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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창작 강의

시의 기법의 발견과 그 수용 / 힌명희

by 丹野 2006. 3. 9.

 

 

 

시의 기법의 발견과 그 수용

-김수영 시 「전화이야기」를 중심으로

 

한명희(시인 ․ 삼척대 교수)

 

 

 

1. 문제 제기

2. 「전화이야기」의 기법

3. 「전화이야기」의 수용 양상

(1) ‘전화’ 담화를 통한 수용

(2) ‘전화’ 담화의 변용을 통한 수용

4. 결론

 

1. 문제 제기

 

해방 이후의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시인의 첫째자리에 김수영을 놓기를 주저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김수영은 시정신의 측면에서는 물론 시의 기법 면에서도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바 크다. ‘반복의 효과’는 김수영이 완성한 새로운 기술로 고평되고 있으며 ‘언어의 범속화’는 ‘김수영에 의해서 개발된 매우 중요한 현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시의 형식에 있어서도 김수영은 ‘이상과 더불어 현국현대시사상 가장 다양한 시형을 개척한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수영이 시에서 구사한 ‘풍자’와 ‘아이러니’의 기법도 주목에 값하는 것이다.

김수영의 시에 나타나는 이러한 다양한 기법들은 김수영이 시의 작품성에도 민감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실제 그는 산문에서 ‘최소한도 작품다운 작품’, ‘<문맥이 통하는> 단계에서 <작품이 되는> 단계’, ‘말하고자 하는 그 무엇을 어떻게 시의 수준에까지 올려놓느냐’ 등의 표현을 통해 ‘시의 예술성’을 강조한 바 있다. 시인에게 있어 ‘기법’이란 그가 시의 주제를 발견하고, 탐험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김수영이 시에서 개척한 새로운 형식과 기법들은 그의 시정신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이 글에서 살펴보고자하는 것은 김수영에 의해서 처음으로 시도되었다고 판단되는 기법을 사용한 시 「전화이야기」이다. 「전화이야기」가 새로운 기법을 보여주는 시임에도 불구하고 김수영 시에서 이러한 기법이 사용된 시를 더 이상 발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화이야기」의 기법이 우리 문단에 끼친 영향은 결코 작은 것이었다고 할 수 없다. 많은 후배 시인들이 자신의 시에 「전화이야기」를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화이야기」에 대한 연구가 후배 시인들에게 수용된 양상까지를 포함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전화이야기」가 서정시의 양식에 어떤 변화를 몰고 왔는지를 ‘전화’라는 소통 매체의 특성을 중심으로 고찰해 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후배 시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후배 시인들은 「전화이야기」를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지 구체적인 작품을 예로 들어가며 설명하려 한다.

 

2. 전화이야기의 기법

 

「전화이야기」는 김수영이 1966년 6월 14일에 써서 같은 해 9월에 ?한국문학?에 발표한 시로 김수영의 후기작에 속한다. 이 시에서 김수영은 ‘전화’라는 매체를 통한 화자의 발화라는, 이전의 우리 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담화 방식을 보여준다. 시에 의사 소통의 매체를 도입함으로써 화자의 발화 양식에 변화를 가져왔던 것으로는 편지 형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920년대, 임화가 「우리 오빠와 화로」에서 편지 형식을 활용하였던 것이 대표적인 예다. 편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화’라는 의사소통 매체를 도입하여 시의 목소리에 일대 변화를 가져온 것이 바로 「전화이야기」이다.

 

여보세요. 앨비의 아메리칸 드림예요. 절망예요.

八월달에 실려주세요. 절망에서 나왔어요.

모레면 다 돼요. 二백매예요. 特種이죠.

머릿속에 特種이란 자가 보여요. 여편네하고

싸우고 나왔지요. 순수하죠. 앨비 말얘요.

살롱 드라마이지요. 半島호텔이나 朝鮮호텔에서

공연을 하게 돼요. 절망의 여운이에요.

미해결이지요. 좋아요. 만족입니다.

新聞會館 三층에서 하는 게 낫다구요. 아네요.

거기에는 냉방장치가 없어요. 장소는 三백명가량

수용될지 모르지만요. 절망의 연료가 모자

란다구요. 그래요! 半島호텔같은 데라야

미국놈들한테서 입장료를 받을 수 있지요.

여편네하고는 헤어져도 되지만, 아이들이 불쌍해서요, 미해결예요.

 

코리안 드림이라구요. 놀리지 마세요.

아이놈은 자구 있어요. 구원이지요. 나를

방해를 안하니까요. 절망의 물방울이

튄 거지요.

내주신다면, 당신의 잡지의 八월호에 내주신다면,

특종이니깐요, 극단도 좋고, 당신네도

좋고, 번역하는 사람도 좋고, 나도 좋은 일을 하는 폭이 되지요.

앨비예요, 엘비예요. 에이 엘 비 이이. 네.

그래요. 아아, 그렇군요.

네에, 그러실 겁니다. 아뇨. 아아, 그렇군요.

 

이런 전화를, 번역하는 친구를 옆에 놓고,

생색을 내려고 하고나서, 그 訃告를

그에게 전하고, 그 무지무지한 騷亂 속에서

나의 소란을 하나 더 보탠 것에 만족을

느낀 것은 절망에 지각하고 난 뒤이다.

― 「電話이야기」 전문

 

위의 시는 크게 1, 2연과 3연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2연이 전화를 통한 발화 내용을 옮겨놓은 것인데 반해 3연은 전화가 끝난 후의 화자의 진술이기 때문이다. 먼저 ‘전화’를 통한 발화인 1, 2연에 주목해 보자. ‘전화’ 통화를 옮겼다는 것은 우선, 이 시가 ‘문자 언어’보다는 ‘구술 언어’의 특징을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하게 하는데 이 시에서는 ‘말하기’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전화 통화는 송화자와 수화자를 필요로 하는데 이 시에서는 송화자의 발화만 드러날 뿐, 수화자의 발화는 직접 언표되지 않는다. 이 시는 특정한 상황, 즉 출판사에 전화를 해서 원고를 실어달라는 부탁을 하는 상황이 설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극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이 극적인 상황이 화자의 일방적 독백으로 전달되고 있어서 알프레드 테니슨에 의해 처음 시도되어 로버트 브라우닝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하는 ‘극적 독백’의 모습과도 일견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이 시는 시인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극적 독백과는 다르다.

이 시가 전통적인 시의 발화 방식과도 다름은 물론이다. 엘리어트는 시의 음성을 세 가지로 구분하여 제시한 바 있다. 첫 번째 음성은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시인의 음성이다. 둘째는 많거나 적거나간에 청중에게 말하는 시인의 음성이며, 셋째는 시인이 만들어 낸 한 극중 인물로 하여금 시로서 말하게 하려고 할 때의 시인의 음성이다. 이 경우에 시인은 자기 자신이 말하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한 상상적 인물이 다른 한 상상적 인물에게 말을 한다는 한계 내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서정시는 이 세 가지 음성 중 하나로 씌어지거나 두 가지 이상을 결합해 씌어 것이다. 그러나 김수영의 「전화이야기」는 이 세 가지 음성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새로운 음성으로 씌어진 시이다. 앞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이시의 표면적 진술은 송화자의 그것만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독자들은 전화의 수화자가 되는 청자의 음성까지도 충분히 짐직할 수 있게 된다. 화자의 목소리 자체가 수화자의 영향을 받아 발화된 것이기 때문에 청자의 목소리를 짐작해가면서 이 시를 읽지 않는다면 시의 독해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청자(수화자)의 목소리가 어떤 식으로 개입하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자. 「전화이야기」의 1, 2, 3, 4, 5연은 수화자의 독백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수화자의 발화가 추측되기도 한다. 그러나 수화자의 발화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9연 “신문회관 3층에서 하는 게 낫다구요. 아네요”에 이르면, 이것이 수화자의 발화에 대한 응답임이 분명해진다. 송화자는 6, 7연에서 “반도호텔이나 조선호텔에서 공연을 하게 돼요”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문맥에 드러나지 않는 수화자의 발화, 아마도 “신문회관 3층에서 공연을 하자”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을 발화가 이어졌기에 송화자의 9연의 말이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아네요./ 거기에는 냉방장치가 없어요.”는 수화자의 발화에 대한 송화자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코리안 드림이라구요. 놀리지 마세요” 역시 수화자의 발화가 없었다면 나오기 어려운 말이다. 이 시에서 수화자가 발화했으리라고 추정되는 곳을 표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 )

코리안 드림이라구요. 놀리지 마세요.

( )

아이놈은 자구 있어요. 구원이지요. 나를

방해를 안하니까요. 절망의 물방울이

튄 거지요.

내주신다면, 당신의 잡지의 八월호에 내주신다면,

특종이니깐요, 극단도 좋고, 당신네도

좋고, 번역하는 사람도 좋고, 나도 좋은 일을 하는 폭이 되지요.

( )

앨비예요, 엘비예요. 에이 엘 비 이이. ( ) 네.

( )

그래요. 아아, 그렇군요.

( )

네에, 그러실 겁니다.( ) 아뇨. ( )아아, 그렇군요.

 

위에서 괄호 표시를 한 곳이 수화자가 발화를 했으리라고 추정되는 곳이다. 이것은 송화자의 발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곳이기도 하다. 괄호에는 순서대로 아메리칸 드림이 아니라 코리안 드림이다, 아이들은 뭐하는가, 작가 이름이 뭐라고 했는가, 잡지에 싣기는 어렵겠다, 우리에게도 사정이 있다, 미안하다, 우리 입장은 이렇다 등의 내용이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물론 수화자의 발화는 독자에 따라 다르게 추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발화내용을 독자나름대로 추측하게 만드는 것, 그러면서도 독자들이 비슷한 추측을 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이 시의 중요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수화자의 발화를 독자들이 삽입해서 읽게 되는 방식은 ‘전화’라는 의사소통 매체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화’는 ‘상대방의 참여’를 요구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화자가 발화할 때 그 내용과 어조 어법 등이 화자의 개성을 구현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전화이야기」처럼 청자의 목소리까지 추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문면에 드러나지 않은 청자의 개성까지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의 독자는 무엇보다 송화자와 수화자의 사적인 대화를 엿듣게 되는 입장에 놓인다는 특징을 지니게 된다.

지금까지 필자는 이 시의 1, 2연에 대해서만 얘기를 해왔다. 3연은 1, 2연의 상황, 즉 전화 통화가 끝난 후의 화자의 발화이다. 그러니까 1, 2연은 통화 내용을 재현하고 있는 것으로 시가 발화의 상태라는 전통적인 시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연에는 1, 2연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번역하는 친구’가 등장하는데, 이 친구는 1, 2연의 화자의 발화를 지켜보던 사람이다. 1, 2연의 화자의 전화는 이 친구를 위한 전화였던 것이다. 이렇게 전화의 용건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 시에는 ‘절망’과 관련된 얘기- ‘절망예요’, ‘절마에서 나왔어요’, ‘절망의 여운이에요’, ‘절망의 연료가 모자/란다구요’, ‘절망의 물방울이/ 튄 거지요’-와 가족과 관련된 얘기- ‘여편네하고/ 싸우고 나왔지요’, ‘여편네하고는 헤어져도 되지만, 아이들이 불쌍해서요’, ‘아이놈은 자고 있어요’가 불쑥불쑥 끼어들어 있다. 이렇게 송화자와 수화자의 대화가 통일성을 갖지 못하고 자꾸만 분산되는 것은 언어의 ‘구술’ 자체가 지닌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자 문화에서는 동질성, 획일성, 연속성이 중심이 되는 반면, 구술 문화는 다원성, 특이성, 비연속성을 특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3연의 청자, 그러니까 화자의 ‘번역하는 친구’는 화자인 송화자와 수화자의 담화를 엿듣게 된 상황에 처해 있다. 이것은 화자가 친구에게 “생색을 내려고” 일부러 친구 앞에서 한 전화이기 때문에 친구가 엿듣게 되는 것은 화자의 의도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이 시에는 1, 2연의 화자의 발화를 듣는 청자가 있고, 화자와 청자의 대화를 엿듣는 청자가 또 존재하는 액자구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화자의 목소리도 1, 2연에서 수화자와 직접 통화를 하는 목소리가 있는가하면, 전화 통화를 한 자신의 목소리를 재현하는 시를 쓰는 화자의 목소리가 겹으로 존재한다.

「전화이야기」는 ‘전화’라는 소통매체를 통한 발화라는 점 외에도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김수영의 시는 그가 독서한 책들을 소재로 한 것이 많은데 이 시에도 그가 독서한 글과 그 글의 내용이 그대로 시의 소재가 되고 있다. 이 시에서 화자가 제시하고 있는 작가는 ‘앨비’다. 김수영은 그의 산문 「반시론」에서 ‘앨비와 보즈네센스키의 싸움’이라고 하여 ‘앨비’를 거론한 바 있는데, 이 시 속에서도 앨비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전화이야기」의 화자가 “앨비예요 엘비예요. 에이 엘 비 이이. 네”라고 표현한 에드워드 앨비(Edward Albee)는 1928년에 미국에서 태어난 희곡작가이다. 1960년에 발표한 ?동물원 이야기?로 유명해졌으며 1961년에 ?모래상자?, 1962년에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를 발표했다. 1967년에는 ?미묘한 균형?으로 퓰리쳐상을 수상했으며, 1975년에 ?바다 풍경?으로 다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전화이야기」의 소재가 된 ?아메리칸 드림?(The American Dream)은 1960년에 앨비가 발표한 희곡 작품의 제목이다. 시 속에 “살롱 드라마지요. 반도호텔이나 조선호텔에서/ 공연을 하게 돼요”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전화이야기」의 「아메리칸 드림」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희곡 작품은 응접실이라는 단일한 무대에 마마, 대디, 그랜마, 미시즈 베이커, 더 영 맨의 다섯 인물이 등장하는 단막극인데, 「전화이야기」의 화자가 잡지사 직원에게 이 작품을 ‘살롱 드라마’라고 소개하는 것은 김수영이 이 희곡의 내용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전화이야기」는 김수영이 읽은 책을 시의 소재로 활용했다는 점도 특징적이지만, 특히 ‘전화’라는 의사 소통매체를 시에 도입하여 서정시의 양식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 될 작품이다. 소설의 경우, ‘최초의 전화 텍스트’는 박완서가 1994년에 발표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라고 한다. 이보다 18여년 앞서 김수영은 「전화이야기」를 통해 전화를 통한 담화 형식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김수영이 「전화이야기」에서 보여준 기법은 많은 후배 시인들의 시에서 수용, 변형된다. 다음 장에서는 그것이 어떤 양상으로 드러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3. 「전화이야기」의 수용 양상

(1) ‘전화’ 담화를 통한 수용

 

김수영이 남긴 170여 편의 시 중 ‘전화’라는 의사 소통 매체를 통한 담화 양상을 보여준 시는 「전화이야기」 단 한 편뿐이다. 그러나 김수영 이후의 많은 시인들이 「전화이야기」에서 김수영이 보여준 기법을 자신들의 시에 수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전화’라는 소통 매체의 도입에 그치지 않는다.

 

여보세요 雨期야요 전화할 수

없었어요 어제도 없었어요 그저께도

없었어요 심연이야오 망설임이야요

가방을 들고 제3한강교를 기어갔어요

여보세요 내 말 들려요? 雨期야요 내 원고는

온통 가짜야요 내가 잘 알아요 흐느낌이 없어요

피를 흘리지 않아요 웃으면서 썼어요

발로 썼어요 개발 소발 웃음을 참으면서

지겹게 썼어요 찢어 버렸어요 내가 쓴 논문도 가짜야요

여보세요 거울이 웃어요 거울이

나를 보고 있을 때 비로소 산이

보여요 어제부터야요 산으로 올라가는

개미가 절망이 탄식이 욕설이 어제부터야요

부쓰의 아이러니야요 부쓰 부스 그래요 장화? 케네쓰

버크 놀이의 절망 모티프의 절망 구토 탐닉

거지같은 시야요 여보세요 그래서 기뻐요

전화할 수 없었어요 고마와요 오 윌리 닐리

여보세요 끊지 말아요 끊지....

-이승훈, 「전화」, ?당신의 방?, 문학과지성사, 1986, p. 91.

이 시는 김수영이 「전화이야기」에서 보여준 기법을 상당부분 이어받고 있다. 제목부터가 「전화」로 되어 있는 이 시는 의도적으로 김수영의 「전화이야기」를 차용하고 있다는 느낌까지 준다. 「전화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던 ‘절망’이 이 시 속에서도 중요한 시어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 「전화이야기」가 앨비의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번역 원고에 대해 송화자가 이야기하는데, 「전화」에서도 자신이 쓴 ‘원고’, ‘논문’에 대해 송화자와 얘기하고 있다는 점 등이 그런 느낌을 갖게 한다. 또 이승훈의 「전화」에서 ‘부쓰’와 ‘케네스 버크’라는 외국 문인의 이름이 거론되는 점도 「전화이야기」에서 ‘앨비’를 거론한 것과 비슷한다.

이승훈이 이 시에서 보여준 독창적인 면이라면 ‘부쓰’를 ‘장화’에 연결시키는 펀(pun)의 기법이 사용되었다는 것, 또 “거울이 웃어요 거울이/ 나를 보고 있을 때 비로소 산이/ 보여요”에서 초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시가 강력한 선배 시인 김수영이 성공적으로 마련한 기법을 능가하는 시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시는 ‘내 원고’ ‘내가 쓴 논문’에 대한 회의를 통해 자의식을 탐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김수영의 시와는 변별된다. 이승훈의 「전화」에서 수화자와 발신자의 교호 작용이 「전화이야기」에서만큼 중요하지 않고 화자의 발화 자체가 더 중요해 보이는 것은 이러한 자의식 탐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여보세요 내 말 들려요”와 “여보세요 끊지 말아요 끊지……”는 수화자와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는 상황을 효과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승훈 시의 이러한 특성은 1975년 6월에 쓴 시 「겨울 저녁」에서도 이미 드러났던 것이다. 그러나 「겨울 저녁」 역시 「전화」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므로 여기서는 자세히 분석하지 않는다.

 

어이 이봐 이거 공중전환데, 이리루 잠깐 얼굴 내밀 시간 없어? ∨ 어디냐구? 강서구청 뒤야. 땅에 포원이 진 서울 사람들이야 믿기 힘들겠지만 여긴 시골 학교 운동장 같은 빈터가 있어.∨ 아냐, 그런 이야기가 아니구, ∨ 요즘 내가 신경이 좀 이상하다구? 이런! 아니 글쎄(이건 유행가 제목이군) 그 이야기가 아니구 잡풀 그래 잡초 말이야. 여긴 그게 많단 말이야.

 

이런 빌어먹을. 여긴 내가 매일 좀 앉았다가 가는 장소거든. 답답해 미치겠어. 잡풀에게도 이름이 있을 게 아냐? 아니 이것 봐, 이름을 알아야 불어내어 말이라도 좀 해 볼 것 아냐? ∨ 뭐라구? 지랄한다구! 그래 지랄이야 하든 말든 좋아. 넌 농림학교 출신이지? ∨ 식물 도감이 틀려! 식물 도감이 엉터리라구. ∨ 뭐라구? 잡풀은 잡풀이라구? 이런 빌어먹을. 아니 이 세상에 이름이 없는 게 어디 있어! 글쎄, 나 원, 아니 그럼 대중도 사람 이름이냐? 군중도, 시민도, 행인도? 이거 나 참!

- 오규원, 「공중전화」, ?이땅에 씌어지는 抒情詩?, 문학과 지성사, 1981, p. 66.(∨ 표시 인용자).

 

오규원은 ‘전화’라는 소통 매체를 그대로 활용하고 있지만 그 전화를 ‘공중전화’로 바꾸어 놓는다. ‘공중전화’는 ‘전화’보다 운동장 빈터에 자라고 있는 잡풀들의 이름이 궁금해진 화자의 급한 심정을 전달하기에 보다 효과적인 매체이다. 여기서도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은 화자의 목소리 외에 화자와 같은 시간상에서 교호 작용을 하고 있는 청자의 목소리를 느끼게 된다. 이 시의 독자는 이 두 사람만의 사적인 대화를 엿듣는 듯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 표시를 한 부분은 수화자가 무언가 발화를 했으리라고 추정되는 곳이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 부분을 통해 시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수화자의 개성까지도 짐작하게 된다.

오규원의 「공중전화」는 ‘전화’와는 다른 측면에서도 김수영의 영향을 느끼게 한다. 이름없는 잡풀을 ‘대중’, ‘군중’, ‘시민’ 등에 비유함으로써 김수영이 그의 시 「풀」을 통해 이룩한 것으로 여겨져온 민중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오규원의 「공중전화」에는 김수영의 「전화이야기」의 기법과 「풀」의 민중 이미지를 결합되어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이승훈, 오규원의 시가 김수영의 영향을 비교적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면, 다음에 인용할 시들에서는 김수영의 영향이 감추어져 있다.

보러 가자. 정확한 시간은 물라. 내가 어떻게 지들이 언제 그러고 있는지 알겠어? 바다와 달, 지들끼리 알아서 할 문제야. 우린 그냥 지들이 그러는 동안에 갈라진 바다 사이로 하섬 가면 되는 거야. 생각해봐. 장화를 빌려 신고 갈라진 바닷속을 걷는 거야. 불도 없는 섬을 향해 달빛이 교교히 비치는 바다를 건너가는 거야. 그리고, 또 다음날 보름달이 바다를 다 마셔버리면 우리는 또 그 섬을 나오면 되는 거야. 원불교 섬인데 지금 아무도 없어. 갈래? 시인이 그런 데 안 가면 되니?

-김혜순,「부안군 변산면 마포리 하섬」 부분,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 지성사, 1994. p. 32.

 

「부안군 변산면 마포리 하섬」은 1, 2, 3, 4의 네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위에서 인용한 것은 1이다. ‘1’의 끝, “시인이 그런 데 안 가면 되니?”의 뒤에는 “이영자의 전화”라는 미주 표시가 붙어 있다. 그러니까 인용하지 않은 2, 3, 4는 화자의 발화이고 인용한 부분은 ‘이영자’의 발화를 화자가 재현한 것이다. 그러니까 화자의 친구 이영자가 ‘시인’인 화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하섬이라는 곳에 같이 가기를 권유한 것을 화자가 다시 옮겨 적은 것이 인용한 부분인 것이다.

이 시가 ‘전화’라는 매체를 통한 담화임이 분명하고 송화자와 수화자가 분명히 제시되어 있지만, 여기서 수화자의 역할은 앞의 두 시에 비해 현격히 제한되어 있다. 이영자는 ‘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하섬이란 곳에 같이 가기를 권유하고 있지만, 굳이 ‘시인’의 반응을 살피지는 않는 듯이 보인다. 그냥 하섬의 신비로움에 대해 청자에게 전달하는 것 자체로 만족하는 듯이 보이는 것이다. 김혜순의 이 시는 전화라는 소통 매체를 활용하고 있으면서도 시의 표면적 화자가 청자의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기법이라고 생각된다. 김승희는 김혜순과는 또다른 차원에서 ‘전화’를 새롭게 활용하고 있다.

 

여보세요, 385의 2053입니다.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어 대단히 죄송합니다, 전화거신 분의 성함과 연락처를 말씀하시면 제가 곧 연락드리겠어요, 그럼 삐- 하는 소리가 난 후 말씀을 시작해 주세요…….

여보세요, 김 선생님, 저 문학사상 김명순인데요, <시녀> 후기 원고 어떻게 되셨나 해서요, 마감날이 사흘이나 지났는데……외출하셨나보군요, 빨리 연락주세요!……

―김승희, 「떠도는 환유2」 부분,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세계사, 1991.

 

이 시는 송화자와 수화자가 뚜렷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발화가 모두 시의 표면에 등장한다. 그러나 그 발화는 동일시간대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시간을 달리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전화 중에서도 ‘자동응답기’라는 새로운 매체가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 새로운 시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시에는 “여보세요, 385의 2053입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자동응답기에 녹음해놓은 목소리와 “여보세요, 김 선생님, 저 문학사상 김명순인데요”라고 하면서 이 목소리와 교호 작용을 하는 또다른 목소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두 사람의 교호 작용은 동시간대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시간차를 두고 일어난다. 이 경우는 각각의 발화가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은 현저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런 기법은 ‘의미와 단절된 목소리의 유형들만이 떠도는 이 시대의 삶을 암시’한다.

‘자동응답기’의 등장 이후에도 삐삐, 핸드폰 등이 등장해서 생활 양식의 변화는 물론, 시의 담화 형식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이 ‘통신수단’의 발달 양상을 끝까지 추적하는데 있지 않으므로 삐삐나 핸드폰을 활용한 시들을 이 논문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여기까지의 설명만으로도 김수영의 영향을 얘기하기에는 충분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2) ‘전화’ 담화의 변용을 통한 수용

김수영은 시에 전화라는 소통 매체의 특징을 도입함으로써 시에 변화를 가져온다. 그 변화의 대표적인 것은 화자와 청자가 동일한 시간대에 발화하면서 서로의 발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 또 시의 독자는 화자와 청자의 사적인 대화를 엿듣는 듯한 상황에 놓인다는 점 등일 것이다. ‘전화’라는 매체를 통하지 않고도 이러한 특징을 그래도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낸 시인들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황지우이다.

 

절망의 시한폭탄은 아니구요. 디 임파서블 드림예요. 가방이죠. 열어보라구요. 그러죠, 뭐. 사건은 없어요. 아 이게 뭐냐구요.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죠. 아편은 아니구요. 온건하지요. 다른 저의는 없어요. 필독서예요. 은유가 전혀 없구요. 알리바이에 대한 일종의 옹호에 불과해요. 아, 이건 또 뭐냐구요. 한국 경제의 전개 과정이죠. 이젠 굶는 사람은 없잖아요. 외채는 할 수 없어요. 1인당 70만 원이라메요. 몇 사람이라도 집중적으로 배부르게 해야죠. 그게 성장의 총량을 명시적으로 늘리는 방법이죠. ..... 이건 뭐냐구요. 어려워요. 오리지날이죠. ....

-황지우, 「아, 이게 뭐냐구요」,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개정판, 민음사, 1995, pp. 47-49.

 

이 시는 ‘<전화 이야기> 풍으로’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부제가 보여주는 것처럼 이 시는 김수영의 「전화이야기」의 영향을 상당히 짙게 보여주고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예요’, “.............죠”라는 해요체의 종결어미이다. 그리고 주어를 생략한 짧은 문장들도 다분히 김수영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전화이야기」의 ‘아메리칸 드림’은 이 시에서 ‘디 임파서블 드림’으로 패러디된다. 무엇보다 이 시는 표면에 드러난 것은 화자의 일방적 독백이지만 이것이 시 속의 함축적 청자와의 교호작용에 의한 것으로 되어있다는 점에서 「전화이야기」의 방식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황지우는 자신의 시 속에 김수영 시의 제목을 직접 노출시키는가 하면, 김수영 시를 직접 패러디함으로써 해체적 독서의 다양성을 다소 감소시키고는 있다. 그러나 황지우는 여기에 새로운 시도를 추가한다. 김수영의 시가 보여준 ‘전화’를 통한 담화의 모습을 불심검문을 당하는 담화 상황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이 시의 현실 참여적 공간을 열어 놓은 것이다. 지식인으로 추정되는 이 시의 화자는 불심검문을 당해 가방을 열어보이면서 검문하는 사람과 담화하고 있다. 검문하는 사람의 말은 시의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화자의 말을 통해 충분히 유추가 가능하다는 것이 이 시의 중요한 특징이다. 검문자는 화자를 향해 ‘이게 뭐냐’, ‘가방을 열어 보라’, ‘이 책은 뭐냐’는 등의 말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길에서 가방을 들고 지나가는 평범한 사람이 검문 당한다는 사실, 책을 모두 불온서적이냐 아니냐의 시선으로 재단하는 검문자의 태도 자체가 시대 고발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지만, 여기에 더불어 책의 내용에 대해 설명하는 화자의 담화는 저항시로서 기능하고 있다. “외채는 할 수 없어요. 1인당 70만 원이라메요. 몇 사람이라도 집중적으로 배부르게 해야죠”라는 풍자와 역설을 통해 빈익빈 부익부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는 김수영에 대한 해체적 독서를 통해 「전화이야기」의 기법을 차용하는 한편, 여기에 현실의 모순을 고발하는 내용을 추가하여 「전화이야기」와는 또다른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 속에 화자와 청자가 있고 두 사람이 교호 작용을 하고 있다고는 짐작되지만, 청자의 직접적 발화 내용은 들을 수 없는 형식의 시는 다른 시인들에게서도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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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하, 「밀러 씨와의 외출」, ?우리들의 유토피아?, 나남, 1989, p. 32.

 

왜 내 마음은 단칼에 잘라지지 않는 걸까요? 깨끗이라고 말하면서 깨끗이 헹구어낼 수 없는 걸까요? 1980년엔 결혼을 했어요. 불이 났어요. 늑막염에 또 걸렸어요. 그 다음해부터 라일락 꽃잎이 냄새가 안 나요. 종이꽃들이 폈다가 져요. 물 속에선 물꽃들이 폈다가 지고, 불 속에 선 불꽃들이 피었어요. 죽은 나무도 정원에 서 있어요. 죽은 지 7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서 있어요.

- 김혜순, 「너와 함께 쓴 시」 부분,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 지성사, p. 12.

 

위의 인용시는 모두 화자와 시의 표면에 나타나지 않은 숨은 청자와의 교호 작용에 의한 발화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시에서는 화자와 청자의 교호작용이 중요하다기보다 화자의 발화자체가 중요한 것이 된다. ①은 제목이 ‘밀러 씨와의 외출’인 것으로 보아 화자의 질문 ‘보신탕을 먹어보셨습니까?’, ‘--양기 부족은 실로 곤란한 일이 아닙니까?’, ‘--이 거대하고 치밀한 조직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하죠?’는 ‘밀러 씨’를 향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밀러 씨’의 발화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리고 화자의 말 또한 청자 밀러 씨와의 교호작용 속에서 발화된 것이라기보다, 넋두리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만큼 청자의 역할은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밀러 씨와의 외출」을 읽는 독자는 화자와 밀러 씨와의 사적인 대화를 엿듣는 것과 같은 위치에 처하게 되는데, ②의 경우 「너와 함께 쓴 시」에서도 독자는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시에서는 청자의 역할이 앞의 시에서보다도 더 제한되어 있다. 이 시의 제목이 「너와 함께 쓴 시」인 것으로 보아, 화자의 말을 들어주는 대상이 존재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청자가 발화를 했는지, 또 했다면 어떤 발화를 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화자의 발화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화자는 청자에게 굳이 그런 역할을 부여하고 있지도 않다. 청자인 ‘너’는 화자의 말을 유발시키면서 그 말에 대한 반응을 보이는 존재라기보다 화자 옆에 있어주는 것으로 그 의의를 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청자의 역할이 줄어들고 화자의 발화 내용조차 불분명해지는 것은 현대인의 개인과 개인간의 단절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 결론

김수영의 「전화이야기」는 ‘전화’ 통화하는 것을 재현해 놓음으로서 서정시의 영역을 새롭게 확장한 시라고 생각된다. 「전화이야기」가 ‘구술 언어’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물론이고, ‘전화’라는 의사 전달 매체를 시에 도입함으로써 화자와 청자의 역할에도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전화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송화자의 음성으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시의 독자들은 수화자의 음성까지 짐작하며 읽게 된다. ‘전화’라는 매체는 송화자의 발화가 수화자에 의해 영향을 받고 수화자 역시 송화자의 발화에 영향을 받는다는 특징을 지니는데 「전화이야기」의 언술이 이러한 모습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때 시의 독자는 송화자와 수화자의 사적인 전화 통화를 엿듣고 있는 듯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 또한 이 시의 중요한 특징이다.

170여편에 이르는 김수영의 시 중 ‘전화’를 활용한 시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김수영 이후의 많은 시인들이 「전화이야기」에서 김수영이 보여준 기법을 자신들의 시 속에 수용하고 있다. 이승훈의 「전화」, 오규원의 「공중전화」, 김혜순의 「부안군 변산면 마포리 하섬」, 김승희의 「떠도는 환유 2」 등은 ‘전화’를 활용하여 화자의 발화 외에도 청자의 발화까지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황지우의 「아, 이게 뭐냐구요?」, 이승하의 「밀러 씨와의 외출」, 김혜순의 「너와 함께 쓴 시」 등은 ‘전화’라는 매체를 통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시 속의 화자와 청자가 서로 교호(交互) 작용을 하고 있으며 시의 표면에는 화자의 발화만 드러난다는 점에서 김수영의 「전화이야기」를 수용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김수영 당시 걸고 받는 기능만을 했던 전화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지게 되었고 의사 전달 매체도 삐삐, 핸드폰, 인터넷 등으로 훨씬 더 다양해졌다. 이러한 매체들의 등장은 당연히 시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것까지를 모두 포함시키지는 않았다. 의사 전달 매체의 변화를 끝까지 추적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며, 또 김수영 시 「전화이야기」가 우리 시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를 밝히는 것은 이 글에서 다룬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