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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가시 外

by 丹野 2009. 6. 7.

                                                                           

  

 

가시   / 나호열

 

 

 

가시 / 나호열

그 말이 맞다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 아프다
내 가슴을 떼어내어
너의 가슴에 닿는 순간
가시가 되어야 하는 것을
그래서 네가 눈물 흘리는 것을

이번에는 네 가슴을 떼어내어
나에게 다오
찡긋 한 쪽 눈을 감고
나는 웃겠다
그 말이 맞다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 기쁘다

 

 

 

 

 

 

독버섯 / 나호열


양지녁은 제 잘난 맛에 거들먹 거리는 양반들께 얌전히 돌려 드리고
스스로 감옥에 갇히겠다 붉은 고깃덩어리 요염한 때깔로 기다리고 또
기다리겠다
단 한번 치정으로 절명을 두려워 하지 않는,
거기 누구 없소?

 

 

 

 

그 섬 / 나호열

변방으로 가기 위해서는
길을 배워야 한다
인생이 귀찮으면 그저 앞으로 나아가라
문득, 깨끗이 다려진 식탁보처럼
하늘이 그윽하게 맑다
그 섬은 그 별이다
몇 등급으로 빛나는 소멸인지 그것은
後生에게 물어볼 일
가을을 예감하는 나뭇잎들이 수런거린다
빨리 죽여줘
몇 시간째 나무는 고개를 가로젓고 있다
더러워진 식탁보를 갈아야겠다
머그 잔, 가슴이 얇은 접시
이미 식어버린 차, 말라버린 레몬의 향
잠시 햇살이, 검은 힘살이 꿈틀거린다
자동세탁기 속에 들어가기 전에 바다는
먼지들을 떨구어낸다 눈물처럼,
눈물은 입을 막은 채 웃는 침묵 같다
새벽에 참회가, 탈수기가 굵은 빗방울을
간헐적으로 떨군다
쓰레기 차는 어디서나 예의가 없다
날이 밝기도 전에 뒷문에 엉덩이를 디민다
나는 나의 뒷문을 본다
나갈 수는 있어도 되돌아 올 수 없는 저 문
생각을 닦아낸 휴지처럼
더러워진 새의 깃털이
저기 떨어져 있다

 

 

 

  

 

/ 나호열

화약처럼 폭발할 수 있는 생명만이
알을 깨고 나온다
영원히 침묵 속에 파묻혀 버린
충주 근처 돌밭에서 얻어온
돌멩이를 보면서
느끼는 섬짓한 예감

슬픔을 차단한
저 완벽한 고독
헤아릴 수 없이 할퀴고 떼밀리면서
끝내 거부한
삶의 회유

저 속엔 무엇이 있을까 하고
진열장 같은 나날들 사이에서
수없이 깨진 무정란들의 껍데기들을
옷으로 입고
배회하는 나를 본다


 

 

 

 

눈부신 햇살 / 나호열



아침에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는
일이 행복이다

눈뜨면 가장 먼저 달려오는
해맑은 얼굴을 바라보는 일이 행복이다

아무도 오지 않은
아무도 가지 않은
새벽길을 걸어가며
꽃송이로 떨어지는
햇살을 가슴에 담는 일이 행복이다

가슴에 담긴 것들 모두 주고도
더 주지 못해 마음 아팠던
사랑을 기억하는 일이 행복이다

 

 

 

 

 

 

나는 전생에 나무였다 / 나호열



우뚝 서 보기로 했다
등대처럼
내 앞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적빈의 손이라도 흔들고 싶었다
그러나 등대의 다른 이름이
바람인 것을 나는 몰랐다
똑바로 서 있었는데
등이 휘었고
해를 바라보다
눈이 멀었다
이제는 마음이 가기 전에 먼저 몸이
절벽 쪽으로 다가서고 있다
참고 있는 눈물은
그 무엇도 태울 수 없고
악착같이 뿌리는 질기게
눈 먼 희망을 뿜어올리고 있다
발광은 붉다
도난방지의 경고음이
온 몸 구석구석에 자물쇠를 채운다
평생, 나무는 불임의 꿈을
제 몸에 매장한다

 

 

  

 

 

촛불을 켜려고 / 나호열



양초 한 자루 만들려고
오래 기다렸다
잘 익은 노을을 한 스푼 뜨려고
오래 서녘 하늘을 바라보았다
쉽게 부서지는 노을은
아주 부드러운 구름으로 감싸 안아야 하기에
마을을 저만큼 지나쳐 가는
구름의 이름을 오래 기억해야 했다

목울대를 치고 오르는 울음처럼
새싹을 닮은 심지는 쉽게 너울댄다
촛불은 어둠을 더욱 어둠답게 만들고
어둠 속에 바라보이는 얼굴을
꽃으로 만든다

촛불을 켜야겠다 오늘은
밤이 더 깊어져야 하겠다
촛불 속에서 태어나는 별들
그 아득한 마을에
오래 서성거려야 하겠다

 

 

 

 

 

 

오늘도 탑을 쌓는다 / 나호열
―안동 신세동 7층 전탑

저 멀리에 느릿느릿 강이 걸어가고
그 강 따라 길이 흘러가고
높은 둔덕 위로 철길이 달리고
소음방지벽이 가로 막고
탑은 간신히 머리를 내밀고 있다
천 년이 지나자 다리 힘이 빠진 듯
약간 비스름하다
더러 이끼도 끼고
어깨 위에 내려앉은 잡초
짓다 만 새 둥지가 언뜻
인간적이다
강도, 길도 사람도 경배하지 않을 때
탑은
나무를 닮는다
하늘을 헐훨 날아오르는 꿈으로
강을 잡지 않고
길을 잡지 않고
사람을 잡지 않는 나무는
바람 때문에 철이 든다
누구는 서 있다고 하고
무릎을 꿇거나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고 하고
그러나 탑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내 속에는 나무가 살고 있다 / 나호열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문득 내 앞을 가로막아 서는
저 거대한 침묵이
마지막으로 내가 마주할 외로움이라면
두 팔로도 껴안을 수 없고
고개 들어도 아득한 그런 외로움이라면
차라리 사랑하기로 했다

네 앞에 서면 말을 배운 것이 부끄러워진다
천천히 늘어뜨리는 향내나는 치맛자락처럼
그림자 하나가 마당을 덮고
담장 무너뜨리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높은 산을 넘어간다

너는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너는 소리내지 않고 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너는 우주의 중심이 어딘지 내게 알려주었다

이렇게 멀리 서서야 온전히
너를 바라보며
사랑할 수 있다니!

 

 

 

  

 

비가 후박나무 잎을 적실 때 / 나호열


비가 후박나무 앞에 잠시 머물렀다
눈물 한 방울
드넓은 대지를 적시지 못하지만
보이지 않는 뿌리를 향하여 가는
한 생애에 발걸음을 남긴다

만리 밖에서 어느 사람이 활짝 웃을 때
마침 봉오리를 터뜨리는 꽃을 내가 보듯이
오늘밤 내리는 성긴 빗소리는
또 누구의 울음이겠느냐

열매 하나 맺힐 때마다
하늘이 우르르 무너지고
목숨이 다할 때마다
별들은 맑은 종소리로 울린다

비가 후박나무 잎을 적실 때
나는 땅의 소리를 듣는다

 

 

 

 

 

 

숲에서 기적 소리를 들었다 / 나호열


발자국 소리가 행여 덫이 될까봐
가만가만 천천히
신호등도 없고
기억해야 할 번지도 없는
모든 목숨들의 보금자리
숲은 점점 겨울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먹고 먹히어도 슬픔이 없고
죽어도 장례식이 없는
서로의 집이며 무덤인 이 숲은
살면 죽어야 한다는 더딘 약속을
하나씩 보여주고 있다
새로이 태어나는 들꽃의 발자락에
어제의 나뭇잎은 썩어가고
내일을 향해 가는 열매는
단단한 눈물로 맺혀 있는 곳
혼자 걷기에는 정적이 무서워
징검다리 건너듯 둘이 걸어야
숲은 조금씩 길을 내 준다
흐린 하늘이 빠진 냇물 속으로 오래
고개 숙인 오리들과
그 누구의 억센 손아귀도 마다한 채
사라지는 냇물
너무 오래 살아 등피 벗겨진 참나무와
참나무가 키우는 청설모와
거룩한 가을의 소멸을 향해 합장한
갈대 무리와
그 모든 것들이 소리를 낸다
그 울음과 웃음소리가
숲을 깊게 채우고
숲은 이윽고 기적소리를 낸다
발걸음을 멈추어도
우리는 자꾸 어디론가 떠나고 있는 것 같아
오랫동안 포옹을 풀지 않았다
숲은 다시 한 번 기적을 길게 울리고
그럴수록 맞잡은 영혼은
사슬처럼 단단히 묶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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