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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오징어 外

by 丹野 2009. 6. 4.

 

 

                                         오징어 外  / 나호열

 

 

 

오징어 / 나호열

바다 앞에 섰다
길게 늘어선 덕장 앞으로
푸른 잉크가 쏟아진다
내 몸을 감싸던 
눈 밑에 눈물 점을 없애야 해
먹물 주머니 말라붙고
거꾸로 매달려 있다
머리라고 알고 있는 
지느러미를 꿰뚫은 막대기에
거두절미하고 매달려 있다
오장육부를 덜어내고
이렇게 압축될 수도 있구나
흔들릴 때마다 해탈이다
주검 밑에 
모래밭이 가득하다

 

 

 

 

 

그의 독백 / 나호열


삼일 동안 밥 굶고
장미를 바라본 적 있다

아름다운 붉은 장미

아름다움을 뜯어 먹고
붉음을 집어 삼키고
이윽고 장미는
빵이 되었다

 

 

 

 

 

 

 

꿈꾸는 연습 / 나호열

 

잠의 밀물이 철커덕
자물쇠를 채우고 있다.
먼 발자국
꽃 피는 소리
낙엽지는 소리
쏴아 바람부는 독경소리
질펀하게 내 몸에 퇴적되는 
개펄의 엎드림
사냥을 모르는 독수리 날아가고
공허를 향하여 달려가는 코요태 무리
쫓겨가는 말들의 헐떡임
초식의 슬픈 이빨들이
가시풀을 뜯고 있는
저 낮은 땅의 상형문자
늘 서둘러 오는 새벽 앞에
미처 거두어들이지 못한
사막의 끝머리에 황급히
발자국들이 소금기를 날린다
통채로 뜯겨져 나간 
자물쇠처럼.

 

 

 

 

 

 

알타미라 가는 길 / 나호열

 

 

당신의 집에는 당신 혼자만이 산다 그 집의 방문객은
오직 당신뿐, 일인용 식탁과 일인용의 침실, 완벽하
타인과 단절된 방음벽이 설치되어 있다 전화기는
오로지 외부로만 열려져 있을 뿐 아무도 당신의 비밀번호를
모르고 있다 거울이 없는 당신의 집
밀폐된 그곳에서 당신이 내뿜는 담배연기와 일산화탄소와
심심하지 않게 지나가는 바퀴벌레가 폐허를 이룬다
당신의 생존은 매달치의 지로납부고지서에 표시되어 있다
먹고 배설해 버리는 흔적의 어두운 길, 귀가는 늦고
오바깃을 세우고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처럼
아파트 철문 앞에 선다 심호흡을 하고 내부를 향하여
초인종을 누를 때
그럴 때마다 당신은 늘 당신 밖에 서 있는 당신을 기억한다

 

 

 

 

 

격포에서 / 나호열

  

 

  사막을 미치도록 그리워했던 그 여자가 울고 또 울고 
또 세 번을 울었다는 바다, 그저 풍문으로 들었을 뿐인 
그 사연은 알면 치정이 된다. 면벽하듯 바라보니 밀려오 
는 파도 속에 내가 풀어야 할 문제와 단박에 깨우쳐야 
할 해답이 까무러치고 까무러치고 이 파도 소리 들리냐 
고 잘 들어 보라고 바다에 귀 들이대는 사람들이 보살 같 
다. 그대를 향하여 몇 겹으로 접은 가슴을 펼쳐내니 내가 
배워야 할 말들은 비수처럼 떨어지는 느낌표 하나뿐. 돌 
아가서 그대에게 다시 펼쳐 보일 때까지 온전할지 몰라,
해무에 둘러싸인 섬을 향하여 멀어지는 배 사라질 때까 
지 나지막이 날아보는 갈매기 한 마리 그.섬.에.가.고.싶.다.

 

 

 

 

 

문호리 예배당 / 나호열

 

 

청량리에서 한 시간 
가슴까지 차오르는 강이 
오르고 내리는 버스를 타면 
출렁이는 물 향기 
사랑하는 사람에게 서 너 장의  
편지를 썼다 지우고 
억새풀로 흔들리는 잠결에 닿는 곳 
가끔, 깊은 산골로 가는 기차가 
경적을 울리면 
길은 무섭게 한적해진다 
건널목 지나 
토닥토닥 몇 구비 돌고 돌아도 
보이지 않는 마을 
멀리서도 예배당 종소리는 울려 
마을이 가깝다 
작은 언덕 허리 굽혀 올라가는  
오래된 예배당 
아름드리 느티나무  
바람에 곡을 붙여 
풍금을 타고 
먼지 내려앉은 나무의자에 앉아 
꽃 꺾은 죄를 고백 하는 곳 
그 돌집 옆 
모래알로 쌓아올린 큰 예배당 
더 많은 죄인들이 드나들어도 
아직은 견딜만 하다고 
열 때마다 삐거덕 거리는 영혼 속으로 
숨어들만하다고 
청량리에서 한 시간 
종점까지 와서 만나는 
그대는 나의 
작은 예배당   

 

 

 

 

 

모든 자물쇠는 숨통을 가지고 있다 / 나호열


삽날조차 허락하지 않는 동토
그 얼음 속에서
파랗게 숨대롱을 밀어올리는
새싹들을 보면
아무리 굳게 닫힌 절망의 문에도
열쇠가 있을 것 같다
가두어 두어야 할
숨겨놓아야할 것이 많음이
어찌 부끄러움이 아니랴
날카롭게 부딪치는 육중한 열쇠꾸러미
가쁘게 뛰어갈수록 요란해지는
물음표와 같은 저것들을
죄다 버리고만 싶구나
어디에 있느냐
이 한몸 열쇠가 되어
문을 열면 아! 거기
푸르게 펼쳐진 초원으로 달려올
그 사람은 

 

 

 

 

 

어느 날 종소리를 듣다 / 나호열

 

높은 망루에 올라 한 대 맞으면 속으로 불알 흔들어대며 요란떠는 그런 것 말고
묵직하게 어깨를 내려깔고 안으로 아픔을 감아 올리는 우리나라 종소리는
이 말 저 말 다 버리고 그저 우물거리는 단 한 마디 말씀 뿐이어서
世音, 발자국 소리 멀리 물리친 뒤 적막 한 장 깔아놓고 받아 적어야 하네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작은 산새처럼 날아가 버리고
때로는 나뭇잎 몇 장 떨구어지기도 하여
한번도 제대로 받아 적어보지 못하였지만
우우우 우웅 우웅 우우우 그 소리가 내 목덜미를 죄어와
네 세 치 혀를 내놓아라 으름장 놓는 것은 분명히 알겠네

 

 

 

 

달팽이의 꿈 / 나호열



오늘도 느릿느릿 걸었다
느릿느릿 뛰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느릿느릿 걸었다
성급하게 인생을 걸었던 사랑은
온몸을 부벼댈 수 밖에 없었던
세월 앞에 무릎을 꺾었고
나에게는 어차피 도달해야 할
집이 없다
나는 요가 수행자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잠을 집어 넣는다
언제나 노숙자인 채로
나는 꿈을 꾼다
내 집이 2인용 슬리핑 백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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