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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제주도 기행 시편 / 나호열

by 丹野 2009. 6. 16.

 

 

       제주도 기행 시편  / 나호열

  

 

  

 

어느 새에 관한 이야기 / 나호열


           - 제주도 기행. 1

 

 

십 년도 넘었던 것 같다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그 모습을
끝내 그는 보여주지 않았다
머리 위로 철 지난 동백이 툭툭 떨어졌다
어느새라고 적으면 빨간 밑줄이 그어진다
잘못 입력된 맞춤법 검색
어느새 뒤에는 아무 말도 붙이지 말라
갑자기 생각이 무성해지기 시작한다
저 푸른 독기, 간헐적으로 요즘 비는 
동물성인 것 같아 얼룩이 빠지지 않는다
어느 새 라고 고쳐 적으니 또렷이 그 얼굴이 되살아난다
성산포 가시죠? 우리 집 앞에 내려드리지요
담장 너머가 바다인 집 앞부터 걷기로 한다
어느새 나는 여기까지 왔다
어느 새에 대해서 물어 볼 말이 있다

 

 

 

 

 

먼 길 / 나호열

     - 제주도 기행. 2

 


결코 제 발로는 벗어날 수 없는 섬에 왔다
섬과 구름을 헷갈리면서
한 시간의 유폐는 지루했다
성산포에서 버스를 탔다 기다려 주는 사람 없는
타지를 향해서 바다가 가끔씩 나타났다 사라지고
타고 내리는 사람들은 자리가 넉넉했다
시흥, 종달, 세화, 조천 마을 이름을 하나씩 
해풍에 씻기우는 여로에 새겨 넣었다
부질없는 일이다 어디에서 내려야 할지 허둥대면서
나는 오던 길을 되짚어 내려 왔다
한 시간은 구름이었다가
또 한 시간은 섬이었다가
제비를 처음 본 날 이었다 
 

 

 

 

 

 

가마우지 한 마리 / 나호열

              - 제주도 기행. 3



하늘을 날던 가마우지가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뾰족한 부리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무엇인가 내 것을 빼앗아 가는데도 노엽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깊이도 안 될 것 같은데
깊고 푸른 바다가 내게도 있었던 것이다
나도 모르는 작은 생명들이 그 속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가마우지는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가마우지는 겨울 철새라고 한다

 

 

 

 

 

 

제주기행. 4 / 나호열


섬 안에 섬이 있다는 말, 뼈에 닿는다
눈높이 저 너머에 있던 바다가
저녁이 되자 발밑으로 스며들더니
아예 귀 속으로 밀려들어 온다
벽을 사이에 두고 낯 선 사람들 
억새가 한창이라는 山間에 몸을 맡겨두고
코 고는 소리가 한창이다
산과 바다가 몸을 섞는 모양이다
내일이면 떠날 텐데
이번엔 휘몰이 장단으로
바람이 한바탕 창문을 엎는다 

 

 

 

 

 

고사리 꺾기 / 나호열

                   

     - 제주도 기행. 5

 

 

맛은 없지만

밥상에 오르지 않으면 왠지 서운한

고사리 꺾으러 간다

새벽 해 뜨기 전 이라야

찔레 덩굴 속이나 풀 섶에 숨어 있는

고 놈이 보인다는데

내 눈엔 그 풀이 그 풀 같다

대궁을 잘라도 여덟 번 아홉 번

순을 올린다는 오기가

나에게는 없다

뽑히기를 평생 바랬으나

수많은 군중 속에 하나에 불과한 것이

행인가 불행인가

문득 이 세상 모든 나무의 시조가

바다에서 올라온 고사리라는 진화론의 한 구절이

전생을 스치고 지나는 순간

꼿꼿한 고사리들이 불쑥 돋아 올랐다.

소도 말도 먹지 않는다는 고사리

나도 덤불 속에 몸을 숨겼다.

 

 

 

 

 

한라산 / 나호열

            

          - 제주도 기행. 6

  


 

어디서나 그대를 볼 수 있다는 것이


누구의 기쁨인가요


산봉우리 하나 넘고 그대 알았다 하고


그대의 마음 내려 놓은 잔 물결에


바다를 보았다 외쳤던


부끄러운 메아리는 어디에 품어 놓으셨나요


각혈하듯 쏟아내던 붉은 마음은


서늘한 하늘 한 자락 끌어내려


푸르게 감춰 놓으시고


그저 멀리는 가지 말라고


키돋이를 하시는 모습


누구를 그리워하는 까닭인가요


머리 위에 뭉게 구름

 

청노루 울음소리 들리네요

 

 

 

 

 

저 소나무 / 나호열


             -제주도 기행. 7

 

 

말하자면 무턱대고  우리가 세상에 내린 것처럼

정류장에서 한참을 걷다보니 입산을 결심했던 것

길에는 바름과 그름이 없으므로

산길이 시작되는 곳까지 따라온 공동묘지는

덧없는 시간의 비석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그 산에는 절이 없었다

바다가 한 눈에 보이고

돌아서면 산이 가로 막았던 곳.

나는 발목을 묻었다

고요히 절간이 되어가기로 한 것은 아니었으나

용케 허리가 휘지 않은 것은 저 채찍질

산과 바다 바람이 밤낮으로 나를 후려쳤기 때문이다

새가 날아와서 잠시 머물렀으나 집은 아니라 했고

산꾼들도 고단한 등허리를 내밀지 않았다

독야청청은 내가 바란 바는 아니었으나

맞은 매 만큼 독이 올랐다

그대들은 모른다

날름거리는 혀가 겨냥하는 푸른 하늘 

또아리를 튼 채로 허물을 벗으려 안간 힘 쓰는

서서 우는 뱀의 꿈을 해독하지 못한다

속이 텅 빈

저 소나무


 

 

 

 

 

 

약속 / 나호열


        - 제주도 기행. 8


 

바다를 옆에 두면 되요

바다를 잃어버리지만 않으면 되요

걷고 또 걸으면

우리는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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