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하라
존 F. 케네디
칼 마르크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레온 트로츠키
대부2
더글라스 맥아더
시몬 볼리바르(카리요오에 대한 해설이 있음)
살바도르 아옌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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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본명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세르나. 이 사람을 처음 알게 된 것이 과연 어느 때부터인지 내 기억의 창고를 아무리 뒤져봐도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벌써 그렇게 나이가 들어버린 것일까? 하지만 확실히 기억에 남는 것은 나는 고등학생 무렵, 이 사람처럼 살겠다고 스스로에게 숱한 다짐을 하곤 했다는 것이다. 직업 혁명가로서 그의 모습은 어린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모델이었고, 세계사 위인 전기를 아무리 뒤져봐도 이보다 더 멋있는 인물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았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보다 더 어렸을 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한반도에 대규모 폭격을 자행하여 비무장의 민간인까지 학살하고, 핵폭탄 사용을 강력히 주장했던 더글라스 맥아더를 존경했었다.(물론 그 시기엔 그런 사실을 몰랐다.) 더글라스 맥아더로부터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까지의 간격은 또 얼마나 멀고 먼 것이었으며 그러기까지 나의 삶은 또 얼마나 멀리 유랑해온 것일까?
원래 지금의 홈페이지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를 만들기 전에 나는 체 게바라에 대한 홈 페이지를 만들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미 좋은 페이지가 있으므로 그와 중복되는 페이지를 굳이 또 만들어야 할 필요성도 더 좋은 홈페이지를 만들 수도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인터넷의 기본정신은 지식과 정보의 공유라는 나의 믿음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게 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링크라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은가? 지식과 정보는 나누면 나눌수록 좋은 것이며 그것이 인류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더욱더 좋은 일이 아닌가? 애초 그에 대한 관심이 시작될 무렵 국내엔 그에 대한 자료들이 거의 없던 시기였다. 심지어 그의 무덤이 어디인지 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무덤이 알려지고 그의 유해가 송환되었고, 그의 생존을 원치 않았던 구소련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시기가 된 지금에 와서 그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과 그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인지 말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반면에 이 글을 쓰고 있는 2001년 현재는 그의 유해가 발굴되어 쿠바로 송환(1997년)되었고, 국내에서도 그의 평전이 발간되어 비교적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난 뒤이기 때문이다.) |
어린 시절의 체 게바라 - 두 살 무렵에 앓기 시작한 천식은 일생을 두고 그를 괴롭혔다.
말을 타고 있는 체 게바라 - 그의 게릴라 전술은 마오쩌뚱의 게릴라 전술과 함께 현재까지 유용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혁명이 성공한 뒤에도 체 게바라는 게릴라 시절의 검소한 생활방식을 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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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그에 대한 간략한 전기적 지식을 나열하는 것(그렇다고 안 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보다는 그에 관해서 평소 지니고 있던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보는 쪽으로 글을 쓰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이다. 물론 그에 관한 좀 더 좋은 사이트가 있으므로 그 사이트를 소개하는 것 역시 잊지 않을 일이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지금의 이 글은 게바라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 위한 것이다. 그에 관한 이 글은 대충 다음의 몇 가지 질문에서 비롯된다. 첫째, 체 게바라가 의사로서 안정된 삶의 지위를 떠나 직업혁명가로 나선 이유는 무엇인가?, 둘째, 체 게바라가 쿠바에서 했던 일은 무엇인가?, 셋째, 체 게바라가 쿠바 혁명 이후 안정된 직위와 안전을 버리고 나선 이유는 무엇인가?, 넷째, 체 게바라가 꿈꾸었던 이상은 현재도 유효한가?,다섯째, 그에게 바쳐진 대중적이고 다소 상업적인 열광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다. 이 글을 다 읽고 난 뒤 그런 질문들에 대한 좋은 답을 드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함께 생각해볼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믿는다.
첫째, 체 게바라가 의사로서 안정된 삶의 지위를 떠나 직업혁명가로 나선 이유는 무엇인가?
체 게바라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체 게바라를 다른 혁명가들과 다른 존재로 우리들에게 인식시키게 된 계기는 그가 언제나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고 혁명의 최일선에서 행동했기 때문이다. 체 게바라는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의 로자리오에서 미숙아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는 귀족의 후손이었고, 어머니 세실리아 데 라 세르나 역시 독립전쟁 당시의 군인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르주아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집안은 자유주의적 좌파에 속하는 무신론자들이었다. 그의 집안이 비록 부르주아 출신이었다고는 하지만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집안은 아니었다.
평생동안 체 게바라를 괴롭힌 천식은 그의 나이 두 살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천식을 앓자 그의 가족은 아들의 건강을 위해 코르도바(근처의 알타그라시아)로 이사를 했고, 아들의 건강을 위해 그의 아버지는 에르네스토에게 여러 가지 운동을 가르쳤다. 그는 돈에 대한 욕심도 없었고 옷차림이나 외모에 신경쓰지 않는 소탈하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는 종종 고독을 즐기며 미친 듯이 책을 읽고 공부도 열심이었다. 그러나 청년 게바라는 모험을 즐기는 청년이었다. 그는 자신의 나이 17세 무렵 모터를 붙인 자전거를 이용해 아르헨티나 중부 지방을 여행하는 등 잠시도 집에 붙어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이 여행 후에 자동차 운전과 비행기 조종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1950년에 이혼하고 만다. 그는 어려워진 집안 살림 때문에 스스로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47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 의학부에 입학한다. 자신의 지병인 천식으로 인해 그의 관심이 의학에 쏠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그는 기회만 있으면 여행을 떠났다. 1952년에는 같은 의대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스(알베르토는 그보다 나이도 많고, 체 게바라에게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해준 인물이다)와 10개월여 동안 모터사이클을 이용해 라틴 아메리카 전역을 여행한다. 그는 이때 갖은 고생을 하며 라틴 아메리카 민중의 비참한 삶을 직접 목격했다. 그는 특히 상파울루 나환자촌에서의 노동을 통해 "인간의 사랑과 유대감은 고독하고 절망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싹튼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를 떠나 잠시 미국의 마이애미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는 이때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의 관계 속에 그 실상을 깨닫게 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는 귀국한 후, 의학공부에 몰입하여 1953년 3월, 무사히 대학을 졸업했다.
게바라는 라틴 아메리카 여행을 통해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이 처한 현실과 근본적인 문제를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런 과정을 거쳐 미래가 보장된 의사에서 급진적인 혁명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의사가 된지 두 달만에 게바라는 의사 가운을 벗어던지고 아르헨티나를 떠나 새로운 정권이 수립된 볼리비아로 갔다. 그러나 이 무렵까지 게바라의 주된 관심사는 아직 정치적인 문제에 가 있지는 않았다. 라틴 아메리카는 서서히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고질적인 문제들이 곪아터지기 직전이 되자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시도했던 개혁시도가 수구보수세력의 저항에 부딪치며 좌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개혁 시도가 좌절되는 현실을 지켜보면서 게바라는 좀더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이념에 눈을 뜨게 된다.
그런 그에게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 1954년 콰테말라에서 벌어진다. 중남미의 작은 나라 과테말라의 선거에서 자유주의적 좌파인 하코보 아르벤즈가 승리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과테말라의 비참한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혁신적인 정책을 실시했으나 과테말라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인 유나이티드 프루츠가 대부분의 경작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아르벤즈는 그런 경작지를 국유화시킨 후 그것을 다시 인디오와 빈농에게 재분배하는 개혁을 실시하고자 했다. 게바라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이런 아르벤즈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민중은 물질적으로 굶주렸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엄성에 더욱 굶주려 있다"는 아르벤즈의 사상에 대한 경외심을 평생동안 간직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아르벤즈 대통령의 경제개혁 조치는 미국의 경제적 이해와 충돌하게 된다.
미국은 이 당시부터 직접적인 무력 침공보다는 CIA에 의한 비밀공작을 통해 제3세계를 지배하려는 공작을 펼치게 되는데 그 첫 무대가 과테말라의 아르벤즈 정권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를 대변해줄 우파 인물인 호세 카스티요 아마스를 통해 과테말라 내에서 군부 쿠데타를 획책한다. 그리고 이런 군부 쿠데타에 앞서 괴벨스에게서 배웠음에 틀림이 없는 정치적 선전공작을 펼친다. 그것은 방송과 언론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은 유언비어와 악소문을 퍼뜨리며 과테말라의 합법적인 정부를 흔들어 놓는다. 가령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지역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퍼뜨린다던지, 특정 지역을 점령했다던지 하는 식의 소문을 퍼뜨려 우파 쿠데타에 저항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이런 과테말라의 사례를 이후에도 여러 곳에서 목격하게 된다. 이후 아시아와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지에서 군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는 독재자들은 거의 대개가 미국의 군사학교 출신이라는 점, 합법적인 선거에 의한 정부라 할지라도 미국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경우 헌법을 수호해야할 책임이 있는 군대, 경찰, 의회가 등을 돌리거나 방관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이에 대해 좀더 자세한 내용은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편을 참조하시길) 결국 과테말라의 아르벤즈 정권은 무너지고 만다. 아르벤즈는 미처 피신할 틈도 없었고, 게바라는 이때 처음 무기를 들고 저항을 시도했으나 그들의 저항은 애초부터 상대도 되지 못했다.
게바라가 평온할 수도 있었던 자신의 행로를 포기하고, 혁명의 일선으로 달려나가게 된 것은 무엇보다 그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중요성을 깊이 깨우쳤기 때문이었다. 과테말라 정부의 전복이 계기가 되어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학습을 시작했다. 이 학습을 통해 알게된 것은 가난하고 착취받는 나라의 혁명정부는 계속적인 착취와 수탈을 위해 미제국주의와 결탁한 자본가 세력에 의해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공격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의 과테말라 침공을 통해 게바라는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의 민주주의와 민중의 삶을 착취하는 현장을 목격했고,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와 세계 민중들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투쟁할 것을 다짐한다.
둘째, 체 게바라가 쿠바에서 했던 일은 무엇인가?
체 게바라는 과테말라의 현지 사정이 악화되자 그곳 친구인 엘 파토호와 함께 멕시코로 갔다. 당시 멕시코는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모여들었고 그는 이곳에서 에르네스코 게바라 데 라 세르나에서 체 게바라가 되었다. 이때가 1954년 9월 21일이었다. 그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준 사람들은 1953년 쿠바의 몬타카 병영 습격 사건에서 살아남은 일련의 혁명가들이었다. 게바라가 처음부터 이들에게 관심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다른 라틴 아메리카의 혁명적 지도자들을 만나고 싶어했지만 그들이 체 게바라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체제 내의 혁명을 꿈꾸었기 때문에 게바라처럼 혈기왕성한 젊은이에게 관심을 보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게바라를 비롯해서 라틴 아메리카의 성공한 혁명가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정통적인 이념보다는 오히려 마오주의에 경도된 것처럼 보이거나 후일 신좌익(New Left)쪽에서 오히려 더 지지를 받게 되는 것은 이 당시에 이미 유럽이나 라틴 아메리카의 공산당이 일종의 교조주의적인 도그마에 빠져 있었던 탓도 크다고 할 것이다. 망명지 멕시코에서 게바라와 그의 친구 파토호는 극도로 비참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게바라는 이곳에서 진보적인 여러 정치사상과 이론, 그리고 각국의 민족해방전쟁의 사례들을 공부한다. 그리고 게바라가 피델 카스트로를 만난다. 1955년 여름, 멕시코로 추방당한 피델 카스트로와의 만남은 게바라에게 인생의 전기를 마련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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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미국 CIA의 중남미 비밀공작과 과테말라 아르벤즈 정권의 몰락
CIA가 확립되기 이전에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반미정권들을 처리한 방식은 해병대를 파견하여 군사적으로 억누르는 것이었다. 1950년대에는 그와 달리 CIA 비밀공작을 활용했다. 파워스는 그 이유를 주로 라틴 아메리카 인민의 반미감정에서 찾았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냉전시대에 소련과 이데올로기 경쟁을 하는 처지에서 공개적인 군사개입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가능하다면 일부러 소란을 피울 필요 없이 되도록 은밀한 방법을 찾게 되었다. 둘째, 1940년대 후반에는 이탈리아에서 MFL고 1953년에는 이란에서 CIA는 비밀정치공작을 성공시킨 경험이 있었다. 이렇게 은밀하면서도 효과적인 수단이 확보된 마당에 공개적인 군사개입보다는 은밀한 CIA공작을 택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선택이었다.
CIA가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서 전개한 공작은 열의 아홉이 선전 및 심리전적인 요소를 포함한 것이었다. 여기서 계획된 군부 쿠데타 지도자는 미국 캔자스주의 육군 지휘참모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카를로스 카스티요-아마스 대령이었다. 카스티요-아마스는 인근에 있는 온두라스에서 7백 명의 반란군을 훈련시켰다. 미 국무장관 포스터 덜레스는 공개적으로 아르벤스 정권을 비난했다. 거기다 공군사령관은 일찌감치 반군에 가담했다. 그러자 아르벤스 정부는 계엄을 선포하고 민병대를 조직하고 무장시키기 위해 체코에서 무기를 들여올 것을 검토했다. 그러자 이런 민병대 조직 계획을 싫어한 과테말라 군부는 크게 경계심을 가졌다.
1954년 6월 18일 드디어 카스티요-아마스 군대는 온두라스에서부터 국경을 넘어 과테말라 접경지역 6마일 지점에 진지를 치고는 수도인 과테말라 시티에 주로 삐라를 살포하고 폭탄을 두어 개 떨어뜨렸다. 이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미국 CIA가 동원한 '자유의 소리' 방송이었다. 이 방송을 통해 수많은 명령을 하달하는 것처럼 해서 미국의 지원 아래 있지도 않은 수많은 반란군이 행동하는 것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있지도 않은 전투상황을 보도해댔다. 이러한 심리전을 통해 과테말라 사회와 정권내부를 혼란시키고 내부분열을 조장했다. 아르벤스 정권 내 좌파는 전면적인 저항을 주장한 반면 군부는 타협적 태도를 보였고, 중산층은 미국이 지원하는 반군을 상대로 한 전쟁을 반대했다.
쿠데타가 진행되는 와중에서 심리전에 사용하고 있던 공군 전투기 세 대 중 두 대가 파손되었다. 덜레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공군기 증파를 요청했다. 아이젠하워는 즉각 승인했다. 결국 6월 27일 아르벤스는 카스티요-아마스는 미국 대사 존 포리포리의 대사관 비행기를 타고 입성해 권력을 장악했다. 이 공작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처음에는 반대했던 미국 내 일부 관리도 CIA 비밀공작의 신봉자가 되었다. 이후 과테말라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수십 년에 걸친 살인적인 억압정치의 수렁에 빠지고 만다.
<세계와 미국-20세기의 반성과 21세기의 전망/ 이삼성 지음/ 한길사 중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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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델과 나는 밤을 지새우며 토론을 했다. 그리고 그날 밤에 그의 부대의 의사가 되기로 결정했다. 이미 내 자신의 다리가 라틴아메리카의 구석구석을 돌아보았고, 과테말라에서는 가장 잔인하게 숨통을 조였던 제국주의의 실체를 본 후였기 때문에 압제자에 대항하는 혁명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내 한 몸을 바치는 데 두려움이나 주저함이 있을 수 없었다. 피델은 비범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들이 세운 계획은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낙관적인 태도에 공감하게 되었다. 아무튼 혁명은 코앞에 닥친 현실이었고 온몸으로 뛰어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울부짖기만 한다든지 대충 적당히 해치워버린다든지 하는 일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당시 쿠바는 풀젠시오 바티스타라는 억압적인 독재체제 하에 있었다.(한 마디로 당시 쿠바는 미국 영화 <대부2>에도 잘 나타나고 있지만 미국의 휴양지이자 배설구였다.) 게바라를 비롯한 망명 쿠바인들은 스페인 외인부대 출신 군인에게 게릴라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자신들을 무사히 쿠바로 데려다 줄 배를 찾기 시작한다. 그 배가 바로 그란마호였다. 그런데 이 배는 지독하게 낡은 고물 배였고, 승무원과 승객을 포함해 태울 수 있는 인원조차 20여 명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혁명의 열기에 불타올랐고, 이들의 거사 계획이 사전에 유출되고 있었으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1956년 11월 25일 새로운 전설을 탄생시키며 배를 출발시켰다. 그들의 출항은 이미 알려져 있었고, 쿠바 연안에는 이 꿈많고 철없는 게릴라들을 바닷속에 그대로 수장시키기 위해 삼엄한 해안 경계가 펼쳐져 있었다.
낡은 그란마호는 마침내 연료가 떨어지고 파도에 떠밀려 항로조차 잃고 만다. 결국 상륙예상 지점인 해안에서 2Km 가량 떨어진 산호초에 좌초되고 말았다. 82명의 탑승자는 모두 바다에 뛰어들어 추격을 회피하려 했지만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맹그로브 숲은 마치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설치한 대서양 방벽처럼 게릴라들의 앞 길을 가로막았고, 독재자 바티스타의 군대와 비행기가 그들을 공격했다.
12월 2일 우리들은 도착예정지인 코로다스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벨릭이란 지점에 상륙했다. 이때 이미 대부분의 장비는 분실되었다. 게다가 새로 준비한 군화를 신었기 때문에 늪지대를 빠져나오는 동안, 대원들의 발은 불어터지고 물집이 생겼다. 문제는 이 상처에 스며들어오는 파상풍균만이 아니었다. 카리브해를 항해하는 도중 내내 몰아친 폭풍 속을 7일간이나 헤쳐왔기 때문에 항해에 익숙치 못한 대원들 거의 모두가 심한 배 멀미로 탈진해버려 기진맥진한 상태여서 다음의 작전을 수행해 내기가 어려웠다. <체 게바라>
그러나 이런 사상 최악의 상륙작전은 그들에게 앞으로 다가올 갖은 고난과 위험의 전초전에 불과했고, 이때 살아남은 원정대원들은 이후 쿠바 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82명의 원정대원 중에 첫날 상륙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은(1956년 12월 25일 생존자) 피델 카스트로, 우니베르소 산체스, 후안 알메이다, 시로 레돈도, 라미로 발데스, 알만도 로드리게스, 레네 로드리게스, 프란스스코 곤잘레스, 라휄 챠오 산타나, 에피게뇨 아메이헤이라스, 카리스트 모잘레스, 까밀로 시엔후에고스, 레이날도 베니테스, 라울 카스트로 그리고 에르네스토 게바라 며칠 후에 여섯 사람의 생존자가 합세한다. 호세 모얀, 루이스 크레스포, 훌리오 디아즈, 카리스트 가르시아, 카를로스 베르무데스 까지 스무 명에 불과 했다.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20명의 게릴라들과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독재자 바티스타의 1만 2천여 정규군 사이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는 살아남았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이끄는 게릴라들의 명성을 드높인 최초의 사건은 라플라타 병영 습격이었다. 1958년 초 바티스타 정권은 게바라를 비롯해 카스트로를 수없이 잡아죽였다. 그들의 시체를 공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죽었다던 게릴라들은 어느새 살아나 다시 독재자의 뒷덜미를 잡았다.
1957년 초, 우리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의 산악지방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라 플라타강 하구에 위치한 소규모의 병영(라 플라타 병영)을 습격하여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험준한 산간벽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알려져 쿠바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 습격은 게릴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투쟁의 준비가 완전히 끝났음을 확인하게 하는 계기였고, 부대전체에 있어서는 앞으로 다가올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준 것이었다. 게릴라군은 이 라 플라타 병영 습격사건으로 다수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체 게바라>
쿠바 혁명은 어쩌면 언론이란 매스미디어의 매력을 적절히 활용한 혁명이었다. 그들은 뉴욕 타임즈의 허버트 매튜즈 기자를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 속의 게릴라 기지까지 불러들여 기자 회견을 했으며(1957년 2월 17일), 같은 해 4월에도 미국의 방송국 기자인 봅 티버를 초청하여 회견을 했다. 이런 회견 장면이 미국 전역에 방영되었고, 산속의 게릴라군과 도시의 레지스탕스들에게 점차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제 쿠바는 산 속과 도시에서 통일전선을 구축됐으며 이러한 통일전선은 게릴라라는 물고기들의 바다가 되어 주었다.
쿠바 게릴라들의 주된 구성원은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이해관계 때문에, 혹은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참여했다가 도망가기도 하고, 심지어 밀고를 하기도 했다. 게바라는 이런 게릴라 부대를 지휘하며 엄격한 규율을 세웠고, 마침내 규율이 엄정한 게릴라 부대원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1958년 12월, 마침내 바티스타군은 쿠바 전역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게바라 부대는 산타클라라 공격을 통해 마침내 바티스타 정권의 마지막 숨을 끊어 놓게 된다.
1959년 1월 1일, 새해의 첫날 새벽, 독재자 바티스타는 현금과 보석 자루를 훔쳐 비행기에 싣고,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도망쳐버렸다. 그는 자신의 경호원이나 수행원들도 모두 버렸다. 마침내 쿠바는 해방되었다. <체 게바라 ② 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