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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by 丹野 2009. 11. 21.

                                

 

 

 

 

 

니콜라스 머레이가 촬영한 프리다 칼로(1938)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1907-1954, 멕시코 )

 

 

 

 

 

 

 

 Inner Link

 

"이 출발이 기쁜 것이 되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실비아 플라스

조지아 오키프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까미유 끌로델

디에고 리베라

에밀리아노 사파타

시몬 볼리바르

윈스턴 처칠

이오시프 스탈린

쥴 앤 짐

베티 블루

비트겐슈타인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1925년 9월 17일 오후. 작은 체구에 짙은 눈썹을 지닌 한 소녀가 타고 가던 버스가 전차와 부딪히는 충돌사고가 있었다. 그녀는 수업을 마치고 남자친구 알레한드로(그는 프리다 칼로와 같은 학교를 다니던 오빠뻘 되는 친구로 프리다는 그에게 열렬히 빠져있는 상태로 스스로 그의 약혼녀 혹은 정부로 자임할 정도였다)와 함께 집에 돌아가던 중이었다. 버스가 전차와 부딪히는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 후유증은 평생을 두고 그녀의 삶을 짓이겨 놓았다. 가슴 속에 뜨거운 열기를 품었고, 놀라운 예술적 재능을 지닌 아리따운 소녀의 몸은 승객용 손잡이들이 달려 있던 쇠파이프에 몸 한복판을 관통 당했다. 파이프는 옆가슴을 뚫고 들어와 골반을 통해 이어진 질을 뚫고 허벅지로 나왔고, 의사들은 세 군데의 요추 골절과 쇄골 골절, 제3, 제4 늑골 골절, 세 군데의 골반 골절, 어깨뼈의 탈구, 그리고 오른쪽 다리의 열두 군데 골절과 비틀리고 짓이겨진 오른발을 발견했다. 한 달 동안 그녀는 석고 틀 속에 꼼짝없이 갇혀 지내야 했고, 퇴원 뒤에도 학교에 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침대에 누운 채 머리맡에 붙여놓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그녀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다. "나는 병이 난 것이 아니라 부서졌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은 행복하다"고 훗날 술회했던대로, 몰핀으로도 달래지지 않는 고통을 달래는 작업이었다.

   실비아 플라스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테드 휴즈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듯이, 조지아 오키프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듯이 프리다 칼로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역시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주관적인 판단이겠지만 이 세 커플 중에서 가장 비참했던 사람을 고르라면 나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프리다 칼로를 선택할 것이다. 조지아 오키프의 경우엔 이미 알고 있듯이 매우 행복한 경험이었을 것이고, 실비아 플라스의 자살을 전적으로 남편 탓이라 할 수 없겠지만 프리다 칼로의 경우 디에고 리베라는 거의 전적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사랑했거나 사랑하는 이로 인해 프리다 칼로에 비견될만큼 불행한 여성 예술가가 있다면 까미유 끌로델 정도만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 이유는 디에고 리베라가 이 시대의 다른 남자들에 비해 훨씬 더 호색한이었다거나 프리다 칼로의 예술 세계에 대해 무지했거나 그녀를 덜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 두 사람 사이의 가장 큰 문제는 서로의 인생에서 상대방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컸다는 것이다.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첫 번째 결혼식 사진 - 1929년 8월 21일 프리다는 자신보다 21살 연상인 마흔 두 살의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한다. 당시 그녀의 부모는 이 결합을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합이라고 처음엔 반대했지만 결국 허락하고 말았다.

 

 

 

자신의 작품 <두 명의 프리다> 앞에 서 포즈를 취한 프리다 칼로 - 프리다는 7살 무렵 소아마비를 앓았고, 그로 인해 늘 깊은 고독 속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내면 속에 또다른 프리다를 만들어 늘 그와 함께 했다.

 

 

 

프리다 칼로가 침대에 누워 <불쌍한 조부모님, 부모님 그리고 나>를 그리고 있는 모습(1936년)

 

 

 

 

<원숭이와 앵무새와 함께 한 자화상> 앞에 서 포즈를 취한 프리다 칼로(1941년),사진. 니콜라스 머레이 - 프리다의 그림에는 유독 원숭이와 앵무새가 자주 등장하는데, 어느 분의 홈피 게시판에 김명수 시인의 <앵무새의 혀>를 올려 놓았다가 이 홈피의 쥔장이 앵무새의 상징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여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을 보고 나름대로 작은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시에 대해서 늘 피교육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앵무새의 혀

김명수

앵무새 부리속에 혓바닥을 보았느냐?
누가 길들이면 따라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 아닌 말을 단한번 하고싶은
분홍빛 조봇한 작은 혀를 보았느냐

 

 

 

그녀의 새끼 사슴 그라니소와 함께(1939년)

 

 

디에고와 키스를 나누는 프리다 - 디에고는 프리다가 만난 두 번째 대형 사고였다.

 

 

 

 

 

 

병상에 누운 프리다 칼로 - 7살 때 앓은 소아마비, 18살 때의 대형 충돌사고 그리고 회저병으로 절단된 오른쪽 다리, 일곱차례의 척추 수술도 그녀를 쓰러뜨릴 수 없었다.

 

 

 

 

 

 

 

 

프리다 칼로, 나의 탄생, 1932, 금속판에 유채, 30.5x35cm

 


프리다 칼로, 멕시코 혁명과 식인귀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다

   20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두 개의 사건은 당시 정치경제문화의 핵심이었던 유럽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한 사건은 유럽 중심 제국주의와 19세기의 종결을 상징하는 사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21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최초의 사회혁명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아프리카 최남단 지역에서 벌어진 보어 전쟁(1900년 8월 영국군이 트랜스발을 점령하며 종전되었으나 개전 이후 농민이 주축이었던 보어인 게릴라들에게 영국 정규군이 크게 고전하였다. 영국은 보어인 게릴라들에 대응하기 위해 작전지역에 거주하는 보어인 민간인들을 강제로 소개시켜 집단수용하는 초토화 작전을 실시했고, 그 결과 수용소에 갇힌 민간인 중 1만 8천명에서 2만 8천명에 이르는 인원이 사망하여 영국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윈스턴 처칠 편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과 과거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멕시코에서 일어난 멕시코혁명이었다. 보어 전쟁이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해가 지지 않는 제국 - 영국'과 유럽 제국주의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면 1910년 10월 5일 시작된 멕시코 혁명은 이후 다가올 러시아 혁명을 예고하는 최초의 사회혁명이자 현대사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멕시코 전체를 휩쓴 이 혁명은 농민이 주도한 자생적인 사건이었다. 나중에 에밀리아노 사파타와 디에고 리베라편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1910년 이전의 멕시코는 비록 스페인 식민 지배자들은 떠났지만 사회 체제와 경제 구조는 그대로인 상황이었다. 대다수 농민들은 여전히 대지주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고, 대지주들은 사병으로 무장된 강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열 다섯명의 지주가 백만 헥타르에 이르는 토지를 지배했고, 광활한 개인 소유지를 오가기 위해서는 지주가 개인적으로 소유한 철도를 이용해 할 정도였다.

   그들은 마치 식민 지배자처럼 굴었고, 시몬 볼리바르 이래 계속된 상류층의 허례허식과 유럽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했다. 이들은 영국에서 가정교사를 초빙했고, 파리로 빨랫감을 보냈으며 오스트리아산 철제금고를 들였다. 멕시코의 산업 전반은 외국인들에 의해 장악되어 광업과 시멘트 공업은 미국인이, 군수산업과 철광업은 독일인, 식품업은 스페인, 섬유업과 도매업은 프랑스인이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멕시코의 독재자 디아스 대통령은 문화에 나름대로 조예가 깊은 인물이긴 했지만 멕시코 문화예술계는 뿌리없는 유럽 지향의 허례와 허식으로 치장되는 궁중예술이었다. 멕시코의 많은 예술인들이 이런 숨막히는 분위기를 피해 유럽으로 떠났고, 디에고 리베라(당시 24세) 역시 멕시코 혁명 당시엔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생활 중이었다. 물론 프리다 칼로(당시 3세)는 이 무렵 매우 어렸다. 프리다 칼로가 태어난 멕시코의 코요아칸은 시골이었고, 이 마을에서 일어나는 가장 큰 사건이래 봐야 일주일에 한 번 서는 장이었을 만큼 조용한 곳이었다.

   어린 프리다가 그를 최초로 만난 것은 1923년 디에고가 멕시코 시티 국립 예비학교에서 교육부가 주문한 프레스코 벽화 작업을 하고 있을 무렵의 일이었다. 디에고는 벌써 꽤 이름난 화가였고, 이미 복잡한 여자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당시 그의 연인인은 루프 마린이었는데 그녀는 디에고의 주변 여자 관계에 대해 매우 날카롭게 대응하고 있었다. 디에고가 벽화 작업을 하고 있는 동안 루프 마린은 그 주변에서 수를 놓고 있었는데, 그때 작업장이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면서 한 어린 소녀가 떠밀리다시피 해서 작업장 안으로 들어왔다. 이 날의 순간을 디에고는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그녀는 보기 드문  품위를 지녔고,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눈에는 기묘한 불길이 타오르고, 가슴은 봉긋 솟아오르기 시작하여 마치 아이 같지 않은 매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 때 볼리바르 강당의 작업대 위에서 '인간의 창조'를 주제로 프레스코 벽화 초안을 잡고 있던 디에고는 자신을 지켜보던 소녀를 마주 보았고, 작고 어린 소녀 프리다는 이 거인에게 '그가 일하는 모습을 좀더 지켜보고 싶으니 작업을 계속하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소설가 르 클레지오는『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를 통해 디에고 리베라가 그녀와의 만남을 매우 신비로운 것이며 운명적인 사건으로 규정하려는 느낌을 받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이유를 어떻게 해석하든 두 사람의 만남은 결국 필연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프리다 칼로는 여인의 삶과 살을 탐닉하던(디에고 리베라에게 식인귀란 별명이 붙은 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퍼뜨린 이야기. 의대에서 해부학 수업 중 죽은 여인의 인육을 먹었다는 것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여성 편력 탓이 더욱 크다), 산을 뽑아 옮길 수 있건 없건 간에 거인으로 디에고 리베라를 만났고, 그에게 자신의 인생과 영혼을 송두리째 들어다 바칠 각오를 했기 때문이다.

디에고 리베라를 향해 타오르는 불길, 화가 프리다 칼로

    남자를 사랑하기 위해서 화가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과연 프리다 칼로에게 잘 어울리는 말일 수 있을까? 1970년대 페미니즘이 기세를 떨치기 전까지 프리다 칼로의 이름은 없었다. 그녀는 단지 프리섹스주의자, 양성애자, 스탈린주의자 그외 디에고 리베라의 세번째 부인 등등으로 불렸다. 하긴 맞고 틀리고를 따져서 될 일은 아니다. 프리다 칼로에 대해 생각해보다가 문득 그녀를 생각하는 일면에 그녀를 동정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져선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는 그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 한때 나는 그림을(나는 미술을 동경하진 않았던 것 같고. 이 둘의 차이를 말하라고 하면 잘 말할 수는 없겠지만)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 사생대회에 붓과 팔레트를 가지고 나가는 일이 한때는 자랑스러운 일이었으니까.(조금이라도 큰 규모로 개최되는 대회에 나간다는 것은 그 날 하루는 재미없는 수업에서 해방될 수 있는 시간이라는 뜻이다.)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런 일들이 내게 맞지 않는다는 아니 허락되지 않을 성질의 일이란 걸 알고 너무 쉽게 포기해버렸다. 그후로 나의 그림 재주는 날로 쇠퇴해버렸고, 미술과도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살아왔다. 하긴 그런다고 멀어질 성질의 일은 아니다. 재주가 없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보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까지 미치게 된 까닭은 그녀의 주장들, 그녀가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언어들이 어느 순간 비명처럼 들려 온 까닭이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들은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그리는 그림의 전형과 같다. 그녀의 그림은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먼저 가슴에 불을 붙여야 한다. 이를테면 내 가슴엔 애시당초 그런 불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사기나 허영 같은 것 말이다. 그녀의 그림을 보면서 그녀의 삶을 불쌍하게 느끼면서 감상한다는 것은 이미 화력을 반이상 감소시킨다. 철학자 비트켄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라고 말한다. 이 말을 프리다 칼로에게 들이대면 그녀가 맞닥뜨렸던 여성으로서의 한계가 20세기 여성들이 맞닥뜨린 세계의 한계였다고 풀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여성은 과연 자신의 육신과 정신으로 홀로 설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프리다 칼로가 보여준 대답은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전에는 보잘것없는 평가에 그쳐야 했던 프리다 칼로를 되살려 낸 것은 여성주의 비평가들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녀를 온전히 이해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프리다 칼로는 때로 <쥴 앤 짐>의 '잔 모로'나 '바람같은 베티'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프리다 칼로에게 드리워진 디에고 리베라의 거대한 그림자를 인정하는 일이며 동시에 디에고 리베라 없이도 얼마든지 훌륭한 화가로서, 인간으로서 홀로 설 수 있었던 프리다 칼로를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프리다 칼로에게 디에고 리베라가 없었더라도 그녀는 아마 화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그렇게 유명해지지는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화가가 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디에고를 만난 프리다는 그에게 가장 빨리 다가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1925년의 고통스러운 사고를 겪고 난 뒤에도 자신이 선택한 사람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 방법을 택했다. 그녀는 자신이 황홀하게 바라보았던 남자, 그의 부인이 되어 그의 아이들을 낳고 키우리라 마음먹었던 남자와의 재회를 위해 서둘러 화가가 되어야만 했다. 프리다 칼로는 디에고 리베라에게 성큼성큼 걸어들어 갔고, 디에고는 그녀에게 빨려 들어갔다. 마치 거대한 행성이 작은 블랙홀에 빠져 들 듯이….

 

남과는 다른 프리다, 어여쁜 우리 프리다!

   리다의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는 우울한 눈빛의 유태계 사진사로 예술적인 감수성이 강했고, 어머니 마틸드 칼데론은 스페인과 토착 원주민의 피를 이어 받아 강인했고 현실적이었다. 디아스 시절 관공서의 사진사였던 아버지는 멕시코 혁명으로 인해 직장을 잃었고, 간질을 앓고 있었다. 그는 멕시코 시티 중심부에 있었던 사진관에서 낡은 휘장을 배경으로 영성체 받는 여인이나 신혼 부부의 사진을 찍어주며 살았고, 어머니는 남편이 사실상 거의 실직 상태에 있었던 데다가 잇따른 임신으로 지쳐 어린 프리다에겐 거의 신경을 써줄 수 없었다. 실제로 프리다는 자신의 어머니를 '나의 주인님'이라고 불렀고, 어머니와 보내는 시간보다는 유모와 보내는 시간이 더 길었다(이건 디에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프리다는 허약하고 몽상적이었던 데다가 간질마저 앓고 있던 아버지에 대해 지극히 헌신적이었고, 아버지 기예르모 역시 자식들 중에 프리다를 가장 예뻐했다. 1952년 프리다 칼로가 그린 <아버지의 초상>이란 작품 하단에는 이런 헌사가 적혀 있다. "헝가리계 독일 출신으로 예술가이자 전문 사진사였고, 성품이 너그러웠으며 명석했던 나의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의 초상이다. 그는 성실하고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60년 동안 간질로 고생하면서도 결코 일을 멈추지 않았고, 히틀러에 맞서 싸웠다. 깊은 애정을 담아. 딸 프리다 칼로." 아마 프로이트가 발견했다면 디에고 리베라와의 사이에 대해 뭔가 의미심장한 해석을 내리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싶은 그런 글귀이다.

   평생을 두고 프리다에게 찾아온 시련 중 가장 큰 것은 물론 디에고 리베라와의 만남이었지만 그녀를 찾아온 수많은 시련 중 가장 첫 번째 것은 프리다가 여섯 살 때의 일이었다. 1913년 그녀는 소아마비에 걸려 왼쪽 다리에 불구가 왔다. 그녀를 촬영한 여러 사진들과 자화상을 보면 그녀가 즐겨 입는 기다란 치마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자신의 다리를 감추려고 했기 때문이다. 디에고 리베라가 그린 프리다의 유일한 나체화에서도 프리다는아픈 다리를 성한 다리 밑으로 포갠 어설픈 자세를 취하고 있다. 어린 프리다는 주변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받아야 했고, 프리다 칼로는 스스로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프리다 칼로의 유년 시절은 고독했다. 어머니는 늘 지쳐 있었고, 아버지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현실에선 무능했다. 그녀의 가족 중 프리다와 가장 친했던 언니 마티타는 그녀의 나이 일곱 살 때 가출해 버렸다. 고독한 프리다는 늘 마음 속에 자신의 분신을 품게 되었고, 1939년 <두 명의 프리다>를 통해 그런 자신 내면의 분신을 드러냈다. 또 그녀는 자신의 일기장을 통해 또 하나의 프리다라 할 수 있는 자신의 내면과 대화를 나누었다.

   화가들은 대개 자신의 얼굴을 작품으로 남긴다. 그러나 프리다 칼로처럼 많은 자화상을 남긴 작가는 흔치 않다. 수많은 인물화를 그렸던 모딜리아니는 말년에 이르러서야 마지 못한 듯 한 장의 자화상을 남겼을 뿐이었고, 고흐 역시 많은 자화상을 남겼지만 고흐의 경우엔 좀더 현실적인 이유가 작용했다. 왜냐하면 그는 평생 동안 그림 주문 한 번 받지 못한 데다가 가난에 시달린 나머지 모델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어떤 화가도 프리다 칼로처럼 의도적으로 많은 자화상을 남긴 화가는 없다. 그렇다면 프리다 칼로는 어째서 그토록 많은 자화상을 남긴 것일까? 우리는 화가가 어째서 자신의 얼굴을 그리는지 그 심리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심리학에서 거울은 정체성을 의미하는 상징이다. 거울에서 낯선 얼굴을 대하는 꿈은 종종 정체성의 위기를 나타내기도 하고, 거울에 비친 얼굴이 꿈꾸는 이를 깜짝 놀라게 하거나 겁먹게 만들 경우에 그 얼굴은 그림자, 즉 꿈꾸는 이의 보다 어두운 측면을 드러내는 원형을 상징하곤 한다.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린다는 것이 반드시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것은 아니겠지만 그와 무관할 수는 없다. 특히 그 화가가 프리다 칼로라면 더욱 더 그러하다.

고독과 고통스러운 저주의 탑에 갇힌 다나에 - 프리다

   나에의 아버지 아크리시오스는 자신이 외손자의 손에 의해 죽게 된다는 신탁이 두려워 자기의 딸인 다나에를 임신하지 못하도록 아마도 오를 수 없을 만큼 높은 청동탑 꼭대기에 가둬두었다. 그런데 제우스가 이를 발견하고 황금소나기로 둔갑해서 다나에를 임신시키고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페르세우스였다. 1925년 18세가 되던 프리다는 그 당시 멕시코 시티의 새로 생긴 명물이었던 버스를 타고 가다 사고를 당한다. 사고 결과는 너무 끔직해서 프리다를 진찰한 의사들 대부분은 그녀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놀라워 했다. 프리다는 놀라운 생명력으로 이를 버텨냈지만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소아마비에도 불구하고 항해사나 유명한 여행가를 꿈꾸었던 고독하고 냉소적인 몽상가의 곁에는 가출한 언니 마티타가 신문 기사를 읽고 달려와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사고 소식에 충격을 받고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같이 버스를 탔던 알레한드로는 부모의 강권에 밀려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버렸다. 병원에서 퇴원한 뒤로도 오랫동안 프리다는 침대에만 누워 있어야 했는데, 프리다는 이때 자신의 침대의 천장 위치에 큰 거울을 붙여 자신을 바라보며 스스로의 모델이 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1926년 그녀는 스스로 다음과 같은 통지서 한 통을 작성했다. "레오나르도는 서기 1925년 9월 적십자 병원에서 태어나 다음해 코요아칸에서 세례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프리다 칼로였으며, 이사벨 캄포스와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가 그의 대부모였다." 앞으로도 영원히 태어나지 못할 아이의 출생 신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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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버스, 1929년, 캔버스에 유채, 25.5x55.5cm

   고통스러운 저주의 탑에 갇힌 프리다는 침대에서 한 발짝도 걸어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를 둘러싼 사방의 벽이 유일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프리다는 혼신의 힘을 쏟아 결국 움직였고, 무리해서 외출을 했다. 병원에서 퇴원한지 삼 개월 후에는 멕시코 시티 중심부까지 버스를 타고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프리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림이 되었고, 존재의 중심이 되었다. 그녀는 이제 열아홉이 되었고, 성숙하고 단호했으며 불같은 기질과 공격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예술적이고 다정했던 아버지와 당대의 풍속으로는 매우 도전적이었던 가출을 감행한 언니 마티타를 사랑했다. 그러나 당시 부르주아적인 관습에 젖어있던 어머니의 독실한 신앙심과 서로를 질투했던 연년생 동생 크리스티나를 몹시 싫어했다. 그러나 프리다는 아직 젊었다. 비록 그녀의 육신은 망가질대로 망가졌지만 그 안에 깃든 프리다의 영혼은 비록 미숙하고 때론 어리석었지만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가끔씩 재발하는 상처와 싸웠고, 코르셋과 목발에 의지해 걸었지만 이제까지는 별로 관심없어 하던 세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마치 높다란 청동탑 꼭대기에 갇힌 다나에가 매일같이 창문을 내다보듯 프리다 역시 신문과 잡지를 통해 멕시코의 현실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뜨거운 혁명의 열기에 젖어들었다. 그 중에서도 그녀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것은 멀리 러시아와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혁명이었다. 그녀는 레닌이 주도하는 러시아혁명과 손문이 주도한 신해혁명의 이념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28년 1월 무렵 다시 국립 예비학교로 돌아간 프리다는 공산주의 소모임에 들어갔고, 이 모임에서 여러 나라에서 온 망명자들을 만났다. 당시 멕시코는 혁명 덕분에정치적인 망명자들을 보호했고 그로 인해 많은 망명자들이 집결했다. 그러나 이중에서도 그녀가 무엇보다 많은 관심을 보인 것은 미술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구원할 방법으로 미술을 택했지만 그녀는 그로 인해 더욱 고통스럽게 되었고, 불행 역시 이제부터 시작된다.

혁명의 열기 속에서 꽃 핀 사랑

   시코 혁명은 판초 비야와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암살과 함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민중봉기를 이끈 이들에 대한 기억은 멕시코 민중들의 뇌리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고, 부자들이 지배하던 세상에 대해 저항했던 혁명의 위풍당당함 역시 살아 있었다. 혁명가들이 세상을 뒤엎어 버리지는 못했지만 멕시코 민중들에게 돌아가는 혁명의 과실은 그 이전보단 확실히 풍성했다. 이제 교육은 더 이상 중산층만의 특권이 아니었고, 배고픔 못지 않게 교육의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민중들도 깨달았다. 멕시코는 이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낡은 모든 것들을 불태우고 새롭게 모든 것을 창조하고자 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대중을 위한 벽화예술가들이었다. 이전까지 흠모와 숭배의 대상이자 배워와야만 했던 유럽의 미술이 모더니즘에 중독되어 있던 시기에 멕시코 미술은 그와는 정반대의 길로 달려나갔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멕시코 미술의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한때 멕시코에서 유행했던 야수파와 큐비즘은 멕시코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그들은 멕시코 원주민들의 순수한 힘과 새로운 형식과 시각을 얻었다. 그들은 예술을 일상의 뒤틀린 현실 속으로 되돌려 놓았다. 디에고 리베라는 전쟁(제1차 세계대전)으로 핍폐해진 유럽을 떠나 멕시코로 돌아왔고, 이곳에서 폭발하는 생명력과 폭력, 관능적인 사랑을 발견했다. 그는 이것을 '멕시코 르네상스'라 불렀다.

   유럽의 각지를 돌아다니며 안목을 높히고 때론 그들에게 절망하며 고통 속에 젖어 있던 디에고는 멕시코에서 정열적인 활동에 활동을 거듭했다. 1927년 여름 디에고는 소련 정부의 초청으로 몇 달간 소련에 머물게 되었다. 소련에 가기 전 그는 독일에서 히틀러를 만났고 이를 통해 히틀러와 스탈린을 비교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소련에서 디에고는 이제 막 레닌으로부터 정권을 이어받은 스탈린의 대중적인 언변과 행동에 매료당했지만 소련 체제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실망을 품게 되었다. 다시 멕시코로 돌아온 그는 함께 벽화운동을 추진하던 오로스코, 시케이로스와 함께 공산당 집행위원회에 선출되었고, 신랄한 농담과 함께 대중을 매료시켰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가 만난 것은 바로 이 때였다. 디에고는 프리다가 무척 마음에 들었고, 그가 이전에 만났던 다른 어떤 여인에게서도 찾을 수 없었던 것들을 그녀에게서 발견했다. 그녀의 눈에는 디에고에 대한 사랑과 흠모의 마음이 가득했고, 아직 젊은 데다가 고통 속에 터득한 그녀만의 지혜가 돋보였다. 이 두사람을 지켜보던 주변의 사람들은 아직 어린 프리다가 천재 디에고를 아이처럼 자연스럽게 다루는 데 충격을 받았다.

  사랑에 빠진 디에고는 코요아칸의 프리다의 집을 방문했고, 이때 그녀는 나무 위에 앉은 채 위태로운 자세로 휘파람으로 '인터내셔널'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프리다는 단지 디에고의 부인이 되기 위해 그림을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받쳐 무언가를 이루고자 했으며 디에고의 애인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노동자로 그의 앞에 서길 원했다. 그녀는 디에고에게 "자신은 그저 살아가기 위해 그림을 그려야 하는 여자"라고 말했다. 프리다는 그림이야말로 자신을 키우고 자신의 본질을 확인하는 거울이자 유일한 기회라고 느끼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살았다. 디에고는 자신 앞에 선 이 연약한 여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힘에 매료당했고, 그녀를 예술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리에서 피카소와 로댕, 모딜리아니를 만났고, 베를린에서 히틀러를,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만나 악수를 했던 이 천재화가 디에고 리베라가 멕시코를 벗어나 본 적도 없는 아니 주된 생활 공간이라고는 코요아칸과 멕시코 시티, 그리고 자신의 침대를 벗어나 본적이 없으며 머리 맡에 붙은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 이외에는 그려 본 적이 없는 소녀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 두 사람은 1929년 8월 21일 코요아칸에서 결혼했다. 프리다의 부모는 이 결혼이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합만큼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말 만큼 이 두사람의 결혼 생활에 잘 어울리는 말도 없을 것이다. 다만 프리다가 비둘기가 아니라 매였다는 사실만 빼면.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1907-1954, 멕시코 )

 

 

 

 

 

 

 

 

 

 Inner Link

 

천재와 천재의 고독한 아내 그리고 혁명의 배신

 

 

 

이오시프 스탈린

지그문트 프로이트

아돌프 히틀러

레온 트로츠키

마야코프스키

마르크 샤갈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에드워드 웨스턴

헨리 포드

프랑코

앙드레 브루통

파블로 피카소

바실리 칸딘스키

베니토 뭇솔리니

체 게바라

 

  류의 역사를 통틀어 불의와 압제가 없었던 시기는 없었다. 그러나 억압받는 대중이 다른 집단을 대리로 하지 않고도 그들이 직접 권력을 장악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비로소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20세기가 채 저물기도 전에 그 꿈은 다시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는데 다소 무식하고 성차별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남성들이 꿈 꾸는 방식의 혁명이 부딪친 한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성들이 꿈 꾸는 혁명이란 모든 걸 불태우고 파괴한 뒤에 새롭게 만들어지는 방식이지만 여성들이 꿈 꾸는 방식은 그와는 좀 다른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것이다. 디에고가 프리다와 결혼한지 두 달 만에 그가 혼신을 다해 지원했고 그 스스로가 만들다시피 한 멕시코 공산당은 디에고를 제명했다. 당시 당서기장이었던 디에고는 멕시코 소시민 계급 출신의 어용화가 '디에고 리베라 동무'의 제명을 공식선언했다. 그는 선언을 마친 뒤 주머니에서 찰흙으로 빚은 권총을 꺼내 탁자 위에 놓고 망치로 부셔 버렸다고 한다. 공산당은 그의 자유분방함을 의심해 제명했고, 산 카를로스 미술학교는 그가 너무 혁명적이라는 이유로 해임시켰다. 디에고는 이렇듯 자신의 제명 처분에 대해서 야유를 보냈지만 다른 한편으론 자신의 제명을 고통스러워 했다. 혁명으로부터 버림받은 모든 예술가들, 마야코프스키, 마르크 샤갈, 쇼스타코비치가 걸어가야 하는 길을 그 역시 걸어야 했다. 그것은 형극의 길이었다.

  디에고는 환상에서 깨어났고, 그 곁을 프리다가 지켜 주었다. 프리다는 디에고를 비난하는 당과 친구들과의 관계를 모두 청산했다. 이 무렵 디에고는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프리다는 건강이 매우 좋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작품을 그리지 못했다. 대신에 그녀는 늘 디에고와 함게 했다. 그녀는 디에고와 어디든 동행했고 그를 위해 식사를 준비했고, 그의 생활을 관리해주었고 그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함게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그녀는 디에고를 위해 자신의 외모를 바꾸었다. 공산당 청년 모임으로부터 시작된 혁명 복장을 벗고, 테우아나족 여인들의 긴 주름 치마, 오악사카 지방의 블라우스 등 멕시코 원주민들의 복장을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다. 어떤 이들은 프리다의 복장과 행동을 연극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녀의 행동에서 의식(意識)적인 측면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녀의 의식(儀式)이기도 했다. 프리다 부부는 결혼 직후 많은 어려움을 함께 했다. 많은 이들이 디에고를 비판했고, 끝없는 정치 논쟁은 이들 부부를 키치게 만들었다. 이 무렵 프리다는 병원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가졌다가 유산하고 말았다. 그들은 잠시 멕시코를 떠나 미국에 가기로 했다. 그들은 미국에서 사진작가 에드워드 웨스턴을 만났다. 웨스턴은 프리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그녀는 디에고의 곁에 있는 작은 인형 같았다. 그러나 키만 작을 뿐 강하고 아름다웠다."  디에고는 미국 생활에서 많은 것을 발견하고 일부분은 흡족해 하기도 했지만 프리다는 미국 생활을 그다지 즐기지 못했다. 낯익은 풍경과 사람들로부터 너무 많이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여동생 크리스티나의 아이들을 돌보는 프리다 - 크리스티나의 아이들은 프리다의 아이들이기도 했고, 쓸쓸한 코요아칸의 집안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존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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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희망은 사라지고, 1945년, 캔버스에 유채, 28x3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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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스탈린을 그린 그림 앞에 자화상, 1954년, 오래된 천에 유채, 59x39cm - 디에고와 프리다를 열렬한 스탈린주의자로 바라보는 시각은 다소 잘못된 부분이 있다. 이들은 열렬한 혁명가이긴 했지만 트로츠키주의자도 그렇다고 스탈린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들은 지식인이라기 보다는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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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부서진 기둥, 1944년, 캔버스에 유채, 40x30.5cm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
 


1907년
. 7월 6일. 멕시코 교외의 코요아칸에서 독일 출신의 사진사인 아버지 곤잘로 기예르모 칼로와 멕시코 출신인 어머니 마틸드 칼데론 사이의 네 딸 중 셋째 딸로 태어남.
1921년. 멕시코 최고의 명문인 국립예비학교에 입학. 2,000여명의 신입생 중 여학생은 단 30여 명이었고 그중에 프리다 칼로도 포함되어 있었음. 의학도를 꿈꾸며 서클 카추차스에 가입. 첫사랑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를 만남. 그와의 사랑은 우정으로 변해 평생 이어짐.
1925년. 9월 17일. 프리다와 알레한드로가 탄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는 대형 사고가 일어남.
1926년. 프리다 칼로와 자신의 첫 그림 <자화상>을 완성하여 알레한드로에게 선물함.
1928년. 알레한드로와 결별 후 좌익계 활동가였던 티나 모도티의 소개로 공산당 조직에 참가. 이 때 디에고 리베라를 만남.
1929년. 8월 21일. 21살 연상의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하여 그의 세 번째 부인이 됨. 디에고가 공산당에서 제명당하자 그녀도 탈퇴함.
1930년. 첫 번째 임신을 했으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중절수술을 함. 디에고와 도미.
1931년. 평생동안 그녀의 충실한 의사가 되어주는 엘로서를 알게 됨. 오른쪽 다리에 육체적 고통이 점점 더함.
1932년. 두 번째 아이를 임신했으나 유산함. 이때부터 그녀는 정말에 몸부림치며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함. 어머니 폐암으로 사망.
1933년. 다시 멕시코로 이주.
1934년. 난소 발육 부진으로 임신 석달 만에 다시 중절 수술함. 오른편 다리 발가락을 절단하는 수술.
1935년. 여동생 크리스티나가 디에고와 깊은 관계를 맺어 왔음을 알고 큰 충격을 받음. 수개월간 별거 생활.
1937년. 트로츠키와 교제하며 왕성한 작품활동.
1938년. 초현실주의의 거장인 앙드레 브루통과 만남. 니콜라스 머레이와 사랑에 빠짐.
1939년. 니콜라스 머레이와 결별 후 멕시코에서 디에고와 이혼함.
1940년. 디에고의 여자 관계 정리, 상대방에 대한 존중 등을 조건으로 디에고와 재결합.
1941년. 프리다의 아버지 기예르모 사망. 프리다의 건강이 다시 악화되기 시작. 코요아칸의 푸른 집에 정착.
1946년. 뉴욕에서 척추 수술을 받음.
1950년. 영국에서 일곱 번의 척추 수술을 받고 병원에서 9개월을 보냄.
1952년. 반전평화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서명운동에 참여함.
1953년. 멕시코에서 회고전이 열림. 전시회 이후 건강이 급속히 악화돼 오른쪽 다리를 무릎 아래까지 절단.
1954년. 건강 악화 고생하던 중에도 6월 2일 반미 공산주의자 시위에 참여. 6월 13일 사망
 

 

 


  그도 그럴 것이 디에고는 미국에서 헨리 포드가 이룩해 놓은 그의 공장에서 더할 나위없는 감동을 받기 까지 했으며 공산주의자와 자본가 사이의 기묘한 우정을 맺기 까지 한다. 물론 디에고가 이 늙은 자본가에게 감복되었다기 보다는 그가 일궈놓은 미래의 세계에 대한 감탄이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프리다는 헨리 포드가 유태인에 대한 강한 인종 차별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후 그의 집에서 열린 공식 만찬장에서 아주 뚜렷한 목소리로
"포드 씨, 당신은 유태인입니까?"하고 물어 그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프리다는 멕시코로 돌아가고 싶었고, 천재의 부인으로서 살기 보다는 자신의 작품을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그녀는 그저 누에고치 속의 번데기처럼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다시 아이를 갖기로 결심했다. 그때 찾아간 포드 병원에서 그녀는 자신이 사고로 말미암은 후유증만이 아니라 선천적인 기형으로 인해 자궁이 너무 좁아 임신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그녀는 매독에도 걸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이를 낳으려 했고, 다시 끔찍한 하혈 뒤에 유산하고 말았다. 디에고는 며칠 후 병원에 누워있는 그녀에게 연필과 물감을 가져다 주었다. 디에고는 이 때의 일을 '프리다의 비극'이라 불렀고, 실제로도 이들 부부의 생활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프리다가 그려내는 아니, 토해내는 작품들은 이 시기의 것들이 가장 걸작이 되었다. 유산 이후 프리다는 끊임없이 데생을 하고 그림을 그렸다. 결국 디에고가 록펠러 센터의 벽화를 그리는 작업이 무산되면서 다시 멕시코로 돌아가게 되었다.

첫 번째 사고, 육신의 붕괴와 두 번째 사고, 디에고와의 만남

   "일생 동안 나는 두 번의 심각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하나는 18살 때 나를 부스러뜨린 전차입니다. 부서진 척추는 20년 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죠. 두번째 사고는 바로 디에고와의 만남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디에고는 평생을 두고 프리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의 여성 편력에 대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측에 서지는 못한다. 그를 두둔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예술가에게는 그의 성별과 관련없이 성(섹스)이 매우 중요한 창작의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측면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그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다루게 될 디에고 리베라 편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자). 미국에서 돌아온 디에고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여전한 멕시코와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이었고, 유산으로 갈갈이 찢어진 몸으로 돌아온 프리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이즈음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일은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일이었으며 어린 시절 서로에게 가장 애증의 관계로 엮였던 동생 크리스티나가 자신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디에고와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1934년 여름, 동생 크리스티나의 고백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프리다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크리스티나는 그녀에게 남은 거의 마지막 친구이자 동지였고 무엇보다 자신의 동생이었다. 설령 디에고가 세상 모든 여인과 정분이 난다고 할지라도 피했어야 할 여인이었다. 프리다는 단숨에 모든 걸 다 잃었다. 프리다는 드디어 디에고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했고, 실천에 옮겼다. 그녀에게 고난은 두려운 대상이 아니었고 매우 낯익은 존재였다. 그녀는 이 때의 고통을 한 장의 그림으로 남겼다. 배신자 디에고에게 보내는 한 장의 편지와도 같은 이 그림에서 프리다는 그가 배반의 칼날로 자신을 후벼 판 사실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침대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자신의 저고리를 피로 물들인 채 말한다.  "그냥 몇 번 칼로 살짝 찔렀을 뿐입니다. 판사님. 스무 번도 안 된다구요." 사실 디에고가 자신과 결혼한 여인의 여동생이나 가장 친한 친구와 바람을 핀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디에고는 프리다가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하는 여인이란 사실을 망각했다. 디에고와 헤어져서 몇 달을 보낸 프리다는 다시 디에고의 곁으로 돌아갔지만 디에고는 이 일을 자랑삼아 떠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병실에 누워있는 프리다 칼로와 이를 지켜보고 있는 여동생 크리스티나(사진 우측) - 프리다와 연년생으로 태어난 동생 크리스티나는 프리다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어려서부터 서로 애증으로 엮여 있던 사이였다. 1928년 프리다가 여동생의 초상화를 그려줄 무렵부터 디에고와 가까워진 사이가 된 크리스티나와 디에고의 관계는 프리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프리다는 자신이 만든 태양으로부터 버림받았고, 그 허무를 잊기 위해 많은 남자들을 만났으며 자신이 양성애자라는 소문이 퍼지는 것도 모르는 척했다. 그녀가 일본계 미국인 조각가 이자무 노구시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으며 투신자살한 여배우 도로시 헤일의 그림<도로시 헤일의 자살>과 함께 껍질이 벗겨지고 차가운 불빛 아래 놓인 <땅의 과일들>을 그린 것도 이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반대로 그녀의 의식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세계와 더욱 밀접하게 겹합하기 시작했다. 1939년 말 프리다가 파리에서 돌아왔을 때, 디에고는 이혼을 요구했고 이들은 결별했다.

트로츠키와 프리다, 디에고 그리고 앙드레 브루통

   약 프리다가 1920-30년대를 그것도 디에고와 함께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녀에 대해서 좀 더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가령 그녀의 화풍은 어떠했고, 기법 상 어떤 특징을 보여주는 화가라든지 하는 이야기를 말이다. 그러나 프리다의 삶은 너무나 강렬해서 그녀의 삶과 작품을 따로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으며 그녀의 삶을 살펴보는 것이 곧 그녀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 보는 일과 거의 같다고 할 수 있을 지경이다. 게다가 그녀는 멕시코 혁명기에 태어나 멕시코 혁명의 좌절과 함께 했으며 스페인 내란을 지켜 보았고, 공화파 시민들이 어떻게 프랑코와 그의 팔랑헤당에 의해 살해당하는지, 그리고 러시아 혁명이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고 할 수 있다. 프리다 칼로가 살아온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 1937년 1월 9일, 레온 트로츠키와 그의 부인 나탈리아 세도바가 멕시코 탐피코항의 후끈한 열기를 받으며 유조선 루스호에서 내렸을 때 이들을 환영하기 위해 나간 여인이 바로 프리다였고, 트로츠키가 은신처를 구한 곳도 코요아칸에 있는 그녀의 집이었다. 스탈린의 밀정들이 전세계에서 그를 쫓고 있었고, 노르웨이가 추방했으며 루즈벨트가 미국 체류를 금했던 트로츠키는 공산주의 순교자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혁명 유산을 세상에 전파하는 타협을 모르는 순수한 혁명가였다.

   디에고와 프리다가 그를 열렬히 환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멕시코 공산당이 그를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디에고에게 트로츠키는 혁명의 이상 그 자체였고, 이념을 위해 스스로를 송두리째 희생시킨 인물이었다. 디에고는 그를 위해 당시 멕시코의 신임 대통령 라사로 카르데나스에게 그의 입국을 허용해줄 것을 요청했다. 카르데나스는 트로츠키를 위해 자신의 전용열차를 보낼 만큼 그를 열렬히 환영해주기까지 했다. 코요아칸에 머물게 된 트로츠키는 이곳을 트로츠키파 국제노동자 연맹의 본부로 삼았고, 프리다에게 빠져들었다. 그러나 트로츠키와 프리다가 아주 깊은 관계였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디에고와 프리다 부부의 결별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든 것은 디에고 리베리와 트로츠키, 앙드레 브루통의 만남이었다. 트로츠키를 만나 재야 혁명 예술가 국제연맹의 선언문을 작성하기 위해 멕시코 시티를 방문한 브르통은 곧 프리다에게 매료되었다. 그러나 브루통은 단지 그녀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그린 그림의 깊이와 자유로움 때문이었다. 그는 프리다의 예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프리다 칼로의 예술은 폭탄 주위에 둘러진 리본이다." 이미 프리다와 헤어지기로 결심한 디에고는 그녀가 첫 번째 전시회를 위해 뉴욕으로 떠나는 것을 결별의 구실로 삼았다.

  디에고의 혁명은 사랑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프리다의 해방은 남자들과 동등해지고 독점적인 사랑의 예속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뉴욕에서 프리다 칼로는 사진작가 니콜라스 머레이를 만나 수개월 간 함께 지냈고, 그와 함께 지내는 동안 그녀는 18살 때의 끔찍한 사고 이전의 프리다처럼 행동했다(사진에 사람의 마음이 실린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증거는 니콜라스 머레이가 프리다 칼로를 촬영한 사진들인데 그의 사진만큼 프리다를 아름답게 담아낸 사진을 볼 수 없다는 것이 그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뉴욕에서 동시대의 많은 예술가들과 저명 인사들을 만났고, 그중에는 무용가 마사 그레이함, 화가 조지아 오키프 등도 있었다. 디에고와 프리다는 서로에 대해 애써 무관심한 척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리다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살아가는 동안 결코 당신의 존재를 잊지 않으리라. 당신은 지친 나를 안아주었고 어루만져 주었지. 너무도 작은 이 세상에서 시선을 어디로 향해야 하나? 너무 넓고 깊어라! 이제 시간이 없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 아득함. 오직 현실만이 존재한다. 그랬다. 항상 그랬다." 1937년 프리다는 더 이상 디에고에게 얽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프랑스 파리의 피에르 콜르 화랑에서 열린 멕시코전에 초청을 받아 디에고의 곁을 떠난다.

초현실주의와 프리다 칼로

  리에서 프리다는 앙드레 브루통의 집에 머물면서 초현실주의자들이나 이브 탕기, 피카소 등과 같이 저명한 화가들에게 열렬한 환대를 받았고, 바실리 칸딘스키는 그녀의 그림에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전시장의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안아주기도 했다. 그러나 프리다는 뉴욕에서처럼 파리에서 행복하지 못했다. 브루통은 그녀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거의 하지 않았고, 프리다는 그의 집에서 만나게 된 초현실주의자들에게도 실망했다. 프리다가 파리의 지식인들에게 어찌나 깊은 혐오감을 느꼈던지, 머레이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들이 어찌나 썩었는지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예요. 정말 너무 심하네요. 이 예술까인 척하는 파리의 멍청이들과 일을 하느니 차라리 톨루가 시장 바닥에 앉아 옥수수 부침개나 파는 게 낫겠어요. 난 디에고나 당신이 이렇게 어리석은 수다와 현학적인 토론에 시간을 낭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중략 … 세상에! 다닞 무엇 때문에 유럽이 곪아 터지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이 무능력자들이 히틀러나 뭇솔리니 일당을 불러들이게 되었는지를 이젠 정말 잘 알겠군요."

  프리다가 멕시코 시티로 귀국했을 때 그녀를 기다린 일은 니콜라스 머레이가 결혼하게 되어 그녀를 떠나야 했고, 디에고가 그녀에게 이혼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때의 심정을 그녀는 <머리카락을 자른 자화상>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 상단에 적힌 악보와 노랫말은 "알겠니, 내가 날 사랑한 건 네 머리카락 때문이었는데, 이제 그 머리카락이 네게 없으니, 더 이상 널 사랑하지 않아."라는 내용이었다. 그녀가 파리에서 발견한 것은 파시즘의 발호에도 불구하고 무력한 유럽 지식인들의 몸짓이었고, 껍데기만 남은 초현실주의였다. 그녀는 이런 경험을 통해 분명히 초현실주의적인 화풍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초현실주의와 전혀 상관없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강변했다. 하긴 그녀의 말이 옳기도 했다. 그녀에게 있어 자신의 작품은 철저히 현실이었고, 그것이 현실이므로 더욱 슬펐다.

  1941년 초 디에고는 더 이상 프리다가 없는 삶을 견딜 수가 없었고, 그것은 프리다도 마찬가지였다. 디에고는 프리다를 샌프란시스코로 불러 두 번째 청혼을 했다. 1949년 디에고 리베라의 창작활동 50주년을 기념하여 국립미술학교에서 개최된 성대한 전시회에서 프리다는 처음으로 디에고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글을 발표했다.

"나는 내 남편 디에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우스운 일이게 되겠지요. 디에고가 한 여자의 남편이었던 적은 한번도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애인으로서의 그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성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그를 아들처럼 다루며 이야기한다면 그건 디에고에 대해 묘사한다기 보다 내 자신의 감정을 묘사하거나 그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해 묘사하는 일일 뿐입니다."

프리다와 디에고, 부부, 부자, 부녀, 확실하고 모호한 여러 관계들

  리다와 디에고 부부를 각각 별도의 장에서 다룰 생각으로 이 글을 만들면서 곤혹스럽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몇 차례 지나갔다. 그건 애초에 내가 생각을 잘못했거나 아니면 이들 사이를 너무 만만하게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심 같은 것이었는데, 그만큼 이 두 사람을 따로 떼어놓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페미니즘적인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디에고 리베라 같은 그런 개망나니가 따로 없을 것이고, 프리다 칼로에 비하자면 그의 중요성은 한 없이 왜소해 보이기 마련이지만 역사적으로, 미술사적으로 보자면 디에고 리베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거물이다. 게다가 나의 주관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디에고와 프리다는 서로 증오한 만큼 아니 이 표현은 적절치 않다. 사실 이 두사람의 관계를 적절히 표현할 수 있을 만한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이 두사람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마치 뱀이 서로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것처럼 이어져 있다. 참고로 이 때의 뱀은 사악함의 상징이 아니라 지혜와 생명의 상징일 것이다.

  프리다에게 디에고에 대한 사랑은 그에게 눈 멀고, 마음을 내주는 그런 범주의 것이 아니었다. 비록 고통스러운 것이긴 했으나 프리다 자신이 고통스럽게 고백하고 있듯이 자신의 이마에 마치 불상에서 광명을 비춘다는 백호(白毫)처럼 디에고를 박아두고 있다. 프리다의 수많은 자화상들을 보면서 문득 보살을 그린 불교의 탱화가 연상되는 까닭은 그녀 자신이 삶의 비의(秘意)를 깨달은 자의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프리다는 이렇게 말한다.

"광기의 장막 저편에서는 내가 원하는 여인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난 하루종일 꽃다발을 만들고 고통과 사랑과 다정함을 그리면서 다른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리라. 그러면 모두들 말하겠지. 불쌍한 미친 여자라고(난 무엇보다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리라) 나 자신의 세계를 건설하겠다. 그것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 다른 모든 세계들과 조화를 이루리라. 내가 살아갈 날과 시간과 분은 내게 속한 동시에 모든 사람들에게 속하겠지. 나의 광기가 작업 속으로 도주할 수단이 되지 못할테니,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들 작품의 포로로 가둘 것이다. 혁명이란 형태와 색채의 조화이며, 모든 것이 오직 생명의 법칙에 따라서만 움직이고 머문다. 누구도 다른 누군가와 헤어질 수 없다. 누구도 자기자신만을 위해 싸우지는 않는다. 만물은 전체인 동시에 하나이다. 불안, 고통, 쾌락, 죽음, 이들은 존재를 유지할 유일한 방법이고, 결국은 하나이다 ."

프리다 칼로, <매우 추한 자화상> - 스스로 'ugly'란 제목을 붙인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이지만 개인적으론 그녀의 자화상 중 가장 맘에 드는 그림 중 하나이다. 글쎄, 그녀의 눈빛이 가슴에 와 닿아서 그럴까.

 

 

 

 

 

 

관련 사이트 & 참고 도서

『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 르 클레지오 지음/ 신성림 옮김/ 다빈치/ 2001년 - 프랑스의 작가 르 클레지오가 멕시코에서 불문학을 강의하다가 만나게 된 프리다와 디에고의 삶에 푹 빠져 쓰게 된 책이다. 두 사람의 삶이 정제된 문체로 잘 정리되어 있고, 읽다보면 감동받을 만한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 올려진 프리다에 대한 이 글 역시 이 책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알려 두는 바이다.(필독)

『멕시코 혁명사』/ 백종국 지음/ 한길사/ 2000년 - 멕시코 혁명은 20세기의 개막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이지만 우리의 관심이 주로 구미에만 집중되어 있는 나머지 그동안 소개가 잘 되어 있지 않았던 사건 중 하나이다. 이 책은 한국인이 쓴 최초의 멕시코 혁명사라는 의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책 그 자체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책이다. 판초 비야와 사파타와 함께 그 시대를 탐험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권한다.

『20세기 라틴 아메리카 미술』/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 지음/ 남궁준 옮김/ 시공사/ 1999년 - 제목 그대로 20세기 라틴 아메리카 미술에 대한 개론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책이다.

『멕시코 벽화운동』/ 남궁준 지음/ 시공사/ 2000년 - 비록 프리다 칼로에 대한 내용은 별로 없지만 당시 멕시코 벽화 운동을 이끌던 시케이로스, 오로스코, 디에고 리베라 등을 중심으로 당시 멕시코 벽화 운동을 심도있게 분석하고 있는 좋은 책이다.

영화 프리다 칼로 팬사이트 - 아직 국내에는 개봉되지 않았지만(조만간 개봉될 예정인 듯) 셀마 헤이악 주연으로 프리다 칼로의 일대기가 제작되었다. 아직 보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이 약간 께름직하긴 하지만 그녀의 생애를 연애와 사랑 중심만으로 풀어가기 쉬울 것 같다. 할리우드의 인물 영화들 특히 여성에 대한 영화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프리다 칼로의 세계(영문)

조지 이스트만 사진 박물관(영문) - 한때 프리다와 좋은 사이를 유지했던 뉴욕의 사진가. 니콜라스 머레이가 촬영한 프리다의 여러 사진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스모그넷(영문)
 

 


   푸른 집
(코요아칸의 집을 이렇게 불렀고, 프리다 기념관이 되었다)과 철제 코르셋(척추의 부상으로)의 견고한 이중 감옥에 갇힌 프리다가 디에고에게 바친 사랑은 마치 종교와도 같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그에게 경배를 보내든, 인간이 신을 창조하고 그에게 경배를 보내든 결국 경배를 보낼 나란 존재가 없다면 신의 존재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디에고에게 프리다는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광명의 빛이었으며 메마른 대지로부터 솟아오르는 한줄기 감로수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디에고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 어머니의 마지막 적금 통장을 털어 달아나듯, 신과 자연과 생명의 넘쳐나는 사랑을 인간이 미처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디에고 역시 프리다 곁을 떠나고자 했다. 디에고가 프리다의 곁을 떠나고자 했던 것(바람을 피웠다거나 외도가 잦았다는 것은 프리다에게도, 디에고에게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었음을 전제하고)은 그의 평생동안 단 한 차례의 일이었고, 그 한 번이 프리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물론 이들 부부의 재결합 이후에도 디에고는 여전했다. 그는 계속해서 놀라운 창작열을 보였고, 다른 여자들을 침대로 끌어들였다. 남자들의 혁명은 죽음을 부르는 권력이었고, 그것은 여성들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러나 여성의 혁명은 그들 스스로에게 삶의 고통과 사랑을 책임으로 짊어지웠다.

  프리다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디에고, 탄생/ 디에고, 건설가/ 디에고, 나의 아이/ 디에고, 나의 약혼자/ 디에고, 화가/ 디에고, 나의 연인/ 디에고, 나의 남편/ 디에고, 나의 친구/ 디에고, 나의 어머니/ 디에고, 나의 아버지/ 디에고, 나의 아들/ 디에고, 나/ 디에고, 우주/ 디에고, 통일 속의 다양함/ 그런데 왜 나는 '나의 디에고'라고 말하는가? 그는 결코 내 것이 아닌데. 그는 오직 그 자신의 것일 뿐이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디에고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녀의 푸른 집과 철제 코르셋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녀는 생명과 죽음, 사랑과 증오, 우주와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그림들을 그렸다.

프리다의 생성과 소멸, 에로스와 타나토스

  리다 칼로는 1950년과 51년 사이에 오른쪽 발에 회저병이 생겨 발가락을 절단해야 했고, 영국의 병원에서 골수 이식 수술을 받다가 세균 감염으로 1950년 3월부터 11월까지 여섯 차례의 수술을 더 받아야 했다. 디에고는 프리다가 누워있는 병실을 떠나지 않았고, 그녀를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해주려고 했다. 그녀 스스로의 말대로 부서질대로 부서진 육신이었지만 그녀의 영혼은 그 어느 순간보다도 맑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철제 코르셋과 석고 붕대에 공산당의 별과 낫, 망치를 그려넣었고 디에고는 그런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에게 고통은 곧 언어였다. 프리다는 물감 대신 자신의 피를 짜내 그림을 그리는 여인이었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디에고는 프리다를 위해 그녀의 기념전을 열어주려고 했다. 그것이 그녀를 떠나보내는 마지막 환송 잔치가 될 것임을 어쩌면 디에고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기념전을 준비하는 중에 프리다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지만 디에고는 그녀의 침대를 들것에 실어 화랑으로 옮기도록 했다.

  기념전은 대성황리에 끝났고,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것은 물론 멕시코 전역에서 쏟아지는 열광에 젖었다. 그러나 이들의 행복도 잠시였다. 오른발의 회저병이 도져서 결국 그녀는 오른발을 잘라낼 수밖에 없었다. 프리다는 "내게 날아다닐 날개가 있는데 왜 다리가 필요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수술이 끝난 후 프리다는 "한쪽 다리를 잘라냈다. 이렇게 아픈 적이 없었다. 내게 남은 건 정신적 충격과 형액순환마저 바꿔놓은 불균형이다. 수술한지 일곱달이 지났는데 나는 여전히 누워있고, 그 어느 때보다 더 디에고를 사랑한다.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고, 그림도 계속해서 그리고 싶다. 디에고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만에 하나 디에고가 죽는다면 나 역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뒤를 따르리라. 우리는 함께 묻힐 것이다. 디에고가 죽은 뒤에도 내가 살아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디에고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내게 그는 아들이자 어머니이며, 배우자이고, 그리고 내 전부이다." 결국 프리다는 디에고보다 오래 살지 못했다. 1954년 6월 프리다의 건강은 일시적으로 호전되었고, 그녀는 회화의 새로운 세계와 세계적인 공산주의의 도래를 위한 디에고의 투쟁에 함께 했다. 그녀는 미국의 과테말라 개입과 아르벤스 대통령(이 부분에 대해서는 체 게바라편에 비교적 상세히 다루고 있다)을 지지하기 위한 집회에 참석했다가 비를 맞았고 결국 폐렴이 도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는 화장되었다.

  프리다는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디에고에게 이제 17일 가량 남은 결혼 25주년 기념 반지를 미리 건넸다. 디에고가 왜 반지를 미리 주는가 묻자 '머지 않아 당신 곁을 떠날 것 같아서 그래요'라고 말했다. 그녀가 쓴 마지막 일기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프리다는 세상에 온지 정확히 47년 7일을 살고, 6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은 다음날 폭우가 쏟아졌다. 디에고는 프리다가 죽은 뒤 일년이 채 못된 1955년 6월 29일 오랜 조력자 중 하나였던 엠마 우르타도와 조용한 결혼식을 치뤘다. 디에고 리베라의 누이었던 마리아 델 필라의 회고에 따르면 이들의 결혼은 죽기 직전의 프리다가 엠마에게 부탁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엠마에게 자신이 죽은 뒤, 디에고와 결혼하여 그를 보살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엠마와 디에고의 결혼생활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프리다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4개월 뒤 디에고도 이승을 등졌기 때문이다. 디에고는 유언으로 자신이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사랑했던 여인과 영원히 합쳐질 수 있도록 자신을 화장해달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돌로레스 시민묘지의 유명인사 구역에 매장했다.

  세상의 모든 여자들, 아니 세상의 모든 암컷은 그들의 몸 안에 삶과 죽음의 경계를 품고 있다. 이 말이 디에고 리베라를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 숫컷들이 여성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스테레오 타입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찌 하겠는가? 이 글을 쓰는 내내 남성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존재가 바로 프리다 칼로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알 수 없는 막막함에 시달렸다. 프리다 칼로는 평생 단 하나의 생명도 그녀의 품 안에서 길러내지 못했지만 그녀는 우주의 모든 생명을 포옹했고, 디에고 리베라라는 자식을 길렀다. 이 글을 통해 나는 내 오랜 친구에게 남긴 글빚 하나를 청산하고자 한다. 부디 그녀의 마음에 흡족하기를….

 

 

 

 

출처 / 바람구두연방의 문화 망명지 http://windshoes.new21.org/art-frida02.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