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와 존 F. 케네디의 공통점과 차이점 - 두 사람 모두 쿠바산 시가를 엄청나게 사랑했다는 것, 그러나 두 사람의 차이점은 케네디는 쿠바산 시가만 사랑했지만 게바라는 그 시가를 만들어 낸 쿠바와 쿠바 민중까지 사랑했다.
볼리비아 산중에서 체포된 직후 체 게바라 - 어쩐지 우리나라의 녹두장군 <전봉준>과 비슷한 인상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가? 언젠가 읽은 글 중에 시대와 불화하여 혁명을 꿈꾼 자들의 인상은 하나같이 비슷하단 글을 읽고 감탄한 적이 있다. 80년대 거리를 메운 수배자의 얼굴을 보라. 저마다 녹두장군같지 않았는가!
체 게바라의 최후 - 미국은 CIA를 통해 이 라틴 아메리카의 게릴라를 끊임없이 조사했고, 결국 그린베레를 동원해 볼리비아 산 중에서 그를 포로로 잡을 수 있었다. 그들은 비록 그의 육신은 사로 잡을 수 있었지만 그의 영혼만큼은 포로로 할 수도, 죽일 수도 없었다.
무엇을 생각하느냐는 심문에 게바라는 "혁명의 불멸성을 생각하고 있다"라고 대답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던 듯 하다. 그를 가둠으로써 느끼는 불안보다는 그를 죽임으로써 당하는 비난이 훨신 가볍다고 생각한 그의 적들이 서둘러 사살했기 때문이다.
게바라는 언젠가 그 혁명의 불멸성을 이렇게 풀이한 적이 있다.
"내가 패배해도 승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에베레스트 산정에 도달하려다가 많은 사람이 실패했지만, 결국 에베레스트는 정복되었습니다."
체 게바라가 카스트로에게 보내는 편지
(이 글은 체가 쿠바혁명 이후 쿠바 공직에 봉직하던중, 자신은 혁명가이지 정치가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쿠바 제2인자의 자리를 버리며 아프리카와 남미의 혁명현장으로 향할때 카스트로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이다.)
"나는 공식적으로 당이 가지는 민족적 지도력에서 차지하는 나의 위치, 수상으로서의 지위, 고위 실력자로서의 지위 그리고 쿠바 시민권, 이 모든 것을 사양합니다. 그 어떤 법적 절차도 나를 쿠바에 묶어두지 못합니다. 유일한 끈은 약속이 그렇듯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또 다른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지나간 생활을 돌이켜볼 때 나는 혁명의 승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충분한 자부심과 헌신적인 마음을 가지고 일해왔다고 믿습니다. 나의 유일한 중대 실수는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투쟁을 시작할 때 부터 보다 당신을 더 신뢰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했다는 것과 지도자와 혁명가로써의 당신의 자질을 충분히 그리고 빨리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화려한 날들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같이 있으면서, 찬란하지만 아직은 슬픈 카리브해 위기의 날들을 우리의 민중과 더불어 살아왔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 당시 어떤 정치가도 당신보다 화려하게 산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무런 주저 없이 당신을 따랐다는 점과 위험과 원칙에 대하여 사고하고 그것을 직시해 평가하는 데 있어 당신과 일치했다는 점도 자부심을 갖습니다. 세계의 또 다른 국가들은 저의 순수한 노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쿠바 최고 지도자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당신이 하지 못한 것을 나는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 온 것입니다.
당신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이 기쁨과 슬픔으로 엉클어집니다. 하나의 건설자로써 내 마음을 여기에 두고 갑니다.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것들 중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자식처럼 받아주었던 쿠바 국민들을 두고 떠납니다. 그런 사실들은 나를 몹시 가슴아프게 합니다.
나는 당신이 가르쳐 준 신념, 우리 민중의 혁명정신, 그리고 제국주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것입니다. 그래서 대항해 싸워 성서러운 의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전장으로 떠납니다. 이러한 것들이야 말로 깊은 상처를 치료해줍니다.
다시 언급해두고자 하는데 쿠바혁명으로 생기는 의무감을 떠나 어떤 책임감으로부터 쿠바를 자유롭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 나의 최후의 시간을 그 어떤 다른 하늘 아래에서 갖게 된다 하더라도 내가 마지막으로 생각하는 것은 쿠바국민 특히 당신에 대한 생각일 것입니다. 당신의 가르침, 모범에 대해 감사드리며, 나는 나의 행동 최후결과에 충실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쿠바 혁명가의 한사람으로 책임감을 느끼고 그러한 자격으로 행동할 것입니다.
나는 아내와 자식에게 어떠한 물질적 재산도 남겨두지 않았으며 또한 그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그것을 행복으로 여깁니다.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정부가 그들의 생활과 교육을 위해 충분한 것을 제공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우리 민중에게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에게 바라는 것을 말로써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승리를 위해 끝없는 전진을 조국이냐 죽음이냐 나의 모든 혁명적 열정으로써 당신을 포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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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쿠바중앙은행 총재가 되지마자 행한 가장 첫번째 일은 자신의 월급을 5천 페소에서 1천 2백 페소로 줄인 일이었다. 이때까지 상황의 추이를 바라보며 계산기를 두드려대던 쿠바의 많은 부르주아들이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미국의 마이애미로 도망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쿠바의 지폐는 미국에서 인쇄되고 있었다. 혁명이 일어난 뒤 미국은 쿠바의 새로운 정부를 괴롭히기 위해 많은 지폐를 시중에 풀었고, 인플레이션이 심해졌다. 결국 게바라는 지폐 인쇄를 체코에 맡겼고 지폐에 자신의 사인을 남겼다. 그는 밤을 세우며 일했지만 그의 경제정책이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1960년, 게바라는 사회주의 국가들을 순방하게 된다. 소련, 중국, 불가리아, 북한, 체코슬로바키아 등을 방문했다. 그러나 이때 그가 이들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해 좋은 인상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피델의 아우인 라울과 잦은 충돌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라틴 아메리카에 침투해 있는 미국의 자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미국을 자극하게 된다는 점과 자국의 경제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는 점에서 뜨거운 감자와 같은 것이다.결국 쿠바는 쿠바 내 미국 재산을 국유화하고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통상 교류 확대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이때까지 관망하던 자세를 취하던 미국은 쿠바와 국교 단절을 한다. 그때가 1961년 1월 8일의 일이었다.(이에 대한 일화 중 하나는 평소 쿠바산 시가를 즐겨 피우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시중의 쿠바산 시가에 대한 사재기를 하게 한 후 마침내 쿠바와 국교단절 문서에 서명했다고 한다. 그가 이 시가를 모두 다 피울 수 있었는지는 약간 의심스럽다. 그는 1963년 11월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1961년 4월 17일부터 48시간 동안 쿠바의 피그만 해안을 침공한다. 사실 미국이 쿠바 혁명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비밀작전을 수행한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1959년 3월에 일단의 쿠바 망명인들을 동원해 쿠바 진공 작전을 실시하고자 했으나 쿠바 내 반 카스트로 세력이 보잘 것 없었고, 쿠바 군의 보안체제가 예상외로 강력해 실패로 돌아가자 본격적인 침공 계획을 수립했던 것이다. 이 작전은 아이젠하워 정권 시절 입안되어 승인되었고, 케네디 대통령 당시에 실행되었다. "힘있는 자가 정의로와 약한 자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한 케네디 대통령이 한 일이었다. 케네디와 미 CIA는 그들이 과테말라를 비롯한 제3세계에서 수행한 일련의 비밀공작에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쿠바에서의 작전도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비참하게 좌절되고 만다. 그들의 쿠바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와 세계 여론이 미국의 이런 음모에 대해 등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도 미국이 쿠바에 대한 비밀공작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몽구스 작전이라 불리우는 일련의 공작들을 통해 쿠바가 제3세게 국가들의 모범적인 경제발전과 정치발전의 모델이 되는 것을 저지할 수 있는 경제봉쇄 정책과 카스트로 암살에 관한 것이었다. 심지어는 카스트로가 피우는 시가에 폭발물을 장치하는 것까지 계획되었었다고 한다. 해외지도자 암살 계획과 관련하여 미국 상원 처치 위원회가 1975년까지 밝혀낸 바에 의하면 카스트로란 인물 한 사람에 대해서만 1960년부터 65년의 기간 동안만 적어도 8 차례 이상의 암살 기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미국의 조치들은 카스트로로 하여금 사회주의의 일원이 되었음을 선포하도록 만든다. 게바라는 이때 쿠바의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전국 각지에 공장을 건설하는 산업발전 4개년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이런 경제정책은 그 모델을 찾기 어려웠고, 해외 차관도 미국에 의해 봉쇄당하고 만다. 또한 게바라는 자본주의가 뿌려논 경제 시스템의 문제에 봉착한다. 그것은 혁명이 노동자 농민을 위한 것이었음에도 아직 그 결실을 맺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 기간 동안 노동자, 농민은 좀더 많은 경제적 혜택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제국주의자들의 경우에는 문제 해결이 훨씬 쉽다. 많은 이익을 올리려는 욕심이 그들의 본성이기 때문에 임금 인상의 요구가 있어도 여유있게 시간을 끌다가 막판에 가서야 임금을 아주 조금 인상해주어 생색만 내면 문제가 해결되니까 말이다."
게바라는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해 다소 낭만적이라고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대처하고자 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노동자 한사람 한사람이 신성한 노동의 의미를 자각하게 되면 물질적 욕구보다는 신성한 의무감을 갖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자본주의적 시스템이 골수에 밴 노동자들을 설득하는 것이 중요했다. 물질적 욕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신성한 의무감에 의해 노동하게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의식 개혁에 의한 노동생산성 향상은 단기간 내에는 효과를 볼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그에 따른 보답이 보이지 않을 경우 급속히 쇠퇴하고 만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를테면 게바라 자신이야 얼마든지 헌 옷을 입고, 배급을 받으며 인민대중을 위해 일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겠지만 다른 노동자들까지도 그렇게 느낀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에 의한 쿠바 봉쇄와 카스트로 암살 음모, 반혁명 기도, 경제정책의 어려움 등은 신생 쿠바의 여러 어려움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들은 기존 사회주의 국가들로부터도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도 동시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 압박은 날로 더 심해졌고,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국가들조차 쿠바를 이해하지 못했다. 1961년 8월 게바라는 쿠바대표로 우루과이의 푼타 델 에스테에 갔다. 그곳에서 그는 OEA의 '경제사회심의회'에 참여했다. 그는 쿠바로 돌아가는 길에 대부분의 산업을 국유화시켰던 쿠바 경제가 이젠 위기에 직면했고, 미국과의 암거래가 다시 이뤄지고 있다고 실토하며, 소련 등 사회주의 체제 국가들로부터의 원조가 만족할 만큼 효과가 없으며 쿠바에는 적당하지도 않다고 말한다. 게바라는 쿠바의 인민대중을 위해서라면 그 자신이 그토록 증오해 마지않았던 미국과도 경제교류를 재개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 민중이 주권을 되찾아야만 한다. 독점자본으로부터 주권을 되찾아야 한다. 독점자본은 이미 쿠바에 침투하여 움직이는데 그것은 거의 모두가 미국 자본과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다. 쿠바는 이제 무엇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 그 해답은 다른 자의 삶과 노동으로 부유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동으로 살아가야 하는 일이다." <체 게바라>
1962년, 미국은 쿠바 국내에 소련의 미사일이 배치되어 있다고 비난했다. 쿠바로서는 미국의 거듭된 침략을 회피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에 본때를 보여줄 필요를 느꼈으며 소련으로서는 자신들의 턱밑에 설치된 터키의 미국 미사일 기지에 대항할만한 기지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이것은 쿠바로 하여금 필요 이상으로 미국을 자극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으며 사회주의 종주국임을 자처하는 소련의 위신과 명예를 실추시켰고, 동시에 쿠바가 소련에 기대할 만한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게바라와 카스트로에게 다시 한 번 확신시키는 일이 되었다. 소련은 쿠바를 보호해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런 쿠바 미사일 사태는 다시 한 번 전세계인들에게 쿠바라는 나라를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쿠바 민중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일이었다. 게바라는 유럽의 공산당과 사회주의자들에게 실망하고 있었다. 그 옛날 인터내셔널 찬가를 부르던 꿈꾸었던 게바라에게 있어 그들은 속물에 불과했다.
사실 체와 피델이 쿠바에서 혁명을 시도하고 있었을 무렵에도 쿠바에 공산주의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도시와 노동자 중심의 혁명 노선을 주장했고, 농촌과 농민을 중심으로 한 혁명 노선을 주장한 체와 피델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의 공산당은 심지어 체와 피델을 사회주의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이 부족한 인물들로 불신하기 까지 했다. 사실이 또한 그랬다. 체와 피델이 생각하기에 그들은 말만 앞세우는 자들이었고, 혁명의 열기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게바라는 소련식의 관리형 사회주의 모델보다는 정신적 각성을 중시하는 중국식 사회주의를 선호했다. 사실 코민테른의 일방적인 지시만으로는 혁명 열기에 고양된 일반 대중들을 이끌 수 없었다. 그러나 게바라는 기본적으로 소련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어쨌든 동지였기 때문에, 그러나 소련도 게바라에 대해서 우호적이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1965년 1월 게바라는 콩고, 기니, 가나, 알제리, 탄자니아와 이집트 등을 방문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소련을 비난했다. "소련은 돈을 지불하는 나라들에게만 무기를 내줍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쿠바로 돌아왔을 때(3월) 체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와 격렬한 토론에 임해야만 했다. 이제 카스트로는 혁명이 성공한 뒤의 쿠바를 이끌어야만 할 책임을 지고 있는 인물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아직도 혁명가로 행동하는 체 게바라를 통제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게바라는 인간이 물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체제를 꿈꾸었다. 그는 '인간의 욕망이 물질로부터 자유롭고, 노동이 유희가 되는 경제'를 꿈꾸었으며 화폐, 기업 뿐만 아니라 국가 개념까지 부정하는 극좌적 이상을 돌출시켰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당시 일국 사회주의 혹은 국가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는 소련의 세계 정책을 비판했고, 소련이 쿠바에 대해 유상 차관을 지원하는 것도 비판했다. 체 게바라의 이런 비판은 근본적으로는 옳은 것일지는 모르나(국제 사회주의적 관점에서라면 트로츠키주의) 현실적으로는 대내외적인 갈등의 소지가 있는 것이었다. 소련 역시 이런 게바라의 경제정책을 비판했고, 노동자, 농민들도 자발적 임금의 삭감이라거나 자발적 잉여노동 문제에 반발했다. 그리고 4월 중순 게바라는 쿠바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정부청사에서도, 사탕수수밭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많은 풍문이 떠돌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카스트로에 의해 숙청당했다거나 소련에 의해 시베리아로 유배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게바라는 콩고에 있었다. 그해 11월 11일, 피델은 아바나의 채플린 극장에서 게바라에게서 온 편지를 낭독했다. 그것은 양친에게, 딸 일디타에게, 그리고 피델에게 보낸 세통의 편지였다.
게바라는 라틴 아메리카 해방을 위해 아니 세계의 억압받는 민중의 해방을 위한 전사로서 쿠바 시민권을 포기했다. 그가 단지 고매한 이상만으로 다시 전선에 복귀한 것이 아닐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의심 많은 이들은 오직 인간만이 순전히 정신적인 이유만으로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게바라는 또다시 자신의 안위를 포기하고 게릴라로 돌아갔다. 그것이 그를 다른 혁명가들과 다르게 만드는 점이었고, 동시에 그의 행복한 점이었다. 그에게 피델이 없었다면 자신도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행정관료로서 평생을 보내야했을 것이기 때문에….
넷째, 지금도 체 게바라가 꿈꾸었던 이상은 현재도 유효한가?
라틴 아메리카는 시몬 볼리바르가 라틴 아메리카 연방공화국을 수립하려던 이상이 무너진 이래 미국의 뒷뜰 이상의 정치적 각성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과테말라의 아르벤즈 정권을 비롯한 각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그들의 이상을 점진적이고 평화로운 방식의 개혁을 통해 이룩하고자 했을 때조차 그들의 이상과 열망은 여지없이 무너졌고, 막대한 피해만을 강요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벌어진 쿠바의 혁명은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피압박 민중들에게 희망의 복음과 같은 것이었다. 아메리카 신대륙은 앵글로 색슨에 의한 북미와 스페인, 포르투갈에 의한 중남미로 구분된다. 이중 북미에서는 앵글로 색슨계 백인들에 의해 원주민들의 대대적인 학살이 자행되었고, 그 결과 원주민의 역사와 정체성은 거의 대부분 절멸하고, 유럽에 의해 이식된 정체성을 지닌 백인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거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원주민 학살이라던지 여러 잔혹한 행위들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북미에서 행해진 일련의 학살에 비해 살아남은 원주민가 문화가 많았다. 시몬 볼리바르를 비롯해서 많은 라틴 아메리카인들이 라틴 아메리카만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좌절한 뒤 라틴 아메리카는 단순히 엑조틱한 풍경화의 한 자락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서 세계적 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 본격적인 간섭 정책을 펼쳐 이들 나라를 자신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두었다. 초기에 이런 정책은 단순히 경제적 수탈, 군사적 침략에 의한 것이었으나 차차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의 저항에 부딪치자 지식인들과 문화를 고아범위하게 흡수하고 포섭하고자 했다. 그 결과 라틴 아메리카는 그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문화마저도 심각한 대미종속 관계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한 때에 일어난 쿠바 혁명은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지식인들을 자극하는 일이었다. 중남미 좌파는 앞서 아르벤즈와 뒤에 아옌데의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점진적이고 개량주의적 노선을 견지했다. 그들은 혁명의 가능성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서구의 사회민주주의를 자신들의 모델로 삼았고,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회 및 계급구조에 기초한 이론을 채택했다. 그리고 노조를 중심으로 도시노동자 계급에 지지를 통해 집권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혁명에 성공한 지역은 시에라마에스트라의 험준한 산맥을 기반으로 농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쿠바 혁명의 성공이었다.
물론 카스트로와 게바라 이전에도 중남미 지역에서 무장 투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세기부터 시작한 쿠바의 호세 마르티, 멕시코의 비야, 에밀리아노 사파타, 엘살바도르의 파라분도 마르티, 니카라과의 산디노 등 많은 민족주의자, 자유주의자, 때로는 마르크스주의자에 의해서 이어져왔지만 그러한 무장투쟁이 결국 성공하여 정권을 장악한 것은 쿠바 혁명이 처음이었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을 비롯하여 많은 전세계 많은 무장 게릴라들이 쿠바 혁명을 하나의 교훈으로 삼았다. |
참고서적 & 참고사이트
체 게바라 평전/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실천문학사/ 2000년 - 20세기가 저물어가는 마지막 해인 2000년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한 책이 바로 이 <체 게바라 평전>이다. 많은 이들이 이런 이상 열기를 분석해내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게바라는 분명 스타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소모되는 스타와는 달리 우리 속에서 되살아나는 스타라는 점에서 다르다. 게바라에 대한 이 책은 사실 생각만큼 재미있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의 삶에 덧씌워진 신화적 행동에 대한 탐구가 부족했다기 보다는 그만큼 그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컸던 탓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책이 지닌 약점은 당시 게바라를 둘러 싼 시대적 분위기나 정치적 현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에 대한 저자의 인식이 잘 드러나 있지 않고, 다루고 있더라도 상당히 미흡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
체 게바라의 라틴여행일기/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지음/ 이재석 옮김/ 이후/ 2000년 - 국내에서 구해 볼 수 있는 게바라의 저작물 중 거의 유일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예전에 그가 쓴 게릴라 전술에 관한 글이 다른 책에서 일부 삽입된 적은 있다. 이 책은 그가 모터 달린 자전거를 이용해 라틴 아메리카의 곳곳을 살펴보던 시절의 일기이다. 아직 게릴라가 되기 전 청년기의 게바라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재미있는 책이다.
체 게바라/ 장 코르미에 지음/ 은위영 옮김/ 시공디스커버리 총서 99/ 1999년 - 역사는 아이러니하다. 은퇴한(?) 독재자의 아들이 사장인 출판사에서 체 게바라에 대한 책이 나온다. 장 코르미에는 유럽에서는 인정받는 게바라 전문가 중 하나이다. 다만 그의 글이 재미없다는 단점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꼬집을 구석은 없다. 사실 고마워해야할 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우리는 게바라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체 게바라/ 유현숙 지음/ 자음과 모음/ 1997년 - 특이하게도 이 책은 국내 작가가 쓴 소설이다. 지난 97년에 대학로 샘터 서점에 서서 한참을 뒤적이다가 결국 사지 않고 뒤돌아서 나왔는데 나중에 구입하려고 했을 때 절판된 것을 알았다. 국내에는 꽤 많은 체 게바라 매니아들이 있다. 물론 그들이 다른 매니아들과 다른 점은 삶에 있어서 그를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는 점일 것이다.
체 게바라 /리우스 지음/ 오월/1991년 - 불행히도 이 책이 지금도 나오는지 알 수 없다. 헌 책방에서 만나게 된다면 이 시리즈를 구입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당시 오월 출판사에 다니는 친구가 있었는데 내게는 추억의 책이기도 하다. 한 가지 더 알려드릴 것은 만화책이라는 사실이다. 아주 유익하므로...꼭 읽어보시길.
현대게릴라전 연구/ 오상카 외 지음/ 편집부 편역/ 세계/ 1985년 - 나로서는 추억의 책이다. 소비에트 빨치산부터 마오의 홍군 전술, 게바라, 알제리민족해방전선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그야말로 현대게릴라전 연구서이다. 상당히 오래 전 책이기 때문에 그동안 어디에 처박아두었는지 한참을 찾았다. 누가 뭐래도 게바라는 게릴라였다. 이 책에는 그와 쿠바 혁명가들의 혁명과정이 자세히 다뤄지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사상/ 이성형 편/ 까치/ 1999년 -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서 까치 출판사에서 여러 좋은 출판물을 많이 내고 있다. 이 책도 그 중 하나이다. 국내의 라틴 아메리카 학회 소속 학자들이 각자 논문을 만들어 라틴 아메리카의 과거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인물들을 통해 그들의 역사와 사상을 살펴볼 수 있도록 꾸미고 있다. 이번 시몬 볼리바르에 대한 글은 그 중 전북대 송기도 교수님의 논문이 큰 힘이 되었다.
라틴 아메리카를 찾아서/ 곽재성, 우석균 지음/ 민음사/ 2000년 - 위의 책이 약간의 사전 지식을 필요로 하는 책이라면 이 책은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입문서 구실을 할 수 있는 책이다.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간략한 통사와 더불어 문화, 예술, 환경 등에 대해서 곽재성, 우석균 두 명의 필자가 재미있게 잘 다루고 있다. 게다가 이 책의 한 가지 장점을 더 추가하자면 인터넷 시대답게 관련된 사이트들을 두루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점을 꼽으라면 적은 분량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만큼 대충대충이 좀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옥에 티인 셈이고, 라틴 아메리카 읽기를 시작하는 분들은 이 책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무난하리란 생각이다.
『세계와 미국』-20세기의 반성과 21세기의 전망/ 이삼성 지음/ 한길사/ 2001년 - 밀레니엄을 결산하는 의미에서 한길사가 마음먹고 출판한(뭐 단순히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책이다. 이삼성 교수가 서문에서도 밝혀두고 있듯이 미국과 세계에 관한 연구는 단순한 정치사나 외교사적 서술일 수는 없다. 우리의 존재양식, 우리의 사유양식 그리고 결국 우리 자신의 문명에 대한 연구이다. 이 책은 미국에 대해 관심있는 이들은 물론 관심이 없는 이라도 꼭 읽어보아야할 좋은 책이다.
『20세기 사람들』/ 한겨레신문 문화부편/ 한겨레신문사/ 1995년
체 게바라 홈페이지 - 사실 체 게바라에 대한 인터넷 사이트들이 왜 이 곳 한 곳밖에 없겠는가? 국내외에 많은 인터넷 사이트들이 체 게바라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사이트는 상당히 오래되었고, 다른 사이트들에 비해 내용의 충실도도 상당히 높은 곳이다. 링크도 매우 잘되어 있다. 내 경우엔 이 사이트 하나만 가지고도 다른 사이트들을 찾아 헤먀는 수고를 하지 않더라도 게바라에 대해 충분한 탐구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이 사이트가 존재했기 때문에 바람구두는 <문화망명지>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게바라의 게릴라 캠프가 세워졌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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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바르가스 요사는 "(쿠바 혁명으로) 우리 나라들(중남미 국가들)에서 혁명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그 당시까지만해도 혁명은 우리의 사고에서 낭만적이고 먼 얘기였다. 우리는 혁명을 우리와 같은 나라에서는 결코 현실화될 수 없는 아카데믹한 개념으로 취급하고 있었다."라고 말한다. 마르케스의 쿠바에 대한 지지 역시 이러한 인식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러나 게바라는 볼리비아의 산중에서 게릴라로서 일생을 마감한다. 결과적으로 게릴라로서 그가 성공한 곳은 쿠바의 경우에만 국한된다고 할 것이다. 1966년 3월, 게바라는 게릴라 훈련을 마치고 콩고를 떠났다. 볼리비아의 공산당원과 만나기 위해 파리를 경유하여 프라하로 갔다. 그리고 최종 목적지는 볼리비아였다. 그러나 CIA는 이미 그가 콩고에 있었으며 유럽을 통해서 볼리비아로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바라는 볼리비아가 라틴 아메리카 혁명의 중요한 기지가 될 것이라 믿었다. 볼리비아는 여러가지 이유로 해서 게릴라 전투의 근거지로 적당하였다. 국민과 유리된 정부, 대중화된 불만, 기근, 정부의 충실한 하수인인 군대, 투쟁의욕이 넘치는 광부들, 게다가 정부의 부정부패.... 그리고 게릴라 활동에 유리한 삼림까지 모두가 충분한 조건이 되었다. 남미의 5개국과 국경이 접해 있는 볼리비아는 장차의 라틴아메리카 민족해방군을 구성할 게릴라 공작기지로서 매우 이상적인 위치에 있다고 하겠다. 게바라가 볼리비아 산중에서 죽게 되기까지는 사실 많은 복잡한 판단착오와 이유들이 있었다.
우선 게바라 자신이 CIA 가 자신을 집요하게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 그가 전술전략적으로 게릴라 기지를 건설하기 전에 맹렬한 공격에 휩싸인 점, 볼리비아 내 좌파 지식인들이 그를 지원해주지 않은 점, 소련(혹은 쿠바)이 암묵적으로 그의 죽음을 방기했다는 점, 미국이 일개 게릴라를 사살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작전과 특수부대를 지원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1967년 3월까지 싸움은 없었다. 그러나 2명이 훈련중 익사했고, 이때 방문한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레지 드브레와 시로 브즈토스가 후에 체포되었고 고문에 못이겨 게릴라의 은신처를 자백한다. 그리고 같은 해 4월에 볼리비아군은 본격적인 '게릴라 사냥'을 시작했다. 2천명 이상의 병사와 대게릴라전 미국인 특별고문관들(그린베레), CIA의 앞잡이들을 투입하였다.
게바라는 이들의 집중적인 추적과 밀고로 인해 부상당한 채 포로로 잡히고 만다. 그리고 CIA는 이 너무나도 위험한 포로를 살려두느니 죽여버리는 것이 오히려 편리할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이때까지도 체 게바라를 죽임으로써 그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리란 사실을 깨우치지 못했던 것이다. 입회인으로서 게바라의 총살을 목격했던 사람은 두 명의 기자였다. 그들은 볼리비아 출신의 알카사르와 프랑스인 레지 드브레였다. 11시15분, 볼리비아인 하사관 마리오 테란이 사형집행인 역을 자원하였고, 부상당한 게바라에게 마구 총질을 해댔다. 그리고 볼리비아군의 페레스 중위가 게바라의 목에 총을 쏨으로서 확인사살을 했다. CIA는 세계가 체 게바라의 죽음을 믿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게바라의 양 손목을 잘라 피델에게 보냈다.
1967년 10월 9일 12시, 라틴아메리카 해방전쟁에 생명을 바친 한 사나이가 죽었다. 게바라가 꿈꾼 이상은 현재에 있어서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아직도 멕시코에서 사파티스타들이, 페루에서 투팍 아마루가,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 게릴라들이 그들의 이상을 위해 무력과 평화적인 방법을 동원해 투쟁하고 있다. 그 방법이 반드시 옳다고는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체 게바라의 이상이 현재까지도 위험한 것은 사실이다.
체 게바라의 결혼식
다섯째, 그에게 바쳐진 대중적이고 다소 상업적인 열광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한 세기의 야만이 저물고 또 다른 세기가 밝아오던 지난 1997년 여름 볼리비아의 비야그란데의 공동묘지의 한 무덤이 열리고 신화처럼 되살아난 게릴라가 있었다. 그가 바로 체 게바라였다. 게바라의 죽음 이후 그의 죽음은 영원히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주기를 두고 대중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되살아나곤 했다. 심지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쿠바가 죽은 게바라에 의해 먹고 산다는 풍문이 있을 만큼 그에 대한 환호는 열렬하고 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열기가 드디어 우리나라에게까지 번져들어 2000년 그의 전기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상업적인 열광은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해볼 만하다. 한때는 위험한 인물로 치부되어 좌우로부터 모두 집중적인 공격을 받던 그가 이제는 더이상 위험하지 않다는 뜻일 수 있고, 다른 한 가지는 지금의 현실이 또다른 체 게바라를 꿈꿀 만큼 어렵다는 것일 수 있다. 이것이 전자라는 측의 의견은 그가 박제가 되어버린 제임스 딘처럼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해버렸고 그의 혁명적 이상은 거세된 채, 자유로운 반항아의 이미지만으로 현재 팔리고 있다고 추측한다. 일생동안 자본주의에 반대했지만 그의 얼굴이 담긴 배지와 T-셔츠가 불티나게 팔리는 자본주의적 현상에 대해 게바라가 살아있다면 어떻게 말할 것인가? 그것은 마치 사냥당한 짐승의 머리가 사냥꾼의 거대한 저택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것처럼 슬픈 일일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게바라의 주장이 더이상 현실 세계에서 먹혀들 수 없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사회민주주의 진영이나 신좌익에게 유익한 아이콘으로 사용되어 온 것은 사실 오래전부터이다. 그의 죽음이래 소련을 비롯한 국가사회주의의 그늘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진영으로서 그의 모습은 그런 반항아의 이미지와 대중적 스타의 이미지를 동시에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 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 탄생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게바라를 읽고 그에 대해 탐닉한다는 외면만을 놓고 비판한다면 이런 상업적인 열광의 그늘 뒤에 숨겨져 있는 다른 의미를 너무 쉽게 버리는 것이 된다. 게바라의 볼리비아 행이 그의 이상과 사회주의적 현실 사이에서의 괴리를 그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인정하여 이루어진 것처럼 지금 당대의 게바라는 현실적 폭발력을 상실했을 지도 모르지만 잠재된 폭발력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80년대 우리 사회의 많은 지식인들이 , 민중들이 전태일 평전을 통해 그들의 안락한 일상에서 떨쳐 일어났던 것처럼 게바라 열풍은 앞으로의 그런 일탈을 꿈꿀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이미 한 세기 전의 인물이자 머나먼 라틴 아메리카의 한 혁명가를 현재의 젊은이들은 알지 못한다. 불과 10여년 전의 우리 현실을 많은 이들이 잊은 것처럼 비록 게바라 열풍이 상업적인 딜레마를 안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삶을 통해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게바라의 열기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1990년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이 대선에서 패배한 후, 그 정권에서 11년간 장관직을 수행했던 신부이며 시인인 에르네스토 카르데날은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산디니스타 정권은 결국 실패한 것이 아닌가"는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니카라과 민중이 산디니스타 정권을 통해서 하늘을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잠깐 동안 본 하늘은 그들의 가슴에 영원히 새겨져 있을 것이고 이것은 후에 다시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힘이 될 것입니다." 일견 이해되지 않는 이 대답은 게바라의 죽음의 의미와 일맥상통하지 않나 생각된다.
왜나햐면 그들은 체 게바라를 통해 잠시라도 하늘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