 잦은 활용에 따라 평면적인 말들이 되었다. 이제 그것은 익숙한 정서를 환기하는 익숙한 말들이다. 그만큼 황지우와 기형도의 문맥이 우리에게 익숙해진 셈이다(기형도 역시 “생” “인생” “일생”과 같은 말들을 흔하게 썼다). 여기에 “어둠”, “희망”, “절망”, “일상”, “고통” 같은 말을 덧붙이면, 상투어의 목록이 완성된다. 이 말들이 문맥에 포함되면, 시행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대신에 말할 수 없이 평평해져 버린다. 선행 시구들의 두께(그것도 무척이나 두툼하다)가 그것들을 지탱하고 그것들을 억누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만 더하자. 최승자는 “매독” “뇌수” “골수”라는 시어를 우리 시에 보탰다. 그녀는 당대의 고통을 단절된 사랑의 관계에 빗대어 말했다. 극단적인 고통은 순화된 시어들로는 결코 표현될 수가 없다. 최승자와 김혜순을 계기로 우리의 여성시는 고분고분한 서정, 순화된 서정에서 벗어나 드잡이하는 서정, 격렬한 서정으로 진입하게 된다.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마른 빵에 핀 곰팡이/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일찍이 나는」)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매독 같은 가을.(「개 같은 가을이」) 흐르는 물처럼/네게로 가리./(…)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매독균처럼(「네게로」) 그녀의 뇌세포가 방바닥에/흥건히 쏟아져 나와/구더기처럼 꿈틀거린다.(「어느 여인의 종말」) 저승의 물결 같은 선잠만 오락가락/밤새 내 머릿골을 하얗게 씻어가누나.(「선잠」) 종기처럼 나의 사랑은 곪아/이제는 터지려 하네.(「이제 나의 사랑은」) 꿈꾸지 않기 위하여/수면제를 삼킵니다./마지막으로 내 두뇌의/스위치를 끕니다(「외롭지 않기 위하여」) 그녀의 머리통이 깨어지고/꿈이 좌르르 쏟아진다/뇌수와 함께.(「술독에 빠진 그리움」) 고독의 핏물은 흘러내려/언제나 내 골수 사이에서 출렁인다.(「외로움의 폭력」)
시집 ?이 시대의 사랑?(1981)에서 고른 구절들이다. 최승자는 ‘저주 받은 시인’의 형상을 ‘버림 받은 연인’의 형상으로 바꾸었다. 그녀가 해부학적 시어들을 고른 것은, 대개 아픔이 육체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에 사로잡힌 인간은 육신을 분열된 것으로 인식한다. 병든 육체에 대한 시인의 집요한 묘사는 고통을 살아 있음의 유일한 증거로 인식해야 했던 당대의 시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그 후에 “골수”와 “뇌수” 같은 말들은 일종의 시적 클리셰(cliché)가 되어갔다. 이 시어들은 이후의 여성시에서, 순화된 서정의 대척점에 놓인 반의어로 목록에 올랐다. 격렬한 고통이 격렬한 시어를 고른 게 아니라, 격렬한 시어가 격렬한 느낌을 담보하는 방식이 되고 말았다. 이제 그 시어들은 더 이상 격렬하지 않다. 순서가 바뀌면서 상투화되었던 것이다.
3. 구문들
김명인은 새로운 구문들을 다양하게 활용하여 우리 시의 서술 방식을 크게 확장하였다. 많은 시인들이 많은 구문을 활용하였으나, 김명인만큼 시편들마다 구문의 다양한 변화를 실험한 시인은 드물었다. 김명인의 구문은 술어 변환을 통해 통상의 평서문을 변형한 것이라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의문①] 여기서 보면 질주는 적막한 흔적인 셈인가; 강한 것은 무엇인가(「무화과」) [의문②] 왜 바퀴를 굴려 스스로의 길 숙명처럼 이으면서/기차는 가야 하는지(「기차에 대하여」) [의문③] 저도 사람이/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일까(「갈매기 관찰」); 길이라면 어떤 길이든 스스로의 굴곡으로/사무치는 걸까,(「네 사람」); 졸음과 초롱을 함께 건너야 하는 걸까(「초록잠」) [의문④] 나/오지 않는 열차를 기다렸던가(「浮石寺」); 구름 꼈던가(「러시아 집」) [의문⑤] 기차를 창밖으로 보고 있었잖니?(「겨울 潛行」) [의문⑥] 아직 안개 몰골 아니냐(「겨울 潛行」); 그대 흉터 없는 바다를 보았느냐(「러시아 여자」); 그리운 마음이야 어째서/벌 나이 때문에 아뜩하겠느냐(「네 사람」) [의문⑦] 남쪽 항로를 꿈꾸게 되나(「네 사람」) [추측①] 어떤 새들은/우리가 모르는 하늘江/저 건너에서도 알고 있으리라(「새」) [추측②] 그 속꽃 만발할 테지(「무화과」) [부정] 눈물을 바치려고 그 새를 본 것은 아니었다(「새」) [추측①+부정] 갈매기는 내 무료함이나 메꾸어 주느라 저렇게 열심히/날고 있는 것은 아니리라(「갈매기 관찰」); 뛰노는 동안은/걱정 없으리라(「러시아 집」) [의문②+추측②] 덧난 상처들만 안타깝게 가시 눈총 세울 테지요?(「초록잠」) [주관적 개입] 여기선 알 수가 없지(「겨울 潛行」) [생략]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이라(「러시아 여자」) [생략+의문] 저 늙은 이팝나무의 자연은 새삼 무엇?(「초록잠」) [부름말] 그러나 속 모르는 길이여(「봄강」) [감탄] 나, 초록잠에 물들고 싶어라(「초록잠」); 뾰루지 움텄어라!(「4월」) [인용] 그게 사월인 거라고/이곳에서도 곧 꽃소식 전할 거라고(「4월」)
시집 ?푸른 강아지와 놀다?(1994)의 1부를 이루는 13편에서만 추린 것이다. 이 외에도 김명인의 시에는 “~라 하자” “~이랴” “~겠지” “~이 아닌가” “~인 것을!” “~이거니” “~하느니” “~일거야” “~해보자” “~하듯이” “~했는데” “~뿐이었다” “~일 줄이야”와 같은 술어들이 무수히 출몰한다. 이런 다채로운 술어들은 김명인 시의 풍경이 일종의 내면 풍경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의미를 가감하지 않는 술어는 어조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는다. 어조의 변화에 힘입어 시인은 통상의 풍경을 마음의 풍경으로 바꾼다. 평서문으로 적혀도 좋았을 풍경이(이 경우, 풍경은 객관에 가깝다) 주관의 작용에 의해 다양하게 변형되는 것이다. 후대 시인들은 김명인의 서법 가운데서, 평서문을 의문문으로 바꾸는 설의법 구문들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그중에서도 “~일까” 형식의 구문들이 가장 많이 활용되었다). 문제는 이런 인용이 단순한 시적 의장으로 쓰였다는 데 있다. 김명인의 구문은 자기반성의 결과다. 김명인의 술어 변환은 통상의 진술을 반추하는 마음의 작용에서 파생된 것이다. 단순한 대상의 묘사에 이런 방식을 적용하면, 묘사가 간접화 될 뿐이다. 거듭 걸러낸 풍경은 순수해지는 게 아니라 불투명해진다. 잘 닦인 창을 통해 풍경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간유리를 통해 풍경을 보는 형국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김춘수는 중성적인 시제를 실험했다. 그의 무의미시는 (시인이 말했듯 의미 배제의 시가 아니라) 짧은 서경시들인데, 시인은 이 시들에서 시간성을 소거했다.
桂樹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단배에 실려 印度洋을 가고 있다. 석류꽃이 만발하고, 마주 보면 슬픔도 金銀의 소리를 낸다. 멀리 덧없이 멀리 冥王星까지 갔다가 오는 金銀의 소리를 낸다.
시집 ?타령조․기타?(1969)에 실린 시 「보름달」이다. 이 시는 윤극영의 동요 「반달」을 시로 번안한 것이다. 시인은 첫 두 행을 「반달」에서 가져왔다. ‘쪽배’를 “돛단배”로, 은하수 건너에 있는 ‘서쪽 나라’를 “인도양”(인도는 서쪽에 있다)으로 치환했을 뿐, 세 번째 행의 의미도 동요와 같다. 4행 이하는 마주 서서 노래를 부르며 손뼉을 치는 이 노래의 율동을 은유한 것이다. “석류꽃”을 마주 선 두 사람의 벌어진 입술로, “금은의 소리”를 손뼉 치는 소리로 변환하고나면 이 점이 분명해진다. 그들의 손뼉 소리는 멀리멀리(“명왕성”까지) 퍼져갈 것이다. 김춘수는 이후에 전개된 무의미시에서도 이런 묘사 방식을 고수했다. 김춘수의 무의미시에 영향을 받은 시편들의 공통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고정된 시제다. 의식은 늘 현재형이기에, 자의식적인 시편들이 현재시제를 차용하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김춘수 시의 시제는 강조된 자의식의 특별한 산출물(시인은 시론에서 무의미시의 발생학적 배경으로 이 점을 힘주어 강조했다)이 아니다. 그의 시제는 서경(敍景)에서 비롯된 불가피한 결과라고 해야 옳다. 시에서 시제가 증발하고 나면, 시에 등장하는 대상과 사건은 의식의 자기 회귀적인 놀이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게 된다. 시제가 없으면 시간이 소멸되고 시간이 없으면 이야기가 사라지고 이야기가 불가해지면 대상을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시제가 없는 곳에서 결국 사건은 의식의 원환 운동일 따름이며 대상들은 의식의 가면 놀이에 불과하다. 시제를 소거하고 나면, 시는 극히 폐쇄적인 자기 발언의 테두리에 갇히고 마는 것이다. 기형도는 사물이나 관념을 주인으로 내세운 활유법을 즐겨 썼다. 사물을 주어의 자리에 놓는 방식은 드문 것이 아니다. 기형도가 동시대의 다른 시인들과 다른 점은 흔히 관념을 주어로 삼았다는 데 있었다. 이런 물주구문을 살펴보자.
발밑에는 몹쓸 꿈들이 빵 봉지 몇 개로 뒹굴곤 하였다.(「鳥致院」)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무책임한 탄식들이여/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물 속의 사막」)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정거장에서의 충고」)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가는 비 온다」) 그때 내 마음은 너무도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질투는 나의 힘」) 어떠한 권태도 더 이상 내 혀를 지배하면 안 된다./(…) /마침내 희망과 걸음이 동시에 떨어진다.(「그날」) 沈黙은 언제나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바람은 그대 쪽으로」) 그 불안한 발자국 소리에 괴로워할 나의 죽음들.(「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었네/(…) /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그집 앞」)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빈집」)
관념이 때로는 주체의 자리에서, 때로는 객체의 자리에서 사물화된 것을 볼 수 있다. 물화된 관념은 극단적으로 졸아든 관념이다. 화자는 사물화 된 감정을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이라고 주장할 수가 없다. 감정과 느낌은 화자의 상태를 지칭하는 것인데, 그것이 화자에게서 벗어나서 저처럼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사물화 된 관념 역시 화자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화자의 통제를 벗어난 자리에서 제 스스로 움직인다. 마치 내 밖의 사물들처럼 말이다. 기형도는 이를 통해 무자비한 세계와 소외된 자아로 이분화 된 세계를 형상화했다. 후대의 많은 시인들이 이 방식을 준용하여 시를 썼다.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이 구문이 외국어 구문의 직역이라는 데 있다. “그는 너무 피로해서 쓰러졌다”는 문장이 “피로가 그를 쓰러뜨렸다”는 문장으로 바뀌었다면, 이를 산문에서 시로 이행한 것이라 볼 수 있는가? 여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우리말의 어순을 파괴하는 모든 번역문장이 낯설게 하기의 예문이 될 수는 없을 것이지만, 표현의 효과를 도외시한 채 모든 물주구문을 타기해야 마땅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도 문제는 문제다. 더욱이 기형도 시가 가진 이런 표현법은 이미 우리 시에 깊숙이 스며든 것처럼 보인다. 둘째는 여기서 생긴다. 물주구문을 활용한 최근의 시 가운데 일부는 단순한 묘사의 방식으로 이를 활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주구문 자체가 시적인 효과의 처음이요 나중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코스튬에 가깝다. 이런 방식이 올바른 방식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송재학의 은유구문에 관해서도 이야기하자. 송재학이 즐겨 쓰는 은유는 은유 가운데서도 가장 단순한 형식을 가진 은유 곧 “이다” 형식의 은유(A=B이다)인데, 그 효과까지 단순한 것은 아니다. 시집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1997)에서 인용한다.
부드러운 연두색은/내 손이 닿지 못하는 등에 흘러내렸던 햇빛(「조문」) 원래 그 빛 덩어리는 죽기 위해 바다에 갔던 여자의 눈빛이다(「일출」) 분홍은 흰색을 벗어나려는 격렬함이다 (…) 분홍은 또 다른 감각에 도달하고픈 노루귀의 비밀이다(「흰색과 분홍의 차이」) 풀잎이 가진 초록이란/일생을 달리고도 벗어날 수 없는/오랑캐 들판(「풀잎」) 삶이란 살 속에 파묻은 고무호스 통해 빨아들인 몇 밀리리터의 공기를 몸의 칸수만큼 천천히 나누는 일,(「노인」) 모슬포 길들은 비명을 숨긴 커브여서/집들은 파도 뒤에서 글썽인다네(「모슬포 가는 까닭」) 가까이 다가가면 애월 길은 미끈거리는 食道(「애월 바다까지」) 앰뷸런스는 하나하나 불빛으로 바뀌는 울음의 슬로우 모션이다(「앰뷸런스」) 내가 만졌던 너는 벌건 숯덩이 이전에/악의 두께였다/(…) /참담하여라, 그러고도 너는 출렁거리는 호수이다(「애인」) 저녁의 저수지에서 찰랑거리는/종소리는/느림에서 정지 사이의 돋을새김(「고요가 바꾼 것」) 받아들일 수 없던 사랑, 낙동강의 결빙음, 매지구름은/내 육체가 붙들던 난간이었다(「빈집」)
송재학의 “이다” 은유가 가진 강렬함은 “이다”를 통해 만나는 두 대상의 거리가 통상의 시보다 훨씬 멀다는 데서 나온다. 시인은 이 먼 거리를 정확한 감각으로 짚어가며 은유의 목록을 작성한다. 간단히 살펴보자. 연두색은 내 손으로 다 형용할 수 없는 순한 빛이며(「조문」, 시인은 조문을 가는 길에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빛을 만난다), 떠오르는 태양은 깊은 상처를 숨긴 눈빛을 닮았고(「일출」, 여자는 고민 때문에 퀭한 눈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노루귀는 흰빛을 품은 분홍 꽃이다(「흰색과 분홍의 차이」). 풀잎의 초록은 넓은 들판을 온통 물들이고(「풀잎」), 노인은 인공호흡기에 의지하여 힘겹게 숨을 쉬고 있다(「노인」). 모슬포 길들은 급하게 꺾여 있고(「모슬포 가는 까닭」), 애월 길은 방파제 너머 파도를 받아 미끄럽다(「애월 바다까지」). 앰뷸런스의 불빛은 촌각을 다투어 다가오는 죽음 때문에 자세히, 천천히 묘사해야 하고(「앰뷸런스」), 애인은 열정으로 인해 불타거나 성애로 인해 출렁였다(「애인」). 종소리는 물 위의 파문처럼 아주 천천히 번져갔고(「고요가 바꾼 것」), 나는 아픈 사랑 때문에 난간을 붙들고 비틀거렸다(「빈집」). 송재학의 “이다”는, 한 대상에서 시작하여 긴 우회로를 지나 도달하는 다른 대상까지의 거리를 축약하는 말이다. “이다” 은유를 활용한 시인들은 한용운 이래로 무척 많지만, 송재학만큼 정교한 감각을 따라 멀리까지 나아간 시인은 많지 않았다. 이 구문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사물의 결을 잘 따라가야 한다. “이다” 은유는 본래 거칠고 성근 은유 방법론이다. 거기에는 동일시의 완력 같은 게 있다. 사물의 결을 제대로 존중하지 않으면, “이다”의 이쪽과 저쪽에 놓인 대상은 “이다”의 인력(引力)에 의해 제 형상을 잃고 일그러지기 쉽다. 그렇다고 해서 닮은꼴인 두 사물을 단순히 “이다” 형식으로 병치하면 초보적인 은유가 생겨날 뿐이다. 이 형식을 통해 멀리 나아간 은유 구문이 최근에 눈에 띄게 늘었다. 그것의 성과가 어느 정도인지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직 아닌 것 같다.
4. 구조들
이성복은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에서 시공간을 건너뛰는 자유로운 연상의 방식을 선보였다. 이 방식은 흔히 말하듯 초현실주의의 방법론을 차용한 것이 아니다. 그는 가능한 연상의 가짓수를 헤아려 범주를 설정하고 그것을 시작(詩作)에 적용했다. 그래서 그의 시를 관통하는 원칙은 철저히 이성적이다. 시 전체의 구조와 관련하여 몇몇 예를 살펴보자. 전문이 길어 시의 일부만을 든다.
① 누이가 듣는 音樂 속으로 늦게 들어오는/男子가 보였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音樂은/죽음 이상으로 침침해서 발이 빠져 나가지/못하도록 雜草 돋아나는데, 그 男子는/누구일까 누이의 戀愛는 아름다워도 될까/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정든 유곽에서」) ② 나는 아침 이슬 李氏 노을에 걸린 참새가/내 엄마 나는 껍질 벗긴 소나무 진물/흘리며 꿈꾸고 있어 한없이 풀밭 위를/달리는 몸뚱이 體位를 바꾸고 싶어 正敎會의/돔을 세우고 싶어 體位를 바꾸고 싶어/느낌표와 송곳이 따라와 노래의 그물에/잡히기 전에 어디 숨고 싶어 體位를 바꾸고/싶어 돋아나는 뾰루지 속에 병든 말이/울고 있어 병든 말을 끌어안고 임신할까 봐/지금은 다만 體位를 바꾸고 싶어(「口話」) ③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만났다/버리고 버림받았다 기도의 형식으로/나는 손잡고 입 맞추고 여러 번 죽고 여러 번/태어났다/흐르는 물을 흐르게 하고 헌 옷을/좀먹게 하는 기도, 완벽하고 무력한 기도의/형식으로 나는 숨쉬고 숨졌다//지금 내 숨가쁜 屍身을 밝히는 촛불들/愛人들, 지금도 불 밝은 몇몇의 술집(「연애에 대하여」)
① 늦은 밤 누이에게 들어온 “남자”는 누이가 듣던 음악프로의 진행자다. 내가 듣는 음악은 침침하고 우울한데, 누이는 그 남자의 목소리에 연애하듯 빠져 들었다. 다음으로 꿈의 내용이 나오는데, “韓半島”가 시달리는 것과 “伐木/당한 여자의 반복되는 臨終”(이것은 성교를 암시하는 이미지다)이 대비되면서 불행한 누이의 운명과 우리 민족의 운명이 동일시된다. 그 다음, 누이의 말이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의 말과 겹친다. “엘리, 엘리 죽지 말고 내 목마른 裸身에 못 박혀요/(…) 더럽힌 몸으로 죽어서도/시집가는 당신의 딸, 당신의 어머니.” 누이는 딸이자 어머니였다. 다르게 말해서 예수가 인류의 수난을 몸으로 겪은 존재라면, 누이는 우리 민족의 수난을 몸으로 대신한 존재였다. 그 다음, 별과 희망이 동일시되면서(“새벽까지 行進하는 나의 별” “광대뼈에 반짝이는/나의 별, 우리 韓族의 별”), 이 세상이 한편으로는 고통으로 가득 찬 곳(“유곽”)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사랑하고 사랑 받아야 할 곳(“정든”)임이 이야기된다. 이 시가 가진 연상의 방식은 이렇다: 은유적인 전이(음악프로의 진행자→누이와 연애하는 남자), 시간의 경과(늦은 밤→꿈)와 장소의 확장(하숙집→내 조국), 화자의 변환(예수→누이)과 확장(누이→우리 민족), 우의(나의 별=희망). ② (제목을 이룬) “口話”는 청각 장애인이 말하는 이의 입술 모양으로 알아듣고 소리 내어 말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제목은 온전한 의사소통이 단절된, 화자의 혼란스런 자기 발언을 보여준다. 과연 시는 6개의 일련번호로 나뉘어 다른 어조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인용한 부분만 살펴보자. 나는 “아침 이슬”이다. 이것은 전 단락에서 나온 “술 한 잔”에서 나온 말이다(예전에는 술을 마시고 “아침이슬”이란 노래를 부르곤 했다). 발음의 유사성에 기대어 “이슬”에서 “이씨”와 “노을”을 떠올리고, 전 단락에서 나온 “애를 낳았으면 좋겠어”란 구절에서 “엄마”가 나왔다. 참새가 엄마였으니, 나 역시 제대로 되었을 리 없다. 나는 “껍질 벗긴 소나무”여서 “진물”을 흘리고(성병에 걸린 육신을 은유하는 말이다), 그래서 “풀밭 위를” 마음껏 달리는 꿈을 꾼다. “체위”를 바꾸고 싶다는 말은 성교를 의미하는 말이면서,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말이기도 하다. “正敎會의/돔”이 바로 엉덩이다. 내 거듭된 발언이 곧 노래이고(노래는 반복이 생명이다), “느낌표와 송곳”은 노래의 끝에 붙는 감탄(둘은 닮았다, 느낌표가 찬탄이라면 송곳은 비난이다)이다. 이 노래, 이 소망이 다하기 전에 나는 진짜로 달라지고 싶다. 병든 “말”은 말[馬]이면서 말[言語]이다. 노래가 끝나기 전에, 아니 이 노래만으로 나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거기에 숨었다. 연상의 방식을 간추려보자: 언어유희(“이슬”과 “李氏”와 “노을”, “말”), “이다” 은유들, 은유적인 전이(“정교회의 돔”, “체위”), 제유(“뾰루지”→모든 상처), 반복. ③ “기도의 형식”은 성교 때의 자세를 말한다(②에서 말한 “체위”의 하나다). 나는 여러 여자를 만나서, 그녀들을 버리거나 그녀들에게서 버림 받았다. 나는 “흐르는 물을 흐르게 하고”(만나고 헤어지는 게 순리였거나, 여자들이 애액을 흘렸다는 얘기다), “헌 옷을 좀먹게” 두었다(내가 벗어던진 옷이 “헌옷”이다). 그것은 완벽했으나, 실제로 신에게 올린 기도가 아니었으므로 무력했다. 나는 여러 번 숨쉬고 여러 번 죽었다(①에서 말한 “벌목 당한 여자의 임종”과 같은 것이다). 죽은 나를 조문하는 애인들과 다시 살아난 나를 기다리는 애인들이 상가와 술집에 여전히 있다. 여기서 주된 연상의 방식은 여러 겹으로 둘러싸인 은유적인 전이다. 이성복은 이 시집에 실린 시편들에서, 시공간의 전환과 은유적인 전이, 비슷한 구문의 반복, 언어유희, 우의(이 시집의 중간 부분에 집중된 가족시편들이 주로 이 방식을 썼다), 인과 판단에 따른 진술 등을 자유롭게 활용하여 계기적인 연상의 고리를 만들어냈다. 이런 연상의 방법은 시집에 실린 가족 시편들과 함께 이후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영향에서 끝내 자유롭지 못하다면, 자신의 발언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시집이 없지 않았다. 한 가지만 덧붙이고 얘기를 마치기로 한다. 수필식 사고라 이를만한 상투형이 있다. 먼저 하나의 대상을 묘사한 다음에 그것의 의미를 덧붙이고, 그 다음에 자신의 반성적 진술을 덧붙이는 방식 말이다. 사물과 화자의 심정을 나란히 놓는 이 방식은 일종의 비교구문이다. 문제는 정형화된 비교형식이 비교 대상과 화자의 심사 둘 모두를 잡아먹는다는 데 있다. 이 방식으로 시를 쓰면, 대상이 추상화되고 반성이 상투화된다. 경계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5. 전범들
몇몇 전범을 살폈다. 새로운 시가 늘 좋은 것은 아니지만, 좋은 시는 언제나 새로운 시다. 시어에서 시의 구조에 이르기까지, 우리말의 가능성을 확장한 시편들은 이외에도 아주 많을 것이다. 새로운 시와 시인을 기다리는 것은 작은 불편(새로운 미학은 언제나 불편하다)을 감수하고 큰 편안(그 미학은 이후에 익숙한 미학으로 정립될 것이다)함을 기대하는 일이다. 지금의 시인들이 새로운 전범을 마련해주기를 기대한다.
.......................................................................................................................................................... 1967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하였고 고려대 국문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에 평론이, 1997년 <<문예중앙>>에 시가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황금나무 아래서}, {마징가 계보학}이 있으며, 평론집으로 {미래파}가 있다. 현대시동인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한양여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고 <<문예중앙>> 편집동인으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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